[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이 글은 아래 다섯 개 기사로 발행된 인터뷰를 하나로 통합한 것입니다. (편집자)

인어공주, PC 그리고 페미니즘

캡:콜드케이스 01

통합본

슬로우뉴스 창간 동인 캡콜드(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김낙호 교수) 님은 만화 덕후이자 미디어 전문가로 연구 분야는 언론학입니다. 캡콜드 님께 사회적 논란과 지적 이슈에 관해 묻고, 그 답변을 정리합니다. 첫 번째 콜드케이스는 인어공주와 PC(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페미니즘에 관한 이슈입니다. 가독성을 고려해 나눠서 올립니다. 캡콜드 님과의 대화는 6월 초에 있었고,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보충했습니다.

목차 (통합본)

01. 인어공주, 디즈니의 해석본은 어떻게 추억의 원본이 되었는가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를 가진 백인이었던 에리얼이 레게머리를 한 흑인으로 바뀌었다.”

“5월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스페인어 영화 매체의 기사에선 한국어 더빙판에 다니엘 걸그룹 뉴진스 멤버 (편집자)을 캐스팅한 것은 한국인의 인종차별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할리우드 리포터와 CNN은 기사 제목에 인종차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리뷰가 넘쳐나는 나라로 중국과 한국을 저격해서 보도했다.”나무위키, 인어공주(2023)11. 원작과의 차이점12. 논란 중에서

위에 인용한 나무위키의 설명은 실사판 [인어공주] (2023) 논란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를 가진 백인”이 원작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이라고요? 안데르센 원작 ‘작은 인어'(1837)에서 바다 왕의 여섯 번째 공주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백인 소녀가 아닙니다. 원작에 그런 설명은 없죠. 이름도 ‘에리얼’이 아니고요. 하얀 피부, 붉은 머리, 백인, 에리얼… 네, 원작에는 없습니다.다만, “피부는 장미 꽃잎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파란빛”이라는 서술은 원작에 있습니다. 이 글 맨 아래 원작 번역본 참조. (편집자). 모두 디즈니의 창작(해석)이죠.

우리는 안데르센의 ‘작은 인어'(1837)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1989)를 원작이라고 착각하면서, 그 추억에 관한 배반감과 아쉬움을 인종주의적 편견과 차별이라고 비난하는 미국 일부 언론의 공격마저 당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인어’ 혹은 ‘인어공주’를 둘러싼 내우외환인데요. 원작을 존중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중국과 한국에서 인어공주(2023)가 흥행에 실패한 건 일부 미국 언론의 지적처럼 백인 선호, 흑인 차별이라는 인종차별적 인식 때문일까요?


캡:콜드케이스 – 인어공주(2023)

– 흑인 여주인공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인종차별적인가. (매우 그렇다)
– 중국과 한국 흥행 실패는 인종차별적 인식 때문인가.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 소수 제작자의 ‘정치적 올바름’이 원작 인어공주를 훼손했는가. (그렇지 않다)

인어공주 (디즈니, 2023)

민노: 인어공주 논란, 미국에서는 어때요?

캡콜드: 재미있는 게 인어공주로 흑인 여배우가 캐스팅됐을 때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특히 미국에서도 반대 목소리는 많았어요. 어떻게 나의 추억 속 에리얼 공주를 흑인으로 캐스팅 하느냐! 우리 추억을 짓밟는다! 이게 다 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사조 때문이다. 반발은 다 똑같았어요.

민노: 반발은 어디서나 같았다?

추억에 대한 배반: 중국과 한국 흥행 실패 이유

캡콜드: 그런데 이제 그게 실제로 개봉한 다음에 미국 같은 경우는 그럼에도 실제로는 흥행 대성공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에 비해서 한국과 중국 같은 경우가 특히 흥행이 아주 폭망했죠.

민노: 그랬죠.

인어공주(2023)가 중국과 한국에서 일부 관객의 인종차별적 반발로 인해 흥행 고전 중이라는 CNN 기사.

캡콜드: 그걸 한국과 중국이 인종 차별이 더 심해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CNN이나 그런 데서 슬슬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요. 아마도 그것 자체만의 문제는 아닐 거고, 자세한 분석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런 대형 영화들이 개봉하기 전에는 시네마 스코어라고 우선 사전 시사회를 통해서 관객 만족도를 측정하는 게 있어요.

민노: 그렇겠죠, 아무래도.

캡콜드: 인어공주 같은 경우가 실제 시네마 스코어 점수가 꽤 높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논란과 관계 없이 어쨌든 미국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만족도가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게 흥행으로 이어진 거고요. 미국에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로 그 논란(흑인 인어공주)을 제기했던 사람들하고, 실제 관객층이 그만큼 따로 놀고 있다라는 거거든요.

민노: 비판하는 사람들과 실제 극장에 가는 관객이 따로 놀고 있다?

캡콜드: 그렇죠. 그러니까 그 문제를 제기했던 와는 달리 실제로 극장에 가는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이란 말이죠. 아이를 데리고 디즈니 실사본을 보려는 부모는 다양한 인종에 의해 인어공주가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그런 관객층일 수도 있고요.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에 논란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극장에 올 사람들은 또 극장에 왔단 말이죠.

민노: 우리나라의 경우엔 흥행에 실패했는데요.

디즈니 르네상스 (1989~1999). 인어공주부터 타잔까지.

캡콜드: 한국에서 인어 공주는 디즈니 르네상스를 90년대 초에 완전히 재발견한 거거든요.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그때 한국이 좀 더 문화적으로 개방하면서 난데없이 애들용 주말용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극장 애니메이션이라는 세련된 이미지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다시 등장한 거죠.

민노: 여담이지만, [미녀와 야수] (1991)가 좀 더 디즈니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영화 아닌가요?

캡콜드: 그렇죠. 그런데 [미녀와 야수]가 한국에서 위세를 떨치기 직전에 나왔던 게 [인어공주] (1989)거든요.

디즈니 르네상스의 첫 작품 [인어공주] (1989)

민노: 아, 디즈니 르네상스의 전조가 [인어공주]였다?

캡콜드: 그렇죠. [인어공주] 같은 경우는 그런데 극장보다는 그전에 비디오, 특히 복제본으로 많이 유통됐고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가 거의 연달아서 히트를 치면서 하나의 문화적인 상징처럼 돼 버린 거죠. 아마 중국도 그런 비슷한 패턴이었을 겁니다.

중국도 그때 조금씩 개방 기조였고, 그런 맥락에서 이들 지역에서 [인어공주]라는 건 독특한 문화적인 상징이 된 거죠. 그래서 한국 관객들에겐 그때 그 기억을 최대한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그런 향수가 있는 거고요.

민노: 인어공주에 관한 미국의 문화적 맥락과 한국, 중국의 문화적 맥락은 차이가 있군요.

캡콜드: 네, 그렇죠. 디즈니가 가족의 문화 활동에서 필수 코스처럼 돼 있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한테는 세련된 데이트 영화 같은 그런 느낌도 있거든요. 한마디로 관객층이 그만큼 다른 거예요. 그런 산업적 문화적인 맥락 때문에 흥행에서도 차이가 생기는 거죠.

레게머리를 한 흑인 여배우라서 원작을 훼손했다고? 명백한 인종차별적 발상…! (사진 제공: 디즈니, 인어공주, 2023.)

흑인 여배우라서 원작 훼손? 명백한 인종차별적 발상

민노: 흥행 성적 차이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인어공주 실사판의 흑인 여배우 주인공 캐스팅 논란에 관해 논평한다면요.

캡콜드: 우선 흑인 배우를 캐스팅했을 때 바로 나왔던 반응들은 변명의 여지 없이 당연히 인종차별적이죠. 아주 간단하게만 생각해도 인어공주라는 환상의 존재를 백인으로 캐스팅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이유로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인 발상이죠. 그건 전혀 피할 길이 없고요.

민노: 흑인 여배우 캐스팅만을 문제 삼는 인종차별적 발상은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디즈니 영화 ‘블랙팬서’; (2018)과 ‘알라딘’ (2019)은 한국에서 각각 약 540만 명, 약 1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했다. 알라딘의 경우 미국, 일본에 이은 전 세계 3위의 흥행 성적.

캡콜드: 한국이나 중국이 흑인이나 비백인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다 싫어하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블랙 팬서] (2018) 같은 경우도 흥행에서 성공했고, [알라딘] (2019) 같은 경우도 다 성공했거든요. 한국과 중국에서 실사판 [인어공주]에 관한 관객의 불만은 내가 추억하고 있는 그 버전을 엎어버렸다는 거거든요. 그 실망을 인종차별적으로 드러낸 셈이죠.

추억의 원본? 디즈니의 해석(발명품)이었을 뿐

민노: 그 지점, 인종차별적 반발이 아니라 추억에 관한 배반, 아쉬움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요소 같습니다.

캡콜드: 그렇죠. 그런데 90년대 초에 디즈니 인어공주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특정한 디즈니화된 이미지로 완전히 고정시켰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는 비극으로 끝나잖아요.

민노: 그렇죠.

캡콜드: 그런데 디즈니는 안데르센 원작의 동화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만들었단 말이죠. 이런 걸 할리우드화, 문화적 잠식력이라고 해서 문화연구자들은 비판했죠. 인어공주가 빨강머리 백인이라는 이미지도 사실은 디즈니가 발명한 거고요. 아니 애초에 에리얼 공주라는 이름 자체도 디즈니에서 만든 거고요.

민노: 우리가 알고 있는 추억의 인어공주 역시 디즈니의 발명품일 뿐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왕자를 죽여야 한다! 막내 인어공주를 돕기 위해 머리카락을 마녀에게 팔고, 그 대신 칼을 구해온 다섯 언니 공주들의 모습. 1899년 필라델피아 리핀코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안데르센의 요정 이야기] 중 헬런 스트라튼의 삽화. 이 삽화 역시 원본에 관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출처: 뉴욕 공공도서관 사본, 퍼블릭 도메인, Helen Stratton – The fairy tales of Hans Christian Andersen (c1899) Philadelphia: Lippincott)

캡콜드: 애초에 안데르센의 원전에서 디즈니화된 어떤 상상력을 발휘한 거라는 거죠. 지금 실사판 같은 경우도 또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건데 그게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일종의 성서처럼 생각해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걸로 간주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원전으로 삼는 게 하필이면 에리얼 공주는 젊은 백인 여성이어야 한다는 건데, 그건 당연히 인종주의적인 발상이 당연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거죠.

민노: 근데 원작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도가 상업적으로든 아니면 정치적 올바름의 차원이든 변형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 같아요. 원작을 변형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로 보세요. 기준이 애매모호하잖아요.

캡콜드: 저는 아주 간단한 원리 하나만 적용하면 된다고 봅니다. 원작을 계속 사람들이 찾아보면 되는 거예요. 원작을 찾아볼 수 있다면 다른 해석판은 얼마든지 나와도 된다는 거죠. 원작이 필요한 사람은 원작을 보면 되니까요.

민노: 아, 명쾌한 기준이네요. 원작은 따로 있으니까 이미!

캡콜드: 그럼요. 그 원작이 따로 있다는 걸 사람들이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란 말이죠.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양성애자로 알려진 안데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특히 후원자 조나스 콜린의 아들이자 동성인 에드바르드 콜린(Edvard Collin)을 사랑했고, 콜린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고백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애자인 콜린은 그 고백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콜린과의 이룰 수 없는 관계가 ‘인어공주’의 줄거리에 반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인어공주는 푸케의 소설 ‘운디네’에서 몇 가지 기본적인 설정을 차용하기도 했다.

민노: 그 기준을 인어공주에 적용하면?

캡콜드: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은 디즈니 플러스에 가입만 하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애초에 더 실제 원작인 안데르센 동화도 인터넷 검색만 하면 원문을 다 볼 수가 있단 말이죠. 예를 들어 인어공주 캐릭터의 이미지라는 거는 원래는 장미 같은 피부의 요정에 가까운 이미지라고 원작에는 묘사가 돼 있단 말이죠. 즉, 원작 인어공주 이미지는 사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해석했던 빨강머리 백인 소녀 이미지도 아니거든요. 즉, 디즈니의 1989년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버전 역시 디즈니의 어떤 독특한 해석에 불과했단 말이죠.

“사랑스러운 공주가 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에서 막내가 가장 아름다웠다. 피부는 장미 꽃잎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파란빛이었다. 하지만 다른 인어들처럼 발이 없었다. 몸 끝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렸다.”안데르센, ‘인어공주’, 1837., 김선희 번역, 2021. 중에서

민노: (인어공주 실사판의 흑인 여배우 캐스팅이) 원작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런 말씀이시죠?

캡콜드: 그럼요. 원작은 원작대로 있는 거고, 거기에 대한 해석판이 있는 거고, 거기에 대한 또 다른 재해석이 또 하나 있는 거고요. 하지만 그 또 다른 재해석이 원래 원작뿐만 아니라 재해석했던 이전 판본을 또 참조하기도 하는 거고요. 그런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문화가 계속 발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번 실사판 인어공주 같은 경우는 1980년대 말 애니메이션 판 인어공주를 많이 참조했죠. 사실상 그걸 모체로 삼고 있지만, 그럼에도 2023년 판으로서 새로운 해석을 한 거고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참고: 원작 ‘인어공주’ (전문, 한글 번역본)

저 멀리 드넓은 바다에, 바닷물은 사랑스러운 수레국화 꽃잎만큼이나 파랗고 깨끗한 유리만큼이나 투명하다. 하지만 매우 깊기도 하다. 닻 밧줄이 닿는 곳보다 더 깊이 내려가서 바다 밑바닥부터 수많은 첨탑이 위로, 위로 높이 쌓일 정도이다. 거기 아래 인어들이 살았다.

자, 바다 밑바닥에는 그저 하얀 모래만 휑뎅그렁 있다고 추측하지 마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늘거리는 줄기와 잎이 달린 놀라운 나무와 꽃들이 그곳 아래에서 자라는데, 바닷물이 조금만 휘저어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몸을 흔들어 댄다. 여기 새들이 나무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각양각색의 물고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드나든다. 드넓은 바다 가장 깊은 곳에 바다 왕의 궁전이 솟아 있다. 성벽은 산호로 지었으며 높이 솟은 뾰족한 창문은 보석, 호박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홍합 껍데기로 만들어 파도에 맞추어 입을 벌렸다가 닫았는데 아주 장관이다. 조개는 모두 반짝이는 진주를 품었는데 어느 것이라도 여왕이 쓰는 왕관의 자랑거리가 될 만했다.

저 아래 바다 왕은 몇 년 동안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았다. 노모가 아들을 대신해 가정을 돌보았다. 노모는 현명한 여인이지만, 자신의 귀족 태생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리하여 자기 꼬리에 굴 열두 개를 달아 과시하면서도 궁정의 다른 부인들에게는 오직 여섯 개만 달고 다니게 했다. 이것만 빼고는 대체적으로 칭찬할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손녀들, 어린 바다 공주들을 지극히 좋아했기 때문에 칭찬할만했다. 사랑스러운 공주가 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에서 막내가 가장 아름다웠다. 피부는 장미 꽃잎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파란빛이었다. 하지만 다른 인어들처럼 발이 없었다. 몸 끝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렸다.

낮 내내 공주들은 성 안, 살아있는 꽃들이 벽에서 자라는 저 아래 거대한 홀에서 놀았다. 우리가 창문을 열면 제비들이 우리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듯이, 높은 호박 보석 창문이 열리면 물고기들이 헤엄쳐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 물고기들은 공주들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고 귀여움을 받으러 곧장 헤엄쳐 갔다.

성 밖에는 불꽃처럼 빨갛고 또 깊은 바다색 같은 나무가 자라는 정원이 있다. 나무 열매는 황금처럼 빛나고 꽃은 끊임없이 손짓하는 가지에 붙어서 불꽃처럼 일렁였다. 흙은 정말이지 아주 고운 모래로, 불타는 유황처럼 파란빛이었다. 야릇한 파란 장막이 거기 아래 모든 것에 드리웠다. 여러분은 바다 밑바닥이 아니라, 위아래로 온통 파란 하늘만이 있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죽은 듯이 고요할 때면 태양을 볼 수 있었는데, 태양은 마치 꽃받침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품은 붉은 꽃과도 같았다.

공주들은 각각 자기들만의 작은 꽃밭이 있어서 땅을 파 좋아하는 꽃을 심었다. 공주 하나는 고래 모양 속에 귀여운 꽃 침대를 만들었는데, 또 다른 공주는 인어 같은 침대 모양을 만드는 게 더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막내는 태양처럼 둥글게 꽃밭을 만들어서 거기에 태양만큼이나 붉은 꽃만 심었다. 막내는 보통의 아이와는 다르게 평범하지 않고 차분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니들이 자기 꽃밭을 가라앉은 배에서 찾아낸 온갖 이상한 것들로 꾸미고 있을 때, 막내는 태양만큼 붉은 꽃과 예쁜 대리석 동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져다 놓지 않았다. 새하얀 대리석에 새긴 잘생긴 소년의 동상은 난파된 배에서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것이었다. 막내는 그 동상 옆에 붉은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나무는 무척이나 잘 자라서 풍요로운 가지가 동상에 그늘을 드리우고 파란 모래까지 가지를 축축 늘어뜨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그림자가 보랏빛을 띠었다. 마치 나무뿌리와 나뭇가지 끝이 살아서 서로 어울려 놀면서 입을 맞추는 것 같았다.

막내 공주는 위쪽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들었다. 할머니를 졸라 배와 도시 그리고 사람들과 동물에 대해 이야기를 다 들었다. 가장 근사한 것은 땅 위의 꽃들이 향기롭다는 사실이었다. 바다 밑바닥의 꽃은 향기가 없었다. 숲이 푸르다는 게 멋진 것 같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물고기’가 큰 소리로 달콤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즐겁게 들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는 작은 새를 모두 ‘물고기’라고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주들이 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너희 중 열다섯 살이 되는 사람은 바다에서 나가 달빛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있어도 된단다. 지나가는 거대한 배를 지켜볼 수도 있어. 숲과 마을도 보게 될 거야.”

다음 해 맏이가 열다섯 살이 된다. 하지만 다른 공주들, 그러니까 각자 동생들 보다 한 살씩 더 먹었으니 막내가 물에서 나가 세상이 어떤지 볼 때까지 5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언니들은 각자 자기들이 본 것을, 그리고 첫날 가장 아름답게 찾아낸 것을 전부 다른 공주들에게 들려주기로 약속을 했다. 할머니는 반도 말하지 않았기에 공주들이 간절히 알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았다.

가장 간절히 바라는 공주는 바로 무척이나 조용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막내였다. 여러 날 밤 막내는 창문을 열고 서서 물고기들이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어대는 검푸른 바다를 들여다보았다. 달과 별만 보일 뿐이었다. 확실히 달과 별빛은 꽤 흐릿했다. 하지만 물을 통해 보였기에, 우리한테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게 보였을 것이다. 구름 같은 그림자가 달과 별을 가로지를 때면 그것이 머리 위로 헤엄치는 고래라든가 많은 사람들을 싣고 가는 배라는 걸 알았다. 저들은 귀여운 어린 인어가 배 바로 아래에서 배를 향해 하얀 두 팔을 내밀고 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했다.

맏이 공주가 열다섯 생일을 맞았다. 그래서 이제 물 밖으로 올라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맏이가 돌아왔을 때 동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백 가지나 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바다가 잔잔할 때 달빛을 받으며 모래톱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물가의 불빛 수백 개가 별처럼 반짝거리는 커다란 도시를 보고, 음악과 덜거덕거리는 마차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교회의 높은 첨탑을 보고,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었다. 도시에 들어설 수 없었기에 그것이 가장 간절했다.

아, 막내 공주가 어찌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지! 이윽고 공주는 밤에 창문을 열고 서서 검푸른 바다를 들여다볼 때마다 딸깍딸깍 떠들썩한 소리가 가득한 거리와 도시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깊은 곳까지 교회 종소리가 들린다고 상상하기도 했다.

다음 해에는 둘째 공주가 물 위로 올라가서 어디든 헤엄을 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둘째는 해가 질 때 올라갔다. 일몰은 자신이 본 가장 놀라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하늘은 황금빛인데, 구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아름다움을 묘사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붉게 출렁이면서 보랏빛으로 물들며 머리 위로 지나갔다. 흘러가는 구름보다 훨씬 빠른 백조가 무리 지어 갔다. 백조는 길고 하얀 장막처럼 바다 위로 흔적을 남기며 지는 해를 향해 날아갔다. 둘째 공주도 헤엄쳐 갔지만 해가 지자 그 장밋빛 불꽃도 바다와 하늘에서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다음 해에는 셋째 공주가 올라갔다. 가장 대담했기에 큰 바다로 흐르는 넓은 강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화려한 초록의 언덕이 보였다. 성과 영주의 저택이 화려한 숲 사이로 언뜻 보였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어찌나 밝게 빛나는지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워져 식히려 종종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작은 만에서 유한한 생명의 인간 어린이들이 물속에서 발가벗은 채로 물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과 놀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렸다. 이윽고 자그마한 검은 동물이 왔다. 개였다. 공주는 전에 개를 본 적이 없었다. 개가 셋째 공주를 보고 어찌나 사납게 짖어대는지 공주도 겁을 집어먹고 너른 바다로 달아났다. 그래도 그 화려한 숲, 초록 언덕, 비록 지느러미는 없어도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예쁜 아이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넷째 공주는 그렇게나 모험심은 없었다. 공주는 거친 파도 한가운데 멀리 머물렀었는데 멋진 곳이었다고 말했다. 주위 몇 마일을 볼 수 있고, 위 하늘은 거대한 둥근 유리 지붕 같았다. 공주는 배를 보았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었기에 갈매기처럼 보였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돌고래는 공중제비를 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고래는 코로 물을 뿜어 댔다. 그래서 마치 수백 개의 분수가 주위에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다섯째 공주 차례가 되었다. 공주의 생일은 겨울이었기에 다른 언니들이 본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바다는 진 초록색이고 거대한 빙산이 여기저기 둥둥 떠다녔다. 공주는 빙산 하나, 하나가 진주처럼 빛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빙산은 인간이 지은 교회 첨탑보다 훨씬 높았다. 공주들은 가장 멋진 모양,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것을 추측했다. 다섯째 공주는 커다란 빙산 위에 앉았는데, 항해사들은 공주가 긴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부리나케 배를 몰아 지나쳐갔다.

늦은 저녁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하늘을 쏜살같이 오갔다. 시커먼 파도가 거대한 산맥 같은 얼음을 높이 들어 올렸다. 번개가 내리치자 얼음이 번쩍번쩍 빛났다.

배들은 모두 돛을 내렸다. 공포와 초초함만 흘렀다. 하지만 공주는 거기 둥둥 떠다니는 빙산 위에 차분하게 앉아서 바다에 쩍쩍 내리치는 들쭉날쭉한 번개를 지켜보았다.

언니들은 각자 바다의 수면 위로 처음 올라갔을 때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새로웠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자 그곳에 흥미를 잃었다. 어디를 가든 한 달이 지나면 향수병에 걸려서는 바다 밑과 같은 곳이 없다고, 집이 무척이나 편안하다고 말했다.

여러 날 저녁 언니들은 물 위로 올라가 다섯이 한 줄로 서로 팔짱을 끼고 섰다. 다들 유한한 인간보다도 훨씬 더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폭풍이 불자 공주들은 조난 사고가 있으리라 예상하고 배 앞으로 헤엄쳐 가서 바다 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원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편견을 깨기 위해 유혹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폭풍 소리로 착각했다. 저들은 영광스러운 깊은 바다를 보지 못했다. 배가 가라앉았을 때 사람들은 익사해서 바다 왕의 성에 죽은 인간으로 도착했다. 그날 저녁 인어들은 이처럼 팔짱을 끼고 물 위로 올라왔을 때 막내는 뒤에 혼자 남아 그 죽은 사람들을 돌보며 눈물을 흘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어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막내가 말했다.

“내가 열다섯이 되면 좋겠어! 저기 위 세상, 그리고 저기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무척 좋아하게 될 것 같아.”

마침내 막내도 열다섯 살에 이르렀다.

노부인 여왕,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 너를 보내주마.”

할머니는 어린 공주의 머리카락에 하얀 백합 화관을 씌워 주었는데 꽃잎은 진주를 반으로 잘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부인은 막내 공주의 꼬리 지느러미에 높은 지위의 표시로 큼지막한 굴 여덟 개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거 아프단 말이에요!”

막내 공주가 소리쳤다.

“치장을 하려면 많이 참아야지.”

할머니가 막내 공주에게 말했다.

아, 이런 장식을 전부 다 털어내고 번거로운 화관을 포기하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의 붉은 꽃은 공주에게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굳이 바꾸지는 않았다.

“안녕.”

막내 공주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바다를 헤치고 거품처럼 빛을 내며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태양이 막 사라져다. 하지만 구름은 여전히 황금과 장미처럼 빛나고, 섬세하게 물든 하늘에는 저녁별이 투명하게 빛났다. 공기는 온화하고 신선하며 바다는 잔잔했다. 돛이 세 개 달린 거대한 배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돛을 하나만 폈다. 선원들은 삭구 안이나 활대에 기대어 빈둥거렸다. 배에서는 음악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이 내리자 선원들은 엄청나게 밝은 수백 개의 불을 밝혔는데 누군가는 만국기가 허공에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인어 공주는 가장 큰 선실 창문까지 바짝 헤엄쳐 갔다. 몸이 바닷물 위로 출렁일 때마다 유리 창문으로 그 안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무리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의 젊은 왕자였다.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왕자의 생일이었기에 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갑판 위 선원들이 춤을 추는데 왕자가 선원 사이로 나타나자 백 개가 넘는 불꽃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불꽃에 공주는 몹시도 놀라서 물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곧 다시 빼꼼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별들이 모두 공주에게 떨어지는 듯했다. 저런 불꽃을 본 적이 없었다. 큰 해가 여러 개 빙글 돌고, 화려한 불꽃-물고기가 파란 하늘을 둥둥 떠다녔다. 이런 것들은 모두 크리스털 같은 투명한 바다에 거울처럼 비추었다. 어찌나 밝은지 배의 작은 밧줄도 다 볼 수 있고 사람들도 선명하게 보였다. 아, 젊은 왕자는 어찌나 잘생겼는지! 왕자가 웃었다. 미소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 사이 음악은 완벽한 저녁 속으로 울려 퍼졌다.

시간이 꽤 늦었지만, 사랑스러운 인어 공주는 배하고 그 잘생긴 왕자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록달록 밝게 빛나는 초롱불이 꺼지고 불꽃도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고 폭죽도 더 이상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닷속 깊은 곳에서 우르르 쾅쾅 소리가 들려왔다. 물살이 계속 인어를 높이 튀어 올라가게 해서 인어는 그 선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제 배는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람 속에 돛이 하나, 둘 활짝 펴지고 파도가 높이 솟고 거대한 구름이 모여들며 번개가 멀리서 번쩍거렸다. 아, 배는 끔찍한 폭풍을 만났다. 뱃사람들은 서둘러 돛을 내렸다. 높다란 배가 성난 바다를 헤치며 속도를 내자 이 커다란 배는 튀어 올랐다가 뒹굴었다. 파도는 마치 돛을 부서뜨릴 듯 시커먼 산처럼 높이 일었다. 하지만 배는 백조처럼 거대한 파도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높이 솟아올랐다. 인어 공주에게는 이것이 썩 괜찮은 놀이처럼 보였지만, 선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배는 와지끈 갈라지고, 굵은 나무가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파도가 배를 내리쳐 돛이 갈대처럼 두 개로 부서졌다. 배는 옆으로 기울어 물이 짐칸까지 쳐들어왔다.

이제 인어 공주는 사람들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았다. 자신도 바다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와 판자를 피해야 했다. 한순간 어두워져서 공주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번개가 무척이나 환하게 내리쳐서 배 위의 모두를 구별할 수가 있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살 궁리를 했다. 공주는 그 젊은 왕자를 찾아서 가까이 가 지켜보았다. 배가 두 동강 나 왕자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공주는 왕자가 자신과 같이 있어서 너무 기뻤다. 그러다 문득 인간은 물속에서 살 수 없으며 아버지의 성에 죽은 시체로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안 돼! 이 남자는 죽으면 안 된다! 그래서 공주는 둥둥 떠다니는 나무판자 기둥이 자신에게 부딪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깡그리 잊고 그 사이로 헤엄쳐 갔다. 파도 속으로 들어가 물마루를 타면서 마침내 그 젊은 왕자에게 다가갔다. 왕자는 그 성난 바다에서 더 이상 헤엄칠 수 없었다.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굳게 닫혀서 공주가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공주는 물 밖으로 왕자의 머리를 올리고는 파도가 가는 곳으로 몸을 맡겼다.

날이 밝자 폭풍은 잦아들고 배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태양이 수면 위로 붉고 환하게 솟아오르며 왕자의 뺨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도 왕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공주는 반듯한 왕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자 공주에게는 자신의 작은 꽃밭에 있는 그 대리석 동상처럼 보였다. 공주는 왕자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는 살아나기를 바랐다.

저 앞에 푸르른 산이 솟아난 육지가 보였다. 마치 백조 떼가 그곳에서 쉬고 있는 것처럼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빛났다. 바닷가 아래 화려한 초록의 숲이 있고 한가운데 성당인지, 수도원인지 공주가 알 수 없는 어쨌거나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오렌지 나무와 레몬 나무가 마당에서 자라고 높다란 야자수들이 문 옆에 즐비했다. 여기 바다는 작은 항구를 이루고 퍽 조용하고 매우 깊었다. 고운 하얀 모래가 절벽 아래로 쓸려 내려왔다. 공주는 그 잘생긴 왕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헤엄쳐가서 모래밭에 왕자를 눕히고 따뜻한 햇살을 받게 머리를 높이 괴어주고는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하얀색 커다란 건물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한 무리의 젊은 여인들이 정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공주는 물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거품으로 머리카락과 어깨를 가렸기에 누구도 공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고는 누가 이 가엾은 왕자를 찾아내는지 지켜보았다.

잠시 뒤, 한 젊은 여인이 왕자에게 왔다. 여자는 아주 잠깐 동안 놀란 것 같았다. 이윽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렀다. 인어는 왕자가 의식을 되찾는 것을, 주위의 모두를 향해 웃음 짓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공주에게는 웃어 보이지 않았다. 왕자는 인어 공주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공주는 몹시 속이 상했다. 사람들이 왕자를 그 커다란 건물로 이끌 때는 슬픈 마음으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의 성으로 돌아갔다.

공주는 언제나 조용하고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지금 훨씬 더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언니들은 물 위로 처음 올라가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막내 공주는 조금도 말하려 들지 않았다.

여러 날 저녁 그리고 여러 날 아침, 공주는 그 왕자를 떠나보냈던 곳에 다시 가보았다. 정원에 잘 익어 추수를 마친 과일을 보고 높은 산에 눈이 녹는 것도 보았지만 그 왕자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떠날 때보다 더 마음이 슬펐다. 그 작은 정원에 앉아서 왕자처럼 보이는 그 아름다운 대리석 동상을 감싸 안는 것이 공주에게는 하나의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제 꽃을 돌보지 않았다. 꽃은 함부로 길까지 뻗어가서 그곳은 황무지가 되었다. 기다란 줄기와 나뭇잎은 나뭇가지에 마구 엉켜서 우울한 그림자를 던졌다.

공주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비밀을 언니 하나에게 들려주었다. 즉시 다른 언니들 모두 그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몇몇 인어들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인어가 그 왕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 친구도 배 위에서 왕자의 축하 파티를 보았다. 그 남자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 왕궁에 사는지도 알았다.

언니 공주들이 말했다.

“어서, 막내야!”

서로 팔짱을 끼고 길게 한 줄로 서서 물 위로 올라가서 왕자의 성이 있다는 곳 바로 앞으로 갔다. 거대한 대리석 계단에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돌로 지은 성이었는데, 계단 하나는 아래 바다로 이어졌다. 금박을 입힌 거대한 돔이 지붕 위에 솟아있고 건물 주위 기둥 사이로 실물과 똑같아 보이는 대리석 동상이 있었다. 높은 창문의 투명한 유리로 값비싼 비단 걸개와 태피스트리가 있는 화려한 홀이 들여다보였는데 그림으로 뒤덮인 벽은 보기에 무척 근사했다. 메인 홀 한가운데 커다란 분수가 유리 돔 지붕까지 물을 뿜고 햇빛이 분수대의 물과 커다란 수반에서 자라는 사랑스러운 식물을 비추었다.

이제 인어 공주는 왕자가 어디에 사는지 알았기에 여러 날 저녁, 여러 날 밤 그곳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언니들보다 훨씬 더 바짝 과감하게 헤엄쳐갔다. 심지어 화려한 대리석 발코니가 바다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좁은 시내까지 올라갔다. 여기에 앉아서 그 왕자를 지켜보았다. 왕자는 달빛 속에서 자기 혼자 있다고 생각을 했다.

여러 날 저녁, 왕자가 음악이 흐리고 깃발이 흩날리는 멋진 배를 타고 나가는 모습을 공주는 보았다. 공주는 덤불 사이로 몰래 내다보았다. 바람이 불어 공주의 은빛 꼬리 위로 불면 꼭 백조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였다.

여러 날 밤, 낚시꾼들이 횃불을 들고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낚시꾼들이 왕자가 얼마나 착한지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왕자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자신이란 걸 생각하며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에 기댔던 왕자의 머리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왕자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왕자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인어 공주는 인간이 좋아졌다. 그리고 점점 더 인간들과 더불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인간 세상은 인어 세상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인간들은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닐 수도 있고 구름 위 높은 산을 오를 수도 있었다. 인어 공주는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언니들은 막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전부 다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물 위 세상’에 대해서 잘 아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물 위 세상’은 할머니가 바다 위에 있는 나라에 붙인 이름이었다.

인어 공주가 물었다.

“인간은 물에 빠져 죽지 않으면 영원히 사나요? 우리가 여기 아래 바다에서 죽는 것처럼 인간들은 죽지 않나요?”

노부인 여왕이 대답했다.

“죽지. 인간들도 죽어. 인간의 수명은 우리보다 훨씬 짧아. 우리는 삼백 살까지 살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수명을 다할 때 우리는 그저 바다의 거품으로 변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 여기 아래 무덤이 없어. 우리는 불멸의 영혼이 없거든.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단다. 우리는 초록 바다풀과 같아. 일단 잘리고 나면 결코 다시 자라지 않아. 반대로 인간에게는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단다. 육체가 흙으로 변하고 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이어지는……. 영혼은 희박한 공기를 타고 저 위 반짝이는 별로 올라가지. 우리가 육지를 보기 위해 물을 헤치고 올라가는 것처럼, 인간들은 미지의 아름다운 곳으로 올라간단다. 우리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인어 공주는 애석해 하며 물었다.

“왜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받지 못했어요? 단 하루라도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나중에 그 천사의 왕국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 내 삼백 년을 기꺼이 포기할 거예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우리는 저기 위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지내고 훨씬 더 잘 살고 있어.”

“그러면 나도 죽어서 바다의 거품처럼 둥둥 떠다녀야 해요. 음악과 같은 파도를 듣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 붉은 태양을 보지 못하고요! 불멸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없어. 인간이 너를 무척 사랑해서 그 사람에게 네가 부모보다 더 큰 의미라면, 그 남자의 모든 생각과 심장이 모두 너와 하나가 되어서 사제가 그 사람의 오른손과 네 손을 맞잡게 하고 충직과 영원을 약속하게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이 네 몸으로 스며들어 갈 거야. 그러면 너는 인간의 행복을 함께할 거야. 그 사람은 너에게 영혼을 주어도 자기 것은 간직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여기 바다에서 그렇게나 아름다운 네 지느러미를 땅에서는 흉측하다고 여긴단다. 그곳 취향은 어설퍼서 너한테는 사람들이 다리라고 부르는 어색한 소품이 있어야 돼.”

인어 공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기 지느러미를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어서, 우리 기운 내자. 우리가 살 삼백 년 내내 펄펄 뛰어다니자. 확실히 그걸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하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 평화롭게 쉬게 될 거란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궁중 무도회를 열 거란다.”

무도회는 땅 위에서 볼 수 있는 여느 무도회보다 훨씬 더 화려한 행사였다. 거대한 연회장의 벽과 천정은 큼지막한 투명 유리로 만들었다. 장미처럼 붉고, 짙은 풀빛 거대한 조개 수백 개가 파란 불꽃을 품고 한 줄로 양옆에 나란히 서서 무도회장 전체와 벽을 아주 선명하게 비추어서 바닷속이 꽤나 밝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물고기가 그 유리벽을 향해 헤엄치는 게 보였다. 몇몇 물고기의 비늘은 붉은 보랏빛으로, 또 다른 물고기는 은빛과 금빛으로 빛났다. 무도회장 바닥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흘렀다. 그 위로 인어들이 매혹적인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목소리는 땅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막내 공주는 다른 누구보다 감미롭게 노래를 불러서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순간 막내 공주는 자신의 목소리가 바다에서든 땅에서든 누구보다 사랑스러웠기에 행복했다. 하지만 곧 저 위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흘러갔다. 그 매력적인 왕자, 그리고 왕자처럼 불멸의 영혼이 없다는 슬픔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즐겁게 노래하고 있는 아버지의 성을 몰래 빠져나와 자신의 그 작은 꽃밭에 처량하게 앉았다.

문득 바다를 통해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는 생각했다.

‘저건 분명 왕자가 배를 타고 나간다는 뜻이야. 내가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 보다 더 사랑하는 왕자, 내가 오매불망 생각하는 왕자, 내 평생의 행복을 기꺼이 맡기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불멸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하겠어. 언니들이 여기 아빠의 성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이, 지금까지 내내 무척 두려워만 했던 바다 마녀를 찾아가겠어. 어쩌면 마녀가 내게 무슨 조언을 해주며 도와줄 거야.’

인어 공주는 꽃밭에서 나와 마녀의 집 근처, 으르렁거리는 소용돌이를 향했다. 한 번도 그 길을 가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꽃도, 바다풀도 자라지 않았다. 황량한 잿빛 모래가 소용돌이까지 쭉 펼쳐졌는데, 그 소용돌이는 물레방아 바퀴처럼 빙그르르 돌면서 바다 밑바닥에 닿는 것은 뭐든 낚아챘다. 마녀의 집으로 가려면 이런 소용돌이를 뚫고 가야 했다. 그러고 나서 펄펄 끓는 꽤 길게 이어진 진창길이 있었다. 마녀는 그것을 석탄 습지라고 불렀다. 거기 너머 마녀의 집은 기괴한 숲 한가운데 있었는데, 나무와 관목은 전부 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식물인 폴립(히드라·산호류 같은 원통형 해양 고착 생물)이었다. 폴립은 마치 땅속에서 자라는 머리 백 개 달린 뱀처럼 보였다. 나뭇가지는 모두 길고 끈적끈적한 팔인데,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지렁이 손가락이 달렸다. 폴립은 몸마디, 마디를 꼼지락거리며 뿌리에서 밖으로 뻗은 촉수로 잡히는 건 뭐든 꽉 움켜잡고는 절대 보내주지 않았다. 인어 공주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숲 끝자락에서 멈추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쿵쾅거려서 거의 되돌아갈 뻔했지만 왕자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영혼을 떠올리고 용기를 그러모았다. 폴립한테 잡히지 않게 긴 머리채를 묶고 두 팔을 앞으로 모으고는, 공주를 움켜잡으려고 안달이 나서 팔과 손가락을 마구 뻗어대는 그 끈적끈적한 폴립 사이를 물고기처럼 잽싸게 빠져나갔다. 손아귀마다 수백 개의 촉수에 뭔가를 잡고 있었는데, 튼튼한 쇠고리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바다에 빠져 이렇게 깊은 곳까지 가라앉은 죽은 인간의 허연 뼈가 폴립의 팔에 있었다. 배의 부품, 어부들의 궤짝, 육지 동물의 해골도 저 손아귀로 떨어져 내렸지만 가장 으스스한 풍경은 무엇보다도 붙잡혀 목이 졸린 어린 인어였다.

공주는 숲속 진흙투성이 넓은 빈터에 도착하니, 살집 좋은 굵은 물뱀들이 미끄러지듯 스르르 나아가며 역겨운 누런 뱃가죽을 드러냈다. 빈터 한가운데 난파된 인간의 뼈다귀로 지은 집이 한 채 있었다. 그리고 거기의 바다 마녀가 앉아서 우리가 카나리아 새에게 설탕을 먹이듯 두꺼비 한 마리를 시켜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라고 시켰다. 마녀는 그 흉측한 물뱀들을 ‘아기’라고 부르면서 스펀지 같은 자신의 가슴을 이러 저리 기어 다니게 했다.

마녀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너 아주 어리석구나. 하지만 네 뜻대로 그대로 될 거야. 자랑스러운 공주, 넌 슬픔도 얻게 될 거다. 너는 지느러미 꼬리를 없애고 그 대신에 그 물건 두 개를 갖고 싶어 하는구나. 그 젊은 왕자가 너와 사랑에 빠져서 그 사람과 더불어 불멸의 영혼을 얻고 싶어 해.”

여기에서 마녀는 어찌나 깔깔대며 웃어대는지 두꺼비랑 뱀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온몸을 비틀어댔다.

마녀가 이어 말했다.

“제때에 잘 왔어. 태양이 내일 떠오르고 나면 난 일 년 내내 너를 도와줄 수가 없거든. 내가 한 번 먹을 약을 만들어 주지. 해가 뜨기 전에 그걸 가지고 물가로 헤엄쳐 가야 해. 마른 땅에 앉아서 그걸 다 마셔. 그러면 네 꼬리가 둘러 갈라지면서 쪼그라들 거야. 예리한 칼로 찍찍 찔러대는 느낌이 들 거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 지금껏 본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말할 거란다. 사뿐히 걷는 네 발 걸음은 어느 무용수도 따라올 수가 없거든. 하지만 네가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너는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피가 철철 흐르는 느낌이 들 거야. 기꺼이 너를 도와주지. 그런데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럼요.”

공주는 왕자와 인간의 영혼을 얻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녀가 말했다.

“기억해! 일단 인간의 모습이 되면 넌 다시는 인어로 되돌아올 수 없어. 네 언니들, 네 아버지의 성으로 바다를 헤엄쳐 절대 돌아올 수 없다고. 그리고 네가 왕자의 사랑을 완벽하게 얻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자기 부모를 깡그리 잊고 머리와 심장으로 오로지 너만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제가 결혼식에서 너의 손을 잡지 못한다면, 그러면 너는 불멸의 영혼을 얻지 못해. 만약에 왕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네 심장은 다음 날 아침 산산 조각이 나고 바다의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감수하겠어요.”

공주가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죽은 듯 창백했다.

“게다가 넌 내게 값을 지불해야 돼. 난 하찮은 걸 달라고는 하지 않지. 너는 여기 바다 아래에서 누구보다 목소리가 아름다워. 그 목소리로 분명 그 왕자를 사로잡고 싶을 거야. 하지만 넌 그 목소리를 나한테 주어야 해. 네가 가진 바로 그걸 내가 가져갈 거야. 내 값비싼 약을 주는 대가로 말이야. 난 거기에 내 피를 흘려야 해, 아주 잘 듣는 약을 만들려면…….”

“하지만 내 목소리를 가져가면, 나한테 뭐가 남지요?”

“네 아름다운 모습. 미끄러질 듯 걷는 발걸음, 초롱초롱한 눈동자. 이런 것들로 넌 왕자의 마음을 쉽사리 사로잡을 거야. 흠, 용기가 사라졌나? 혀를 쑥 내밀어. 그러면 내가 싹둑 잘라낼 테니까. 난 내 대가를 갖고 너는 잘 듣는 약을 갖게 될 거야.”

“어서 해요.”

마녀는 불 위에 가마솥을 걸고 약을 끓였다.

“깨끗한 게 좋지.”

마녀는 그렇게 말하며 뱀을 둘둘 말아서 그것으로 단지를 쓱쓱 문질렀다. 그러고는 가슴을 쿡 찔러서 시커먼 피를 그 가마솥 안에 후드득 떨어뜨렸다. 그 안에서 연기가 으스스하게 피어올라서 그 모습만으로도 공포로 얼어붙을 것 같았다. 마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가마솥에 던져 넣었다. 곧 악어가 눈물을 흘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마솥이 서서히 끓기 시작했다. 마침내 약이 완성되었다. 약은 깨끗한 물처럼 투명해 보였다.

“네 약이야.”

마녀는 인어 공주의 혀를 잘랐다. 공주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노래도,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마녀가 말했다.

“네가 내 숲을 돌아나갈 때 폴립들이 너한테 덤벼들 거야. 이걸 녀석들한테 한 방울만 떨어뜨려. 그러면 촉수가 수천 갈래로 갈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폴립들은 그 약을 보자마자 놀라서 몸을 말았다. 약은 빛나는 별처럼 공주의 손에서 빛을 냈다. 그래서 공주는 금세 그 숲, 습지, 그리고 으르렁대는 소용돌이를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성이 보였다. 연회장의 불은 이미 꺼졌다. 분명 성에 있는 모두가 잠이 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공주는 차마 근처에 가지 못했다. 이제 말을 할 수 없게 된 채 영원히 고향을 떠날 갈 것이다. 심장이 슬픔으로 부서질 것 같았다. 살금살금 꽃밭에 가서 언니들의 꽃을 하나씩 따서 성을 향해 수없이 입맞춤을 보냈다. 이윽고 검푸른 바다를 헤치고 위로 올라갔다.

왕자의 성에 도착했을 때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그 화려한 대리석 계단을 올라갈 때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공주는 그 쓰디쓴 약을 꿀꺽 삼켰다. 약은 양날의 칼처럼 가녀린 몸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공주는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그곳에 쓰러졌다. 태양이 바다 위에 떠오르자 찌를 듯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하지만 공주 바로 앞에 그 잘생긴 왕자가 칠흑 같은 눈동자로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꼬리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젊은 연인들이 바라는 사랑스러운 하얀 다리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발가벗은 채였기에, 자신의 긴 머리로 몸을 감쌌다.

왕자는 누구냐고, 이곳에 어찌하여 왔냐고 물었다. 공주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짙은 파란 눈동자로 부드럽지만 몹시 슬프게 왕자를 쳐다보았다. 문득 왕자는 공주의 손을 잡고 성 안으로 이끌어 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면도날 그리고 예리한 칼끝을 걷는 것 같았다. 마녀가 미리 알려준 그대로였다. 하지만 공주는 기꺼이 참아냈다. 왕자 옆을 걸으면서 거품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왕자와 공주를 본 모두가 그 우아하게 걷는 모습에 놀라워했다.

일단 성에서 내준 실크와 모슬린 의상을 입자 공주는 이 성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공주는 말을 할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다. 실크와 황금빛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 무희들이 와서 왕자와 왕자의 부모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중 하나가 누구보다 노래를 잘 부르자 왕자는 그 여자를 향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공주는 몹시도 슬펐다. 자신이 훨씬 더 아름답게 부르곤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생각했다.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 내 목소리와 영원히 헤어졌다는 것을 당신이 안다면…….’

우아한 무희들이 이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문득 공주는 하얀 팔을 들고는 발끝으로 일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누구도 그렇게나 춤을 잘 주지는 못했다.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더 아름답게 춤추며 그 어떤 무희보다 눈으로 가슴을 향해 깊이 말했다.

모두가 공주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특히 왕자가 그랬다. 왕자는 공주를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불렀다. 공주는 몇 번이고 다시 춤을 추었다. 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예리한 쇠붙이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왕자는 언제나 공주를 곁에 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밖에서 자도 좋다면서 벨벳 이불을 내주었다.

왕자는 공주에게 시종의 옷을 만들어 주어서 공주는 말을 타고 왕자와 함께 나갈 수 있었다. 둘은 향기로운 숲을 달리곤 했다. 초록 가지가 인어 공주의 어깨를 스치고, 작은 새들이 나풀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노래를 불렀다.

공주는 왕자와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 부드러운 발에서는 눈에 띄게 피가 흘렀지만 그저 웃으며 왕자를 따라 올라가서 구름이 새무리처럼 저 먼 땅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왕자의 궁전에서 모두가 밤에 잠들었을 때 공주는 그 넓은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 차가운 바닷물에 불에 덴 것 같은 발을 식혔다. 그러고 나서 바다 아래 사는 이들을 떠올렸다. 어느 날 밤, 언니들이 팔짱을 끼고 바다에 올라와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주가 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언니들이 알아보고는 공주가 모두를 무척이나 슬프게 했다고 말했다. 그 이후, 언니들은 매일 밤 보러 왔다. 한 번은 멀리, 멀리 바다에서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최근 오랫동안 물 위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거기 왕관을 쓴 바다의 왕도 함께 있었다. 둘은 공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언니들만큼 육지로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날이 갈수록 공주는 왕자를 더 깊이 사랑했다. 왕자는 어린아이를 아끼듯이 공주를 좋아했지만 왕비로 삼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왕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불멸의 영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왕자의 결혼식 다음 날 아침 바다의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인어 공주의 눈은 왕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나요?’

그러면 왕자는 인어 공주의 두 손을 잡고 사랑스러운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물론이지. 너는 내게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너는 누구보다 마음이 착하니까. 게다가 다른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지. 넌 언젠가 내가 한 번 보았던 그러나 결코 찾을 수 없는 어린 소녀를 무척이나 닮았어. 난 난파된 배에 있었어. 파도가 한 수도원으로 나를 쓸어갔지. 거기에 젊은 여인들 여럿이 의식을 치르고 있었어. 가장 어린 소녀가 바닷가에서 나를 찾아서 내 목숨을 구해주었지. 하지만 난 그 소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어. 그 소녀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여인이야. 그래도 네가 그 소녀와 많이 닮았기에 내 마음속에서 그 여인의 추억을 대신해 주지. 그 여인은 수도원에서 살아. 다행스럽게도 너를 얻었지.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야.”

인어 공주는 생각했다.

‘아, 왕자는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내가 바다에서 그 수도원 정원으로 왕자를 데리고 갔는데. 나는 물거품 뒤에 숨어서 누가 오는지 지켜보았어. 왕자가 나보다 더 사랑한다는 그 여자를 보았어.’

한숨만이 공주가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인어들은 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 여인이 그 수도원에 산다고 왕자가 말했지. 이 세상으로 결코 나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겠지. 나야말로 왕자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왕자를 위해 목숨을 전부 줄 수 있어.’

이제 왕자가 이웃 왕의 아름다운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근사한 배가 항해에 나설 준비를 했다. 왕자가 이웃 왕국을 향하는 이유는 왕의 딸을 보기 위한 것으로, 듬직한 수행원들과 함께 떠난다고 했다. 인어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왕자의 생각을 누구보다 훨씬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왕자가 공주에게 말했다.

“여행을 떠나야 해. 아름다운 공주를 보러 가야 하거든. 부모님의 바람이야. 하지만 신부가 내 뜻과 다르다면 난 공주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절대 그 공주를 사랑할 수 없어. 공주는 수도원에 있는 그 사랑스러운 여인을 너만큼 닮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신부를 선택한다면, 너를 선택할 거야. 말 못 하는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아.”

그러고는 인어 공주에게 입을 맞추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공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공주는 인간의 행복과 불멸의 영혼을 꿈꾸었다.

이웃 왕 나라로 실어다 줄 웅장한 배에 올라타자, 왕자가 말했다.

“너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지?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

그러고는 인어 공주에게 폭풍, 차분한 배, 깊은 바다의 낯선 물고기, 물속에 들어가서 보았던 경이로운 것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주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공주만큼이나 저 깊은 바닷속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밝은 달빛 아래, 배를 모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잠이 들었을 때 공주는 배 한쪽에 앉아서 투명한 바다를 들여다보며 아버지의 성을 상상했다. 성의 탑 맨 위에 할머니가 은색 왕관을 쓰고 서서 서둘러 흘러가는 배를 올려다보고 있다. 문득 언니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공주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서로 하얀 손을 움켜잡았다. 공주는 웃으며 손을 흔들면서 모두 잘 되어 간다고, 자신은 행복하다고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선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소년이 나오는 바람에 언니들이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년은 자신이 본 넘실거리는 파도가 그저 바다의 거품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배는 이웃 왕의 화려한 도시의 항구에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모두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높은 탑에서는 트럼펫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이 나부끼는 깃발과 반짝이는 총을 들고 한 줄로 섰다. 매일 축제 행사가 열렸다. 무도회 또는 또 다른 알현식이 이어졌지만 공주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멀리 있는 수도원에서 왕실의 예의범절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마침내 공주가 들어왔다.

인어 공주는 이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궁금했었다. 솔직히 그렇게나 뛰어나게 아름다운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피부는 투명하고 고우며 그 길고 짙은 속눈썹 뒤로 파란 눈동자가 진실 되고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왕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었군요! 내가 죽은 듯 바닷가에 누워있을 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군요.”

왕자는 얼굴을 붉히는 신부를 두 팔로 안았다. 그러더니 인어 공주를 향해 말했다.

“아,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거야. 내 사랑하는 꿈,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꿈이 이루어졌어. 넌 나의 이 큰 기쁨을 나와 함께 하겠지. 너는 나를 다른 누구보다 사랑하니까.”

인어 공주는 왕자의 손에 입을 맞추며 심장이 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혼식 다음 날 아침 공주는 목숨을 잃고 물거품으로 변할 테니까 말이다.

교회의 종이 모두 울려 퍼지며 온 도시에 결혼식 소식을 전했다. 제단마다 값비싼 은 램프에 향유를 피워 올렸다. 사제들이 향로를 이리저리 흔들고 교황은 신랑과 신부에게 축성을 내려 주었다. 인어 공주는 황금색 실크 옷을 입고 신부의 긴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결혼식 행진곡도 들리지 않고, 결혼식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날 저녁 신부와 신랑은 배를 타러 갔다. 폭죽이 터지고 깃발이 휘날렸다. 배 갑판 위에 보라색과 황금색 왕실 천막이 차려지고, 우아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고요하고 맑은 밤 신혼부부는 여기에서 잠을 잘 것이다. 배는 산들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가볍게 지나가서 조용한 바다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해 질 녘 오색찬란한 색색 등이 켜지자 뱃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춤을 추었다. 인어 공주는 깊은 바다에서 처음으로 올라왔을 때 보았던 그 흥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인어 공주는 먹이를 쫓는 제비처럼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다. 모두가 인어 공주에게 박수를 보냈다. 실로 인어 공주가 그렇게나 멋지게 춤을 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검이 연약한 발을 찌르는 듯했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심장이 훨씬 더 큰 고통으로 아팠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아낌없이 버리고 끊임없는 고통을 감내했던 왕자를 보는 마지막 저녁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면 왕자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몰랐다. 인어 공주에게는 왕자와 같은 공기를 숨 쉬고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파란 하늘의 무수한 밤을 올려다보는 마지막 밤이었다. 생각도 할 수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영원과도 같은 밤이 인어 공주를 기다리고 있다. 공주는 영혼이 없으며 영혼을 가질 수도 없다. 한밤이 지나도록 잔치가 이어졌다. 하지만 공주는 마음에 드리운 죽음의 생각을 잊고 웃으며 춤을 추었다. 왕자는 아름다운 신부에게 입을 맞추고 신부는 왕자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그 웅장한 천막 안으로 쉬러 들어갔다.

배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배를 모는 키잡이만 갑판에 남았다. 인어 공주는 벽에 기대어 서서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았다. 첫 여명이 비치자마자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문득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로 언니들이 둥실 올라왔다. 언니들은 막내 공주만큼이나 창백했다. 산들바람이 빗겨주던 길고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 잘려 나갔다.

언니들이 말했다.

“우리 머리카락을 마녀한테 주었어, 너를 도와줄 방법을 얻으려고. 오늘 밤 네 목숨을 구해. 마녀가 우리에게 칼을 주었어. 이 날카로운 칼날을 봐! 해가 뜨기 전에, 넌 왕자의 심장에 이걸 꽂아야 해. 왕자의 뜨거운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발이 다시 하나가 되어 지느러미 꼬리로 변할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인어가 되어서 바닷속 우리한테 돌아올 수 있어. 죽어서 짠 바다의 거품이 될 때까지 삼백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서둘러! 왕자든 너든 해가 뜨기 전에 죽어야 해. 할머니는 슬픔에 빠져 하얀 머리카락이 계속 빠지고 있어, 꼭 마녀가 가위로 잘라버린 우리 머리카락 같아. 왕자를 죽여. 그리고 우리한테 돌아와. 서둘러! 서둘러! 하늘의 저 빨간 기운을 봐! 몇 분 있으면 태양이 떠오르고 넌 죽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언니들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파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어 공주는 보라색 천막을 열었다. 아름다운 공주가 왕자의 가슴에 머리를 얹고 잠이 들었다. 인어 공주는 허리를 숙여 왕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서둘러 하루를 열기 위해 붉게 빛나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날카로운 칼을 보고 다시 왕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왕자는 자면서 신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온통 신부 생각뿐이었다. 인어 공주의 손에 든 칼날이 바르르 떨렸다. 문득 공주는 칼을 저 멀리 바다 위로 휙 던져 버렸다. 칼이 바닷속에 풍덩 빠진 자리가 마치 부글부글 끓듯 피처럼 붉어졌다. 인어 공주는 이미 흐릿해진 눈으로 한 번 더 왕자를 보고는 밖으로 물러 나와 바다로 몸을 날렸다. 몸이 거품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태양이 떠올라, 햇빛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그 서늘한 바다 거품을 비추었다. 인어 공주는 죽음의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머리 위로 비추는 환한 햇빛 속에서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생명체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무척이나 투명해서 배의 하얀 돛과 하늘의 붉은 구름이 들여다보였다. 목소리는 음악과도 같아서, 지상의 눈이 인어들의 거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귀로는 그 소리를 쫓을 수가 없었다. 날개도 없이, 이들은 공기만큼이나 가볍게 떠다녔다. 인어 공주는 자신이 저들과 같은 모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점점 거품에서 빠져나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누구세요? 내가 어디로 가는 거죠?”

인어 공주가 물었다. 목소리가 위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신비해서 지상의 음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공기의 딸들이란다. 인어는 불멸의 영혼이 없어서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영혼을 가질 수 없어. 인어의 영원한 생명은 몸 밖의 힘에 달렸지. 공기의 딸들도 불멸의 영혼이 없어. 하지만 착한 행동을 하면 얻을 수 있지. 우리는 남쪽으로 날아가. 우리가 차가운 바람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곳의 독약과도 같은 뜨거운 공기가 인간을 죽이거든. 우리는 가는 곳마다 신선함과 치유의 밤을 주는 꽃향기를 공기에 실어간단다. 삼백 년 동안 최선을 다해 좋은 일을 하면 우리는 불멸의 영혼과 인간의 영원한 은총을 나누어 받아. 너, 가엾은 인어야, 너도 이것을 위해 온 마음을 다 바쳐 노력했어. 너의 고통과 충실함이 하늘 높은 영혼의 왕국으로 너를 들어 올렸어. 이제 삼백 년 동안 선한 행동을 하면 절대 죽지 않을 영혼을 얻게 될 거야.”

인어 공주는 투명하고 밝은 눈을 신의 태양을 향해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 위는 서서히 활기를 띠며 다시 생기가 돌았다. 왕자와 그 아름다운 신부가 자신을 찾는 것이 보였다. 둘은 슬프게도 그 부글부글 끓는 거품을 쳐다보았다. 마치 인어 공주가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인어 공주는 신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왕자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높이 흘러가는 장밋빛 구름으로 공기의 딸들과 함께 올라갔다.

“여기가 신의 왕궁으로 가는 길인가요, 삼백 년이 지난 후에?”

“좀 더 이를 수도 있어. 보이지 않게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인간들의 집으로 날아 들어가지. 매일 우리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착한 아이를 찾아. 그러면 신은 우리를 시험하는 날을 짧게 해줘. 아이는 우리가 자기 방을 둥둥 떠다닐 때 알지 못해. 하지만 우리가 그 아이를 향해 웃을 때 삼백 년에서 1년이 줄어든다는 뜻이야. 하지만 우리가 버릇없는 아이를 보면 우리는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해. 눈물 한 방울마다 우리 시험의 하루가 더 늘어나지.” (끝)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공부했습니다. 소설 『십자수』로 근로자문화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뮌헨국제청소년도서관(IYL)에서 펠로십(Fellowship)으로 어린이 및 청소년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 [김선희’s 언택트 번역교실]을 진행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토머스 모어가 상상한 꿈의 나라, 유토피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윔피 키드」 「드래곤 길들이기」 「위저드 오브원스」 「멀린」 시리즈, 『생리를 시작한 너에게』 『팍스』 『두리틀 박사의 바다 여행』 『공부의 배신』 『난생처음 북클럽』 『베서니와 괴물의 묘약』등 200여 권이 있습니다.

– 블로그 : https://blog.naver.com/thinkwalden
–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h_translator_sunhee/

  • 위 번역본은 김선희 번역가의 ‘기증저작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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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곳간에서 진보난다: PC와 반(反)페미니즘 그리고 성평등은커녕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그 조어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만한 용어, 만만한 개념이 아닙니다.

“‘정치적 올바름’ 개념이 오늘날처럼 소수자집단과 주류집단 사이의 논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에 이 용어는 레닌 좌파들이 자신들의 노선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좌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과격함을 아이러닉하게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한 다문화주의·다양성 개념은 사회적 정의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적 정의가 아니라 주류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특정 소수자집단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후 PC지지자들은 anti-PC지지자와의 논쟁 과정에 주류집단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또 다른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이란 용어는 사회 변화와 진보, 보수라는 사회적 시각에 따라 의미가 추가되거나 새로운 의미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종일,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과 논쟁 범위 고찰, 2016.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인어공주] (개봉 예정)에 대한 전문가 비평과 대중 반응을 함께 분석한 결과, 각각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찬성과 거부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가 발견되었다. 전문가 담론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문화예술 생산자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로 논의되었던 반면, 대중 담론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치부된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 비판을 정당화하는 기제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팬들에 대한 기만, 역차별 담론 등이 동원되었으며 그 논리적 귀결은 원작 근본주의와 예술 지상주의이다.”

한송희, 이효민,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2020. 5.

“‘트럼프 현상’의 근저엔 지난 40년간 미국 사회를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과 그에 따른 ‘위선의 제도화’, 그 토양 위에서 구축된 ‘플랫폼 정치’와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강한 집단적 불만, 그리고 이 불만을 행동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게 한 ‘미디어 혁명’이 있었다.”

강준만, ‘미디어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트럼프 현상’, 2016.10.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을 통제하려는 운동의 철학이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돼 왔지만, 1990년대초부터 보수 우파의 반발로 이념적인 ‘문화전쟁’의 한복판에서 격렬한 갈등의 온상이 되어 왔다. 사회적 운동으로서의 PC의 역사가 이제 겨우 수년에 지나지 않는 한국에서 수십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PC 비판 담론을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까?

강준만, ‘정치적 올바름’의 소통을 위하여, 2018.12.

도널드 트럼프 (출처: Duncan Hull, CC BY)

인어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캡콜드 님께 물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어원: 반어 혹은 조롱

민노: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은 어떤 억압이랄까, 피곤함이랄까, 경직성이랄까, 그런 부정적인 느낌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캡콜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 자체를 쪼개서 봐야 합니다. 그냥 올바름이라고 하지 않고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하잖아요. 실제론 올바르지 않다는 얘기예요. 그 순간의 어떤 정치적인 목표에 적절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거죠. 굉장히 반어법적으로 쓰였던 거거든요.

특히 20세기 초반 같은 경우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정치 운동을 하면서 현실에서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문제가 있는 거라도 정치적인 도그마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잘못됐지만(우스꽝스럽지만) 정치적 방향에서는 올바르다는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거고요.

이 용어가 사실은 70년대에 사회진보운동들이 문화적인 패러다임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재발굴되는 데요. 소수 그룹의 사회적 권력을 박탈하는 표현 방식이 문제라면서 그런 표현 말고 중립적인 용어를 새로 쓰자고 주장하고, 그런 중립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면 굉장히 잘못하는 거라는 그런 움직임이 70년대에 이미 있었단 말이죠.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고 도그마를 따르는 운동을 하는 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올바르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서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거다라는 거죠. 즉, 7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반어법적 의미로 쓰였다는 거죠. 한마디로 조롱이었단 말이예요. 조롱.

그래, 니가 킹왕짱이다! (출처: Image by Sam Williams from Pixabay)

한국적 맥락에서 정치적 올바름

민노: 조롱이라…

캡콜드: 미국적 맥락에서 조롱과 반어로 쓰였던 ‘정치적 올바름’이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 재발굴된 건 세계적으로 온라인 미디어상의 반동적이고 극우적인 일련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라인 극우파들이 들고나온 논리적인 흐름이 이런 거였거든요.

  • 좌파가 미디어를 모두 장악했다.
  • 그래서 우리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억압한다.
  • 그 모든 게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자유를 뺏어가려는 활동의 일환이다.
  • 그런데도 정치인이 그걸 제지하지 못하는 건, 그게 정치적으로는 옳기 때문이다!

민노: 아!

캡콜드: 지금 오히려 미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pc)라는 말은 구닥다리가 돼서 더는 안 쓰고요. 소위 깨어있는(woke)라는 말을 써요. ‘깨어있는’을 이제 ‘정치적 올바름’ 대신에 조롱의 의미로 쓰는 거죠. 어쨌든 한국은 한 단계 늦게 수입이 되면서 여전히 PC, PC 하게 되는 거죠.

민노: 우리나라로 치면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을 조롱의 의미로 쓰는 것과 비슷하겠네요.

캡콜드: 그런 비슷한 흐름이죠. 같은 거를 지칭하지는 않지만, 그런 비슷한 흐름으로 일종의 조롱의 의미가 되는 거죠.

뒤늦은 미국수입품 PC, 한국에서 히트(?)한 이유

민노: 우리나라는 그럼?

캡콜드: PC라는 게 한국에서 지난 몇 년 동안 히트를 친 게 뭐냐면 반페미니즘 흐름하고 사실은 딱 맞닥뜨려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민노: 맞아요.

캡콜드: 지난 몇 년을 보면, 기존 권력에서 계속 주변화 돼있던 여성이 그나마 힘을 얻어가던 그런 분야였잖아요. 우선 지적하고 싶은 건, 모든 사회적 권력관계라는 게 어떤 비슷한 흐름이 있는데요. 제가 즐겨 쓰는 말이 ‘곳간에서 진보난다’라는 말이 있어요.

민노; 곳간에서 진보난다?

캡콜드: 예, 곳간에서 인심난다처럼 곳간에서 진보난다라는 말인데… 그러니까 내가 뭔가 가진 게 있고, 가진 거를 안 뺏길 것 같을 때에는 좀 더 다른 계층, 다른 그룹들한테도 뭔가 조금 더 권리를 얻도록 해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든단 말이죠. 그냥 평범한 인간의 어떤 유기적인 심리 기제인 거죠.

그런데 그에 비해서 내 위치, 내 권력이 흔들리는 것 같다 하면 굉장히 방어적이 되고요.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기제인데요. 그게 사실은 지난 한 10여 년 동안 여성 인권이 좀 더 표면화하면서 안 그래도 경쟁 체제가 굉장히 심한 한국에서는 굉장히 남성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단 말이죠.

레디컬 페미니즘 vs. 강력한 반동

민노: 제가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기본적으로 진보층에서는 레디컬 페미니즘조차도 제가 느끼기에는 정치적 올바름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지지했단 말이죠. 앞서 설명하신 극우파의 반동적인 맥락과는 정반대에서.

캡콜드: ‘레디컬’이라는 것은 다소의 긍정적인 역할이 있고, 장기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문제들을 낳곤 하는게, 기본적으로 소위 말하는 기존 체제를 확 근본적으로 뒤집어 엎는 전투적인 태세로 들어간단 말이죠. 그래서 초기에 무언가 억압된 구조를 뚫는 데는 굉장히 장점을 발휘하는데 왜냐하면 그만큼 강력하게 공격을 하니까요. 그런데 그다음에 다수 지지를 이끌어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는 말이죠.

민노: 그런 맥락에서요.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페미니즘이 굉장히 핫한 어떤 이념적인 지향 내지는 운동 내지는 사회적인 어떤 흐름이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일시적인 쇠락일 수도 있고, 침체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는 뭐랄까 어떤 강력한 반동을 만나고 있잖아요, 지금.

캡콜드: 그렇죠. 강력한 반동이라고 표현하신 게 딱 맞는 것 같아요.

뜬구름 잡는 반(反)페미니즘 담론들

민노: 캡콜드 님 보시기엔 페미니즘은 일시적인 쇠락인가요? 아니면 강력한 반동에 의한 멈춤인가요. 아니면 장기적인 침체 국면인가요. 어떻게 보세요?

캡콜드: 우선 페미니즘을 세분화를 해서 봐야 할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범위가 아무래도 넓죠. 그러니까 실제로 어떤 노동 평등으로서의 페미니즘도 있는 것이고, 어떤 문화적인 영역에서의 페미니즘도 것이고, 제사상 함께 차리기 같은 일상에서의 페미니즘도 있는 거고요. 여러 층위의 페미니즘이 있는데요.

우선 레디컬 패미니즘이라고 해서 특히 온라인 등지에서 갑자기 확 부상했던 방식은 페미니즘 자체를 이슈화시키는 데 굉장히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전투적으로 나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주 재빨리 결국 큰 반동을 만났고요. 처음에 이슈 자체를 키우는 데 있어서는 그런 반동마저도 사실은 도움이 돼요.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니까요.

하지만 그다음에 각 영역에서 페미니즘의 성과를 계속 정착시키고, 더 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운동, 다른 종류의 노력들이 계속 필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당장 일터에서의 임금 형평성이나 진급 등등과 관련한 노동 영역의 평등과 관련해선 주목을 쉽게 끌지도 못할 뿐더러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거는 주목만 많이 끈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도 현장에서는 많은 분들이 잘 안 보이는 방식으로 안 보이는 곳에서 굉장히 많이 정말 피나는 노력들을 많이 하고 계신데요. 그런 거는 애초에 문화적으로 큰 이슈가 안 된단 말이죠. 그거에 비해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거는 뭐냐면 그냥 막연하게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다’라는 둥 여성지향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너무 꼴 보기 싫다더니 둥, 그런 추상적인 영역에서만 (반)페미니즘 담론이 폭발하는 거죠. 현실과 괴리가 있는 그런 상태죠.

여성상위? 현실과 괴리된 반페미니즘 담론… (출처: Image by Tumisu from Pixabay)

성평등은커녕… 노동평등의 현실

민노: 그러니까 담론 자체가 너무 비생산적이다. 좀 불필요한 부분에 너무 좀 과잉 대표되고 있다. 이렇게 보시는 건가요?

캡콜드: 그렇죠. 굉장히 의미 없는 부분에서만 대중적 여론들이 몰려 있(었)고, 그거보다 사실 훨씬 더 중요한 영역에서는… 저는 가령 노동평등 쪽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실제로 아직 통계 수치를 보면 성평등은커녕 여전히 소위 많은 유리천장이 있고, 임금 불평등이 있고, 그런 것들이, 진전이 아예 없다는 거는 아닌데, 진전이 굉장히 더디거든요.

그런데 그런 노동(불)평등과 관련한 자료들로 사람들이 흥분하고 감동하지는 못하는 거고, 그보다는 여성들이 내가 보기엔 막연하게 더 잘 나가는 것 같고,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여성들을 우쭈쭈해줘야 하느냐 그런 게 반동의 핵심 포인트거든요. 이미 여성상위가 됐고, 성평등인데 왜 우리 남성이 여성을 봐줘야 되느냐? 그게 반동의 기본 ‘네거티브’(흑색선전)예요.

한마디로 앞서 얘기했던 ‘곳간에서 진보난다’ 말이 바로 그런 포인트인데, 사회 진보라는 거를 굉장히 시혜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본 마인드가 아무래도 세계 어디서나 있거든요.

참고: 노동평등의 관점에서 본 실제 통계 수치 (편집자)

  • 2022년 경제활동참가율(%) “통계청 성불평등지수(GII) 현황에서 인용
    • 남성 경제활동참가율: 74.4%
    • 여성 경제활동참가율: 53.4% (이상 출처, UNDP, 재인용 출처: e-나라지표)
    • “2035년까지 한국 여성과 남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같아지면 국내총생산(GDP)은 지금보다 7% 이상 성장할 겁니다.”(기타 고피나트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 ‘2022 대한민국 성평등 포럼’ 기조연설 중에서, 2022. 9. 27., 재인용 출처: 한겨레)
  • 남성대비 여성 임금비율
    • 남성대비 64.6% (2021년 기준)
    • 월임금 총액(평균): 남자 383만 원 v. 여자 248만 원 (2021년 기준)
  • 주요 OECD 회원국 남녀 임금격차(%): 압도적으로 1위 (31.5%)

03. 신나면 망한다: ‘미제 똥물’ 전설에서 ‘밥.꽃.양.’의 현실까지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영화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루했고 그래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때 나는 카메라의 시선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을 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의 남성 노동자들은 못 생기고 거칠고 비열했다. 혐오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얄팍하고 비루한 현실을 이 영화는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3년 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이 해묵은 영화에 열광하는지도 알게 됐다. 처음 보았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나중에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나는 이 영화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영화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때는 1998년 여름이다. 국회에서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파견법이 제정됐다. 이 영화는 그해 여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정환, 우리가 ‘밥꽃양’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2005. 12.
“노동3권 보장되면 툭 하면 파업할 것” (2013년 당시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 2023년 현재 충청남도지사)

2013년, 김태흠(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이 사람들(국회 청소노동자) 무기계약직되면 노동3권 보장된다. 툭 하면 파업할 터인데 어떻게 관리하려고 그러냐”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국회 청소노동자는 2016년 직접고용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고, 2019년 정년을 사실상 68세까지 연장무기계약직으로 65세까지, 이후 3년간은 기간제로했습니다. 김태흠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김태흠 자신도, 그 망언에도 불구하고, 도지사가 됐죠.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앞선 글에서 살핀 것처럼, 여성의 노동은 깊은 어둠 속에 남아 있습니다. 고용률은 남성보다 20%가 낮고남성74% vs. 여성 53%, 임금은 월 평균 135만 원을 덜 받습니다남성 383만 vs. 여성 248만. 반페미니즘 선동의 네거티브(흑색선전)는 ‘지금은 여성상위가 됐고, 왜 우리가 여성을 봐줘야 하느냐?’는 뜬구름 잡는 허수아비 때리기였지만,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막연하고 근거 없는 선동이 효과적으로 먹혔을까요. 콜라 마시던 후배 보며 ‘미제 똥물’ 타령하던 운동권 선배의 꼰대질과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라는 주장은 서로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닮아 있을까요. 정리해고가 도입된 1988년 그해 현대차 노조 투쟁의 희생양이 된 ‘밥하는 아줌마’ 노동자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인어공주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대화에서 이어집니다.

‘미제 똥물’ 전설… 반동에 먹이감 주는 급진주의

민노: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네거티브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면,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전략적인 아쉬움 같은 건 없을까요. 자신의 아군으로 포섭할만한 세력에게조차도 배타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싶기도 해서요. 전략적인 어떤 경직성이랄까요. 공격성이랄까요. 그런 측면은 어떻게 보세요?

박불똥, 코화카염콜병라, 1988. 드로잉&판화, 69X50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캡콜드: 그럼요. 그런데 그게 페미니즘만의 무슨 독특한 특성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소위 말한 급진 운동을 추구할 때 항상 있었던 게 예를 들어 예전에 대학 문화가 IMF 구제금융(1997년)를 기점으로 완전히 세속화되기 전, 운동권 중심 대학문화, 민중문화 그런 게 남아있는 영역에서는 노동이나 사회적인 깨달음 등이 훨씬 더 전투적으로 추구가 되었단 말이죠. 그런 전설들이 있잖아요. 신입생이 콜라를 마셨더니 한 복학생 선배가 와서 ‘너는 왜 미제의 똥물을 마시고 있냐’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

그런게 지금 언급하신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했던 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거란 말이죠. 이 패턴은 인종이든 계급이든 다른 나라, 다른 맥락의 급진운동에서도 비슷하게 반복이 되고요. 운동을 강력하고 공격적으로 추구할 때 생기는 비슷한 패턴이예요.

앞서 말씀드렸듯 초반에 돌파할 때는 그렇게 하더라도, 그다음에 빨리 여러 다른 그룹들을 연대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되는데 그 타이밍을 놓치고 계속 계속 공격적으로만 나가면, ‘반동 앞에서 오히려 정체’가 되는 거죠.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 라는 보장은 없다

민노: 좀 더 질문을 좁혀보면, 지금 말씀하신 급진 진영에 있는 분들이 아니고, 제도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분들, 언론으로부터 일종의 대표성을 획득해 발언을 대리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TV 페미니즘 관련 토론에 패널로 초대받는 분들이라거나.

캡콜드: 좀 더 성공해서 발언권을 얻었다는 거지, 여전히 급진의 방식, 즉 어떻게든 이슈 파이팅을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마인드에 계속 잡혀 있는 거죠.

민노: 개인적으로 캡콜드 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라는 명제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캡콜드: 택도 없는 소리죠. 피해자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목소리, 귀중한 진술이에요. 그 진술이 실제 증거가 되려면 다른 것들과 함께 합쳐져서 고려되어야겠죠. 너무나 당연한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 나가는 과정인데, 그 속에 굉장히 중요한 ‘조각’인 거죠.

민노: 곧바로 증거 수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캡콜드: 중요한 부품이라고 해서, 부품이 전체는 아닌 거잖아요. 증언으로 얘기가 나왔으나 그게 알고 보니까 전혀 다른 엉뚱한 맥락이었다라든지, 증언 자체가 사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던 그런 경우도 발생할 수 있거든요. 반대로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증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믿으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중요한 부품이고, 그 부품을 다른 부품과 합쳤을 때 어떤 진실이 드러나느냐는 과정이죠.

‘신나면 망한다’ … 하지만 반걸음식 진보를 이어가는 사람들

민노: 그렇다면 그런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다’와 같은 주장이 소위 주류 매체 기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된 배경이랄까요. 그냥 개인의 판단 미스, 한 개인의 우연한 발언이나 태도에 불과하다고 보세요, 아니면 일련의 흐름을 상징하거나 대표한다고 보세요?

캡콜드: 당연히 흐름이죠. 그러니까 제가 즐겨 쓰는 격언 중 하나가, ‘신나면 망한다’예요. 너무 신나하다 보면 그 자체가 권력의 쾌감을 주거든요. 급진적으로 공격적으로 나서는 게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옳은 것처럼 여겨지게 되면,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나가는 거죠.

민노: 그렇다면 그런 빌미들 때문에 강력한 반동을 만난 현재의 페미니즘은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평가해야 할까요.

캡콜드: 음… 급진적으로 이슈화하던 흐름은 확실히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요. 그런데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구분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여전히 페미니즘에서 좀 더 천천히 진전할 수밖에 없는 어렵고 중요한 부분을 맡으신 분들은 계속 계시니까요. 누가 알아주지 않고, 누가 그렇게 스타로 만들어주지 않아도 계속 노력하고 계시거든요.

민노: 이를테면.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캡콜드: 단체로 치자면 모든 노조에서 여성 분회들이 다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요. 굳이 스타성 비슷하게 따지자면 김진숙 위원이라든지, 노동계의 얼굴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이야기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들은 계속 계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꾸준히 반걸음식의 진보를 계속 이어나가고 계시는 분들이죠.

2023년 4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폐암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연 경기도 학교 급식노동자 (사진 제공: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밥.꽃.양.

민노: 한국 노동계, 가령 민노총 같은 단체에서 여성 인권이나 여성 노동자의 어떤 위상이랄까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캡콜드: [밥.꽃.양.] (임인애, 2001)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어요.

98년 여름, 현대자동차 노조식당 아줌마들은 ‘투쟁의 꽃’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나서지만, 노사 협상이 타결되면서 전원 정리해고 대상이 된다. 노조위원장은 노조가 식당운영권을 가지고 전원 고용승계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녀들은 경기가 회복되면 복직시켜 준다는 노사합의에 기대를 걸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노조의 하청노동자가 된 지금, 회사의 상황이 좋아졌음에도 원직복직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고, 노조 또한 복직투쟁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다.”다음영화, ‘밥.꽃.양.’ 소개

캡콜드: 대형 노조의 쟁의 안에서 계속 주변화됐었던 여성 노동자들, 특히 ‘밥하는 아줌마’, 그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 안에서도 계속 오히려 주변화됐던 거죠. 그러니까 똑같은 노동자고, 오히려 더 심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 노동자들의 강한 푸시에 노동권이 더 뒤로 밀려나고… 그런 모순을 그려냈던 다큐멘터리인데요.

민노: (….)

캡콜드: 그게 이미 한 20년 전 얘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문제는 계속 있어왔고, 계속 제기가 됐는데, 아직도 충분히 표면화되지 못하고 있는 구석이 있죠.

[밥.꽃.양.] (임인애, 2001)
[밥.꽃.양.] (임인애, 2001)
[밥.꽃.양.] (임인애, 2001)
2023년 4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폐암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연 경기도 학교 급식노동자 (사진 제공: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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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숭배와 혐오의 이분법을 넘어서: 로알드 달, 르 귄, 그/그녀

작품은 ‘그때/거기’의 세계에서 태어나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지금/여기’의 세계를 통과합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말이죠. 그렇게 평론가와 독자는 변화된 가치와 기준으로 작품을 끊임없이 규정하죠. 그들은 작품을 닫아버리려 합니다. 그들은 작품을 매번 자신의 기념비로 만들려고 시도하죠. 하지만 작품은 자신을 닫아버리려는 비평적 권력과 욕망에 저항해 항상 열려 있으려 합니다.

이런 대화와 투쟁, 우리가 비평 혹은 해석 또는 독서라고 부르는 행위를 통해 작품은 매번 ‘대화적 상상력’ 속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그 대화와 투쟁, 화석화의 시도를 견딘 채 끝끝내 열린 채로, 오랜 시간 동안 대화적 상상력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끊임 없이 생성하는 작품은 드디어 위대함을 획득하죠(참조: T. 토도로프, ‘구조시학’, 곽광수 역; 문학과지성: 1977.).

하지만 그 기념비의 욕망이 작품을 ‘수정’하는 데에까지 미친다면? 해석자의 권력이 올바름, 적절함이라는 당대의 기준으로 작품을 사지 절단한다면?

‘아동문학계의 셰익스피어’ 로알드 달에게 생긴 일

로알드 달(Roald Dahl; 1916년 웨일즈 ~1990년 잉글랜드, 1954년 38세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더 타임스가 전후 위대한 영국작가 16위로 선정한 ‘아동 문학계의 셰익스피어’ 로알드 달에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로알드 달이 발표한 10개의 작품들 중 505건의 표현이 달의 출판권을 가진 출판사에 의해 수정됐고, 78건은 아예 삭제됐습니다. 이것은 어린이 독자를 위한 배려일까요? 올바름, 적절함을 위한 정당한 편집권의 행사일까요? 아니면, 용납할 수 없는 검열일까요?

로알드 달에게는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다. [제임스와 슈퍼복숭아],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녀를 잡아라], [멍청씨 부부 이야기], [마틸다] 등 수많은 그의 작품들은 퀸틴 블레이크의 그림과 더불어 어린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현란한 재미를 준다. 로알드 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그를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인정하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로달드 달의 작품들은 놀라움과 당황, 경악, 분노, 불안, 통쾌, 감탄 등의 정서적 반응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작품을 다 읽은 후에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엽기적이며 재미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책을 쉽게 덮지도 못 하고 입맛을 다시게 된다. 맛있는 요리를 단숨에 먹어치운 후 빈 접시를 바라보는 아쉬움처럼 책을 놓기가 섭섭한 것이다. 로알드 달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렇게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 독자나 어른 독자의 반응이 크게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여기까지만 놓고 볼 때, 로알드 달의 작품은 일단 최상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고 단정 짓는다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윤소희, 로알드 달의 이야기 방식: [마틸다]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중심으로, 2008. 12.

로알드 달 작품 수정 ‘사건’에 관한 텔레그래프의 기사 (온라인 기사 갈무리)

민노: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돌아가면요. ‘올바름’, ‘적절함’이라는 기준(?)으로 원작을 직접 수정해버린 사건이 있었죠. 로알드 달의 출판권을 가진 출판사가 최근(2022년 개정판 등) 로알드 달의 소설 일부 표현을 자기네들 마음대로(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서?) 뜯어 고쳤잖아요. 텔레그래프가 크게 보도할 정도였는데요. 우리나라에선 마부뉴스(SBS)가 그 소식 중 일부를 전했고요.

캡콜드: 네,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죠. 인어공주 관해서 앞서 얘기했듯, 우선 원본은 원본 자체로 있어야 돼요. 그래야 사람들이 그걸 참조하고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좀 더 시대를 반영해 조금이라도 차별적 내용 문제를 해소하고 싶다면, 이 판본이 다른 ‘해석본’이라는 걸 명시하며 만들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원작 동화 자체의 표현을 수정한 건 큰 문제였던 거죠.

르 귄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그녀

민노: 관련해서요. 제가 최근 르 귄의 소설(’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있는데요. 플레이보이에 기고한 자신의 작품(’아홉 생명’)을 플레이보이 측에서 많이 손댔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작가 초년 시절이라 그랬던 거죠. 그래서 후에 어느 정도 명성을 쌓고, 다시 소설집을 출판하면서 온전하게 다시 회복을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또 다른 한 편의 소설에 관해서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찬찬히 생각해 보니까 이 SF소설(’겨울의 왕’)에 등장하는 종족(게센)이 처음에는 남성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성이더라는 거죠. 그래서 기존에 남성 대명사를 사용한 걸 새롭게 개정하면서 여성 대명사로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어슐러 K. 르 귄(1929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 2018년 오리건 포틀랜드, 사진은 1995년, 66세 당시 모습, Marian Wood Kolisch,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아홉 생명]은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게재된 글로, 내가 유일하게 ‘U. K. 르 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플레이보이’ 편집진은 내 이름을 머리글자만 써도 되겠는지 정중히 물었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플레이보이’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그쪽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그 일은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나를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여 성적 편견을 보였던 내 생애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경우였다. 그리고 그 요구가 너무나 어리석고 기괴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플레이보이’는 이 글을 게재하면서 사소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바꾸었고, 자신들이 출간하는 책에도 계속 바뀐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나는 내가 쓴 원래 글을 더 좋아하며, 그 이후 내 권한 아래 이 글이 다시 출판될 경우에는 언제나 이 책에 있는 내용처럼 실리며, 머리글자가 아닌 완전한 내 이름이 찍히도록 한다.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1975, 시공사: 2004. 중에서

내가 이 단편을 쓸 때는 ‘어둠의 왼손’을 쓰기 1년 전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겨울 행성, 즉 게센에 사는 주민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 글이 출판될 무렵에서야 나는 게센인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들’이라든지 ‘어머니’ 같은 여러 단어를 수정하기에는 너무도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어둠의 왼손’을 읽고 분노하거나 슬퍼했다. 소설에 양성인들을 받는 대명사가 시종일관 ‘그’였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삼인칭 단수의 경우 총칭 대명사는 남성 대명사와 동일하다.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덫이기도 하다.

총칭 대명사이자 남성 대명사he는 여성she과 중성it을 배제하기 때문에 여성형과 중성형은 남성형인 ‘그he’의 쓰임에 비해 좀 더 한정되고 부당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 만든 단어들, 즉 ‘te’나 ‘heshe’ 같은 여러 명사 역시 우울하고 짜증 나긴 마찬가지다.

이 책에 싣기 위해 ‘겨울의 왕’을 개정하면서 나는 그러한 부당함을 조금이나마 수정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모든 게센인들을 칭하는 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반면에 특정한 남성 칭호들, 왕이라든가 주군 같은 남성형 명칭은 지칭되는 인물들의 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남겨두었다.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일부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공평한 일이다. 등장인물이 양성이라는 사실은 이 글과 별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대명사가 바뀜으로써 부모와 자식 간의 중심적이고 역설적인 관계가 역오이디프스 방식(다른 판본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으리라)이 아닌, 더 낯설고 더 모호한 무언가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확실한 것은 내 무의식은 이러한 사실을 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내가 깨닫기 훨씬 전부터 게센인들에 대해 알았다는 점이다. 무의식은 늘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겨울의 왕’, 1975, 시공사: 2004. 중에서

민노: 아무튼, 한글에서도 그/그녀의 표현이 있잖아요. 김동인이 그녀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고도 하고요. 르 륀의 사례도 그렇고, 문학작품에서 ‘그와 그녀’를 성별에 따라 구별해야 된다고 보세요. 아니면, 가급적 ‘그’로 통일해야 된다고 보세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캡콜드: 저는 작가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그녀,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 겁니까?

민노: ‘그녀’라는 표현을 좀 지양해야 된다. 가급적 쓰지 말자는 분들도 있잖아요.

“이 선생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그녀’나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원래 우리말이 아니라는 게 이유다. ‘그녀’는 일본말 ‘가노조’(かのじょ·彼女)를 그대로 직역한 말이다. 문인 김동인이 신문학 초창기인 1919년경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노조는 그 사내의 계집이란 뜻이다. 말의 됨됨이가 남녀 평등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종이라는 성차별적 의식이 들어 있다. 그런 말을 써서야 되겠나.” 이 선생은 “말과 글이 곧 정신”이라고 했다.”

세계일보, [나의삶 나의길] 25년째 빨간펜 들고 ‘쫙쫙’…매일 ‘언어 수술’하는 구순의 국어학자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2018. 1. 6
김동인 (1900년 평양 ~ 1951년 서울)

캡콜드: 그럼요. 그분들은 그렇게 쓰시면 되고, 그걸 공감하는 분들이 함께 그리 하시면 되는 거고요. 반면 만약에 성별을 정확하게 하며 당대 사람들이 흔히 ‘그녀’라고 할 때 이해하는 그 느낌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녀’라고 쓰면 되는 거죠. 아니면 그 여성이라든지 다른 단어로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고. 이런 부분은 실제로 무언가 평등의 어떤 결과를 앞당기지는 않으면서도 그 과정에서 피로해지기만 하는, 좀 비생산적인 논쟁이라고 봐요.

민노: 비생산적이다?

캡콜드: 어떤 분들한테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당연한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거죠.

민노: 음, 저는 제 개인 얘기를 해볼게요. 개인적으로는 이를테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예전에는 그, 그녀를 구별해서 썼거든요. 모두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사용했죠. 거기에 일말의 어떤 억압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데 글을 쓸 때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얘기할 때도 그렇고 ‘그녀라고 써도 되나?’는 억압(?)을 수시로 느끼거든요. 지상파나 혹은 공적인 미디어에서 내부적인 어떤 자율적인 논의를 통해서 가급적이면 ‘그녀’라는 표현은 쓰지 말자 이런 논의가 있을 수도 있고, 저처럼 개인 차원에서도 ‘그녀라는 표현은 차별적인가’라고 억압을 느낄 수도 있는데, 억압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보시는 거예요? 조언을 주신다면요.

캡콜드: 글을 쓰거나 말할 때 그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에 관해서 계속 스트레스받고, 압력 받고 하는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 전제 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라고 굳이 써야할 필요가 있다 하면 쓰는 거고요. 다른 방식으로 간단히 대체할 수 있고, 그걸로 다른 피곤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초점을 좀 다르게 맞췄으면 좋겠어요. 개별 단어를 써야 하는지 안 써야 되는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원래 전하고자 하는 바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해질 수 있을지.

민노: ‘그녀’에 관해서 좀 더 말씀을 드리면 저는 ‘그녀’라는 표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미학적인 느낌이랄까 어감이 제가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성애자 남성의 어떤 다수적인 지배적인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더 억압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그녀’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어감, 느낌이 나쁘지 않고 좋을 때가 많거든요.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라는 거죠.

캡콜드: 말씀처럼 당장 온갖 기존 시, 노래에 ‘그녀’라는 표현이 많잖아요. ‘그녀를 만나기 100m 전’ 이런 노래도 있고요.

민노: 그렇죠.

매번 새롭게 고민할 수밖에… 혐오와 숭배를 넘어서

캡콜드: 그런 식으로 그때 그 단어를 썼기 때문에 전해지는 어떤 감정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그 단어를 쓰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 내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건 매번 새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미 있는 걸 고친다 어쩐다 할 거는 아니고, 지금 새로 뭔가를 할 때 지금 상황에 대한 적절함의 정도죠.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반 투르게네프, 올더스 헉슬리, 토머스 만 (위쪽 시계방향으로, 퍼블릭 도메인)

민노: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에 관한 편견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토요일]이나 토머스 만의 [키 작은 프리더만 씨] 혹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 [첫사랑]을 봐도… ‘토요일’ 같은 경우엔 여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열등감에 빠진 남성이 등장하면서 좀 우스꽝스럽게도 묘사되고, 창녀에 관해선 미녀에 관한 공포와는 또 다른 관습적 혐오를 드러내고 있죠. 또, 토마스만의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인데, 여기서도 여성 혐오적인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거든요. 물론 이걸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여성 혐오라고 해석하는 건 부당하겠지만요. [첫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소년의 순수한 짝사랑이 파괴되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여성에 관해 편견을 가지기 딱 좋은 작품인데요. 한편, [베니스의 상인] 같은 경우에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당시의 어떤 자연스러운 어떤 사회적인 분위기로서 당연하게 반영되어 있고요. 이런 작품들을 우리가 고전으로서 교육할 때 어떤 관점으로 교육해야 할까요?

캡콜드: 왜 그 작품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려주고, 그 당시의 이런저런 문화적 맥락 때문에 지금 보기에는 문제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이미 과거의 맥락들을 충분히 알고 충분히 정리를 했으니까 고전으로 간주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것까지 같이 가르치면 됩니다.

민노: 지금 제가 예시한 작품들을 보면요. 지금 현재 기준에서는 굉장히 그 인식의 수준이 미흡하잖아요. 뭐랄까, 차별적이고, 공격적이기도 하고요. 이런 그때와 지금의 사회적 인식 차이로 인해 이런 작품에 관한 평가가 적극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보세요. 아니면 그거는 여전히 지엽적이고, 시대적인 보정이 필요하다고 보세요.

캡콜드: 고전을 평가할 때는 두 가지를 피해야 된다고 봐요. 첫 번째는 이런저런 부분에서 지금 기준에서 볼 때 인권적으로 미흡하다, 그러니까 이거는 고전이 아니라 ‘빻은(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 작품 등을 일컫는 멸칭적 표현. 편집자) 물건’이다.

민노: 쓰레기다… 그렇죠.

캡콜드: 두 번째는 이건 고전이고 훌륭한 작품이니까 그런 문제(현재의 인권에 관한 인식 수준에서 보기엔 반인권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것)는 사소한 것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것. 그 두 가지를 전부 다 피해야 돼요.

민노: 두 가지 모두 피해라?

캡콜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석했을 테니 더욱 그 맥락을 풍부하게 전해야 하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고전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후대에 있어서는 이런 이런 부분을 더 개선해 나갔다. 그 두 가지를 같이 얘기를 해야 되는 거죠. 이건 그냥 쓰레기다, 혹은 신성불가침의 무슨 성물이다 하는 두 가지 극단은 모두 피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민노: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캡콜드: 숭배하거나 혐오하거나 그 두 가지 중 선택하고 싶어 하는 거고, 그런 충동을 피해야 한다는 말이죠.

민노: 아! 맞습니다.

캡콜드: 그런데, 그렇게 일일이 따져가면서 파악하는 건 우선 좀 피곤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죠.

민노: (….)

05. PC 가짜 논쟁의 종착점: 답은 작품에 있다

디즈니 실사판 ‘인어공주'(2023)를 둘러싼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와 작품의 원전성에 관한 논란은 앞선 글에서 정리한 것처럼 ‘가짜 논쟁’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버전의 ‘인어공주'(1989)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라는 원전에 대한 하나의 해석판이었죠.

물론 원전은 그 자체로 불가침의 성물은 아닙니다. 좋은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항상 ‘당대의 관객’과 함께 숨쉬고 대화합니다. 원전을 비판하는 것은 언제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원전을 해석판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판사의 ‘검열’에 의해 작품의 표현이 수정되고 심지어는 삭제된 로알드 달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해석’한다는 것, 원전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롯한 급진주의 운동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옳든 그르듯 ‘곳간에서 진보난다’는 시혜적 경향성과 반동성의 본질에 관해 캡콜드 님은 지적했고, 급진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 ‘신나면 망’하는 상황, 그리고 그런 관념적 논의 뒤에 여전히 소홀하게 취급받는 현장 노동의 문제, 실질적인 평등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인어공주로 시작해 레디컬 페미니즘과 로알드 달을 경유해 도달한 마지막 정거장입니다. 그 대화를 정리합니다.


[피지컬: 100] (넷플릭스, 2023), [나는 솔로] (ENA, SBS 플러스, 2021)

한국 예능의 ‘묘한 한국적 균형감각’

민노: 예능을 보면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잖아요. 미팅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고, 육체적인 경쟁에 드라마틱한 서사를 배합한 [피지컬: 100]이나 그 유사의 프로그램들도 많아지고 있고요. 마침 오늘 러닝맨이라는 예능을 잠깐 봤는데, ‘나는 솔로’를 패러디하고 있더라고요.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캡콜드: 네. 그런데 한국 예능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려 하는 지점도 있어서, 사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어떤 교훈적인 면모를 잃지 않으려 해요. 아무래도 그간 한국 방송의 심의 체계와 규범 같은 게 워낙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서 [피지컬: 100]의 경우만 하더라도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한국적인 균형감각이 있었죠. 맨몸의 무한 경쟁으로 그려냈는데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 그러니까 상호 존중을 굉장히 강조해요.

민노: 맞아요. “리스펙”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하죠.

캡콜드: 어느 정도 자기 분야에서의 개가를 이룬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지만 존중과 존경을 보내는 것을 일종의 사회적인 미덕으로 바탕에 깐단 말이죠. 그 점이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칭찬을 받았고요.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그 욕망을 어떻게 소화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도덕적인 지향점까지도 같이 보여주는 식이 균형인데, 나름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봐요.

민노: ‘나는 SOLO’는 좀 보셨어요?

캡콜드: 그런 연애 프로들도 앞서 말한 식으로 약간 도덕적인 설계를 하죠. 너무 이기적이거나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성공을 잘 못한다든지, 묘하게 도덕적인 메시지를 여전히 계속 깔고 있죠.

PC 때문에 영화가 재미 없잖아!? (아닌데!)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인어공주] (…중략…) 전문가 담론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문화예술 생산자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로 논의되었던 반면, 대중 담론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치부된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 비판을 정당화하는 기제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팬들에 대한 기만, 역차별 담론 등이 동원되었으며 그 논리적 귀결은 원작 근본주의와 예술 지상주의이다.”

한송희, 이효민,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2020. 5.

캡콜드: 한국에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얘기가 나왔던 게, 헐리우드가 PC(정치적 올바름) 챙기느라, PC에 빠져서, PC의 억압 때문에 영화들이 재미 없어졌다. 그래서 망한다. 그런 식으로 많이 비판하고 있잖아요.

민노: 네, 그랬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궁금하네요.

PC(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영화가 재미 없어졌다고! (정말???)

캡콜드: 선후 관계가 사실은 잘못된 게, 많은 경우는 영화를 잘 못 만들어 놓고는, 어떤 PC적인 발상으로 ‘면피’를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인종적 다양성이나 성적 평등을 챙기고 재미가 없는 영화들 같은 경우는, 그런 것을 챙기느라 영화가 재미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재미없는 영화를 그나마 그런 식으로 면피하려고 하다가 역부족이 드러난 거죠.

민노: 원래 재미 없는 영화를 PC로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책임을 면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캡콜드: 보통 그런 영화들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캐릭터들이 너무 단순화되었거나 캐릭터들이 겪는 경험이나 강점, 약점 그런 것들이 제대로 조율이 안 되어 있어서 내용이 망한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선진적으로 인종과 성별을 잘 배치했다라는 식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못 만든 영화는 대체로 훨씬 더 간단하게 못 만든 이유가 있는 거지, 무슨 거대한 보이지 않는 압력을 챙기느라 못 만들고 그렇지 않습니다.

민노: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났는데 영화든 드라마든 유색 인종이 한 명 이상인지 아니면 일정한 비율 이상으로 등장을 해야 한다는 그런 이런 게 법이나 스튜디오 내부의 자율적인 어떤 내부 규율이 있었나요?

캡콜드: 그런 게 도시 전설이에요.

민노: 없어요, 그런 거?

캡콜드: 실제론 없어요. 그런 게 약간이나마 규약화된 것이라면, 몇 년 전에 미국 아카데미상이 너무 백인 위주라고 비판이 크게 있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으로 작품을 올리려면 일정 인종 비율을 캐스트나 스태프 안에서 확보해야 된다는 식으로 규정을 만든 게 있어요. 이 규정 자체는 굉장히 경직되고 난감한 측면이 있는데, 그 전에 조문화된 적이 없어서죠. 개별 프로덕션에 따라서 나름의 숨겨진 내규가 있는 데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방향성 자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될 수는 없었다고 보고요.

우리가 이렇게 세심한 신경을 쓴다라는 너스레를 떨기 위해서 불필요한데도 굳이 비백인이라든지 여성이라든지 끼워 파는 그런 경우들이야 당연히 특히 80년대 부터는 좀 있었는데, 작품과 상관 없이 불필요한 데에 소수 인종 끼워넣어서 오히려 끼워넣어진 소수 인종 그룹에게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그런 ‘소수 인종 끼워넣기’ 때문에 영화를 망쳤다고 할 수는 없죠.

이터널스 (월트디즈니컴퍼니, 마블스튜디오, 클로이 자오, 2021)

민노: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실망했던 영화 중에 [이터널스]라고, 마동석이 출연한 영화 있잖아요. 예로 들어서 설명하기 적당할 것 같아서요. [이터널스] 어떻게 보셨어요?

캡콜드: 흑인 인어 공주는 추억 짓밟기인데 마동석이 길가메시인 건 나라의 자랑이에요? 그건 너무 모순이죠.

마동석이 연기한 길가메시? 길가메시는 누구?

영화 ‘이터널스’ 속에서 길가메시는 신화 속 인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신화의 모티브가 된 ‘가상의 실존인물’로 그려집니다. 즉, 영화에서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 침공한 데비안츠를 주먹으로 제압하면서 등장하는데, 문명이 발전한 후에도 다른 이터널 멤버들과 함께 데비안츠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그래서 길가메시를 찬양하는 노래(= 길가메시 서사시)가 만들어졌다는 게 영화 속 설정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 길가메시 서사시는 단순한 찬양의 노래는 아닙니다. 길가메시라는 영웅의 의미와 길가메시 서사시의 의미에 관해서는 아래 정인화와 이해인의 글을 (가볍게) 참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수메르인에 의해 발전된 전설과 신화를 토대로 해서 바빌로니아인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시 중 하나인 [길가메시]를 저술했다. 규모와 힘에 있어 그리스의 [일라아드], [오디세이]에 필적하는 이 장편 서사시는 수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여러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이다. 이 서사시의 영웅인 길가메시는 숱한 모험을 치른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 지역. 편집자)의 왕이었다. 그 중 한 이야기에서 그는, 신들이 홍수로 세계를 파멸시키려고 했을 때 살아 남은 한 노인과 그의 아내로부터 불사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다. 이 이야기의 많은 요소들은 놀랍게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와 비슷한데 그 가운데는 그 부부가 방주를 탕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바빌로니아의 영웅 길가메시는 노부부로부터 체념만을 배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자들만 보모하며, 인간은 신의 결정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길가메시는 노부부로부터 젊음을 되찾게 해 준다는 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후 그는 천신만고 끝에 바다 밑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잠든 사이에 그만 뱀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리고 만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뱀이 해마다 허물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이런 연유 대문이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드디어 자신이 노쇠와 죽음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사시는 체념 가운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남긴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생명은 자신들이 가졌다.”

정인화, 『길가메시』와『걸리버 여행기』를 통해서 본 인간의 삶과 죽음, 관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수천년 수백년 전에 쓰여졌지만, 시간과 공간과 민족을 초월하여 거듭 읽히고 있는 고전문학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대의 서사시는 어느 개인의 창작품이기보다는 그 민족 전체의 체험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이야기다. 12개의 점토판으로 구성된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와 24권으로 구성된 그리스의 [오딧세이]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단순히 산화적인 요소를 띠고 있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무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오딧세이에 비하면 길가메시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비교적 어둡고, 침울한 감이 있는 듯하고, 또 저자가 속해 있는 그 시대와 민족의 특성 내지 차이점들이 많이 발견될 수 있겠지만, 두 주인공들이 모두 ‘길’ 위의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합일접에서 필자는 비록 단편적으로나마 길가메시와 오딧세우스라는 인격을 통하여 표현된 인간의 특성을 몇 가지 측면에서 주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해인, 길가메시 서사시와 오딧세이 서사시에 나타난 길 위에서의 인간,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1993.

민노: 영화 자체로는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너무 재미가 없던데 말이죠.

캡콜드: 영화 자체로는 망했죠. 그런데 그건 전형적으로 영화 자체를 못 만들었기 때문에 망한 거고, 그저 영화 속에 다양한 인종이 있었을 뿐인 거죠. 영화 자체가 재미 없어진 문제는,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던 어떤 정서나 감성과, 마블이라는 회사가 내준 숙제가 사실은 전혀 안 맞아떨어진 거죠.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2020)

클로이 자오 감독은 전작 [노매드랜드] (2020)을 보면 인생이 반영된 듯한 거대한 풍경에서 고즈넉하게 삶의 편린들을 돌아보고,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 살아 숨쉬는 그런 식의 미학을 보여줘서 아주 큰 칭찬을 받았죠. 자오 감독을 기용할 때 ‘이터널스’ 이야기에 그런 거를 담아내라고 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터널스’ 자체가 지구의 역사를 함께 살아왔던 초인들이,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현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그런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마블이 요구하는 내용으로는 그 초인들이 치고받고 싸워야 하고, 다른 마블 영화들을 위해 떡밥도 자꾸 던져줘야 해요. 그런데 이제 영겁의 삶을 잘 정리한다는 내용과 앞으로의 큰 싸움을 대비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상충되죠. 감독의 장점과 스튜디오가 원하는 것이 부딪히면 근본적으로 재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은 등장배우의 인종이 다양하다고 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죠.

민노: 여담이지만, 저는 마동석 캐릭터 이름이 길가메시인 줄도 몰랐어요. 다른 캐릭터들은 모르겠지만 길가메시라고 하면 인류 최초의 서사시 속 영웅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영화 속에서는 무슨 순둥이 엄마 같은 느낌으로 묘사가 된단 말이죠. 되게 따뜻하고 정이 많은 그런 인물로. 감독이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는지 의심스러운 설정인데 말이죠.

캡콜드: 그런데 그건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어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팬심이 잘못 발휘된 거죠. 마동석이 국제적으로 확실하게 뜬 것은 사실 [부산행]이었거든요.

민노: 그렇죠.

배우 마동석의 이율배반적 이미지의 매력(우락부락+순둥이)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부산행] (연상호, 2016)

캡콜드: 엄청난 떡대에 굉장한 완력을 가지고 있는데, 정작 속마음은 부드럽고 곰탱이처럼 굉장히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엄마스러운” 캐릭터. 마동석은 기본적으로 그런 캐릭터로 어느 정도 고정 캐스팅이 되는 거죠. 인종적 배치보다는, 그냥 마동석 배치입니다.

PC라는 변명 vs. PC 음모론: 이유는 작품 안에 있다

민노: 오늘 우리가 나눈 얘기들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는 말씀이 있다면요.

캡콜드: 우선 PC라는 것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요. 그런 인식은 과대평가고, 원래 재미 없게 만들어진 완성도 낮은 작품에 대한 변명으로 오히려 활용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PC의 전투적, 적대적 자세가 거슬린다면, 그것은 급진적인 운동들이 어느 정도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기적 장점이자 장기적 한계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즘이나 인종 운동 그런 몇 가지 경우에 한정되는 유별난 문제가 아니라요.

민노: 독자와 관객들이 어떤 태도로 수용하면 좋겠다, 조언을 좀 더 주신다면요.

캡콜드: 여러분이 보기에 재미가 없고 말이 안 된다 하는 건 대체로 작품 안에서 설명 가능합니다. 자꾸 다른 이유를 가져와서 어떤 대단한 산업적인 음모론에 짜맞추지 마시구요. 만든 이들이 무슨 PC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유는 작품 안에 이미 있습니다.

민노: 정말 끝으로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나 책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테마와 관련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3 (디즈니, 마블스튜디오, 제임스 건, 2023)

캡콜드: 최근에 ‘가오갤3’을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민노: 아! 가오갤, 팬이 많죠.

캡콜드: 그건 정말이지 사람들이 PC가 이래서 잘못됐다라고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재미있게 뽑았거든요.

민노: 그렇죠. 그걸 풍자하고 있죠.

캡콜드: 작품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메시지가 그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까지 존중하자라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더욱 이상한 것들, 더욱 바깥에 있는 것들, 그런 것도 다 같이 존중하자. 사람들에게 비난받곤 하는 PC주의의 대폭발, 끝판왕 같은 내용이거든요.

캡콜드: 마지막에는 심지어 사람들만 데리고 오자 했는데 동물들까지 다 데리고 옵니다.


캡콜드: 사람들이 PC가 이래서 문제다라고 하는 모든 거를 다 넣고도 오히려 재밌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주제에 오히려 가장 부합하는 그런 영화죠.

민노: 그러네요. 아주 적절하네요, 진짜. PC의 억압적인 속성도 풍자를 통해 해체하면서 그 이상의 포용성과 호혜성을 이야기하는 그런 작품이라서요.

캡콜드: 어떻게 보면 풍자도, 반어법도 아니라 그냥 아주 곧이곧대로 가득 넣는 거죠.

민노: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여담 1: 왜 지구 입장에서 생각하죠?

민노: 다음 대화 주제는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2011)로 하면 하면 어떨까요? 지금 기준으로는 꽤 오래된 책이기도 하지만 많이 사람이 읽은 책이기도 하고, 저 개인적으로는 기대 만큼은 아니었지만, 대중적으로는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은 들거든요.

‘사피엔스’의 전언 중 하나로 저는 개인적으로 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간이 지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다양한 동식물을 파괴하는 종이라는 거. 정말 뭐랄까요. 히틀러 저리 가라할 만큼 위험한 종이라는 거잖아요. 그 점에 관해 한번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지구 입장에서는) 인간이 병균이야”라는 희대의 대사(!)를 남기는 엠마 러셀 박사(베라 파미가 분, 위쪽)
레디컬 생태근본주의(?) 군인으로 등장해 엠마 박사와 함께 타이탄 해방작전(?)을 이끄는 앨런 조나(찰스 댄스 분, 아래 사진).
출처: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워너브라더스, 마이클 도허티, 2019)

이를테면 저는 영화 [고질라]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영화 ‘고질라’ 시리즈 중에서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2019)를 보면요. 극 중 엠마 러셀 박사와 레디컬 생태주의(?) 군인이 있잖아요. 지구를 위해서 ‘병균 같은’ 인간 개체를 줄이기 위해 타이탄들을 깨어나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까지 과격하게 헌신할까. 저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 궁금하더구먼요. 이런 소재라면 캡콜드 님이야말로 깊이 있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캡콜드: 물론 그런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죠. 그런데 저는 그런 식의 논지를 볼 때마다 항상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질문이 있어요. ‘왜 우리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가.’ 애초에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거든요.

민노: 인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캡콜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고, 그리고 그 이상을 애초에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태계와 여러 가지 종 다양성이 필요해서, 그 한도 안에서 챙기려는 거죠.

민노: 이건 좀 논외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 (1980, 사이언스북스: 2006)를 쓰면서 인간이 지구 자체를 대변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그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제호로 사용한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7, 사이언스북스: 2001)이라는 책도 쓰고요. 우주(코스모스)의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약함, 겸손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하는데요.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을 부르는 명칭. 태양 반사광 속에 있는, 파랑색 동그라미 속 희미한 점이 지구다. 퍼블릭 도메인.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노예제도의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별 세계의 비밀을 캔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몽테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던진 힐문이라고 한다.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 세상의 천체들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 없는 한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690년경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구석에서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제13장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1980,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6.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7, 사이언스북스: 2001

캡콜드: 인간은 이렇게 작고 미약한 존재니까 겸손하자, 그런 메시지는 딱히 문제가 없죠.인간은 이렇게 티끌 같이 작은 존재니까 필요가 없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거죠.

민노: 그런데 인간이 인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도 하나의 종에 불과하고 진화의 연속성 상에 있는 우연적인 존재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로 자신을 착각해서 많은 것들을 파괴한 거는 맞잖아요.

캡콜드: 그럼요. 그런데 약간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게,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불안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거죠.

민노: 이 테마도 나중에 한번 얘기를 해보시죠.

캡콜드: 네.

여담 2: 무인도 책 한 권

민노: 이제 정말 정말 끝으로. 캡콜드 님 무인도에 딱 책 한 권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 가실까요?

캡콜드: 한 권을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실용적인 것을 가져가야죠. 물리학 교본이라든지.

민노: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법’ 이런 책은 빼고요. 그런 취지의 질문은 아니잖아요. ㅎㅎ.

캡콜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문명성, 인간성의 핵심을 어느 정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반복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그런 질문이잖아요. 그 점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책은 사전이라고 봐요.

민노: 사전이요?

캡콜드: 네, 국어사전이라든지 영한사전. 어떤 말이 서로 다른 말들과 연결돼 있는지를 찾다보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서로 소통하며 의미를 교환하고자 했었는지가 보입니다. 그 모든 게 담겨 있는 게 결국은 사전이니까요.

민노: 독특한 답변이네요. 사전이라고 말씀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캡콜드: 인간 문명, 인간 사회, 인간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기억을 유지하고 싶을 때 뭘 필요로 하느냐 하면은 저는 결국은 언어인 것 같아요.

민노: 그러게요.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 하다보니 한도 끝도 없네요.

캡콜드: 이해하시고요. 다음 회의로 넘깁시다.

민노: 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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