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 인어공주, 디즈니의 해석본은 어떻게 추억의 원본이 되었는가
- 곳간에서 진보난다: 정치적 올바름과 반(反)페미니즘 그리고 성평등은커녕
- 신나면 망한다: ‘미제 똥물’ 전설에서 ‘밥.꽃.양.’의 현실까지
- 숭배와 혐오의 이분법을 넘어서: 로알드 달, 르 귄, 그/그녀
- PC 가짜 논쟁의 종착지: 답은 작품에 있다 (끝)

인어공주, PC 그리고 페미니즘
신나면 망한다
캡:콜드케이스 01-03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영화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루했고 그래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때 나는 카메라의 시선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을 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의 남성 노동자들은 못 생기고 거칠고 비열했다. 혐오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얄팍하고 비루한 현실을 이 영화는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3년 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이 해묵은 영화에 열광하는지도 알게 됐다. 처음 보았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나중에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나는 이 영화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영화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때는 1998년 여름이다. 국회에서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파견법이 제정됐다. 이 영화는 그해 여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정환, 우리가 ‘밥꽃양’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2005. 12.

2013년, 김태흠(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이 사람들(국회 청소노동자) 무기계약직되면 노동3권 보장된다. 툭 하면 파업할 터인데 어떻게 관리하려고 그러냐”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국회 청소노동자는 2016년 직접고용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고, 2019년 정년을 사실상 68세까지 연장무기계약직으로 65세까지, 이후 3년간은 기간제로했습니다. 김태흠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김태흠 자신도, 그 망언에도 불구하고, 도지사가 됐죠.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앞선 글에서 살핀 것처럼, 여성의 노동은 깊은 어둠 속에 남아 있습니다. 고용률은 남성보다 20%가 낮고남성74% vs. 여성 53%, 임금은 월 평균 135만 원을 덜 받습니다남성 383만 vs. 여성 248만. 반페미니즘 선동의 네거티브(흑색선전)는 ‘지금은 여성상위가 됐고, 왜 우리가 여성을 봐줘야 하느냐?’는 뜬구름 잡는 허수아비 때리기였지만,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막연하고 근거 없는 선동이 효과적으로 먹혔을까요. 콜라 마시던 후배 보며 ‘미제 똥물’ 타령하던 운동권 선배의 꼰대질과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라는 주장은 서로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닮아 있을까요. 정리해고가 도입된 1988년 그해 현대차 노조 투쟁의 희생양이 된 ‘밥하는 아줌마’ 노동자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미제 똥물’ 전설… 반동에 먹이감 주는 급진주의
민노: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네거티브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면,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전략적인 아쉬움 같은 건 없을까요. 자신의 아군으로 포섭할만한 세력에게조차도 배타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싶기도 해서요. 전략적인 어떤 경직성이랄까요. 공격성이랄까요. 그런 측면은 어떻게 보세요?

캡콜드: 그럼요. 그런데 그게 페미니즘만의 무슨 독특한 특성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소위 말한 급진 운동을 추구할 때 항상 있었던 게 예를 들어 예전에 대학 문화가 IMF 구제금융(1997년)를 기점으로 완전히 세속화되기 전, 운동권 중심 대학문화, 민중문화 그런 게 남아있는 영역에서는 노동이나 사회적인 깨달음 등이 훨씬 더 전투적으로 추구가 되었단 말이죠. 그런 전설들이 있잖아요. 신입생이 콜라를 마셨더니 한 복학생 선배가 와서 ‘너는 왜 미제의 똥물을 마시고 있냐’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
그런게 지금 언급하신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했던 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거란 말이죠. 이 패턴은 인종이든 계급이든 다른 나라, 다른 맥락의 급진운동에서도 비슷하게 반복이 되고요. 운동을 강력하고 공격적으로 추구할 때 생기는 비슷한 패턴이예요.
앞서 말씀드렸듯 초반에 돌파할 때는 그렇게 하더라도, 그다음에 빨리 여러 다른 그룹들을 연대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되는데 그 타이밍을 놓치고 계속 계속 공격적으로만 나가면, ‘반동 앞에서 오히려 정체’가 되는 거죠.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 라는 보장은 없다
민노: 좀 더 질문을 좁혀보면, 지금 말씀하신 급진 진영에 있는 분들이 아니고, 제도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분들, 언론으로부터 일종의 대표성을 획득해 발언을 대리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TV 페미니즘 관련 토론에 패널로 초대받는 분들이라거나.
캡콜드: 좀 더 성공해서 발언권을 얻었다는 거지, 여전히 급진의 방식, 즉 어떻게든 이슈 파이팅을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마인드에 계속 잡혀 있는 거죠.
민노: 개인적으로 캡콜드 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라는 명제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캡콜드: 택도 없는 소리죠. 피해자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목소리, 귀중한 진술이에요. 그 진술이 실제 증거가 되려면 다른 것들과 함께 합쳐져서 고려되어야겠죠. 너무나 당연한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 나가는 과정인데, 그 속에 굉장히 중요한 ‘조각’인 거죠.
민노: 곧바로 증거 수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캡콜드: 중요한 부품이라고 해서, 부품이 전체는 아닌 거잖아요. 증언으로 얘기가 나왔으나 그게 알고 보니까 전혀 다른 엉뚱한 맥락이었다라든지, 증언 자체가 사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던 그런 경우도 발생할 수 있거든요. 반대로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증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믿으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중요한 부품이고, 그 부품을 다른 부품과 합쳤을 때 어떤 진실이 드러나느냐는 과정이죠.
‘신나면 망한다’ … 하지만 반걸음식 진보를 이어가는 사람들
민노: 그렇다면 그런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다’와 같은 주장이 소위 주류 매체 기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된 배경이랄까요. 그냥 개인의 판단 미스, 한 개인의 우연한 발언이나 태도에 불과하다고 보세요, 아니면 일련의 흐름을 상징하거나 대표한다고 보세요?
캡콜드: 당연히 흐름이죠. 그러니까 제가 즐겨 쓰는 격언 중 하나가, ‘신나면 망한다’예요. 너무 신나하다 보면 그 자체가 권력의 쾌감을 주거든요. 급진적으로 공격적으로 나서는 게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옳은 것처럼 여겨지게 되면,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나가는 거죠.
민노: 그렇다면 그런 빌미들 때문에 강력한 반동을 만난 현재의 페미니즘은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평가해야 할까요.
캡콜드: 음… 급진적으로 이슈화하던 흐름은 확실히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요. 그런데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구분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여전히 페미니즘에서 좀 더 천천히 진전할 수밖에 없는 어렵고 중요한 부분을 맡으신 분들은 계속 계시니까요. 누가 알아주지 않고, 누가 그렇게 스타로 만들어주지 않아도 계속 노력하고 계시거든요.
민노: 이를테면.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캡콜드: 단체로 치자면 모든 노조에서 여성 분회들이 다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요. 굳이 스타성 비슷하게 따지자면 김진숙 위원이라든지, 노동계의 얼굴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이야기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들은 계속 계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꾸준히 반걸음식의 진보를 계속 이어나가고 계시는 분들이죠.

밥.꽃.양.
민노: 한국 노동계, 가령 민노총 같은 단체에서 여성 인권이나 여성 노동자의 어떤 위상이랄까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캡콜드: [밥.꽃.양.] (임인애, 2001)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어요.
98년 여름, 현대자동차 노조식당 아줌마들은 ‘투쟁의 꽃’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나서지만, 노사 협상이 타결되면서 전원 정리해고 대상이 된다. 노조위원장은 노조가 식당운영권을 가지고 전원 고용승계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녀들은 경기가 회복되면 복직시켜 준다는 노사합의에 기대를 걸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노조의 하청노동자가 된 지금, 회사의 상황이 좋아졌음에도 원직복직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고, 노조 또한 복직투쟁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다.”
다음영화, ‘밥.꽃.양.’ 소개
캡콜드: 대형 노조의 쟁의 안에서 계속 주변화됐었던 여성 노동자들, 특히 ‘밥하는 아줌마’, 그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 안에서도 계속 오히려 주변화됐던 거죠. 그러니까 똑같은 노동자고, 오히려 더 심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성 노동자들의 강한 푸시에 노동권이 더 뒤로 밀려나고… 그런 모순을 그려냈던 다큐멘터리인데요.
민노: (….)
캡콜드: 그게 이미 한 20년 전 얘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문제는 계속 있어왔고, 계속 제기가 됐는데, 아직도 충분히 표면화되지 못하고 있는 구석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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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케이스
캡콜드(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김낙호 교수) 님은 만화 덕후이자 미디어 전문가로 연구 분야는 언론학입니다. 캡콜드 님께 사회적 논란과 지적 이슈에 관해 묻고, 그 답변을 정리합니다. 첫 번째 케이스는 인어공주와 PC(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페미니즘에 관한 이슈입니다. 가독성을 고려해 나눠서 올립니다. 캡콜드 님과의 대화는 6월 초에 있었고, 이후 계속 보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