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인어공주, PC 그리고 페미니즘

PC 가짜 논쟁의 종착점

캡:콜드케이스 01-05.

디즈니 실사판 ‘인어공주'(2023)를 둘러싼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작품의 원전성에 관한 논란은 앞선 글에서 정리한 것처럼 ‘가짜 논쟁’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버전의 ‘인어공주'(1989)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라는 원전에 대한 하나의 해석판이었죠.

물론 원전은 그 자체로 불가침의 성물은 아닙니다. 좋은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항상 ‘당대의 관객’과 함께 숨쉬고 대화합니다. 원전을 비판하는 것은 언제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원전을 해석판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판사의 ‘검열’에 의해 작품의 표현이 수정되고 심지어는 삭제된 로알드 달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해석’한다는 것, 원전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롯한 급진주의 운동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옳든 그르듯 ‘곳간에서 진보난다’는 시혜적 경향성과 반동성의 본질에 관해 캡콜드 님은 지적했고, 급진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 ‘신나면 망’하는 상황, 그리고 그런 관념적 논의 뒤에 여전히 소홀하게 취급받는 현장 노동의 문제, 실질적인 평등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인어공주로 시작해 레디컬 페미니즘과 로알드 달을 경유해 도달한 마지막 정거장입니다. 그 대화를 정리합니다.


[피지컬: 100] (넷플릭스, 2023), [나는 솔로] (ENA, SBS 플러스, 2021)

한국 예능의 ‘묘한 한국적 균형감각’


민노: 예능을 보면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잖아요. 미팅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고, 육체적인 경쟁에 드라마틱한 서사를 배합한 [피지컬: 100]이나 그 유사의 프로그램들도 많아지고 있고요. 마침 오늘 러닝맨이라는 예능을 잠깐 봤는데, ‘나는 솔로’를 패러디하고 있더라고요.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캡콜드: 네. 그런데 한국 예능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려 하는 지점도 있어서, 사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어떤 교훈적인 면모를 잃지 않으려 해요. 아무래도 그간 한국 방송의 심의 체계와 규범 같은 게 워낙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서 [피지컬: 100]의 경우만 하더라도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한국적인 균형감각이 있었죠. 맨몸의 무한 경쟁으로 그려냈는데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 그러니까 상호 존중을 굉장히 강조해요.

민노: 맞아요. “리스펙”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하죠.

캡콜드: 어느 정도 자기 분야에서의 개가를 이룬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지만 존중과 존경을 보내는 것을 일종의 사회적인 미덕으로 바탕에 깐단 말이죠. 그 점이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칭찬을 받았고요.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그 욕망을 어떻게 소화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도덕적인 지향점까지도 같이 보여주는 식이 균형인데, 나름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봐요.

민노: ‘나는 SOLO’는 좀 보셨어요?

캡콜드: 그런 연애 프로들도 앞서 말한 식으로 약간 도덕적인 설계를 하죠. 너무 이기적이거나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성공을 잘 못한다든지, 묘하게 도덕적인 메시지를 여전히 계속 깔고 있죠.

PC 때문에 영화가 재미 없잖아!? (아닌데!)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인어공주] (…중략…) 전문가 담론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문화예술 생산자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로 논의되었던 반면, 대중 담론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치부된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 비판을 정당화하는 기제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팬들에 대한 기만, 역차별 담론 등이 동원되었으며 그 논리적 귀결은 원작 근본주의와 예술 지상주의이다.”

한송희, 이효민,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2020. 5.

캡콜드: 한국에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얘기가 나왔던 게, 헐리우드가 PC(정치적 올바름) 챙기느라, PC에 빠져서, PC의 억압 때문에 영화들이 재미 없어졌다. 그래서 망한다. 그런 식으로 많이 비판하고 있잖아요.

민노: 네, 그랬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궁금하네요.

PC(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영화가 재미 없어졌다고! (정말???)

캡콜드: 선후 관계가 사실은 잘못된 게, 많은 경우는 영화를 잘 못 만들어 놓고는, 어떤 PC적인 발상으로 ‘면피’를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인종적 다양성이나 성적 평등을 챙기고 재미가 없는 영화들 같은 경우는, 그런 것을 챙기느라 영화가 재미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재미없는 영화를 그나마 그런 식으로 면피하려고 하다가 역부족이 드러난 거죠.

민노: 원래 재미 없는 영화를 PC로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책임을 면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캡콜드: 보통 그런 영화들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캐릭터들이 너무 단순화되었거나 캐릭터들이 겪는 경험이나 강점, 약점 그런 것들이 제대로 조율이 안 되어 있어서 내용이 망한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선진적으로 인종과 성별을 잘 배치했다라는 식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못 만든 영화는 대체로 훨씬 더 간단하게 못 만든 이유가 있는 거지, 무슨 거대한 보이지 않는 압력을 챙기느라 못 만들고 그렇지 않습니다.

민노: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났는데 영화든 드라마든 유색 인종이 한 명 이상인지 아니면 일정한 비율 이상으로 등장을 해야 한다는 그런 이런 게 법이나 스튜디오 내부의 자율적인 어떤 내부 규율이 있었나요?

캡콜드: 그런 게 도시 전설이에요.

민노: 없어요, 그런 거?

캡콜드: 실제론 없어요. 그런 게 약간이나마 규약화된 것이라면, 몇 년 전에 미국 아카데미상이 너무 백인 위주라고 비판이 크게 있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으로 작품을 올리려면 일정 인종 비율을 캐스트나 스태프 안에서 확보해야 된다는 식으로 규정을 만든 게 있어요. 이 규정 자체는 굉장히 경직되고 난감한 측면이 있는데, 그 전에 조문화된 적이 없어서죠. 개별 프로덕션에 따라서 나름의 숨겨진 내규가 있는 데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방향성 자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될 수는 없었다고 보고요.

우리가 이렇게 세심한 신경을 쓴다라는 너스레를 떨기 위해서 불필요한데도 굳이 비백인이라든지 여성이라든지 끼워 파는 그런 경우들이야 당연히 특히 80년대 부터는 좀 있었는데, 작품과 상관 없이 불필요한 데에 소수 인종 끼워넣어서 오히려 끼워넣어진 소수 인종 그룹에게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그런 ‘소수 인종 끼워넣기’ 때문에 영화를 망쳤다고 할 수는 없죠.

이터널스 (월트디즈니컴퍼니, 마블스튜디오, 클로이 자오, 2021)

민노: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실망했던 영화 중에 [이터널스]라고, 마동석이 출연한 영화 있잖아요. 예로 들어서 설명하기 적당할 것 같아서요. [이터널스] 어떻게 보셨어요?

캡콜드: 흑인 인어 공주는 추억 짓밟기인데 마동석이 길가메시인 건 나라의 자랑이에요? 그건 너무 모순이죠.

마동석이 연기한 길가메시? 길가메시는 누구?

영화 ‘이터널스’ 속에서 길가메시는 신화 속 인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신화의 모티브가 된 ‘가상의 실존인물’로 그려집니다. 즉, 영화에서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 침공한 데비안츠를 주먹으로 제압하면서 등장하는데, 문명이 발전한 후에도 다른 이터널 멤버들과 함께 데비안츠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그래서 길가메시를 찬양하는 노래(= 길가메시 서사시)가 만들어졌다는 게 영화 속 설정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 길가메시 서사시는 단순한 찬양의 노래는 아닙니다. 길가메시라는 영웅의 의미와 길가메시 서사시의 의미에 관해서는 아래 정인화와 이해인의 글을 (가볍게) 참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수메르인에 의해 발전된 전설과 신화를 토대로 해서 바빌로니아인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시 중 하나인 [길가메시]를 저술했다. 규모와 힘에 있어 그리스의 [일라아드], [오디세이]에 필적하는 이 장편 서사시는 수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여러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이다. 이 서사시의 영웅인 길가메시는 숱한 모험을 치른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 지역. 편집자)의 왕이었다. 그 중 한 이야기에서 그는, 신들이 홍수로 세계를 파멸시키려고 했을 때 살아 남은 한 노인과 그의 아내로부터 불사의 비밀을 알아내려 한다. 이 이야기의 많은 요소들은 놀랍게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와 비슷한데 그 가운데는 그 부부가 방주를 탕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바빌로니아의 영웅 길가메시는 노부부로부터 체념만을 배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자들만 보모하며, 인간은 신의 결정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길가메시는 노부부로부터 젊음을 되찾게 해 준다는 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후 그는 천신만고 끝에 바다 밑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잠든 사이에 그만 뱀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리고 만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뱀이 해마다 허물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이런 연유 대문이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드디어 자신이 노쇠와 죽음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사시는 체념 가운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남긴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생명은 자신들이 가졌다.”

정인화, 『길가메시』와『걸리버 여행기』를 통해서 본 인간의 삶과 죽음, 관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수천년 수백년 전에 쓰여졌지만, 시간과 공간과 민족을 초월하여 거듭 읽히고 있는 고전문학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대의 서사시는 어느 개인의 창작품이기보다는 그 민족 전체의 체험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이야기다. 12개의 점토판으로 구성된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와 24권으로 구성된 그리스의 [오딧세이]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단순히 산화적인 요소를 띠고 있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무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오딧세이에 비하면 길가메시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비교적 어둡고, 침울한 감이 있는 듯하고, 또 저자가 속해 있는 그 시대와 민족의 특성 내지 차이점들이 많이 발견될 수 있겠지만, 두 주인공들이 모두 ‘길’ 위의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합일접에서 필자는 비록 단편적으로나마 길가메시와 오딧세우스라는 인격을 통하여 표현된 인간의 특성을 몇 가지 측면에서 주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해인, 길가메시 서사시와 오딧세이 서사시에 나타난 길 위에서의 인간,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1993.

민노: 영화 자체로는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너무 재미가 없던데 말이죠.

캡콜드: 영화 자체로는 망했죠. 그런데 그건 전형적으로 영화 자체를 못 만들었기 때문에 망한 거고, 그저 영화 속에 다양한 인종이 있었을 뿐인 거죠. 영화 자체가 재미 없어진 문제는, 감독이 표현하고 싶었던 어떤 정서나 감성과, 마블이라는 회사가 내준 숙제가 사실은 전혀 안 맞아떨어진 거죠.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2020)

클로이 자오 감독은 전작 [노매드랜드] (2020)을 보면 인생이 반영된 듯한 거대한 풍경에서 고즈넉하게 삶의 편린들을 돌아보고,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안에 살아 숨쉬는 그런 식의 미학을 보여줘서 아주 큰 칭찬을 받았죠. 자오 감독을 기용할 때 ‘이터널스’ 이야기에 그런 거를 담아내라고 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터널스’ 자체가 지구의 역사를 함께 살아왔던 초인들이,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현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그런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마블이 요구하는 내용으로는 그 초인들이 치고받고 싸워야 하고, 다른 마블 영화들을 위해 떡밥도 자꾸 던져줘야 해요. 그런데 이제 영겁의 삶을 잘 정리한다는 내용과 앞으로의 큰 싸움을 대비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상충되죠. 감독의 장점과 스튜디오가 원하는 것이 부딪히면 근본적으로 재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은 등장배우의 인종이 다양하다고 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죠.

민노: 여담이지만, 저는 마동석 캐릭터 이름이 길가메시인 줄도 몰랐어요. 다른 캐릭터들은 모르겠지만 길가메시라고 하면 인류 최초의 서사시 속 영웅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영화 속에서는 무슨 순둥이 엄마 같은 느낌으로 묘사가 된단 말이죠. 되게 따뜻하고 정이 많은 그런 인물로. 감독이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는지 의심스러운 설정인데 말이죠.

캡콜드: 그런데 그건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어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팬심이 잘못 발휘된 거죠. 마동석이 국제적으로 확실하게 뜬 것은 사실 [부산행]이었거든요.

민노: 그렇죠.

배우 마동석의 이율배반적 이미지의 매력(우락부락+순둥이)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부산행] (연상호, 2016)

캡콜드: 엄청난 떡대에 굉장한 완력을 가지고 있는데, 정작 속마음은 부드럽고 곰탱이처럼 굉장히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엄마스러운” 캐릭터. 마동석은 기본적으로 그런 캐릭터로 어느 정도 고정 캐스팅이 되는 거죠. 인종적 배치보다는, 그냥 마동석 배치입니다.

PC라는 변명 vs. PC 음모론: 이유는 작품 안에 있다


민노: 오늘 우리가 나눈 얘기들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는 말씀이 있다면요.

캡콜드: 우선 PC라는 것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요. 그런 인식은 과대평가고, 원래 재미 없게 만들어진 완성도 낮은 작품에 대한 변명으로 오히려 활용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PC의 전투적, 적대적 자세가 거슬린다면, 그것은 급진적인 운동들이 어느 정도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기적 장점이자 장기적 한계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즘이나 인종 운동 그런 몇 가지 경우에 한정되는 유별난 문제가 아니라요.

민노: 독자와 관객들이 어떤 태도로 수용하면 좋겠다, 조언을 좀 더 주신다면요.

캡콜드: 여러분이 보기에 재미가 없고 말이 안 된다 하는 건 대체로 작품 안에서 설명 가능합니다. 자꾸 다른 이유를 가져와서 어떤 대단한 산업적인 음모론에 짜맞추지 마시구요. 만든 이들이 무슨 PC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유는 작품 안에 이미 있습니다.

민노: 정말 끝으로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나 책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테마와 관련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3 (디즈니, 마블스튜디오, 제임스 건, 2023)

캡콜드: 최근에 ‘가오갤3’을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민노: 아! 가오갤, 팬이 많죠.

캡콜드: 그건 정말이지 사람들이 PC가 이래서 잘못됐다라고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재미있게 뽑았거든요.

민노: 그렇죠. 그걸 풍자하고 있죠.

캡콜드: 작품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메시지가 그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까지 존중하자라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더욱 이상한 것들, 더욱 바깥에 있는 것들, 그런 것도 다 같이 존중하자. 사람들에게 비난받곤 하는 PC주의의 대폭발, 끝판왕 같은 내용이거든요.


캡콜드: 마지막에는 심지어 사람들만 데리고 오자 했는데 동물들까지 다 데리고 옵니다.


(이어서 읽기)

캡콜드: 사람들이 PC가 이래서 문제다라고 하는 모든 거를 다 넣고도 오히려 재밌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주제에 오히려 가장 부합하는 그런 영화죠.

민노: 그러네요. 아주 적절하네요, 진짜. PC의 억압적인 속성도 풍자를 통해 해체하면서 그 이상의 포용성과 호혜성을 이야기하는 그런 작품이라서요.

캡콜드: 어떻게 보면 풍자도, 반어법도 아니라 그냥 아주 곧이곧대로 가득 넣는 거죠.

민노: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여담: 왜 지구 입장에서 생각하죠?


민노: 다음 대화 주제는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2011)로 하면 하면 어떨까요? 지금 기준으로는 꽤 오래된 책이기도 하지만 많이 사람이 읽은 책이기도 하고, 저 개인적으로는 기대 만큼은 아니었지만, 대중적으로는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은 들거든요.

‘사피엔스’의 전언 중 하나로 저는 개인적으로 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간이 지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다양한 동식물을 파괴하는 종이라는 거. 정말 뭐랄까요. 히틀러 저리 가라할 만큼 위험한 종이라는 거잖아요. 그 점에 관해 한번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지구 입장에서는) 인간이 병균이야”라는 희대의 대사(!)를 남기는 엠마 러셀 박사(베라 파미가 분, 위쪽)
레디컬 생태근본주의(?) 군인으로 등장해 엠마 박사와 함께 타이탄 해방작전(?)을 이끄는 앨런 조나(찰스 댄스 분, 아래 사진).
출처: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워너브라더스, 마이클 도허티, 2019)

이를테면 저는 영화 [고질라]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영화 ‘고질라’ 시리즈 중에서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2019)를 보면요. 극 중 엠마 러셀 박사와 레디컬 생태주의(?) 군인이 있잖아요. 지구를 위해서 ‘병균 같은’ 인간 개체를 줄이기 위해 타이탄들을 깨어나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까지 과격하게 헌신할까. 저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 궁금하더구먼요. 이런 소재라면 캡콜드 님이야말로 깊이 있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캡콜드: 물론 그런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죠. 그런데 저는 그런 식의 논지를 볼 때마다 항상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질문이 있어요. ‘왜 우리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가.’ 애초에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거든요.

민노: 인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캡콜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고, 그리고 그 이상을 애초에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태계와 여러 가지 종 다양성이 필요해서, 그 한도 안에서 챙기려는 거죠.

민노: 이건 좀 논외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 (1980, 사이언스북스: 2006)를 쓰면서 인간이 지구 자체를 대변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그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제호로 사용한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7, 사이언스북스: 2001)이라는 책도 쓰고요. 우주(코스모스)의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약함, 겸손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하는데요.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을 부르는 명칭. 태양 반사광 속에 있는, 파랑색 동그라미 속 희미한 점이 지구다. 퍼블릭 도메인.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노예제도의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별 세계의 비밀을 캔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몽테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던진 힐문이라고 한다.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 세상의 천체들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 없는 한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690년경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구석에서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제13장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1980,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6.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1997, 사이언스북스: 2001

캡콜드: 인간은 이렇게 작고 미약한 존재니까 겸손하자, 그런 메시지는 딱히 문제가 없죠.인간은 이렇게 티끌 같이 작은 존재니까 필요가 없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거죠.

민노: 그런데 인간이 인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도 하나의 종에 불과하고 진화의 연속성 상에 있는 우연적인 존재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로 자신을 착각해서 많은 것들을 파괴한 거는 맞잖아요.

캡콜드: 그럼요. 그런데 약간 관점을 바꿔야 하는 게,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불안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거죠.

민노: 이 테마도 나중에 한번 얘기를 해보시죠.

캡콜드: 네.

여담 2: 무인도 책 한 권


민노: 이제 정말 정말 끝으로. 캡콜드 님 무인도에 딱 책 한 권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 가실까요?

캡콜드: 한 권을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실용적인 것을 가져가야죠. 물리학 교본이라든지.

민노: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법’ 이런 책은 빼고요. 그런 취지의 질문은 아니잖아요. ㅎㅎ.

캡콜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문명성, 인간성의 핵심을 어느 정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반복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그런 질문이잖아요. 그 점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책은 사전이라고 봐요.

민노: 사전이요?

캡콜드: 네, 국어사전이라든지 영한사전. 어떤 말이 서로 다른 말들과 연결돼 있는지를 찾다보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서로 소통하며 의미를 교환하고자 했었는지가 보입니다. 그 모든 게 담겨 있는 게 결국은 사전이니까요.

민노: 독특한 답변이네요. 사전이라고 말씀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캡콜드: 인간 문명, 인간 사회, 인간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기억을 유지하고 싶을 때 뭘 필요로 하느냐 하면은 저는 결국은 언어인 것 같아요.

민노: 그러게요.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 하다보니 한도 끝도 없네요.

캡콜드: 이해하시고요. 다음 회의로 넘깁시다.

민노: 네.

(끝)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