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이대남’의 미로를 ‘게임적 세계관’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11분)
Q. 선생님, ‘이대남’을 알고 싶습니다.
A. 아, 그래요? 이대남은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있죠!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대남’)을 하나의 원리(‘게임적 세계관’)로 설명하는 시도는 매력적이다. 그런 걸 환원주의라고 한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복잡한 가정은 오히려 불필요한 경우도 많다. 14세기 수도사의 이름에서 따온 ‘오컴의 면도날’은 ‘경제성의 원리’라고도 불리는데, 불필요한 가정을 피하고 가장 간단한 설명을 선택하라는 권고다.
환원주의는 때때로 가장 날카로운 해석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또 다양한 현상 이면에 있는 본질을 명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니체는 무려 세계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원리로 ‘권력에의 의지’를 제안했다. ‘이대남’을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의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의심한다. 그런 ‘쉬운 설명’은 복잡한 세계의 질서와 그 질서에 엉켜 있는 소위 ‘이대남’의 실존적 양태를 너무 납작하고 뭉툭하게 대상화하는 건 아닐까.
캡콜드(김낙호 교수)에게 ‘이대남’을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게임적 세계관’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남’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이해하고 나아가 대화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지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0]
이대남과 게임적 세계관:
오류와 인사이트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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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3월 15일(월) 밤에서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오류
우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우선 사회 현상에 관한 설명은 결국 ‘꼭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면도 있다’는 양가적인 경우가 잦다. 그만큼 보이는 현상, 그 이면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첫 번째다.
두 번째, 어떤 두 가지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관련 있어 보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인과관계를 맺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해야 한다.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혹은 연이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관계는 아니어서, 중간에 ‘또 다른 매개’를 거치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시간적∙공간적으로 인접해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속칭 이대남의 화두라는 ‘공정’을 게임에서 배워 현실에 적용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반대 방향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경쟁적인 세계의 질서가 실질적이든 표면적이든 내세우는 ‘공정’이라는 원리를 게임에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환원주의는 하나의 변수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보니 복잡한 변인들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인사이트
‘게임적 세계관’은 세계와 게임 그리고 이대남의 관계를 너무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물론 그런 도식화된 설명, 단순화한 설명 속에 인사이트가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게임 속 법칙과 세계의 질서 사이에 ‘연결점’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두 세계는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상관관계’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컴퓨터 게임보다 훨씬 전부터 있던 놀이터 놀이를 생각해 보자. 딱지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오징어도 했다. ‘호모 루덴스'(1938)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하위징아는, 유희론을 만들며 ‘마법의 원’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현실 세계의 규칙을 일정 부분 반영하지만 결과가 심각하지 않은 별도의 규칙을 따르는 ‘안전한 샌드박스(모래 놀이터)’를 만들어내서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와 게임의 세계다. 그래서 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은 그 놀이에서 얻은 감정과 교훈을 다시 현실 세계에 적용한다. 그런 방향에서 놀이를 가장 확실하게 제도화하고 대중화한 사례가 바로 ‘스포츠’다. 즉, 놀이와 현실은 서로 영향을 받으며 순환하는 세계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 흐름 또한 반영된다. 가령 좀 더 옛날,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다방구'(술래잡기의 일종)와 같은 골목의 놀이는 아주 단순했다. 게임 자체의 규칙이 단순했기 때문에,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하려면 그 놀이의 바깥에서 사회적 규칙과 관계들을 가져와 채웠다.
하지만 현대의 게임은 그 규칙이 훨씬 더 복잡하고 체계적이다. 사용자가 게임 바깥에서 생활과 사회의 규칙으로 그 게임의 빈틈을 채울 여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걸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게임 규칙이 사용자를 지배하며 사용자는 그 게임 규칙에 어떤 의미로는 종속된다.
노오력과 ‘템빨’
게임 속 법칙 중 ‘공정함’은 노력이라는 요소와 연결된다. 내가 뭔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필연성과 예견가능성이 바로 좋은 게임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다. 그게 아이템이든 기술적인 숙련이든 내가 꾸준히 노력하면 대가로서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게 없으면 숙련과 성장의 느낌이 결여되며, 재미가 없어진다. 물론 노력이라는 축과 함께 게임을 지탱하는 다른 한 축은 돈(이른바 ‘템빨’)인데, 이건 노력을 덜 들이고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특혜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많은 온라인 게임은 그 투 트랙을 같이 구현해야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돈이 없어도 매일매일 시간을 들여 노오력하는 유저는 그 노오력의 대가를 받는다. 물론 별다른 노오력 없이 그저 좋은 아이템을 ‘현질’해 승리하는 ‘금수저’ 유저도 있다. 아이템 구입의 매력을 주면서 동시에 노오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
다시 마법의 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런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일부 반영한다. 타고난 ‘제비뽑기'(금수저)를 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노오력을 통해 부와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만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산다.

게임이라는 ‘메타포’
게임이 성립하기 위한 본질적 요소는 최소 두 가지다.
- 어떤 규칙을 통해서 규칙 안에서 성과를 얻는 것. 규칙의 느낌만 주는 것일지언정.
- 현실 세계에서는 직접적 보상을 받지 않는 것. 그게 있으면 일이지 게임이겠는가.
이 두 가지는 게임의 본질이고 대전제다. 그런데 갈수록 ⑴ 규칙 ⑵ 승부 요소만 있다면 그걸 ‘게임’으로 유비하는 경우도 생기곤 해서, 현실 세계의 사안에서 ‘게임의 법칙’ 운운하는 경우가 흔하다. 두 세계의 가장 큰 차는 현실 세계의 직접적 보상(피해) 유무인데도 게임을 삶의 다양한 모습에 관한 비유로 사용하는 건, 현실에서의 이득과 피해를 의식적으로 과소평가하는 비유법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비유다.
현실 세계에서는 직접적 보상(벌칙)을 받지 않는다는 그 원칙을 거꾸로 뒤집어서 재미를 만들어낸 사례가 바로 ‘오징어게임’이다. 우리는 놀이터에서 이겼다거나 졌다고 하지 않고, 죽었다 살았다고 말한다. ‘오징어게임’은 그런 게임과 놀이의 비유가 현실이 되면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 즉, 현실을 게임처럼 사는 지옥에 관해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2030의 게임 vs. 4050의 게임
우선 게임은 워낙 여러 가지 장르가 있다. 2010년에 이스케이피스트 잡지에서 제안한 게임성의 기본 요인으로는 액션-전략, 탐험-갈등 등의 두 축이 있는데, 거기에 경쟁-협력의 축까지 넣고 삼차원 지도를 그리다보면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재미가 가능한지 쉽게 감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좀 범위를 좁혀서, 게임의 ‘사회성’을 이야기할 때는 크게 MMORPG(예: 리니지 계열), 배틀로얄(예: 포트나이트 계열), 이 두 가지가 유형으로서는 지배적이다. 지금의 롤(LOL; 리그 오브 레전드)이 2030에게는 00년대초의 스타크래프트의 위상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사실 약간 고인물 느낌이 있지만. 롤의 게임 규칙과 세계관은 자신에게 맞는 캐릭터를 잘 골라서, 정확한 컨트롤과 타이밍으로 상대 플레이어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이다. 비교적 ‘템빨’보다는 스킬로 승부한다는 차원에서 ‘프로 스포츠’에 매력을 느끼고 기대하는 것과 유사하다. 상대적으로 ‘템빨’이 더 중요한 건 MMORPG 유형의 게임이다.
게임과 서부지법 폭동을 연결할 수 있을까? 그 게임이 롤(LOL)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뭉쳐서 뭐 하나 때려 부수자는 ‘레이드’ 문화에 가깝기는 한데, ‘레이드’라는 발상을 게임이 발명하거나 촉진했으냐고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서북청년단의 잔인하고 아픈 역사가 있는 사회인데.

속칭 ‘이대남’을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접근이 가지는 또 다른 취약점은, 마치 게임이 2030의 전유물인 것처럼 과장한다는 것이다. 4050도 게임에 영향 받는걸로 치면2030과 마찬가지다. 다만 생활에 치여, 게임을 잊거나 게임 말고도 다른 영향을 더 받을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2030은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게임하고, 4050은 오락실에서 게임을 시작해 PC방에 갔을 따름이다.
게임에 빠진 이들이 타인을 스탯으로나 본다고 한탄하려면, ‘코에이 삼국지’를 찾아보시라. 그 PC게임 프랜차이즈의 히트에서 ‘스탯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게 한국에서 처음 히트친 게 89년쯤이니, 그때 중학생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50줄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것들은 게임해서 이 모양이래? 그런 가설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4050도 게임하면서 자랐다. 다만, 4050이 20대였을 때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10대 시절에 게임을 매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정도가 변별점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그렇게 큰 차이로 여겨지지 않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10대 때는 학교라는 곳에 대부분 다녀야 한다. 그리고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좋은 방식으로든 나쁜 방식으로는 사회학습이 이뤄지는 거대한 훈육장이다. 그래서 세대 차이를 게임으로 설명하는 건 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학교라는’공통 분모’에서 벗어나는 세대가 있긴 하다. 코로나19로 오프라인 학교로부터 몇년간 ‘단절’되었던 코비드 세대다. 온라인(게임)과 오프라인(학교)의 사회관계에서 오프라인이 손상된 세대 말이다. 하지만 지금 2030 세대는 정상적인(?) 오프라인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코비드 세대로 묶기는 어렵다.

한계
즉 ‘이대남’을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사이트보다는 한계가 뚜렷해 보인다. 게임에서 형성한 사회관을 실제 사회에 적용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회의 규칙과 게임의 규칙은 원래 순환하기 때문에 완전히 단절되고 새로운 다른 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2030 특히 남성에게만 더 많이 적용되는 윤석열 지지의 정서적 원형은, 스스로 누려본 고전적 가부장 보수주의도 아니고 냉전의 국제 구도에서나 정당화했던 반공주의도 아니라, ‘사이다’ 정서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누적된 갑갑한 관료주의의 느낌, 조국 사태에서 부각된 엘리트들의 그들만의 리그 ‘내로남불’ 등을 거치면서 답답하다 뭐든 와서 때려 부숴라! 하던 차에 하필 윤석열차가 도착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에게 투영된 그런 파괴적 만족감 같은 것 말이다.

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본적인 민주정의 규범으로 포용, 합의, 점진적 발전과 진보에 관한 공동체의 신뢰 같은 것을 내세우기라도 했다. 실제 있었던 여러 갈등이 다루어진(부안 방폐장 사태가 2003년이다) 규칙과 별개로, 규범은 그랬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이기면 장땡이라는 노골적 반칙과 변칙을 쉬쉬하지 않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젠더갈등 갈라치기를 정권이 써먹는 시대 아닌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유리천정이 선명한 사회에서, 젊은 남성층의 상대적 상실감을 끌어들여서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걸로 선명성의 차원에서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는 것이 좋은 사례다. 사회통합에 의한 총체적 발전과 반대 방향인, 대놓고 갈라치기 아닌가.

그 방향의 완성형이 미국 트럼프고, 한국 윤석열이다. 정치 무관심층을 정치적 극단주의로 포섭하고, 기존 보수층을 적당히 붙이고, 상대 진영에 대한 위기감으로 대충 버무리고. 그렇게 하면 상대방보다 살짝 더 많은 표로 이길 수 있다는 선거공학의 전략을 찾아낸 거다. 일종의 ‘얍삽이’를 찾아냈달까. 예전에는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규범으로 움직였다면, 지금은 꼼수, 얍삽이라도 이길 수만 있으면 장땡이다. 그런 우익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 미국, 한국에서도 성공했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트럼프의 당선처럼 우익 포퓰리즘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런 것에 동원되는 2030이 유난히 못난 것일 리는 없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놈이 강한 것이고, 옳은 가치라서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옳은 가치가 되는 가치가 뒤집힌 세상을 만든 것은 애당초 지금의 405060이니까. 그렇게 만든 세계에서 요즘 2030이 태어났고, 자랐다. 그런 의미에서 2030은 그들의 거울이지 무슨 돌연변이가 아니다.
반박 불가의 세계
‘공정성에 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고 본다. 사회의 전반적인 신뢰 시스템이 지금 엄청나게 파괴된 상태다. 2030의 공정에 관한 신뢰 파괴는 사회관 스펙트럼의 양쪽에서, 최순실 사태와 조국 사태로 상징된다고 본다.

죄과와 수사 강도의 비례성 같은 디테일은 차치하고, 두 가지 모두 자신들의 권력 이너서클 안에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고, 공정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대학입시라는 가장 상징적인 게임의 규칙을 왜곡했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2010년 이후 한국 엘리트 이너서클이 드러내는 천박하고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권력 게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게임) 규칙의 오남용, 거기에 대한 염증이 얼마나 쌓여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특히 2030에게 더 크게.
기성세대의 전략적 게으름
새로운 세대를 새로운 매체나 기술로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세대 간 반발 효과랄까. 젊은 세대들이 윗세대의 꼰대질이 싫어서 반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반발을 제대로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혹은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 출현을 통해 설명하는 전략적 게으름을 보이곤 했는데, 그것도 뭐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젊은이들은 게임 때문에 타락한 것이어야 했고, 그전 시대에는 TV 때문에, 그전에는 헤비메탈 음악 때문에, 그전에는 만화책 때문에, 그전에는 영화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
물론 새로운 미디어의 영향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고, 그런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운동장의 오징어게임보다 온라인 배틀로얄 게임이 강제하는 게임 규칙이 2030에게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는 하다. 가령, 타인들을 ‘NPC'(논-플레이어 캐릭터) 취급하는, 그러니까 실존하는 상대방을 인격적 대우 없이 목적 충족만으로 대하거나 아예 면전에 없는 것으로 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NPC는 말 그대로 논-플레이어 캐릭터라는 게임 문화의 독특한 요소고, 그런 문화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면 충분히 게임적 세계관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쟁점에 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도 대중문화 상품 일반은 주인공 외의 캐릭터를 병풍화하고 비인간화하는 측면이 있긴하지만, 게임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얼마나 보편화된 문제인지는 모르겠고, 게임으로 무언가를 배워서가 아니라 그냥 현실 사회에서 배워야 했던 중요한 걸 배우지 못한 게 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나 싶다.
마인크래프트 하는 인간
점점 더 인간은 대륙에서 섬으로 되어가는 과정이긴 한데, 게임적 세계관으로 설명하면, 섬과 섬 사이의 다리를 자기 맘대로 놓았다가 뺐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생겼다. 초개인주의라는 용어가 그래서 만들어졌다. 물론 그런 초개인주의 주된 동인은 모바일이나 게임이라기보다는 그 게임에 투영된 현실 사회의 경쟁 시스템이다. 특정한 경쟁에서 오로지 승리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목표로 설정한 건 게임이라기보다는 현실 사회다.
기성세대는 틀려 먹었고…. 아니 틀려먹었다기보다는 4050도 게임세대였고, 2030과 4050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분모도 많고, 연속성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세대와 세대 사이의 관계는 우리 생각보다는 연속적이다. 요는 게임으로 무슨 원흉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을 뭔가를 할 수 있는 도구로서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이왕이면, 배틀로얄 방식보다는 마인크래프트 방식으로.

마인크래프트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이다. 무엇보다 함께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협력의 자유도가 있는 게임이다. 협력 자체의 서사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에 이끌리고, 쾌락은 협력과 조화보다는 파괴와 폭력의 감정에서 더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함께 창조하는 것, 함께 잉태하고 자라게 하는 것, 그건 파괴와 폭력 이상으로 큰 만족감을 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물론 마인크래프트에서도 이거저거 부수고 경쟁하고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광물로 컴퓨터를 만들어서 둠(DOOM)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마법의 원에서 다시 현실세계로 적용하면, 게임적 세계관이 현실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마인크레프트’에 관한 피드백
‘마인크래프트’에 관한 독자 피드백을 추가합니다. 마인크래프트 역시 이미 협동 시스템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작업장처럼 돌아가고 아이들은 거기서 식민지 노동자처럼 역할을 맡아 ‘놀고 있다'”는 현실을 한 독자(@Ashihara NepuYona)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좋은 지적으로 판단해 본문에 추가합니다. (2025.03.31. 오후 9:41)
‘이상한 모자’ 님의 관련 글
게임 자체 너머, 게이머 커뮤니티까지 복합적으로 봐야한다는 관련글이 나와서 함께 소개합니다. (2025.04.01. 오후 10:11)
내 생각은 완전히 다름. 이대남은 이명박근혜의 (국정원을 통한) 일베선동의 결과일 뿐임. 당시 근거도 논리도 없는 일베(국정원)는 근거, 논리에 기반한 오유를 이기기 위해 오유에게 진지충, 설명충, 씹선비 등의 프레임을 씌웠음. 그렇게 사실, 윤리, 논리, 진지함 등의 가치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노무현을 욕하는 ‘~노’ 체 역시 사투리라는 은폐막과 함께 DC 등 남성 위주의 커뮤니티에 많이 퍼졌음. 그렇게 1020 남성들은 그런 ‘놀이’를 통해 간첩 망상을 공유했고, 그 망상을 심화시키며 자라서 지금 2030 남성이 된 것뿐.
거기에 조선일보는 자기네 이미지 세탁을 위해, 자기가 공정하다고 직접 주장하는 대신 자기네 지지층에 공정 이미지를 줌. ’20대 남성들은 공정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정한) 우리를 지지한다.’ 20대남 공정 프레임은 여기서 나온 것뿐, 걔들은 공정함에 아무 관심도 없음. 그냥 평생 그리 살았으니 선동하는대로 뛰어다니는 데에 익숙해졌을뿐. 지들이 공정하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하면서 공정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알다시피 저언혀 아님.
저 게임에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온라인의 무엇을 놓아도 같을 겁니다. 그 구분이 ‘게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세대와 게임을 모르는 세상 속 세대의 부정합’이든, ‘남초 혹은 여초의 커뮤니티’이든 그 구분법은 결국 같은 세상의 제단일겁니다. 마치 제 위의 댓글처럼요.
전 게임세대라는 단어로 그 모두를 바라봅니다. 마치 MZ와 같을테지요. 글이 어지러운데, 제 앎이 짧아 그렇습니다.
짧게 남기자면, 현상을 이유로 제단(금지)하는 사회(오프라인) 그 신뢰가 사라짐이 모든 이유이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을 보는 이유는 오프라인에서 살기때문이고, 더 잘 살고 싶은 이유일테니까요.
메타버스 같은 이해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우리의 모두(진)의 문제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