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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오전 8시]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박사와 나누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가 사용한 가면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간은 천 개의 가면 중 하나를 쓰고, 역할극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일한 자아라는 것은 환상이다. 어쩌면 ‘주체’라는 것도, 미셸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가면 혹은 페르소나는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는 건 아니다. 그 여러 개의 가면, 천 개란 수가 상징하듯, 무수히 많은 내가 모여 나의 형태, 실체 아니 그 테두리를 구성한다. 많은 가면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나를 구성할 수도 있다. 얇고, 평평한 존재란 얼마나 심심한가.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나를 편의적으로 설명하기에 쉬운 가면을 골라 그 가면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 나는 얇고 평평한 그림자처럼 세상에 비춰진다. 점점 더 세상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고, 이면의 진실에 관해선 근심하지 않는다. 그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태도는 너무 완강하다. 이상헌 박사에게 그 편협한 세상에 관해 물었다.

이 글은 2023년 7월 21일 제네바 기준 시각 오전 8시에서 9시까지 화상으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네바 오전 8시

4.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족하다

민노씨가 묻고 이상헌이 답하다


언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다고 보나.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족하다. 특히 이른바 좌파가 더 그런 것 같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주장을 담은 체화물로 보면 공격하기가 쉽다.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어떤 특정한 주장을 펴는 체화물로 보고 정형화하면, 그렇게 이념화한 도구로만 이해하면, 결국은 껍데기 주장만 남는다. 그런 생각을 예전부터 했다.” (이상헌)

슬로우뉴스, 편지 쓰는 경제학자가 바라본 세상 – 이상헌 인터뷰, 2014년 8월 13일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시선


민노: 오래전 인터뷰에서 언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 답하시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른바 좌파가 더 그런 것 같다”고 비판하셨는데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

이상헌: 크게 변한 것은 없고요. 오히려 좀 굳어졌다고 해야 되나… 언론은 사람을 평면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에 투영된 인간을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 맥락에서 평면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프로젝션을 쏘듯 그림자를 비춰서 보는 거라 표면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세상에는 하나의 언론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언론이 존재하니까요.

민노: 하나의 언론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언론이 존재한다?

이상헌: 그렇다면 개별 언론이 인간의 입체성, 사회의 입체성을 드러내기는 힘들고, 어쩔 수 없이 평면적으로 드러내겠지만, 다양한 언론은 각자 자신의 철학과 방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결국은 인간과 사회의 입체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거, 그렇게 어느 정도는 인간과 사회의 입체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제가 생각하는 언론관이에요. 아, 언론관이라기보다는 언론에 대한 바람입니다.

민노: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건가요?

이상헌: 대다수 언론이 평면적으로 바뀌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데, 이상하게 인간을 보는 방식은 너무 평면적이에요. 우파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관한 이미지는 뻔한 거라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좌파도 평면성이라는 면에서는 닮아가는 것 같아요. 상황은 여전히 억압과 억울함인데, 그런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드러내다 보니까, 상황의 절실성과 구체성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한 듯 해요.

민노: 억압과 억울함의 평면적 이미지요? (웃음)

이상헌: 그런 걸 밝히는 건 좋은데요. 연극 무대에 비유하면, 어떤 대상을 무대에 세워두고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인물을 비추는 게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를 크게 한 번 비추고, 그렇게 끝나는 거에요. 전부 다 그런 식이거든. 비춰보니까 저 사람 피 흘리고 있네. 오! 피 흘리고 있어! 이런 식으로 끝나니까요. 한국 사회가 산업재해를 ‘소비’하는 방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좀 더 커졌습니다. 우리가 그 인터뷰를 언제 했었죠?

민노: 2014년에 했습니다.

이상헌: 거의 10년이 지났네요. 지금도 다를 게 없고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진보적인 분들은 대체로 연대의식이 있죠. 하지만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런 연대의식을 가졌으면 해요. 물론 누구보다 저한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좌파의 계층화


이상헌: 좌파의 계층화랄까요. 좌파는 진보적인 이야기,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본인들이 대상화하는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저는 그게 한국에서 산업재해나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우파는 항상 반대했기만 그렇다 치고, 좀 더 진보적인 계층이나 중도에 있는 분들 대부분은 사회적 현안에서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어요. 사실 관계가 없거든요.

민노: 멀리 떨어져 있다…

이상헌: 점점 더 사람이 죽는 문제, 특히 산재로 죽는 문제는 어떤 드라마 속 소재일 수는 있지만, 자신과는 멀어진 문제라서 이런 문제를 사회적으로 집중해서 논의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이 있는 것 같아요. 좌파가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런 면에서 좀 아쉽죠. 아까 김훈 선생 말씀을 드린 것과도 많이 관련돼 있어요.

민노: 김훈 선생님이요?

이상헌: 어떻게 보면 산업재해, 산업안전 문제는 좌파가 주목하고 감당해야 할 영역인데요. 중도파랄까, 이런 분들이 여기 들어와 있다는 게 어떻게 보면 좀 아이러니이기도 하고요. 좌파의 계층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게 어쩔 수 없는 결론인 것 같기도 해요. 오히려 중도에 있는 분들이 산업재해와 같은 영역에서 더 큰 액션을 취할 가능성이 클 수도 있다 싶어요. 결론적으로 답이 길어졌는데, 별로 변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민노: 그런데 박사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게 자신의 경계와 범위를 지키려는 사람들, 그러니까 의식은 좌파라고 하더라도 이런 분들을 굳이 사회적인 맥락에서 좌파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거든요.

이상헌: 발언은 굉장히 좌파적이죠. 예를 들어서 노동 3권을 보장해야 된다. 동의하죠. 그다음에 조세 형평성, 부자 과세해야 된다. 이런 의제에 관해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죠. 그다음에 최저임금, 이런 것도 이제 찬성해요. 왜냐하면 사실 본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게 아니거든요. 한국의 좌파 중산층은 기업하는 사람이 아니고 대부분 저 같은 사람이죠. 그렇게 주장을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요.

민노: 그렇죠.

이상헌: 그런데 어떤 현안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하고,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있잖아요. 선거 행위를 한다든지 아니면 정치적 행위를 할 때 우선순위를 설정해야 할 때, 그럴 때면 이런 주제는 후순위로 확 밀려나고 우선순위에 떠오르는 게 이제 교육 문제 같은 게 되는 거죠.

이제 한국에서는 노동자에 관해 험한 소리 한다고 해서 표가 떨어지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교육 문제에 관해선 한마디 잘못하면 표가 바로 떨어지잖아요. 자기 자식한테 미칠 영향이 0.01%라도 있거든요. 그런 작은 확률로도 반응하는데 산업현장에서 사람이 죽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확률이 0.01%도 안 되거든요. 아무 관계 없어요. 그러니까 잠시 반응하고 끝내는 이런 패턴이 반복되죠.

Rick&Brenda Beerhorst, “you are not listening”, CC BY

애덤 스미스, 연민을 느끼는 ‘거리’


민노: 그런 계층화가 점점 더 굳어진다고 보시나요?

이상헌: 그런 것 같아요.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교수부터 교직에 계신 분들 상인, 노동자, 농민 이렇게 다 있었잖아요. 저 같은 국제노동관료도 있고요. 예전부터 그런 그룹은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확실하게 계층화되는 건 최근의 현상 같아요.

민노: 그 안에서 격차가 커졌다고 볼 수가 있죠.

이상헌: 그 격차가 이렇게 커지다 보니까 노동자 내에서도 분리가 되잖아요. 지금 산재로 죽는 사람들은 대기업 노동자가 아니거든요. 같은 공장에서 일해도 비정규직 노동자거나 하청 노동자죠. 거기에서 완전히 갈리는 거죠. 달라지는 거고요.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서 현장의 위험이 바닥에 위치한 사람들한테 집중되다 보니까 진보 그룹 안에서의 관심도라는 것도 점점 떨어지죠.

민노: 네, 그렇죠. 아무래도.

이상헌: 애덤 스미스가 그런 이야기 한 적 있어요.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이 유명하지만, [도덕 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이라는 책에서 결국 인간이 연민을 가지는 건 결국 그 사람이 문제가 되는 타인하고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가령, 영국 런던에서 빵이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도에서 아사 직전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 영국 사람들은 당연히 런던에서 빵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한테 훨씬 더 연민을 느낀다는 거죠. 왜냐하면, 항상 눈에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까.

민노: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에서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하나보군요.

이상헌: 네, 사회적 행위라는 게 사실은 그 시작은 ‘연민’에서 출발하고, 또 자기 동일시랄까 공감하는데에서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계층화가 되면, 머리에 든 생각이나 이념이 바뀌진 않죠, 하지만 어떤 행동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공감이랄지 연대랄지 자기 동일시 같은 요소들은 점점 더 약해지는 거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말과 행위 간에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죠. 사람 생각이 바뀌지는 않고, 책이나 매체는 계속 그런 진보적인 것들을 읽을 테니까, 의식은 계속 유지되는 거긴 하겠죠.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의 조력을 필요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상호 침해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필요불가결한 조력이 상호성을 기초로 애정, 우정, 존경 등으로부터 제공될 때 그 사회는 번영하고 행복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한길사: 2016, 원서: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

민노: 우리나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이라고 보세요.

이상헌: 물론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죠. 세계적으로 그런 현상이 많아요. 일반적인 현상이고, 그런 것 때문에 세계화니 엘리트에 대한 반발도 당연히 심하고요. 엘리트에 대한 반발이라는 게 사실은 우파 엘리트에 대한 반발뿐만 좌파 엘리트에 대한 반발도 포함돼 있는 거거든요. 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한데 한국은 조금 더 복잡하면서도 아주 급속하게 진행하는 것 같아요.

민노: 박사님 본인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이상헌: 이런 이야기에는 저도 포함돼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하기 힘들어요. 이런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쏙 빼고 이야기하기 쉬운 주제인데, 그래서 전형적인 ‘유체이탈’ 주제에요. (웃음)

민노: 그런 예를 하나 들 수 있을까요? 어떤 이슈에 관해서 나 스스로 자신에게 그런 면을 느꼈다거나.

이상헌: 저는 사실은 그게 좀 힘들어요. 저는 외국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지금 한국적인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한국적 이해관계에 얽힌 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인데, 저에겐 그런 건 없거든요. 스위스 제네바에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요.

한국에서 진보적인 중산층으로 사는 분들은 한국에서 살다 보니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얽힐 수밖에 없지만, 저는 그런 게 없어서…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국에 있으면 안 보이고, 무의식적인 게 저한테는 보일 수도 있는 거고요.

민노: 오히려 좀 떨어져 있으니까 보인다?

이상헌: 네, 오히려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 게 보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는 얘기가 정말 순진한 이야기라고 들릴 수도 있어요. ‘너는 한국에 와서 실제로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게 들릴 수 있고, 맞는 얘기죠. 제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보시기엔 그냥 원칙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로만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쉬운 이야기는 아니죠. 그런데 되게 아쉽긴 아쉬어요…

민노: 아쉽다?

단.순.한. 진보의 논리


이상헌: 많이 아쉽죠. 사실 진보의 논리라는 건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무조건 우선순위로 두고 거기에 맞춰서 정책을 짜고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진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굉장히 단순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사회가 진보했느냐 아니냐도 간단하게 생각해요. 물론 논문은 되게 복잡했어요. (웃음) 아무튼 진보의 기준은 취약계층 삶이 얼마나 개선되느냐 안 되느냐 그걸 보거든요.

민노: 좀 더 구체적으론 정책을 보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이상헌: 저는 사실 정책은 잘 안 봐요. 좋은 정책은 한국에 다 있어요. 웬만한 건 다 있죠. 그래서 가끔 이제 여기나 외국에 해외 정책순방이라고 해서 한국에서 사람들이 출장을 오는데, 제가 볼 때는 이미 웬만한 정책은 한국에 다 있어서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어요. 다만, 이 정책이 실제로 삶을 개선시켰느냐 이런 게 이제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인데요. 그게 많이 아쉬워요.

민노: 우리가 인터뷰했던 10년쯤 전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이상헌; 10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 한국 사람이 진보했느냐 하면 이런저런 노력은 많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정말 그것 때문에 유의미하게 진보했다라고 편하게 말하기는 좀 힘든 것 같아요. 취약계층,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각적으로 구성해서 볼 때 10년 전보다 더 진보했다고 말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물론 잘 살기는 해요. 경제 수준도 좋아지고, 법적인 체제나 민주적인 체제나 이런 거 보면 참 좋기는 해요. 한국 민주주의도 국제적으로 상대적인 위상은 높아졌는데요. 이게 상대 비교를 하다 보니까 전체적인 평균이 낮아져서 한국이 잘하는 건지 한국이 절대적으로 잘해서 잘하는 건지 생각하면 물론 둘 다 어느 정도 합쳐진 거겠죠. 절대평가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상대평가에서는 좀 후하게 평가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동떨어진 ‘아웃라이어’, 어떤 그래프의 한 점 ‘한국’


민노: 한국 정도의 경제적 위상을 가진 나라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우리나라 취약계층 보호나 복지 수준이 중간 정도는 하나요?

이상헌: 많이 처지죠.

민노: 많이 아래쪽인가요?

이상헌: 경제 수준에 비해서는 좀 처진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민노: 그럼 반대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 수준 나라들 가운데 취약계층 보호가 잘 돼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들인가요?

이상헌: 아무래도 유럽이 잘하고 있죠. 이게 한 가지 사례인데요. 한국이 이탈리아나 남부 유럽보다는 일단 잘 살아요. 제가 공유한 그래프를 보시면요. 국민소득이 실선으로 되어 있어요. 그걸 보시면 1인당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산재 사망률이 자연스럽게 떨어지잖아요.

국민소득과 산재사망률은 반비례 경향이 있지만, 한국만은 예외다. 이상헌 제공.

민노: 우리나라가 가장 높네요.

이상헌: 한국은 제가 그래프를 조금 더 손봐서 그래프 안에 들어가지 보통은 그래프에 안 들어와요. 너무 높아서…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세계적인 추세예요. 그러니까 국민소득에 따라서 사회적 지표가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 같은 지표가 많이 바뀌는데요. 산업재해에 관해선 한국이 확실히 많이 뒤떨어지죠.

민노: 그래프로도 확실하게 보이네요.

이상헌: 하나 더 보여드리면요. 이게 똑같은 거거든요. 이것도 제가 예전에 발표에 썼던 자료인데, 이건 노동시간이에요. 그래프를 보면요. 실선을 중심으로 굉장히 촘촘하게 OECD 국가들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국은 또 동떨어져 있어요.

이상헌 제공.

민노: 네, 떨어져 있네요.

이상헌: 이런 걸 우리는 통계적으로 ‘아웃라이어’라고 그러는데요. 일반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요. 왜 유독 한국만, 하필이면 인간의 삶, 특히 노동자의 삶을 결정하는 안전과 노동시간과 같은 핵심 노동 분야에서는 진보가 더딜까. 그리고 취약 노동 계층이 직면한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 진보는 무관심할까. 그런 점을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


민노: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한국적인 어떤 복잡성이랄까 특수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예를 들면 어떤 걸까요.

이상헌: 특수성이라는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특수하다고 표현하는 순간, 한국은 이렇게 특수해서 예외적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 뉘앙스가 생기거든요. 그렇게 ‘특수하다’, ‘예외적이다’ 하면 더 할 말이 없거든요.

민노: 아, 어떤 취지인지 알겠습니다. 한국의 복잡성, 어떤 점일까요?

이상헌: 한국이 급성장한 온갖 요인들이 한번에 다 몰려든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복잡한 현상들이 어떻게 보면 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중요한 사회 의제를 희석화하는 느낌이 있어요. 가령, 소득 하위층이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을 가진 정당이나 정권을 지지하는 현상이 강화하는 것도 아까 말씀드린 진보 그룹의 어떤 계층화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라는 짐작하는 거죠. 제가 무슨 데이터로 입증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느낌적 느낌’이라고 하는 거죠. (웃음)

민노: 이게 연결되는 다 이야기인 것 같아요. 9년 전 인터뷰에선 ‘인간에 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런 현상은 더 가속화됐다고 보세요.

이상헌: 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언론과 관련해서도 말했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시선이 부족하고, 더 견고해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라는 표현이 좀 과하다면, 그냥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노: 타인…

이상헌: 우리 삶에서 타인으로 규정하는 범위가 예전보다는 훨씬 넓어졌어요. 아까 말씀드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라는 건 정확하게 표현하면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인데 사회 계층화 문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런 각도에서 보면 타인에 관한 예의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 타인의 범위가 더 넓어진 거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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