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스토리] 회사 관두고 장애인 이동권 위한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으로, 지민이 엄마로, 활동가로, 자유기고가로. 힘겹고 지치지만 가끔 찬란한 홍윤희 이야기.
네 가지 목소리
행글라이더 사고로 비극적 운명이 내게 다가왔지만, 그것도 프로메테우스처럼 내게 주어진 삶이었어요. 싸우면서 확신이 생겼던 것 같아요. 노들야학에서 학생과 교사들은 서로 함께 가르치며 배웠어요. 그들의 힘으로 이동권의 힘을 실질적인 투쟁으로 만들어온 자부심이 저를 계속 남아있게 했어요. 굉장히 자부심이 있어요. 존중은 쟁취해야 하는 거지, 동정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알게 됐는데 안 싸울 수 없죠. (박경석)
한겨레, 전장연 박경석의 자부심… “고통스러워도, 고통이 기쁨 아닌가”, 2024.01.29.
다 좋은데 그 돈 누가 낼건데? 저들이 지하철 타기 불편한 게 문제이면 그럼 산골짜기에 살아서 버스도 없이 차도 없어서 못돌아 다니는 할매는 어떻게 해줘야 하는데?? 왜 급한 사람은 많은데 니들한테 먼저 돈을 써야 되는데?? 니들이 돈 낼거냐고… 다 합리적으로 한정된 자원에서 급한 일부터 해야 되는데 니들 말 안듣는다고 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피해를 입혀? 그러니까 니들이 장애자 깡패인거지.” (한 댓글러)
위 기사에 관한 댓글 중에서. (좋아요 9, 싫어요 0)
장애 권리 운동에서는 여전히 현장에서 ‘몸’을 가진 존재로서 물리적 공간을 점거하거나 특정 장소를 점유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도 좀 그런 쪽이고요. (중략) 동등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가 있는 몸 그 자체가 가진 힘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원영)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출판사: 2021.
장애인 시위를 ‘불법’이라는 틀에서 보는 경우가 많아요. 미국 장애운동 역사에서는 장애인권을 위한 장애인 시위를 ‘불복종’이라는 관점으로 보죠. 시민불복종은 국가행위가 중대하고 명백하게 정의를 위반한 경우 비폭력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존 롤스). 욕먹고 싶어 시위에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본질이고 여기에 주목해야 해요. (홍윤희)
슬로우뉴스, 홍윤희 스토리, 2024.06.
나는 네 가지 목소리에 모두 공감한다. 어떤 입장에 더 끌리기도 하고, 어떤 입장이 더 옳다는 도덕적 판단도 있지만, 특정 의견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평범한 시민일 댓글러의 푸념과 저주와 악다구니는 장애인 운동가에게는 부당한 공격이다. 댓글러는 폭력적 방법이 싫다면서 스스로는 더 없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그 댓글은, 우리의 인식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모순적이다.
하지만 장애인 운동의 간절함을 비장애인의 불편함으로 공격하는 건 그 댓글러가 너무 몰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일상의 불편함이 그 댓글러에게는 정말 진심으로 짜증스럽고 간절하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는 댓글러가 예외적인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평범한 시민일 거다.
위 댓글과 비슷한 댓글을 읽은 적 있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 구간으로 출퇴근하는 한 평범한 회사원. 회사에서 지각한다고 쪼이고, 인사 고과에 반영한다고 경고받은 회사원은 아주 정중하지만, 진심으로 짜증이 나는 말투로 장애인 운동의 ‘과격함’을 비난했다. 기억이 맞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했다(좋아요는 싫어요에 비해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댓글러의 인식을 만든 건 장애인의 폭력적 시위일까. 아니면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내야 하는 현실일까. 둘 모두겠지만,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을 부여해야 하는가. 몇몇 (대)기업은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때문에 지각하는 경우 해당 회사원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댓글러의 회사에서는 그런 ‘관용’과 ‘연대’의 조치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 회사만 탓할 일인가? 정부가 장애인 운동에 이토록 적대적인데? 장애인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불법으로만 보는 정부의 강퍅하고 저열한 인식이 회사의 일차원적인 제도와 문화를 형성하게 한다.
그래서 장애인 운동가는 부족한 법 제도와 인프라, 그리고 사회적 인식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제도, 인프라, 인식은 장애를 더 큰 장애로 만든다. 그럼에도 그 푸념과 저주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푸념과 저주의 방향은 잘못됐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한다. 왜 저 푸념과 저주와 분노가 연대와 공감과 이해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하루하루 만원 지하철이 아니면 출근할 수 없는 평범한 서민. 왜 이들이 지하철로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장애인과 싸워야 하는가. 왜 그들은 서로 적이 되는가. 왜 정치와 언론은 자기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고 수수방관하는가.
제대로 된 질문은 제대로 된 인식에서 출발한다. 장애인 운동 방법이 과격해서 틀려먹었다고 하기 전에 그런 시위 방법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의 모순, 제도의 미비와 부족한 사회적 인식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홍윤희의 말처럼 불법을 원하고, 불법을 목적으로 하는 장애인 운동은 없다. 홍윤희에게 무의의 정체성, 장애인 운동의 방법론, 좀 더 정확하게는 전장연으로 대표되는 투쟁적 방식. 무의의 설득과 소통의 방법론. 그렇게 서로 다른 장애인 운동의 정체성과 방법론에 관해 물었다.
5. 정체성이요? 회색지대 무지개죠
2022년 5월, 21년 다닌 직장에서 퇴사했어요. 그리고 기존 무의 조직을 협동조합(영리)에서 비영리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죠. 어떤 차이냐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돈을 ‘버는’ 영리기업이라면, 사단법인은 어떤 목적을 위해 돈을 ‘쓰는’ 비영리법인입니다. 이 차이는 사단법인 설립할 때 조언해 주셨던 회계사께서 주신 말씀이에요.
협동조합 할 때부터 이미 비영리법인과 유사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무의의 대표 사업인 서울지하철 교통약자환승지도는 만드는 작업에는 돈이 들지만, 배포는 무료로 하죠. 물론 여기저기에서 지원금을 받기도 했지만, 조합에서는 개인 돈을 많이 썼어요. 주변에선 후원금을 내고 싶은데 낼 수 없다는 말씀도 많았고요. 그래서 후원받을 수 있는 조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사단법인인 거죠.
결정을 내리기 전 우리 조직의 정체성이 무엇일지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의 정체성이 장애이동권과 접근성을 향상시킨다는 목표 속에서 다양한 시민참여활동을 하고 궁극적으론 ‘턱없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시위란 방식은 아니지만 시민참여 활동을 통해 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장애인 당사자, 비장애인 모두와 함께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려 해요.
어떤 이슈든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죠. 장애운동에도 스펙트럼이 다양해요. 우선 장애 자체가 다양하니까요. 자폐 하나만 보더라도 ‘자폐 스펙트럼’이 정확한 명칭이 되었고요. 자폐인을 ‘신경다양인’(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을 가진 이들)으로 부르자는 운동도 있고요.
같은 장애인은 없고, 모두 저마다 다양한 몸과 신경을 갖고 있죠. 장애당사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도 다양해요. 거기에 대응하는 운동도 다양할 수밖에 없고요. 흑백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의’ 또한 그런 지점에서 ‘회색지대’에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소위 사각지대에 있는 이동권 이슈가 아직도 너무 많아요. 예를 들어 흰 지팡이를 쓰는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 블록이 잘못된 곳이 꽤 많은데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쉽사리 모니터링하기가 어렵죠. 점자블록은 비시각장애인들이 놓을 수밖에 없어서 그래요. 겉으로 보기에는 장애가 없는데 몇 미터 이상 오래 걷기가 힘들다거나, 화장실에 과도하게 자주 가야 하는 등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많고요. 언뜻 보기에 장애가 없는 듯하지만 자기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문제도 있고요. 이동권 이슈에도 빨강, 파랑, 노랑… 다양한 색이 필요해요.
저는 늘 말해요. 저는 장애 전문가가 아니라고. 한 사람이 다 알 수도 없고, 저는 제 분야에서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고요. 접근성과 이동권이라는 건 끊임없는 과정에 있는 거죠.
6. 전장연 투쟁,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전장연 시위가 논란을 일으키던 때 언론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장애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성’을 반영하는 사람으로 제가 적당해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때는 전장연 시위 방식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런 비판만을 그대로 쓰는 언론들도 있었어요.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대해 “비문명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잖아요.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다가, 제가 직접 평가하기보다는 일흔 넘은 친정 엄마 말씀을 들려드리곤 했어요. 엄마는 보수 신문을 30년 넘게 보신 분이에요. 그런 엄마가 전장연 시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나랏님이 이야기라도 좀 들어주지.”
시위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무의가 만든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지도 같은 작업도 엘리베이터를 지하철에 놓겠다고 쇠사슬 묶고, 오체투지하신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해요. 전장연 운동 방식이 사람에 따라 불편하고 불쾌할 수 있지만, 저 자신은 그 뿌리를 인지하고 있어요. 그 기여를 인정하죠.
의외로 많은 시민이 잘 모르는 사실은 그 시위가 지난 20년간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고 한국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를 장애인만 타나요? 어르신들, 유아차 동반한 부모를 비롯해 교통약자와 비장애인까지 모두가 이용해요.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모두가 이용하는 도시 인프라의 일부, ‘문명’의 일부가 됐죠.”
이렇게 장애인들이 주장하고 목소리를 높인 결과로 만들어진, 모두가 이용하지만 이젠 너무 자연스러워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시설이 또 있죠. 건널목을 건널 때 바퀴가 쉽게 구를 수 있게 만든 경사로인 ‘연석 경사로’도 그 중 하나에요.
1980년대 염보현 씨가 서울시장이었던 시절(1983.10.15.~1987.12.29.)에 휠체어를 탄 노점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딱지를 끊겼어요. 그게 너무 억울해서 음독자살했죠. 김순석 열사(1952~1984)입니다. 장애계에선 그런 분들을 열사라고 불러요. 그런 분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외친 거죠.
1984년, 9월 19일 오전 10시경, 마천2동 한 지하 셋방에서 김순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서른셋. 경찰은 이 사건을 ‘음독자살’로 결론지었다. (…) 9월 22일 그의 사연이 조선일보 11면에 실렸고, 염보현 시장은 다음 날 간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간신문에 눈물겹도록 기막힌 얘기가 쓰여 있다 (…) 교통, 건설, 보사국 등 관련 부서 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횡단보도나 건축물에 장애자들의 편의를 도울 수 있는 시설을 단계적으로 갖추도록 대책을 세우라.” “장애자들의 통행 편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항구적이고 면밀한 대책을 수립하라.”
(…) 시장의 지시에도 정작 장애인 접근권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 건물들 대다수는 여전히 휠체어가 접근 불가능한 채 남아 있었다. 우뚝 솟은 도보블록도, 높은 육교도 그대로였다. 장애인들은 그 후에도 십수 년간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했다.
정창조(비마이너), [김순석①] 84년 서울, ‘불구자’의 유서, 2019.10.04.
한국에서만 이런 운동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미국에서도 1970년대 장애인 시위대들이 해머를 들고 나와 도로 연석을 깨고 ‘휠체어도 길을 건널 수 있도록 연석 경사로를 놓자’는 운동이 있었죠. 그 깨진 연석 덩어리는 미국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그 결과 건널목 건널 때 자전거나 유아차, 캐리어로 어떻게 갈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죠. 장애 당사자 투쟁으로, 목숨으로 얻어낸 것들을.
장애인 시위를 ‘불법 시위’라고 흔히 칭하는데, 미국 장애운동 역사에서는 장애인권을 위한 장애인 시위를 ‘불복종’이라는 관점으로 보죠. 시민불복종은 국가행위가 중대하고 명백하게 정의를 위반한 경우 비폭력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뜻합니다(존 롤스). 욕먹고 싶어 시위에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본질이고 여기에 주목해야 해요. 비단 장애인권뿐이 아니죠. 여성들의 투표권, 유색인종이 대중교통수단이나 교육에서 분리되지 않을 권리처럼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민권들도 다 같은 ‘시민불복종’의 과정을 거쳐 확보되었죠.
7. 회색지대 대신 흑백 극단을 부각해요
오늘 아침에 소논문을 하나 받았어요.
한국 사회에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던 장애 혐오의 가시화를 촉발한 사건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선전전과 관련된 유튜브 댓글 분석을 통하여 장애 혐오가 생산되고 확장되는 기제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2021년 12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전장연’을 검색어로 유튜브에서 검색된 영상 529건의 댓글 15,854개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중략) 먼저 온라인 혐오 댓글이 생성되고 확산되는 시기는 관련 언론의 뉴스가 활발히 발표된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의미연결망에 대한 그래프 마이닝 분석을 통해 6개의 군집이 도출되었고, 자기완결적 군집 구조가 혐오 댓글을 생산하고 확산시키는 핵심 기저를 이루고 있었다.
노법래 (국립부경대학교) 문영민 (서울대학교), 장애 혐오는 어떻게 생산되고 증대하는가? – 전장연 지하철 선전전 유튜브 댓글 속 의미연결망에 대한 그래프 마이닝을 중심으로 -, 한국사회복지학회, 한국사회복지학 제76권 제2호 2024.05 45 – 68 (24page)
2021년 전장연 지하철 투쟁 기사와 소셜미디어 반응을 분석한 소논문이었어요. 결론은 소셜 미디어의 장애 혐오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직접 부딪히며 만들어진 갈등이 아니라 언론이 바라보는 시각, 프레이밍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전장연 선전전에 대한 불편함이 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와 결합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라치기를 만들어낸다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장애운동에서 오랫동안 이어왔던 투쟁 방식이 소셜미디어 여론이 쉽사리 왜곡될 수 있는 시대에서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커뮤니티반응 중 자극적인 내용을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기한다는 느낌이 강했죠. 그런데 이게 잘 깨지지 않는 거에요. 포털 뉴스가 비슷한 것들끼리 묶여서 더 큰 덩어리로 보이잖아요, 그 중에서도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이 위로 올라오고, 그걸 보고 또 베끼기식 기사가 양산되는 구조니까요.
우리나라 언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커뮤니티 베끼기’ 기사에요. 작년 말 한국언론재단에서 수습기자분들을 대상으로 장애기사 바로 쓰기에 대한 온라인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제발 좀 커뮤니티 긁어서 기사 쓰지 말아달라’는 얘기를 했어요. 커뮤니티가 여론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자극적인 이야기를 끌어올 수밖에 없고, 대립 구조, 극적인 감정을 끌어와서 갈등을 부추기는 거죠. 회색을 가져오지 않고, 흑백만 부각해요. 결국은 대립을 이끌어내고요. 장애당사자들은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탔을 뿐인데 이 시기에 단지 외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위 좀 하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은 적이 있어요.
“…대립 구조, 극적인 감정을 끌어와서 갈등을 부추기는 거죠. 회색을 가져오지 않고, 흑백만 부각해요.”
장애 담론이 혐오를 매개로 비이성적으로 형성되고, 언론을 통해 증폭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여론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흑백이 아닌 회색지대도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의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를 갖고 가고 싶어요.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 ‘몸들이 보이는 사례’를 늘린 게 전장연 투쟁이라면… 그 투쟁의 결과를 바탕으로 더 많은 ‘장애인의 몸’이 지하철에서 보이거든요. 그들의 몸이 보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자체가 생활에서의 장애인권 운동이죠. 무의는 활동을 통해 그런 목소리를 증폭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고 싶어요.
8. 지옥철에선 다 악마가 돼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사람들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거잖아요.
“지하철이 아니라 지옥철에 몸이 낑겨서 타면 다 악마가 돼요.”
출퇴근에 손해 본다고 환장하겠다고 말한 회사원 댓글, 거기에 공감 누른 분들이요. 그런 분들이 다 전장연에 반감을 느낌 분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친정 엄마가 말하는 ‘오죽하면 나와서 이러겠나’ 하는 걸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아무리 관종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욕먹고, 경찰과 대치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장애인조차도 장애인 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은 1%도 안 되거든요. 정말 극소수가 많은 걸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투쟁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에요. 이와는 조금 다르게 무의가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만들거나 ‘모두의 1층’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경사로 설치 가이드라인이나 장애고객 응대교육을 확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장연도 이동권 증진이라는 목적의식은 같지만, 방법론은 다를 수 있어요. 어떤 건 옳고, 어떤 건 틀리다는 건 없다는 거죠.
저는 이동이나 접근 인프라가 있어야 장애 당사자들이 피드백을 할 수 있게 되고, 피드백 과정에서 향상된 인식이 만들어지고, 다시 인프라가 좋아지는 선순환이 필요한데 여러 회색 지대의 활동 방식이 필요한 거죠.
관심의 정도와 총량은 정해져 있으니까. 누구나 개인적으로 에너지의 총량이 있어서 자기가 보고 싶은 뉴스를 볼 것으로 생각해요. 그럼에도 무의와 같은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민이가 용기내어 외출할 수 있게 되었고 지민이의 외출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유니크한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양적으로 폭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전장연 시위 때문에 지각을 해 준 것을 양해해준 회사가 있다는 걸 기사로 봤어요. 그런 소식도 ‘지각으로 불편 끼친다’는 기사만큼 드러나야 한다는 거죠. 전장연 시위 싫어하는 회사만 나오는 게 아니라 ‘시민불복종’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사장님, 그런 회사 이야기도 노출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이유를 생각해 볼 만한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걸 생각하다 보면, 온건하게 할 수는 없을까? 무의 같은 다른 방식의 접근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