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 인어공주, 디즈니의 해석본은 어떻게 추억의 원본이 되었는가
- 곳간에서 진보난다: 정치적 올바름과 반(反)페미니즘 그리고 성평등은커녕
- 신나면 망한다: ‘미제 똥물’ 전설에서 ‘밥.꽃.양.’의 현실까지
- 숭배와 혐오의 이분법을 넘어서: 로알드 달, 르 귄, 그/그녀
- PC 가짜 논쟁의 종착점: 답은 작품에 있다 (끝)
인어공주, PC 그리고 페미니즘
숭배와 혐오의 이분법을 넘어서
캡:콜드케이스 01-04
작품은 ‘그때/거기’의 세계에서 태어나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지금/여기’의 세계를 통과합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말이죠. 그렇게 평론가와 독자는 변화된 가치와 기준으로 작품을 끊임없이 규정하죠. 그들은 작품을 닫아버리려 합니다. 그들은 작품을 매번 자신의 기념비로 만들려고 시도하죠. 하지만 작품은 자신을 닫아버리려는 비평적 권력과 욕망에 저항해 항상 열려 있으려 합니다.
이런 대화와 투쟁, 우리가 비평 혹은 해석 또는 독서라고 부르는 행위를 통해 작품은 매번 ‘대화적 상상력’ 속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그 대화와 투쟁, 화석화의 시도를 견딘 채 끝끝내 열린 채로, 오랜 시간 동안 대화적 상상력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끊임 없이 생성하는 작품은 드디어 위대함을 획득하죠(참조: T. 토도로프, ‘구조시학’, 곽광수 역; 문학과지성: 1977.).
하지만 그 기념비의 욕망이 작품을 ‘수정’하는 데에까지 미친다면? 해석자의 권력이 올바름, 적절함이라는 당대의 기준으로 작품을 사지 절단한다면?
‘아동문학계의 셰익스피어’ 로알드 달에게 생긴 일
더 타임스가 전후 위대한 영국작가 16위로 선정한 ‘아동 문학계의 셰익스피어’ 로알드 달에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로알드 달이 발표한 10개의 작품들 중 505건의 표현이 달의 출판권을 가진 출판사에 의해 수정됐고, 78건은 아예 삭제됐습니다. 이것은 어린이 독자를 위한 배려일까요? 올바름, 적절함을 위한 정당한 편집권의 행사일까요? 아니면, 용납할 수 없는 검열일까요?
로알드 달에게는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다. [제임스와 슈퍼복숭아],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녀를 잡아라], [멍청씨 부부 이야기], [마틸다] 등 수많은 그의 작품들은 퀸틴 블레이크의 그림과 더불어 어린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현란한 재미를 준다. 로알드 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그를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인정하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로달드 달의 작품들은 놀라움과 당황, 경악, 분노, 불안, 통쾌, 감탄 등의 정서적 반응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작품을 다 읽은 후에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엽기적이며 재미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책을 쉽게 덮지도 못 하고 입맛을 다시게 된다. 맛있는 요리를 단숨에 먹어치운 후 빈 접시를 바라보는 아쉬움처럼 책을 놓기가 섭섭한 것이다. 로알드 달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렇게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 독자나 어른 독자의 반응이 크게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여기까지만 놓고 볼 때, 로알드 달의 작품은 일단 최상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고 단정 짓는다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윤소희, 로알드 달의 이야기 방식: [마틸다]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중심으로, 2008. 12.
민노: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돌아가면요. ‘올바름’, ‘적절함’이라는 기준(?)으로 원작을 직접 수정해버린 사건이 있었죠. 로알드 달의 출판권을 가진 출판사가 최근(2022년 개정판 등) 로알드 달의 소설 일부 표현을 자기네들 마음대로(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서?) 뜯어 고쳤잖아요. 텔레그래프가 크게 보도할 정도였는데요. 우리나라에선 마부뉴스(SBS)가 그 소식 중 일부를 전했고요.
캡콜드: 네,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죠. 인어공주 관해서 앞서 얘기했듯, 우선 원본은 원본 자체로 있어야 돼요. 그래야 사람들이 그걸 참조하고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좀 더 시대를 반영해 조금이라도 차별적 내용 문제를 해소하고 싶다면, 이 판본이 다른 ‘해석본’이라는 걸 명시하며 만들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원작 동화 자체의 표현을 수정한 건 큰 문제였던 거죠.
르 귄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그녀
민노: 관련해서요. 제가 최근 르 귄의 소설(’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있는데요. 플레이보이에 기고한 자신의 작품(’아홉 생명’)을 플레이보이 측에서 많이 손댔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작가 초년 시절이라 그랬던 거죠. 그래서 후에 어느 정도 명성을 쌓고, 다시 소설집을 출판하면서 온전하게 다시 회복을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또 다른 한 편의 소설에 관해서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찬찬히 생각해 보니까 이 SF소설(’겨울의 왕’)에 등장하는 종족(게센)이 처음에는 남성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성이더라는 거죠. 그래서 기존에 남성 대명사를 사용한 걸 새롭게 개정하면서 여성 대명사로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아홉 생명]은 1968년 ‘플레이보이’에 처음 게재된 글로, 내가 유일하게 ‘U. K. 르 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플레이보이’ 편집진은 내 이름을 머리글자만 써도 되겠는지 정중히 물었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플레이보이’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그쪽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깨닫고는 무척 놀랐다. 그 일은 편집자나 출판업자가 나를 여류 문필가로 취급하여 성적 편견을 보였던 내 생애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경우였다. 그리고 그 요구가 너무나 어리석고 기괴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플레이보이’는 이 글을 게재하면서 사소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바꾸었고, 자신들이 출간하는 책에도 계속 바뀐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나는 내가 쓴 원래 글을 더 좋아하며, 그 이후 내 권한 아래 이 글이 다시 출판될 경우에는 언제나 이 책에 있는 내용처럼 실리며, 머리글자가 아닌 완전한 내 이름이 찍히도록 한다.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아홉 생명’, 1975, 시공사: 2004. 중에서
내가 이 단편을 쓸 때는 ‘어둠의 왼손’을 쓰기 1년 전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겨울 행성, 즉 게센에 사는 주민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 글이 출판될 무렵에서야 나는 게센인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들’이라든지 ‘어머니’ 같은 여러 단어를 수정하기에는 너무도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어둠의 왼손’을 읽고 분노하거나 슬퍼했다. 소설에 양성인들을 받는 대명사가 시종일관 ‘그’였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삼인칭 단수의 경우 총칭 대명사는 남성 대명사와 동일하다.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덫이기도 하다. 총칭 대명사이자 남성 대명사he는 여성she과 중성it을 배제하기 때문에 여성형과 중성형은 남성형인 ‘그he’의 쓰임에 비해 좀 더 한정되고 부당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 만든 단어들, 즉 ‘te’나 ‘heshe’ 같은 여러 명사 역시 우울하고 짜증 나긴 마찬가지다. 이 책에 싣기 위해 ‘겨울의 왕’을 개정하면서 나는 그러한 부당함을 조금이나마 수정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모든 게센인들을 칭하는 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반면에 특정한 남성 칭호들, 왕이라든가 주군 같은 남성형 명칭은 지칭되는 인물들의 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남겨두었다.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일부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공평한 일이다. 등장인물이 양성이라는 사실은 이 글과 별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대명사가 바뀜으로써 부모와 자식 간의 중심적이고 역설적인 관계가 역오이디프스 방식(다른 판본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으리라)이 아닌, 더 낯설고 더 모호한 무언가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확실한 것은 내 무의식은 이러한 사실을 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내가 깨닫기 훨씬 전부터 게센인들에 대해 알았다는 점이다. 무의식은 늘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겨울의 왕’, 1975, 시공사: 2004. 중에서
민노: 아무튼, 한글에서도 그/그녀의 표현이 있잖아요. 김동인이 그녀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고도 하고요. 르 륀의 사례도 그렇고, 문학작품에서 ‘그와 그녀’를 성별에 따라 구별해야 된다고 보세요. 아니면, 가급적 ‘그’로 통일해야 된다고 보세요.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캡콜드: 저는 작가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노: ‘그녀’라는 표현을 좀 지양해야 된다. 가급적 쓰지 말자는 분들도 있잖아요.
“이 선생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그녀’나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원래 우리말이 아니라는 게 이유다. ‘그녀’는 일본말 ‘가노조’(かのじょ·彼女)를 그대로 직역한 말이다. 문인 김동인이 신문학 초창기인 1919년경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노조는 그 사내의 계집이란 뜻이다. 말의 됨됨이가 남녀 평등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종이라는 성차별적 의식이 들어 있다. 그런 말을 써서야 되겠나.” 이 선생은 “말과 글이 곧 정신”이라고 했다.”
세계일보, [나의삶 나의길] 25년째 빨간펜 들고 ‘쫙쫙’…매일 ‘언어 수술’하는 구순의 국어학자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2018. 1. 6
캡콜드: 그럼요. 그분들은 그렇게 쓰시면 되고, 그걸 공감하는 분들이 함께 그리 하시면 되는 거고요. 반면 만약에 성별을 정확하게 하며 당대 사람들이 흔히 ‘그녀’라고 할 때 이해하는 그 느낌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녀’라고 쓰면 되는 거죠. 아니면 그 여성이라든지 다른 단어로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고. 이런 부분은 실제로 무언가 평등의 어떤 결과를 앞당기지는 않으면서도 그 과정에서 피로해지기만 하는, 좀 비생산적인 논쟁이라고 봐요.
민노: 비생산적이다?
캡콜드: 어떤 분들한테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당연한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거죠.
민노: 음, 저는 제 개인 얘기를 해볼게요. 개인적으로는 이를테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예전에는 그, 그녀를 구별해서 썼거든요. 모두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사용했죠. 거기에 일말의 어떤 억압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데 글을 쓸 때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얘기할 때도 그렇고 ‘그녀라고 써도 되나?’는 억압(?)을 수시로 느끼거든요. 지상파나 혹은 공적인 미디어에서 내부적인 어떤 자율적인 논의를 통해서 가급적이면 ‘그녀’라는 표현은 쓰지 말자 이런 논의가 있을 수도 있고, 저처럼 개인 차원에서도 ‘그녀라는 표현은 차별적인가’라고 억압을 느낄 수도 있는데, 억압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보시는 거예요? 조언을 주신다면요.
캡콜드: 글을 쓰거나 말할 때 그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에 관해서 계속 스트레스받고, 압력 받고 하는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 전제 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라고 굳이 써야할 필요가 있다 하면 쓰는 거고요. 다른 방식으로 간단히 대체할 수 있고, 그걸로 다른 피곤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초점을 좀 다르게 맞췄으면 좋겠어요. 개별 단어를 써야 하는지 안 써야 되는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원래 전하고자 하는 바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해질 수 있을지.
민노: ‘그녀’에 관해서 좀 더 말씀을 드리면 저는 ‘그녀’라는 표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미학적인 느낌이랄까 어감이 제가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성애자 남성의 어떤 다수적인 지배적인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더 억압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그녀’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어감, 느낌이 나쁘지 않고 좋을 때가 많거든요.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라는 거죠.
캡콜드: 말씀처럼 당장 온갖 기존 시, 노래에 ‘그녀’라는 표현이 많잖아요. ‘그녀를 만나기 100m 전’ 이런 노래도 있고요.
민노: 그렇죠.
매번 새롭게 고민할 수밖에… 혐오와 숭배를 넘어서
캡콜드: 그런 식으로 그때 그 단어를 썼기 때문에 전해지는 어떤 감정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그 단어를 쓰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 내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건 매번 새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미 있는 걸 고친다 어쩐다 할 거는 아니고, 지금 새로 뭔가를 할 때 지금 상황에 대한 적절함의 정도죠.
민노: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에 관한 편견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토요일]이나 토머스 만의 [키 작은 프리더만 씨] 혹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 [첫사랑]을 봐도… ‘토요일’ 같은 경우엔 여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열등감에 빠진 남성이 등장하면서 좀 우스꽝스럽게도 묘사되고, 창녀에 관해선 미녀에 관한 공포와는 또 다른 관습적 혐오를 드러내고 있죠. 또, 토마스만의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인데, 여기서도 여성 혐오적인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거든요. 물론 이걸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여성 혐오라고 해석하는 건 부당하겠지만요. [첫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소년의 순수한 짝사랑이 파괴되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여성에 관해 편견을 가지기 딱 좋은 작품인데요. 한편, [베니스의 상인] 같은 경우에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당시의 어떤 자연스러운 어떤 사회적인 분위기로서 당연하게 반영되어 있고요. 이런 작품들을 우리가 고전으로서 교육할 때 어떤 관점으로 교육해야 할까요?
캡콜드: 왜 그 작품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려주고, 그 당시의 이런저런 문화적 맥락 때문에 지금 보기에는 문제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이미 과거의 맥락들을 충분히 알고 충분히 정리를 했으니까 고전으로 간주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것까지 같이 가르치면 됩니다.
민노: 지금 제가 예시한 작품들을 보면요. 지금 현재 기준에서는 굉장히 그 인식의 수준이 미흡하잖아요. 뭐랄까, 차별적이고, 공격적이기도 하고요. 이런 그때와 지금의 사회적 인식 차이로 인해 이런 작품에 관한 평가가 적극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보세요. 아니면 그거는 여전히 지엽적이고, 시대적인 보정이 필요하다고 보세요.
캡콜드: 고전을 평가할 때는 두 가지를 피해야 된다고 봐요. 첫 번째는 이런저런 부분에서 지금 기준에서 볼 때 인권적으로 미흡하다, 그러니까 이거는 고전이 아니라 ‘빻은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 작품 등을 일컫는 멸칭적 표현 (편집자) 물건’이다.
민노: 쓰레기다… 그렇죠.
캡콜드: 두 번째는 이건 고전이고 훌륭한 작품이니까 그런 문제(현재의 인권에 관한 인식 수준에서 보기엔 반인권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것)는 사소한 것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것. 그 두 가지를 전부 다 피해야 돼요.
민노: 두 가지 모두 피해라?
캡콜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석했을 테니 더욱 그 맥락을 풍부하게 전해야 하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고전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후대에 있어서는 이런 이런 부분을 더 개선해 나갔다. 그 두 가지를 같이 얘기를 해야 되는 거죠. 이건 그냥 쓰레기다, 혹은 신성불가침의 무슨 성물이다 하는 두 가지 극단은 모두 피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민노: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캡콜드: 숭배하거나 혐오하거나 그 두 가지 중 선택하고 싶어 하는 거고, 그런 충동을 피해야 한다는 말이죠.
민노: 아! 맞습니다.
캡콜드: 그런데, 그렇게 일일이 따져가면서 파악하는 건 우선 좀 피곤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죠.
민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