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40.] 노동의 구체성을 놓치기 쉬운 ‘평균’ 노동시간의 함정. 그리고 근로기준법 대신 ‘일하는 사람을 위한 법'(가칭)이 필요한 이유.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노동과 인간. (⏰12분)
한 나라의 ‘평균’ 노동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그 노동시간을 둘러싼 한 인간의 ‘삶’, 그 구체적 진실을 놓치는 일이 되기 쉽다. 우리나라는, 지난 10년 새 연 200시간 정도의 노동시간이 줄었지만, 여전히 OECD에서 꽤 오래 일하는 나라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 슬로건이 있었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저녁’은 많은 노동자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평균 노동시간’은 양극화하고 다양하게 분화하는 노동의 풍경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더 오래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15시간, 20시간, 30시간으로는 생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노동자다. 한편, 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매일 야근에 시달리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다. 노동자의 필요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멋대로 노동자 건강권을 정치와 기업 간 협상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기업은 어떤가. 가령 삼성전자를 보자. 이상헌은 지난 인터뷰에서 삼성의 ’52시간 노동시간 규제 완화’ 주장에 담긴 한국식 정치경제학의 미디어 전략을 이야기한 바 있다(제네바 인터뷰 38. 참조). 이재용의 명백한 실수와 판단 착오에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그럴듯한 정책을 통해 국가의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유용하겠다는 삼성의 ‘반도체법’ 전략은 뻔뻔하면서도 대담하다. 그리고 정치와 언론은 그 기만적인 전략을 해체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그 기만적 정∙경의 전략에 편승하고 동조해 기어코 정∙경∙언의 공생적 사회 유기체를 구성한다.
노동시간은 이렇게 다양한 삶의 풍경 속에서 그 구체성을 통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평균 노동시간의 함정’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리고 그 ‘노동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더 담대한 비전, ‘일하는 사람을 위한 법'(가칭)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상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40]
평균 노동시간의 함정:
노동법 대신 ‘일법’이 필요한 이유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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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2월 21일(금)과 3월 7일(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평균 노동시간의 함정
노동시간을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서로 규모가 비슷할 때는 비교하는 게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경제 규모가 다르고 특히 돌봄노동의 양상이 다를 때 단순히 노동시간만을 비교하는 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편의적이고 자의적 해석에 이끌리기 쉽다.
파트타임에 관해서 말하면, 한국은 좀 모호한 구석이 있다. 네덜란드나 덴마크는 파트타임이 제도적으로 안착해서 그 불이익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미국과 유럽의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 반대다. 한국에서 단기 노동은 불안정노동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굳이 위치를 설정한다면, 미국과 유럽의 중간 정도라고 해야 할까.
노년층의 단기 노동과 관련해서는 하루 두세 시간 짧게 짧게 일하는 일자리들이 유럽엔 많다. 한국은 단기 일자리가 좀 복잡한 게 돌봄노동과 관련한 여성 문제도 있지만, 노인 노동의 문제도 있다. 한국은 그래서 노동시간의 ‘평균’을 보는 것보다는 그 ‘분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평균 노동시간의 함정’이라는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휴가, 돌봄, 사내 정치: 유럽과 한국의 차이
특히 유럽 대부분 국가가 5~6주의 법정 휴가를 보장한다. 가령 독일의 경우 신입사원 1년 차 법정 휴가는 24일이고, 거기에 통상 여름 약 4주, 부활절과 성탄절 각 1주일씩 총 6주의 휴가를 보장받는다(참고). 물론 한국 언론이 비교 대상으로 곧잘 인용하는 미국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유급휴가가 없다. 그래서 유럽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평균 노동시간’에서 가장 유념해야 하는 건 법정 유급휴가의 존재다.
우리는 노동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보다는 유럽에 가까워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유럽의 노동시장 ‘풍경’은 사뭇 다르다.
- 풀타임: 우선 한국은 풀타임 노동자가 많다. 2024년 7월 기준으로 36시간 이상 풀타임 노동자는 2158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74.8%를 차지한다. 2020년(76.3%)이나 2022년(77.5%)에 비해 추세적으로 낮아지긴 하지만 여전히 높다. 반면 초단기(주 15시간 미만) 노동자는 180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6.2%를 차지했다(각 자료 출처: 통계청).
- 단기간 노동: 한국에서 단기간 노동자는 비정규직의 불안정 노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럽의 단기간 노동자는 대부분 ‘정규직’이고, 안정적으로 일한다. 같은 단기간 노동이라도 유럽과 한국은 그 일자리의 ‘질’에서 차이가 크다. 그러니까 유럽에서는 주 3일 정도 근무하는 노동자가 많다. 그 나머지 시간은? 사람 사는 일은 어디서든 같다. 남은 시간은 대체로 돌봄노동에 할애한다.
- 법정 휴가는 빛 좋은 개살구: 한편, 우리나라도 법정 휴가가 있긴 하지만, 유럽만큼 길지는 않고, 그나마도 제대로 휴가를 챙기지 못한다. 실제로 휴가를 사용하는 비중이나 비율이 유럽보다 훨씬 적다. 유럽과 비교하면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압도적으로 오래 일한다. 법정으로 정해진 9시 출근, 6시 퇴근보다는 문화적인 관습과 ‘보이지 않는’ 제도의 이면이 중요하다. 특히 제도를 둘러싼 맥락, 사회∙문화적 압력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유럽은 5시면 눈치 보지 않고 ‘막 퇴근’한다(웃음).
-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차이: 노동 강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유럽은 북구 쪽,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와 스위스까지 중부까지 포함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일찍 출근한다. 회사에 오전 7시쯤 온다. 7시 30분이면 일을 시작하고, 오후 5시쯤 퇴근한다. 남부 유럽 쪽으로 가면 좀 늦게 9시쯤 출근하고 좀 늦게 퇴근한다. 그래서 노동 강도는 확실히 중북부 유럽 쪽이 좀 더 세다. 과학적 통계적 근거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일반적이고 경험적 관찰이다. 남부 유럽에 비해 일하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좀 더 집중해서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 ‘사내 정치’라는 비용: 주니어 레벨의 노동 강도는 좀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정치적이라고 해야 할까, 한국은 민간이든 공공이든 ‘사내 정치’ 비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업무 외적 비용이 많이 든다. 유럽에는 그런 비용이 거의 없다. 비생산적 형태의 노동시간 소비가 한국은 좀 긴 편이고, 유럽은 좀 적다. 생산성 차원에서 보면 노동 시간 차이가 이런 면에서도 생길 수 있다.

노동강도는 낮지만 노동 스트레스는 높은 한국?
참고로 미국에서 로비스트는 그 자체로 직업이라서 ‘사내 정치’와는 관련이 없다. 내가 주로 이야기하는 건 ‘사내 정치’랄까, ‘특정 라인 타기’ 같은 일하는 관습의 문제를 말하는 거다. 유럽에선 그런 게 훨씬 적다. 노동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특히 북)유럽이 생산성도 높고 노동강도도 높을 수 있지만, 노동강도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사내 정치’와 관련한 스트레스는 한국이 훨씬 더 클 수 있다. 즉, 노동강도는 한국이 유럽보다 세지 않지만, 노동 스트레스는 한국이 더 크다는 ‘이율배반’이 말 된다.
한국 말단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은 아주 높은 편인데, 직급이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관리자로 올라갈수록 생산성이랄까 효율성이 낮아진다. 이것도 ‘사내 정치’와 관련이 있다. 유럽 쪽이 생산성 향상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한다면, 한국은 오히려 생산성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적 활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은 한국에 있다가 유럽으로든 미국으로든 직장을 옮기면 만족도가 높은 편인데, 중간 관리자 이상 직장 생활을 하신 분들을 보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면 만족도가 높지 않다. 대부분 일을 훨씬 더 빡세게 해야 해서 한국에서보다 더 힘들어한다(웃음).
가령 나만 해도 ILO에서 직급이 꽤 되는 편인데(참고로 ILO 사무국 전체 직원 2900여 명 중 이상헌 국장 직급인 D2급은 23명에 불과하다. 편집자), 내가 직접 발표 자료를 만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소위 ‘부하 직원’인 하급 직원들을 시킨다. 그리고 하급 직원은 상관에게 발표 자료를 작성해 보고하고, 상관은 첨삭한다. 그걸 몇 번씩 반복한다. 하지만 최종 발표자인 내가 만들면 그런 반복적인 첨삭 과정이 필요 없다. 한 번이면 족하다. 그래서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효율성이 높고, 좀 더 밀도 있는 노동, 즉 노동강도가 큰 노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할 때 다음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허투로 쓰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평균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낮은 게 맞긴 한데, 비어 있는 시간이 많은 게 한몫한다.
-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앞서 살핀 것처럼, 노동시간이 ‘불평등하게’ 분포돼 있다. 생애 주기로 보면, 젊은 시절에는 노동의 밀도가 높은데, 오히려 직급이 올라가면서 관리자가 되면 노동의 밀도가 낮아진다. 즉, 생산성이 낮아진다. 그런 ‘분포’를 잘 살펴봐야 한다. 유럽과 비교해 노동을 조직하는 방식에서 관습적인 노동시간의 분산도가 좀 퍼져 있는 경향이 있다.
즉, 한국은 노동시간이 길어서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 것 외에도 정치적인 비용(사내 정치)이 직급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경향성을 가진다는 측면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사내 정치’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만큼 그렇게 길게 허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미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특수한 사람들의 극화된 이야기 말고 평균적인 회사 분위기를 보면, 미국과 유럽에서 정치적인 비용은 확실히 한국보다 적다.

유럽 같은 단기 노동의 정규직화 가능할까?
유럽과 한국은 단기 노동자의 고용안전성에서 확실히 차이가 난다. 우리도 단기 노동의 정규직화를 꽤 오래전부터 주장해 오고, 법적으로 보호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차갑다. 예를 들어서 돌봄노동 때문에 30시간밖에 일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런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일 텐데, 기업 쪽에서 그런 개인의 사정을 ‘봐주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육아’나 ‘훈육’ 등의 돌봄을 포기할 수 없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반대로 그런 ‘단기간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는 널려 있다. 즉, 단기 노동 공급자는 항상 넉넉하기 때문에 노동자보다는 기업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런 조건에서 기업이 먼저 ‘좋은 파트타임 일자리’를 마련해야 할 유인은 매우 떨어진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정책 개입이 필요하다. 단기간 노동의 시장 상황과 기업과 노동자의 힘의 불균형이 현저하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그 불균형을 정책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이후로는 이런 움직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해법? 패치식 일회용 땜빵으론 안 된다
우리나라는 장기간 노동자가 훨씬 더 많다고 앞서 말했고, 단기간 노동자의 사정이 유럽과 비교해서 상당히 열악한 이유도 설명했다. 장기간 노동자 역시 ‘비정규직’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플랫폼, AI와 같은 기술적 변화가 강제하는 새로운 시대의 노동은 날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 새로운 단위의 노동 시간을 통해 분화하고 있다.
어느 쪽을 먼저 제도적으로 접근해야 할까? 장기간 노동자? 비정규직 문제? 플랫폼 노동자 문제? 단기간 노동자의 문제? 돌봄노동의 문제? 어느 쪽이 당장 급해 보인다고, ‘패치’식 땜빵으로 문제에 접근하면 곤란하다. ‘온라인’ 패치 붙이니까 ‘플랫폼 노동’이 출현하고, ‘플랫폼’ 패치 붙이니까 AI가 출현하는 식이다. 이렇게 일회용 밴드 붙이기 방식으로는 더는 상처를 본질에서 치료할 수 없다. 이런 일회용 땜빵으로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덧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노동시간의 구별을 없애야 한다. 다양한 형태로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거대한 스펙트럼으로 퍼져 있다.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를 구별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시간의 문제는 제도화된 노동이 아니라 ‘일 중심으로 노동을 재편’하는 패러다임의 변화와 이어진다.

근로기준법, 여전히 중요하지만 누군가 배제하고 소외된다
일 중심으로 노동을 재편하기 위해선 기존의 근로기준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으로도 어렵다. 일과 노동의 기본적인 정의와 철학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일하는 사람을 위한 법’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노동에 맞는, 일하는 사람을 위한 법이 필요하다.
이제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를 구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시대다. 그런 구별은 ‘끝.났.다.’ 더는 그 구별에 의미가 없다. 남녀가 일하는 문제, 돌봄노동의 문제, 노인의 문제, 청년의 문제… 다양한 노동시간의 선호, 다양한 그룹, 그런 사람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근로기준법을 땜질해서는 이 모든 다양하고 다채로운 수요를 포섭하기 어렵다. 근로기준법은, 물론 그 자체로 여전히 의미가 있지만,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배제할 수밖에 없는 법이 되어 버렸다. 굳이 비유하면, 날아가는 새를 사냥한다고 치자. 그 ‘무빙 타겟’을 잡기 위해서 화살촉을 바꾸고, 사냥총의 망원경을 바꾸는 방식으로 적응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개별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은 이제는 곤란하다. 더 크고 넓은 그물을 쳐서 다양한 목표물들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근로기준법은 유효하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모두 포괄하기에는 너무 낡았다. 점진적 개정으로는 어렵다. 땜빵이 아닌 ‘대체’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간이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법'(가칭)이 필요한 이유
노동 계층화 문제, 남녀평등 문제, 다양한 연령층의 문제… 차별과 배제를 자칫 법으로 제도화할 수 있다. 노동법과 관련 법제들이 다양한 계층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통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행법 제도는 그런 대화와 소통을 오히려 방해한다. ‘고용’은 또 어려운 문제인 게, 신기술에 의해 새롭게 변화한 시대의 풍경, 가령 플랫폼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긴다. 특수고용(‘특고’) 문제는 이미 오래된 숙제다.
하지만 ‘노동’이라고 하지 않고, ‘일’이라고 하면 변화한 시대에 의해 뚫린 구멍을 메꿀 수 있다. 이제 근로기준법을 대체하는 가칭 ‘일하는사람법'(이하 ‘일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법’에 특히 돌봄노동을 끌어와야 한다. 돌봄노동을 ‘일법’에 끌어오지 않으면 노동시간의 문제, 노동 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가령 고용 관계에서도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차별이 심각하다. ‘일법’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앞서도 강조했지만, 현 근로기준법은 ‘패치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기업이나 기술의 현실은 항상 빠르고, 법과 제도는 항상 늦다. 돌봄과 관련해 노동시간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점점 더 돌봄(육아, 훈육, 노인 간병)은 인간 서비스에 의존해야 하는 모든 행위로 그 의미를 확장하고, 그래야 한다. 우선은 가족 단위가 중요하겠지만, 그것에 한정되지 않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다. 사람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그 모든 행위가 ‘돌봄’의 영역으로 포함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포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 포괄성을 근로기준법이라는 ‘그릇’으로 담아내긴 힘들다. 근로기준법의 ‘시선’은 너무 좁다.
시장 경제 활동에서 개별 노동자가 각자의 돌봄 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은 여성에게 더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남녀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여자의 문제, 남자의 문제를 떠나 모든 사회 구성원의 문제다. 사회 복지 문제, 노동 시장 문제로 분리해서 바라볼 게 아니라 모든 영역을 포괄해서 가장 넓은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우선은 복지와 노동을 ‘연결’하고 ‘연계’해야
현재 사회복지 문제와 노동 시장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구체적으로 통합의 방법을 고민하는 나라는 많지만,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정책을 통해 성공적으로 통합한 나라는 거의 없다. 여전히 복지와 노동은 영역적으로 분화되고 분리돼 있다. 그래서 일단은 그 두 영역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연결’과 ‘연계’가 중요하다. 그 컨트롤타워 역할은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집에서 돌봄노동 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너무 시혜적으로만 접근한다. 돌봄이 사회적 노동의 형태로 인정되면, 돌봄 노동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권리’로 보장하는 게 필요하다. 같은 100만 원을 받더라도 그것이 ‘시혜의 대가’인지 자기 노동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정부의 태도가 달라진다. 가령, 예산이 부족해지면, 시혜성 정책 비용을 가장 먼저 줄인다. 하지만 그게 노동의 대가이고 노동한 권리라면 그 돈을 줄일 수 없다. 그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건 ‘임금 체불’과 같은 것이 된다. 즉, 핵심은 돌봄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명확하게 제도적이고 헌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게 아주 중요하다. 출산율 문제도 이런 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노동? 일? 무엇이 일인가!
기업도 육아휴직 등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기 쉬운데, ‘일법’에서 돌봄노동을 ‘권리’로 인정하고 그런 체계가 행정적으로 인정되면, 기업도 그 기준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도 좀 더 적극적으로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현재의 정치 상황이 ‘일법’ 같은 법을 논의하는 데 유리하진 않다. 다만 하나의 돌파구가 있는데, 헌법 개정이다(헌법 32조, 33조). 기존 노동권을 일하는 권리로 포괄해서 규정해야 한다. 이걸 디딤돌이랄까 기초로 삼아서 다른 구체적인 쟁점들을 하나씩 고쳐볼 수 있다. 여기서 ‘노동’과 ‘일’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 노동: 기존 제도에서 인정받는 일. 근로기준법에서는 노동의 범위가 더 좁다.
- 일: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
‘일’을 인정하는 원칙은 이렇게 간단하다. 다만 그 원칙 위에서 우리 동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가 뭔지를 평가하고 ‘일의 범위’를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건 마치 최저임금 논의와도 비슷할 수 있다. 다만, 돌봄과 관련해 반사회적 행위나 위법 행위를 했을 때는 그 권리를 박탈하고 엄격하게 관리할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별에 따르면 혼자 집에서 게임을 하는 건 일이 아니지만, 보육원이나 양로원에서 자원봉사 하는 건 일이다. 돈을 받는지 안 받는지를 기준으로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래서 인간의 일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사회적인 지원과 인정이 필요하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지금의 공직을 보면 현재의 인사시스템이 효율성을 따질 필요가 없을정도로 불합리하다 생각합니다.
인생을 소모한다는 표현처럼 소득격차로 통과문턱을 높여놓고 문턱만 통과만 하면 거의 방임하기 때문에
취직 하고나면 없던 보상심리도 생길 정도입니다.
그렇게 사회에 중요한 자리에 올라서 오히려 비효율적이라면 다행일 정도로 공직의 사회적 책무를 뒤로하고
사익만을 챙기는 행태를 수 십년간 눈감아 왔고 언론에 눈찔려서 나라가 기울었다 생각합니다.
적재적소 사회적 일자리 효율을 높이는 방법으로 인사문턱을 낮추고 긴 시간동안 평가하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취업문턱을 낮춰서 다수를우선 일에 투입하고 충분한 시간 동안 인사담당자와 일하는 사람이 긴밀히 의견을 나누고
그에 따라 일을 맞춰 바꿀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문턱을 낮추기 위해 소득격차를 줄여야하고 교육쪽에서도 일찍 직업탐색을 실시할 수록 좋습니다.
인사과정의 턱을 낮추고 길게 보는것을 선출직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후보 등록 턱을 낮춰서 다수를 지원받아 의원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기존보다 선출기간을 길게잡아 토론과 인터뷰를 여러번 진행하면서 후보의 언행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공보에 비해 인사권자인 국민에게 꼭 필요한 후보의 역량을 알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인터뷰를 통해 토론 후 느끼는 직책에 대한 후보의 생각과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턱을 낮추어 길게 보기만 해도 공직과 후보의 적합성을 늘릴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소득격차 완화를 배경으로 직업은 명예와 성취를 목적으로 남아야 하며 직책은 권위 없이 책임만 남아야한다 생각합니다.
선출직에서는 후보가 일터나 일상에서 겪은 사회문제를 직접 자치할 기회만을 명예롭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올라야합니다.
특권을 최소만 남기고 선출끼리도 독립권한 기구로써 관계를 강조하고 표면적으로라도 전관예우같은 노골적인 유착을 억제할 사회분위기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쉽게 직을 내려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시 국민으로 돌아와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분위기를 조성해야
민주제에서 개인이 격차없는 대리이자 주인으로써 권력에 치우침없이 민주제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