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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는 게 많은’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 교수)에게 2025년의 키워드를 뽑아달라고 청했다. 캡콜드는, 마치 AI처럼, 캡콜드라는 캐릭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 줄 알텐데, ’12개’의 키워드를, 마치 칼국수처럼, 죽죽 뽑아냈다. 국제 이슈, 국내 이슈 각각 6개씩이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8]

질문 정리: 민노
답변: 캡콜드

💡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12월 15일(월) 밤과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 형식이 아닌 답변자(인터뷰이)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내용을 확인하고 협의하여 퇴고했습니다.
🔖 여는 말(질문자): 민노
🔖 본문(답변자): 김낙호(캡콜드)

🥪 국제

1. 분노 미끼(‘어그로’의 국제 버전)

  • Rage bait
  • 한줄평: 어그로 보내기가 담론 산업의 기본모델이 된 세상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어그로’와 매우 비슷한 말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뉴미디어가 레거시 미디어를 압도하기 시작한 때 ‘클릭 베이트'(클릭 유도, 클릭 미끼질)와 같은 ‘호기심’을 매개로 온라인 미디어가 부흥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호기심’이 재료였다면, 이제는 ‘어그로'(분노)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시대(정신)가 바뀌었다. 그런 시류를 반영한 단어가 ‘분노 미끼’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훨씬 더 일찍 유행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선 트럼프 당선 이후 특히 더 ‘유행’을 탔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벌어진 풍경이 그야말로 기괴하다. 산하 공공기관들이 ‘분노 낚시’에 스스로 나섰다. 우리나라로 치면 ‘노잼’ 관공서 스타일에서 ‘일베’ 스타일로 변신했다고 보면 좋다.

옥스퍼드대학교가 올해의 단어로 뽑은 ‘분노 미끼’

최근 가장 충격적인 사례가 ‘노 킹스'(No Kings) 시위대를 AI 합성 이미지로 조롱한 사건이다. 그런 저질 ‘분노 미끼’ 게시물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분노를 끓어올리게 하고, 양쪽 지지자들끼리는 개싸움하고… 화날만한 일이 많아진 세계 정세 속에서 그런 분노를 자신의 정치적인 자산으로 재료로 삼으려는 행동이 많아진다. 특히 젊은 우익을 자극하려는 극우의 전략은 이런 ‘미끼질’을 더 가속한다. 즉, 분노 미끼의 원동력은 상업적인 효용과 정치적인 목적 둘 모두다.

아쉬운 것은 ‘분노 미끼’에 대한 기성언론의 반응이다. 우리 품위 있는 레거시 미디어는 ‘저런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분노해야 마땅한 민주주의 후퇴 상황에서도 그 분노를 “정제된”, 즉 함의를 탈색한 언어로 표현하고, 그 분노에 김새는 기사와 사설∙칼럼으로 반응하는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억지스러운 저널리즘적 순화’라는 부정적인 반작용이 발생해버렸다.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전쟁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상황에도 분노하지 않는 레거시 미디어, 가령 뉴욕타임스의 모습은 정제된 저널리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분노라는 원초적인 저널리즘 정신을 잃어버린 ‘늙은 레거시’의 모습이다.

당연히 분노에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낡은 제도와 관행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분노의 감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분노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하면 결국 허무주의적으로 귀결하고 만다. 민노씨가 말한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과 같은 ‘분노는 나의 힘’이 되려면, ‘연결’이 이뤄져야 한다.

그 분노가 바꾸는 잘못된 관행과 제도, 사회적인 모순 그리고 개선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삶과 연결해야 한다. 그런 연결 없이 ‘파편적인 분노’가 그 자체로 휘발하고 사라지고, 휘발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면… 남는 건 허무다. 올해 2025년의 분노가 딱 그런 허무만 남긴 허무주의적 분노였다고 평가한다.

2026년에도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고, 오히려 매우 가속하고 심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은 특히 중간 선거가 있다. AI가 분노의 양적 증폭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미국이 ‘분노 상승기’라면 분노 선진국 한국은 ‘어그로 안정기’라고 평가한다.

한국적 ‘어그로’ 패턴의 익숙해짐은 확실히 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장 김어준이 황우석 사태에서 온라인의 힘으로 음모론 지피던 것이 20년 전이다. 그때는 어그로라는 말을 지금처럼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자극적인 것으로 확 관심을 끌고, 분노로 ‘우리 편 vs. 너네 편’으로 나눠버리는 편 가르기 전략은 전형적인 어그로 전략이다. 국익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로 스스로 세력을 규합하는 대대적인 ‘황빠’ 현상을 부추기며, 합리적인 비판자를 마치 이순신을 모략하는 ‘내부의 적’으로 몰고 그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방식으로 선구자(?) 역할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캡콜드가 ‘올해의 보도’로 뽑은 황우석 백서 (한국일보)

2. 식스 세븐: 무의미 그 잡채

  • Six seven
  • 하입보이! 무의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세.

‘식스 세븐’은 미국에서 세대를 나누는 하나의 ‘표지’로 작동했다. 이게 얼마나 유행했느냐면, 청소년층에서 두세 마디 이야기하면 무조건 나올 정도로 유행했다. 대략 ‘고딩’까지? 걔들 입장에선 이제 20살 넘으면 노땅 취급이다. 2022년 뉴진스의 ‘하입보이’가 밈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식스 세븐’도 무의미한 후렴구를 통한 젊은 세대의 ‘자기 정체성’ 드러내기로 볼 수 있다.

기성세대에 대한 야유나 비판적인 부정적인 에너지까지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닌 게, ‘식스 세븐’은 그냥 너무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런 무의미가 쿨하지롱?!’ 이런 일종의 제스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의미해서 부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거기에 담론이 담겨 있지는 않고, 단순한 구별 짓기를 위한 표지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전의 반대편에서는 이해하겠다고 ‘분석’하고 ‘장문의 기사’를 쓰는 애처로운 기성세대가 있는 거고…

3. 캐버노식 검문

  • Kavanaugh Stop
  •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이름(브렛 캐버노; Brett Kavanaugh)의 이름을 딴 인종차별적 검문(Stop)을 가리키는 조어.

미국의 극우화는 무엇보다 인종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민자를 구실로, 사실은 인종차별을 원리로 하는 경찰국가화를 시도하고 있달까? 우익 대법원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위선적 가면을 던져버리고 노골적인 차별 판사의 모습을 보여줬고, 시민 사회는 그런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풍자적 조어, ‘캐버노식 검문'(Kavanaugh Stop)이라는 여론전을 시작하고 있다.

사례는 아주 단순하다. 검문 과정에서 불법 이민자라는 ‘근거’ 없이 피부색을 근거로 붙잡아 놓고 있다. 이런 행동을 멈추라고 소송했다. 하급심에서는 당연히 승소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혔다. 그야말로 극우적 판결. 우익 대법원 중 캐버노라는 판사가 그런 검문 과정에서 정당한 미국 시민이 잡혀가더라도 금방 신분을 확인하고 풀려날 테니까 문제없다는 판결문을 썼다.

당하는 사람의 반인권적 피해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도 않는 판결문이다. 6명의 보수 연방대법원 판사가 자신들만의 상상적 ‘미국 천국’을 그려내면서 극우적이고 차별적인 판결을 양산한다. 그래서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이런 인종 차별적인 검문을 ‘캐버노 검문’이라고 명명하고 극우적 행태를 비판하기 위한 프레임 전쟁에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바깥에서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비합리적 파국에 대해서 미국의 국수주의나 보호무역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결국 내부적으로 보면 ‘인종주의 국가’의 문제가 핵심이다. ‘캐버노식 검문’은 그 점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민 반대를 내세우지만 실제는 유색인종의 이민 금지가 정책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고, 이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를 예정한다. 비백인을 압박하기 위한 사실상 ‘경찰국가화’를 상징하는 건 이민 단속국이다.

대도시 위주로 정치 깡패까지 동원해서 유색인종을 억압한다. 하급심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계속 트럼프 행정부가 박살나고 있지만, 그 판결이 연방대법원에 올라오면 다 뒤집히고 있다. 기를 쓰고 거의 ‘무조건’으로 트럼프 행정부를 정당화하고 있는 게 현재의 미 연방대법원이다.

이런 사태를 효과적으로 표면화하기 위한 담론 전략 가운데 하나는, 그게 그냥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이 자기 욕심, 무지, 악의 같은 것을 발휘한 행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명명법이다. ‘캐버노 검문’이라는 저항의 표현, 비판적 풍자는 인종차별적 경찰국가 행태에 사람의 악의라는 함의를 입히는 것으로, 마치 게리라는 미국 상원의원 이름에서 가져온 ‘게리멘더링’과 같은 맥락으로 아주 유효하고 중요한 명명이다.

이 용어는 ‘식스 세븐’급 대유행은 아니지만, 좀 더 긴 호흡으로 지켜보면 좋겠다. 최근 있었던 ‘롯데호텔 노조 조끼’ 사건도 떠오르는데, 나쁜 짓한 가해자를 ‘현상’과 결합시키고 연상시키는 ‘언어 전략’은 괜찮아 보인다.

4. 인종학살

  • Genocide.
  • 가자 참극을 인종 학살이라고 부를까 말까… 같잖은 서방 저널리즘 고뇌.

가자에서 벌어진 인종학살을 인종학살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영미권의 레거시 미디어의 담론에 관한 문제다. 왜 이들은 인종학살을 ‘인종학살’이라고 부르지 못하는가. 답은 사실 간단하다. 그렇게 부르면 이스라엘은 정말 악마가 되니까. 특히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영미 레거시 저널리즘, 소위 ‘권위지’들은 이런 ‘딱지’ 붙이기를 꺼리는 편이다.

전문적 척도에서 보면 누가 봐도 ‘인종학살’이라고 평가하는데도, 그걸 거부하면서 조심스러워하는 것. 한마디로 이스라엘 눈치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개별 국가에 대한 눈치 보기라기보다는 ‘책임지고 싶지 않는 눈치 보기’랄까. 어느 쪽을 편들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에 가깝다. 특히 반유대주의로 비치는 걸 꺼린다.

2023년 10월 25일. @m.z.gaza
2023년 11월 7일. @m.z.gaza
2023년 11월 18일 @m.z.gaza

인종학살을 선언하고 인정하는 언론은 아주 적다. 그런 단어를 굳이 쓰는 경우는 ‘외부 칼럼’(“본지와는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이 대부분이다. 뉴욕타임스에서도 그런 외부 칼럼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내부 칼럼니스트들은 반대 논지의 칼럼을 써서 ‘억지’ 균형까지 맞추는 경우가 많았을 지경이다.

이런 풍경은 ‘한가한 담론’ 놀이로 보인다. 정말 한심하다. 인종학살로 보이면 인종학살이라고 한 뒤에 다른 문제들을 논의해야 하는데… 일년 넘게 이런 논의만 하고 있으니까. 정말 한가해 보이고, 한심해 보인다. 가자에서의 학살 자체가 가장 중요한 데 그 이야기 자체를 하고 있지 못하다. 전면전은 소강상태고, 휴전했다고 해서 관심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는데, 그런 외부의 한가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현장에서는 살인과 기아가 계속되고 있다. 제대로 된 ‘휴전’도 아닌데, 휴전이라고 선언하고 빨리 손을 털고 싶어 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5. AI 버블

  • AI bubble.
  • 버블인건 다 아는데 그게 터질지 말지… 불안해하면서도 몰빵하는 모습.

특히 한국 같은 제조업 베이스를 갖춘 나라에서 ‘정부’가 나서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외국은 놀라워하면서 부러워하면서 또 잘 될까 배 아파하기도 하고, 또 우려하고 있는 모습. 모 아니면 도… 같은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 상황을 사람들이 점점 더 깨닫고 있다.

딜레마 상황이다. 붐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진짜 실적’은 없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놀이 같은 ‘억지 해프닝’에 환호하면서 붐업하고 있긴 하지만, 억지 마케팅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지브리 놀이’는 그걸 즐기는 개인이 재밌어서 한 게 맞지만, AI의 미래를 보여주는 사례는 아니다. 그저 재밌는 글로벌 해프닝에 가깝다. 그런데도 오픈AI는 그걸 무슨 대단한 걸 한 것처럼 포장해서 홍보에 활용하는데… 그런 모습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재 오픈AI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수익이나 산업구조의 변화는 점진적이다. 돈은 수천억 달러씩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만큼의 성과가 나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걱정하고 있다. 내년에는 그 불안, 그리고 그 불안에 비례하는 기대가 더 커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불안한 만큼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불안하다.

개인적으로는 AGI든 ASI든 아직 멀었다고 판단한다. 손정의는 한국에서 와서 “ASI, ASI, ASI”라고 대통령에게 강조했다지만, 그는 사업가고, 이런 거품과 붐업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돈 들어가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 보인다.

6. 감당할 수 있음

  • Affordability
  • 중요한 건 체감 경제. 체감 경제의 개념을 이 단어 하나로 ‘결정화’. 맘다니를 당선시킨, 트럼프를 수세에 몰아넣는 것은 바로 체감 경제. 그걸 함께 직면해 주는 것이 성공하는 포풀리즘!

맘다니는 성공한 포퓰리즘를 상징한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불안감을 하나의 단어로 ‘결정화’했는데, 이는 그람시가 주창했던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그러니까 대중의 고난에 대중의 언어를 부여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과 같은 국가에서 ‘감당할 수 있음’은 아주 적절한 의미로 시민에게 다가왔다. 사회는 번성하지만, 물가는 오르고, ‘내 자리’가 사라지는 것 같은 불안함. 그 불안과 불만을 적절하게 공략한 선거 표어고, 그런 마음을 포착하고 그 불안을 구체적인 희망과 대안으로 대신하면서 조율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맘다니의 부상 이후 ‘감당할 수 있음’은 하나의 선거 구호를 넘어서 민주당의 전략적인 벤치마킹 교재가 되고 있다. 그래서 공화당, 특히 트럼프가 이제는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다. 적어도 경제 부문에서는 수세에 몰리는 모습이고, 그래서 중간 선거에서 ‘폭망’하면 국외 이슈에 집중할 가능성이 다수 미디어에서 점쳐진다.

‘감당할 수 있음(affordability)’ 구글 트렌드 추이. 뉴욕시장 경선, 뉴욕시장 본선거에서 그래프가 상승하고, 정점에 도달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맘다니 임기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상징성의 크기가 매우 큰 정치인이다. 나 자신, 뉴욕은 아니지만, 미국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아주 와닿는’ 구호다. 가령 ‘부자 되기’는 모호한 느낌이고, 단순히 ‘생활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하면 돈 벌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텐데, ‘감당할 수 있음’이라는 구호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내 삶의 일상과 조건을 찬찬히 다시 들여보게 하는 힘이 있다. 아주 실천적인 담론 전략으로 평가한다.

그전까지는 ‘식탁 경제’ 같은 어법이 생활 체감 경제에 대한 표현법이었는데, 당장의 생필품 가격표 자체에만 관심을 돌리는 한계가 있는 비유였다. 그렇기에 더 적극적이고 종합적인 사회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를 담아내는 키워드를 민주당 등 정치 세력에서 던져보려 했지만, 맘다니 캠프에서 드디어 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맘다니의 잠재력 유연성과 PR 전략팀의 궁합, 즉 팀워크가 좋았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뉴욕 시민들 역시 이런 ‘궁합’의 중요한 퍼즐 조각임은 물론이다.

내년 서울 시장 선거에서 ‘지속 가능한 서울 생활’이 화두로 떠오른다면 어떨까.

🥘 국내

7. 내란 척결

내란 척결이라는 프레임은 안타깝지만, 모두에게 통쾌한 절대선이 아니다. 민주제의 근간을 말아먹으려 한 것이기에 당연히 내란에 기여한 모든 이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되, 실시간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과제들을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그에 대한 시선회피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느끼게 하면 역효과만 난다.

이미 고작 수년 전, 문재인 정권 당시 ‘적폐 청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겪은 교훈 아닌가. 그렇기에 내란 수습 국면은 ‘소 잃은 외양간’을 제대로 고치기와 함께 새 소를 키우는 모습을 동시에 과시하는 ‘균형의 묘’가 가장 중요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잘 보여준 한 해다.

내란 척결의 핵심이 책임 부여라면, 그 전제는 사건 전 과정의 진실이다. 문제는 그게 수사와 재판을 통해 밝혀지는 과정이 시간이 걸리고, 딱히 즐겁지도 않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당연한 관심을 유지시키면서도 감정적 소진이나 둔감화가 되지 않게 의제를 끌어가는 어려운 작업이 필요하다.

비상계엄을 발표하는 윤석열.
‘키세스’ 시위대의 모습.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접근이 ‘자료화’, 그러니까 계속 쌓여나가는 사실관계들을 검색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정돈된 데이터베이스, 진행 현황판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런 식의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언론 주도든 정부 주도든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26년에는 뜻 있고 유능한 분들이 나서시리라 기대한다.

각 주체들이 어쨌든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적합하게 기여했는지, 굳이 간단히 평점으로 치환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재명 9점: ‘내란 척결’이라는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는 다시 현안에 주목하는 이미지를 잘 만들어내고 있어서.
  • 민주당 5점: 내란 척결이라는 프레임에 자꾸 정당의 이미지를 가두는 지도부 행태가 나올 때마다 감점.
  • 국민의힘 0점: 내란당이라는 기본 입지를 어떻게 할지조차 방향성이 없는데 1점도 아깝다.
  • 사법부 7점: 연초에 탄핵 합헌 선고한 헌법재판소가 점수를 다 따줬고, 크고 작은 영장 기각과 지연이 점수를 까먹고.
  • 특검 등 수사당국: 8점 정도. 속도전 과욕 안 부리고 착착 진행하고 있으니.
  • 국민은 평균 점수 없이 0점에서 10점까지. 그 다양한 국민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하나로 묶나.

8. 윤어게인

  • 극우화하는 보수 정치의 위험한 퇴행

보수 정치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자는 주된 서사 위에 서 있다. 그렇기에 어떤 보수 정치가 한번 크게 실패하면, 실패한 것과 다른 전통적 가치를 하나 발굴해서 매달리는 것이 정상적 진행 과정이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든 지적 밑천의 소모든 여러 이유로 그런 발굴이 여의치 않을 때, 돌파구로 선택되는 것은 가치 대신 선명한 상징적 인물이다. 적들에게 억울하게 박해받은 내 상징 인물을 ‘보호하고 돌려놓는’ 것으로 내용의 공허함을 대신하는 셈이다. 올해 선보인 그 정서의 엑기스가 바로 ‘윤어게인’이다.

탄핵 국면에서 벌어졌던 일을 복기해보자. 파면 선고 전까지 보수 정권에서 온갖 대행들이 돌아가며 권력남용 대잔치를 벌인 것의 내용은 정상적인 국가 운영도 새로운 보수 비전도 아니고 그냥 윤석열 내란을 유야무야시키는 시도였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무너진 후 남는 것은 인물에 대한 컬트 숭배뿐이다. 이미 친숙한 패턴이라면 패턴인 것이, 이십 년 전 황우석 숭배 신드롬에서 다 겪은 바다. 겉으로는 적당히 흩어져도, 마음속에서는 ‘그다음 영웅, 카리스마’ 인물에 대한 컬트로 바뀔 따름이다.

전한길과 윤석열.

보수의 가치가 아니라 ‘사람’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퇴화한 정치세력이라면, 그다음 영웅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더 선명하고 위험한 내용을 제시하는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밴스 부통령이 그러하듯. 국민의 힘 장동혁의 돌출 행동과 과격화는 이런 방향에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장동혁의 브랜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는 게, 브랜드화에 성공하려면 그 조건은 ‘성공’이다. 윤석열만 보더라도, 문재인 정권을 혼내달라는 열망을 모아내서 당선되었던 것이고 그 바탕에는 박근혜를 혼냈다는 성공 실적이 있었다. 성공 신화가 없는 선명함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냥 우스갯거리로 끝날 뿐이다.

9. (야간 노동이 아니라) ‘위험 노동’이다

  • SPC. 쿠팡 새벽 배송. 어떻게 어젠다를 잡아야 죽음 자체를 잡을 수 있을까.

여러 노동자의 죽음으로 올 한 해에는 야간 노동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많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곁가지’가 은근슬쩍 중심을 침범하고 있다. 야간 노동 하면 더 돈을 받을 수 있고, 그런 일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다른 안건이고, 죽음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건강권이다. 야간에 노동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돈 더 버는 근면한 노동’으로 포장하곤 해왔다. 하지만 노동이 주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몸에 위험한 노동’이다. 그 위험을 감내할 이유는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어야지, 경제적 교환가치여서는 곤란하다. 응급실은 공동체를 위해서 의료 종사들이 사회적인 예외로 희생하는 것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환자의 ‘편의’와 병원의 ‘수익’을 위해 혹은 의료 종사자의 ‘월급’을 높이려고 응급실을 운영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올 한 해 도마에 올랐던 택배업계의 야간 노동은 그런 사회적 필요라기보다는 고객의 ‘편의’를 수익으로 교환하기 위해 회사가 노동자의 ‘건강’을 상품으로 파는 장사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야간 노동은 그냥 야근을 연상시키는, 좀 잘못 선택한 워딩이라는 느낌이 있다. 비정상 수면 주기의 ‘위험 노동’이라는 범주 아래에 넣는 관점으로 논의해야 한다. 위험 노동의 관점에서 하는 논의는, 위험한 노동을 줄이는 것 그리고 하기는 해야 하는 경우라면 ‘덜’ 위험한 노동을 만드는 조건으로 향하게 된다. 논의의 방향을 그렇게 잡아야 한다.

고압선 설치를 떠올려 보자. 위험 노동이라는 틀로 보면, 어떻게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하고, 혼자서 올라가면 안 되고 등의 안전 수칙들을 마련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새벽 배송도 그저 주간 배송보다 돈 더버는 야근이라는 접근법이 아니라, 건강을 상하게 하고 생명마저 빼앗을 수 있는 위험 노동의 그 ‘위험’을 줄이고 제거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10. 개인정보

  • 개인정보 대량 유출의 일상화, 책임 소재의 소실. YES24. 쿠팡. SK. KT…

책임 소재를 제대로 못 잡고 있다. 한국과 튀르키예 빼고 OECD에 다 있는 집단소송제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 어느 정도 이상의 보안장치를 해야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규제’가 가능할지 논의해야 하는데, 개인정보 대량 유출이 너무 흔해지고 일상화해서 국민의 타격감이 사라지고 있는 점이 문제다. 확실한 ‘사회적 레버리지'(집단소송제)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수순까지 논의를 하나의 패키지로 일괄해서 다뤄야 한다. 흐지부지되기 전에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첫 번째 단추는 ‘집단소송제’고, 그다음 과제는 ‘개인정보 가이드라인’을 마치 안전 관리팀을 강제하듯이 마련하는 일이다.

11. 조짐의 즐거움

  • 백종원 매장하기. 김새론 매장하기. 신지 예비 신랑 매장하기.
  • 집단적 정의감으로 조져 놓기의 즐거움이 올해도 열심히 모두에게…

김새론이 세상을 떠난 지 아직 1년이 안 됐다. 그런데 벌써 먼 이야기 같다. 악의적으로 인간 한 명, 주로 연예인을 매장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아주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악의적인 정의감 패턴은 클릭 저널리즘과 결합해 정형화했고, 한층 더 기승을 부린다. 온라인 게시판에는 ‘악마의 편집’으로 배치된 짤방 모음들이 원본을 대체한다.

나는 이 문제를 한 가지 기준으로 본다. 온라인 군중의 법정에는 무죄와 사형만이 존재하며, 가장 먼저 파괴되는 기준은 바로 비례성이다. 죄지은 만큼 벌받고, 욕먹을 만큼만 욕먹는 게 현대 문명의 근간일 텐데, 스케일 확장된 만인의 주목 경쟁, 공감 경쟁 속에서는 더 선명한 시시비비와 단죄만 불타오른다.

우리가 알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고, 집단적인 정의감으로 ‘작은 사실’을 부풀리거나 잔인하게 ‘매장’하는 방향으로 조합하는 것은 인제 그만 하자. 뭔가를 잘못 판단했다면 잠깐 조용히 있다가 다음 저격 대상을 찾아 나서는 비겁한 짓 말고, 그냥 잘못 판단했다고 좀 나서서 반성하고.

12. 케데헌 뽕

  •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대성공에 대해, 정작 디아스포라 사안은 접고 걍 차오르는 국뽕.

글로벌 히트 비결은 문화적 혼성이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당장 어느 쪽(인간, 요괴)에서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자신은 그 모든 것이라는 오롯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공감대 높은 유구한 주제이자 전형적인 이민자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문화를 소개해서 성공한 게 아니라, 한국 문화를 재미있는 소재로 (한국 문화를 즐기는 방법 자체로) 활용해 가면서 새로운 혼종을 만들어 내 이룩한 성공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케이팝이라는 장르 자체가 서구권 댄스 음악을 다문화 혼종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그런 맥락과 함의가 유독 한국에서는 ‘한국 문화가 세계를 집어삼켰지롱’ 하는 ‘국뽕’에 잡아먹혔다.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는 단순한 자긍심보다는 ‘케데헌’이 설파하는 다문화적 경계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한국 사회 안에 있는 결코 적지 않은 소위 다문화 인구들이 만들어내는 새롭고 당당한 정체성에 좀 관심을 기울인다든지. 경계인의 강함, 혹은 힙함이랄까.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는 혼종 문화인이자 경계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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