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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특집.

  1. 세계화의 황혼, 포퓰리즘
  2. 세계화의 열매, 대도시 엘리트
  3. 세계화를 견디며, 스위스 직업 훈련
  4. 세계화의 딜레마, 탈출을 꿈꾸는 청년

홍세화를 추모하며

  • 인터뷰가 있던 날은 홍세화 선생님께서 별세하신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상헌 박사께 ‘홍세화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에 관해 여쭤봤습니다. (편집자)

“홍세화 선생님은 ‘똘레랑스'(tolérence: 나와는 다른 타자의 ‘다름과 차이’를 관용)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홍세화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게 똘레랑스일까 싶어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삶의 태도가 존경받아야 하지 않나 싶어요. 제가 주목한 건 그런 삶의 태도예요.

홍세화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처럼, 좌파로 생각하는 것과 좌파로 사는 것은 달라요. 본인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않으셨죠. 많은 분들을 만나셨고, 특히 젊은 사람들도 넓게 만나는 삶을 사셨어요. 말과 글과 삶을 통합하는 자신감이 있으셨고, 그래서 누굴 만나도 흔들리지 않으셨을 거로 생각해요.

홍세화 선생님의 책이나 글보다도 그 실천으로 존경받아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그 실천이 항상 겸손하고 따뜻했다는 것으로 더 오래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상헌, 2024.04.19.)

고 홍세화 (1947년 12월 10일~2024년 4월 18일). 2012년 당시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제네바 오전 8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의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인트로 & 2분 요약

  • 오늘 인터뷰 주제는 세계화의 수혜자 대도시 엘리트(고숙련 노동자)입니다.
  • 인터뷰 주요 참고 자료는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2018, 한글 2020)입니다.
  • 이 인터뷰를 위해 [자본주의의 미래]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읽으면 좋습니다.
  • 이 글은 ‘요약’입니다. 제대로 된 지식을 요약 형태로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짬이 나신다면, 본문을 직접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나눠 읽으려면, 소셜 링크로 기억해 두시는 것도 권합니다.

오늘 질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세계화의 열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혹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2.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인 ‘대도시 엘리트’에게 그 소득과 ‘위치’를 결합해 과세할 수 있을까?
  3. 세계화로 파괴된 공동체 회복 방법, ‘복원’할 것인가? ‘재구성’할 것인가? 그 둘의 차이는 뭔가?

1980년을 기점으로 대도시와 지방도시의 격차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런던, 뉴욕, 도쿄, 파리, 밀라노는 번성했지만, 셰필드와 스토크, 디트로이트는 세계화 경쟁에서 뒤쳐지며 쇠락했습니다. 세계화의 성과는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엘리트)에 집중됐습니다. 그들은 대도시의 ‘집적 이익’을 누렸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세계화를 주도한 대도시와 지방도시의 인구 추이입니다.

  • 런던: 677만→898만 (1990년→2019년)
  • 뉴욕: 732만→833만 (1990년→2022년)
  • 도쿄: 1162만→1396만 (1980년→2021년)
  • 디트로이트: 102만→62만
  • 클리블랜드: 50만→36만
  • 셰필드: 52만→58만(대학과 지식산업 결합 정책으로 다시 성장, 이상 세 도시는 1990년→2022년)

폴 콜리어는 대도시의 집적 이익이 대도시에 집중된 인프라와 수많은 시민이 기능적으로 상호 결합해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수 시민은 그런 집적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고숙련 노동자, 즉 엘리트가 그 집적 이익(‘경제적 지대’)을 차지한다고 지적하죠. 그래서 콜리어는 “소득을 대도시라는 위치에 결합”해서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대해 이상헌 박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1. 타당성? ‘위치’에 과세한다는 콜리어의 이야기는 일견 황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2. 현실성? 다만, 이 주장은 영국 안에서도 급진적이다. 현실성은 적어 보인다.
  3. 우리에게는? 아직 과세율을 높이는 정도의 고민 단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적용은 고사하고 논의조차도 힘들 것 같다.
  4. 왜 이런 주장을 할까? 세계화로 인해 가치와 공동체가 파괴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있다는 건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다. 가령 마크 카니의 [초가치] (2021, 한글 2022)도 [자본주의의 미래]와 함께 이런 세계화 비판론의 흐름을 보여주는 책이다. 특히 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5. 세계화로 파괴된 공동체 회복 방법은? 1) 하나는 ‘공동체 복원론’. 우리 안에서 파괴된 것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내국인” 중심의 사고다. 2) 다른 하나는 ‘공동체 재구성론’. “외국인”을 그 공동체 일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다. 콜리어는 이민이나 이주노동에 관해 조심스럽고 모호한 태도인데, 복원론에 좀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복원론이 불가능하고, 재구성론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상헌의 ‘제네바 오전 8시’ [ep. 19]

세계화의 열매, 대도시 엘리트
(세계화 2편)

질문, 정리: 민노

안내 및 알림

– 이 글은 2024년 4월 19일 금요일 오전 8시~9시 10분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가독성을 위해 질문 없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세계화의 열매: 대도시, 엘리트

폴 콜리어는 세계화에 따른 자본주의 발전론의 수혜가 대도시에 집중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특히 1980년을 분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비교적 균형적으로 발전했던 대도시와 지방도시의 격차가 극적으로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대도시에는 ‘집적 이익’이 생겼다. 집적 이익은 1) 막대한 물리적 인프라 2) 유기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사람 3)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하는 법의 지배라는 ‘공공재’에 의한 것이었다. ‘공공재’이므로 그로 인한 수익이 소수에게 집중됐다면 과세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 집적 이익은 ‘지대’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콜리어는 대도시의 집적 이익이 과거에는 토지주에게 집중됐다면, 세계화가 진행하고 심화하면서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엘리트)에게 점차 그 지대가 옮겨갔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에게는 그런 지대 추구 행위도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대도시의 집적 이익은 물리적 인프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법의 지배에 의해 생겨난다. 이것은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다. 즉, 평범한 수많은 시민이 대도시의 집적 이익을 만든다. 하지만 그 이익은 평범한 시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토지주와 엘리트가 나눠 가진다.

콜리어가 말하는 대도시의 집적 이익


도시는 이러한 갖가지 연결을 구현하는 인접성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도시가 그처럼 연결된 인접성을 갖추려면 지하철, 도로, 고층 건물, 공항, 철도망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1980년대까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도시들만 그러한 시설을 갖출 여력이 있었다. (중략)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함으로써 획득한 이득은 결국, 높아진 임금에서 이 임차료(rent, 경제학 용어로 ‘지대’)를 뺀 값이다. (중략)

집적에서 발생하는 이득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창출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집단적 성취이다. 이것을 바로 경제학자들이 공공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 그들(토지주, 고숙련 노동자)의 소득은 ‘경제적 지대’로 분류된다. (중략)

자, 누가 집적의 이득을 획득할까? 그리고 과연 그들은 그 이득을 수취할 자격이 있을까?(헨리 조지의 문제 의식, 편집자) (……) 직접의 이득은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노동자와 토지주가 나누어 가진다. (……) 핵심은 집적의 이득을 수취할 자격이 모호함 없이 분명한 사람들은 그 이득을 창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활동을 담당하는 딱 하나의 집단뿐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바로 집단적으로 법의 지배를 지탱하는 사회 곳곳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득에서 아무것도 수취하지 못한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제7장 지리적 분단: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2018, 한글 2020) 중에서.

대도시라는 ‘위치’에 과세하기?

우리는 부유층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 엄청나게 유익한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집단적 노력의 결실을 그저 따먹기만 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주에게 귀속되지 않고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귀속되는 경제적 지대가 많다는 점이다. 이 지대를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려면 과세 혁신이 필요하다. 즉, 세율을 지금처럼 단지 소득만으로 차등화할 것이 아니라, 고소득에 대도시라는 위치를 결합하여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

폴 콜리어, 위와 같은 책.

일리는 있다: 우리나라 ‘지방교부금’과 유사


콜리어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미 그런 취지의 세금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지방교부금(국가가 지방교부세법의 규정에 의하여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운영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위하여 지급하는 교부금으로서 지방교부세라고도 한다. 기획재정부 참고)이 그런 성격의 세금이다.

외국에도 그리고 영국에도 우리나라 지방교부금과 같은 요소가 있다. 콜리어는 더 강력하게 하자는 거다. 책에서는 “고숙련 노동자”로 번역했지만, ‘엘리트’다. 사실 도시에 이동한 것만으로도 수익이 아주 높아졌다면, 경제적으로는 ‘지대’라고 볼 수 있다.

그 지대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추가 수익이 과세 대상이 된다. 가령 지방에서 300만 원을 벌었는데, 대도시에서는 별다른 특별한 노력 없이 1000만 원을 벌었다면 그 700만 원에 과세하고, 그 세금을 지역에 분배해야 한다는 건데, 우리나라 교부세에 빗대면, 교부세를 좀 더 엄밀하게 과세하자는 것과 유사하다.

단, 이런 과세는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과세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에 과세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노동에 과세하는 것’인데, 노동을 대상으로 하는 과세 원칙은 없다. 그렇게 하면 과세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개념적으로도 규모로도 아주 어려워진다. 현실적으로도 너무 어렵다.

대도시 이동을 ‘지대’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과세론 관점에서 보면, 이동에 다른 수익 증가를 과세 대상으로 잡기 힘들다. 만약에 ‘이동에 따른 추가 수익’을 지대로 해석해서 과세하자고 하면 이에 동의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걷은 세금을 어디에 얼마만큼 보내야 할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대도시라는 위치에 과세하기? 사실상 특정한 위치의 노동에 과세하겠다는 건데, 그런 세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어떨까?


영국 안에서도 아주 급진적인 주장이다. 그런데 콜리어가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지역의 ‘가족과 공동체 복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공동체라는 가치를 보면 콜리어를 보수적으로 볼 여지도 많다. 콜리어는 목적(가족, 공동체)은 보수적이면서도 그걸 실현하는 방식은 아주 급진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콜리어는 정말 진심이다. 진심이 담긴 주장이다.

참고로, 존 케이(콜리어와 함께 ‘탐욕은 죽었다’를 공저, 아래 참고 이미지)는 경제를 너무 화폐 중심으로 사고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 해법으로 공동체, 가치에 중심을 둬야 한다는 주장인데, 경제학의 큰 흐름 중 하나가 경제학이 비화폐적인 가치를 무시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는 거다. 그런 흐름이 있다. 여기에는 콜리어와 케이뿐만 아니라 장하준도 그런 흐름에 속해 있다. 특히 이들은 (가족보다는) 공동체와 가치를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선?


한국에선 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지금은 과세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 노동의 이동에 따른 위치에 과세한다는 건 적용은 둘째치고, 논의조차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논의를 진행하려면, 일단은 세금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것부터 제대로 되어야 새로운 걸 넣을지 말지 논의할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는 그 기본도 안 된 상태로 봐야 한다. 즉, 기본적인 과세 형평성도 갖춰져 있지 않은데, 대도시라는 위치에 고소득자의 소득을 결합해 과세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와 가치

가령, 영란은행(잉글랜드은행) 총재였던 마크 카니의 [초가치]는 교황의 ‘와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으로 사람들을 불러서 이야기한다. 여러 현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제프리 삭스나 마크 카니도 그런 경제 관련 원탁회의에 초대된 거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와인’과 ‘그라파’ 이야기


나도 그 원탁에 몇 번 갔는데, 아주 크고 멋지다. (웃음) 그 원탁에서 교황이 초대한 귀빈들에게 말한다. 이제 당신들은 식사할 거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에게 와인을 줄 거다. 와인 종류는 아주 다양해서 다양한 음식과 짝을 맺는다. 가령 백포도주는 생선과 어울리고, 어떤 포도주는 그에 맞는 어떤 치즈에 어울린다는 식으로. 그렇게 와인은 참 다양하다. 그렇게 서로 어울리는 와인과 음식의 조화를 우리는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가서 식사를 마치면 ‘그라파’라는 게 나오는데, 그게 독주다. 처음에는 애피타이저를 먹고, 그 다음에 샴페인 같은 걸 먹고,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메인 요리, 디저트 그리고 그 다음에 ‘그라파’라는 아주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주를 마신다. 그런데 ‘그라파’는 어떻게 만드는냐면, 와인을 한 번 더 증류하면 알코올 농도가 높아지면서 독주인 그라파가 된다.

이탈리아의 식후주, 독주 ‘그라파(Grappa)’

시장은 와인(휴머니티)을 증발시키고 그라파(이기심)만 남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와인과 그라파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러면 ‘휴머니티는 뭐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답한다. 그건 와인 같은 거라고. 인간성이라는 건 때론 이기적이고, 때론 창조적이고, 단조롭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고, 감성적이기도 하고, 지적이기도 하다. 정말 인간성은 와인과 같다. 그렇게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장이라는 건 인간성의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딱 하나, 이기심밖에 없다. 인간의 다양한 휴머니티를 다 증발(증류)시켜서 ‘그라파’ 같은 독주만 남겨 놓는다. 그게 바로 현대의 시장이고, 세계화된 현재다. 그렇게 증발한 휴머니티를 시장에 다시 되살려 불러오는 것, 그라파라는 독주를 다양한 와인의 맛으로 돌려 놓는 것, 그게 바로 당신들이 할 일이다. (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은 그야말로 통찰이 넘치는군요!)

그렇게 시작하는 책이 바로 [초가치]다. 그래서 원제가 ‘가치(들)’ 즉 ‘value(s)’인데, ‘초가치’라는 한글 번역본 제목은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진 않다.

인간성(휴머니티)을 다양한 와인에 비유한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책을 쓴 마크 카니. 책 제목을 ‘VALUE(S)’라고 한 취지를 제대로 옮겼다면, ‘초가치’라고 번역하기보다는 ‘가치(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세계화를 비판하는 일군의 학자들


이렇게 시장이 인간의 이기심만을 중심으로 경제학을 해석하는 경향에 반대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흐름에 속한 경제학자들이 있다. 흔히 비주류 경제학이라고도 말하는데, 폴 크루그먼(1953년생)과 같은 주류 경제학에 속한 사람들도 1980년대 이후의 세계화를 초세계화로 구별하면서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흐름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급진주의의 세례를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경제학자들의 시각은 좀 급진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크 카니(1965년생)도 이들보다는 어리지만 그렇고.

세계화에 비판적인 일군의 학자들. 왼쪽부터 아제모을루, 그의 공저 [좁은 회랑], 마크 카니의 [초가치], 그리고 브렛 크리스토퍼의 [렌티어 자본주의]

한국에서 이름값이 높은 경제학자들이 대체로 보수화하는 데 비해, 외국에서는 아직도 좀 독자적이고,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이 있다. 지금은 젊은, 40대의 피케티가 그 대표적인 예고. 그런데 한국은 아무래도 그런 비판적 전통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복원이냐 재구성이냐

왜 콜리어는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주장하는 걸까. 앞서도 말했지만,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그의 마음이 그만큼 진심이라서 그런 것 같다. 공동체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재정(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 돈은 다 대도시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대도시라는 위치에 과세하자는 과격한 주장까지 한다. 그래야 (지역) 공동체를 다시 살릴 수 있으니까.

복원(배타주의)이냐, 재구성(개방성)이냐


여기서 그 공동체를 ‘복원’할 거냐, ‘재구성’할 거냐라고 물어볼 수 있다. 복원이냐 재구성이냐에 따라 그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이 갈린다. 콜리어의 담론은 재구성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복원 같기도 하고… (웃음) 콜리어는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를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지만, 아주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한다. 책에서도 그런 묘한 어감이 느껴진다.

나는 가치적으로도 공동체의 재구성, 가족의 재구성이 맞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콜리어의 이야기는 좀 모호하긴 하다. 가족이나 공동체를 복원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재구성하자는 것인지…

좌우나 보수나 진보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복원으로 가자는 거라면 보수주의로 갈 수밖에 없고, 재구성으로 가자면 아무래도 좀 더 개방적으로 이주노동자, 이민자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복원’은 현실적이지 않다


내가 보기에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건 현실적인 방향 같진 않다. 특히 한국처럼 공동체의 물적 토대가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는 건 공동체의 재구성이다. 공동체, 1인 가족까지 포함해서, 어떻게 서로 연계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가족의 재구성은 상대적으로 큰 의미가 없고, 개인들의 연대와 사회적 공동체가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최소한 10년은 지켜볼 수 있는 긴 호흡으로


재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경제’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권의 부침에 따라 그 조직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도 잦다. 정부가 문제 삼으려면 언제든 얼마든지 회계상의 문제들을 이유로 지원을 끊고, 더 나아가 그런 문제가 마치 대단한 비리인 양 부풀려서 대서특필하기도 하고, 그러면 또 그런 기사들을 보고 여론은 확 쏠리고….

공동체는 최소 10년은 지속해야 하는데, 이런 풍토에서는 그런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민노씨도 ‘지역소멸’을 특집으로 취재해 봐서 알겠지만, 지역에서 공동체 운동하고, 사회적 경제 실험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게 그런 문제다. 1년이라는 아주 짧은 예산 단위, 실적 위주 보여주기식 행정. 그래서 행사, 이벤트 같은 걸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지역의 공동체를 단단하게 키우고, 성장시키면서 확산하는 게 아니라, 외부 손님맞이에 그친다.

공동체의 재구성, 우리 자신에게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개인의 연대를 확장하는 아이디어는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공동체를 재구성하려는 아이디어와 방법론은 외국 사례를 찾을 게 아니다. 공동체는 시간의 함수, 역사의 함수, 구체적인 공간과 인간의 함수를 포괄한다. 계속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외국 것이 좋으니까 배우자는 건 우리만의 공간성, 역사성, 문화성, 그 시간과 공간과 역사의 함수를 무시하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실패했던 작업들까지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지역적 차이가 있겠지만, 상호 배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책적으로도 이런 공동체 실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가령, 사회적 경제와 관련해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본다. 울산이나 포항이나 이런 거대한 지역적 단위가 아니라 아주 작은 단위에서 그런 움직임들, 다양한 시도를 지원하면 좋겠다.

콤팩트시티를 추구하는 도야마시(富山市). 인구는 약 40만. 참고 링크.
도야마 공동체를 위한 여러 방법 중 ‘콤팩트시티’ 전략을 채택한 도야마시

(세계화 2편 끝, 세계화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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