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클릭하면 이동. 오른쪽 아래 화살표(↑) 누르면 다시 제자리로. (약 15분)
세계화 특집.
[제네바 오전 8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의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 오늘 ‘제오시’ 인터뷰의 주제는 세계화, 포퓰리즘, 가치와 공동체 그리고 지역입니다.
- 인터뷰 주요 참고 자료는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2018, 한글 2020)입니다.
- 이 인터뷰를 위해 [자본주의의 미래]를 읽을 필요는 없는 없습니다. 물론 읽으면 좋습니다.
- 이 글은 바쁜 독자를 위한 ‘요약’입니다. 본문을 직접 읽으시길 권합니다. 글이 좀 길다면, 잊지 않기 위한 소셜 링크도 권합니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왜) 파산했는가?
콜리어는 왜 세계화를 비판하는가?
콜리어의 세계화 비판에서 주의할 점 무엇인가?
‘그들의’ 세계화 비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헌의 답변을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 세계화는 경제를 공간과 분리해서 운영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 콜리어는 세계화로 상징됐던 자본주의 발전론이 사실상 파산했다고 말한다.
- 세계화를 주도한 엘리트는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면서 ‘공간’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한다.
- 하지만 인간은 ‘그 공간’, 그 지역과 문화 속에서 뿌리내리고 산다. 인간의 노동은 컴퓨터 속 숫자가 아니다.
- 인간의 노동은 그 공간, 역사와 가치가 축적된 그 지역 속 사람들과의 관계, 신뢰와 책임 등의 도덕적 요소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다.
- 그래서 콜리어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아니라 경제의 윤리적 측면과 가치적 측면을 강조하는 [도덕 감정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 단, 콜리어의 세계화 비판은 양가적이다. 영국인, 특히 콜리어의 고향 셰필드 같은 쇠락한 공업지역 노동자에게 세계화 비판은 공동체성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따뜻한 ‘동료시민’의 목소리다.
- 하지만 비(非)영국인, 특히 제3세계 노동자, 특히 이주노동이나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과 도전적인 이동을 막는 장벽과 배타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 이민자와 이주노동자는 이들과 대체 가능한 ‘도착 국가’ 노동자의 갈등을 전제한다. 사회적 통합 밀도가 높은 사회에서는 ‘우리끼리 아웅다웅’이지만, 통합 밀도가 낮은 사회에서는 ‘내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빼앗은 타자’가 된다. 그런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포퓰리즘의 정서적 본질을 구성한다.
- 우리에게는? 가치와 공동체를 강조하는 세계화 비판 담론은 1) 공동체의 물적 토대가 거의 사라지고 2) 규모에 비해서도 노동 이동성이 유독 강한 한국에는 그대로 접목하기 쉽지 않다. 다만, 공동체에 관한 고민이 부족한 우리에게 콜리어의 세계화 비판은 여러 가지 화두를 제공한다.
폴 콜리어의 [자본주의의 미래]를 읽었다. 나는 경제 문외한이다. 이론으로도 실물로도 경제에 관해선 아는 게 없다. 내 삶은 경제의 반대말에 가깝다. 나에게 경제는 여전히 낯설고 무서운 어떤 것이다.
[정부가 없다]의 저자 정혜승은 책의 결론으로 ‘그렇다면 어떤 사회, 어떤 정부이어야 하는가’에 답한다. 그 책에서 처음 콜리어를 접했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마치 자신의 ‘시그니처’처럼 사용하는 ‘사회적 모성주의’를 정혜승은 자기 책의 결론을 위해 빌려왔다. [정부가 없다]에 관한 저자 인터뷰에서 정혜승은 자연스럽게 ‘다정함’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고, ‘사회적 모성주의’에 이끌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폴 콜리어의 책을 추천했다.
세 번 읽었다. 회독이 늘수록 아주 희미했던 풍경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꽤 중요한 생각들이 담긴 책이구나 하는 막연한 호감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로 읽을 땐 부분적으로 이질감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 어떤 함정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생겼다.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어쩌면 이 책에 담긴 생각은 좀 더 다양한 조건 속에 있는 ‘여러 당사자’ 입장으로 읽어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의 경쟁에서 뒤쳐진 영국의 쇠락한 철강 도시 셰필드. 그 셰필드에 사는 영국 국적 노동자에게는 이 책은 공동체의 희망을 제안하는 따뜻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꿈꾸는 제3세계 누군가에게는 그 ‘도전적인 이동’을 차단하는 이론적 방어막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에 관해 제대로 질문하려면 그것에 관해 알아야 한다. 아직 제대로 된 질문을 할 만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헌 박사라면 그 부족한 질문에 ‘찰떡같은’ 답을 주리라 믿었다. 이 인터뷰는 그 부족한 질문에 관한 이상헌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한 번 더 이어질 예정이고,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아래는 내가 이상헌 박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정리해서 전달한 질문의 일부다. 그리고 이 글에 정리된 답변은 대체로 이 질문들에 관한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총평 성격의 답변은 이상헌과의 또 다른 인터뷰(길 잃은 중대재해법 논쟁: 22가지 길라잡이)에서 다시 가져왔다.
- 선진국인 영국 내국인을 기준으로 할 때 사회적 모성주의는 공간적 특성과 그 공간에 밀착한 노동을 강조함으로써 또 그 내국인 사회 집단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지역이라는 인간 특유의 정서적 울타리와 국경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세계화의 무차별성과 획일성, 폭력성에 대한 항의와 비판을 내포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 하지만 제3세계, 가령 유럽인에게는 아프리카인, 우리에게는 동남아시아 외국인을 기준을 볼 때에 사회적 모성주의가 강조하는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공간에 밀착한 ‘전통과 관습, 정신적 요소들이 존재하는’ 노동의 강조는 이주 노동자 반대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개인의 차원에서는 ‘지구촌’이라는 가능성의 토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자아실현)을 실험하고 싶을 수 있는데, 콜리어의 담론은 이런 ‘지구촌 노마드’의 자아실현이나 도전에는 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나 싶고요.
- 좀 더 과장하자면, 트럼프가 쇠락한 러스트벨트 노동자의 분노에 편승해서 멕시코에 장벽을 건설하는 그 명분과 이론으로 악용할 가능성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이에 관한 이상헌 박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상헌의 ‘제네바 오전 8시’ [ep. 18]
세계화의 황혼, 포퓰리즘
(세계화 1편)
질문, 정리: 민노
안내 및 알림
– 이 글은 2024년 4월 13일 금요일 오전 8시~9시 사이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글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 없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사회적 모성주의
사회적 가부장주의 / 사회적 모성주의
(…)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실패를 되풀이했다. 좌파는 국가가 가장 잘 안다고 간주했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전위대가 지휘하는 국가가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유일한 주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윤리적 능력을 터무니없이 과장했고, 덩달아 가족과 기업의 윤리도 무시했다. 우파는 정부 규제의 사슬을 끊으면-이 말은 자유 지상주의의 애창 가사이다-이기심의 능력이 해방되어 모든 사람들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는 시장의 마법을 터무니없이 과장했고, 덩달아 윤리적 제약의 필요성도 무시했다. 우리에게는 능동적인 국가가 필요하지만, 좀더 겸손한 역할을 수긍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시장이 필요하지만, 윤리에 단단히 뿌리 박은 목적의식으로 통제되는 시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내가 제안하는 정책들을, 더 나은 용어를 찾지 못한 탓에 사회적 모성주의(social maternalism)로 이해하고자 한다. 사회적 모성주의에서 국가는 경제와 사회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하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국가의 과세정책은 수취할 명분이 없는 이득을 힘센 자들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하겠지만, 신난 듯이 부자들의 소득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의 규제정책은 경제적 진보를 가져오는 경쟁의 “창조적 파괴”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보상받을 길을 열어주되, 자본주의가 본연의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제1장 새로운 불안
우선 [자본주의의 미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회적 가부장주의나 사회적 모성주의라는 조어의 맥락은 이렇다. ‘가부장주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영미권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기는 하다. 국가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이며, 시혜적인 접근을 강조할 때 ‘가부장주의’라고 쓴다.
가령, 자녀가 부모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다. 아버지는 ‘야, 너 내가 만 원 줄 테니까 이 돈으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엄마는 ‘이 돈으로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알았지?’라고 한다. 그런 차이라는 거다, 결국 (응? 별거 없네?) 그렇다. 별거 없다(웃음). 다소간 마케팅적 조어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무슨 ~주의’를 붙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이 책에서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앵글로-색슨 전통에서 국가주의적 억압과 시혜주의, 그러니까 국민의 일원으로서의 국민의 조건과 그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면, 사회적 모성주의는 그런 가부장주의에 반대해서 공동체 일원이기만 하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보살피는 것에 가깝다. 다만 그럼에도 공동체 일원으로서 서로에게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호혜성(상호주의)은 전제돼 있다.
그들만의 세계화
- ‘그들만의 세계화’ 항목은 길 읽은 중대재해법 논쟁: 22가지 길라잡이에서 이상헌의 답변을 다시 가져온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새 인터뷰에서 정리한 내용이다. (편집자)
세계화는 경제를 공간에서 분리시켰다
폴 콜리어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세계화로 상징됐던 자본주의 발전론이 사실상 파산했다고 말한다. 그게 콜리어의 핵심 주장이다. 그 파산의 이유가 뭔가. 세계화는 자본주의와 시장이라는 게 어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사는 공간과 분리돼서 경제를 운영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런 세계화의 글로벌 엘리트는 항상 자기들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마치 다보스 포럼에 모인 사람들처럼. 그들은 돈이 어디에 있는지, 일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일자리 만들고 투자하고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그들만의 세계화다.
경제가 공간에서 분리되면 포퓰리즘이 출현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사람이라는 건 자기가 사는 공간에 뿌리를 박고,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공간이 중요하다. 그걸 통해서 일도 하고, 사회도 경험한다. 이 둘(경제와 공간)을 분리하면서 오늘날 포퓰리즘이 생겼다는 게 폴 콜리어의 생각이다.
그런 환경에서 트럼프가 출현한다. 세계화 엘리트에는 좌파(리버럴)도 많다. 왜 미국 농부는 이렇게 시위를 많이 할까? 왜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역) 노동자는 좌파(미 민주당)를 싫어할까? 이들은 심지어 왜 트럼프 같은 비윤리적인 거짓말쟁이를 좋아할까? 민주당 도시 잘난 것들은 우리들(농민, 쇠락한 공업지역의 백인 ‘촌뜨기’)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자기 잘난 이야기만 하니까. (‘경제와 공간의 분리가 포퓰리즘의 원인’인 이유는 아래 항목에서 별도로 상술 예정. 편집자)
공간과 시간, 공동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미래]가 말하는 것은 이 공간의 중요성, 시간의 중요성 이런 요소를 복원하는 어떤 공동체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사회적 모성주의’를 복원해야 자본주의의 미래가 있다는 게 폴 콜리어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폴 콜리어는 영국 노동당(특히 토니 블레어의 제3의길, ‘신노동당’)에 비판적이다.
폴 콜리어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상호 반응을 통해서 신뢰를 만든다. 그런 신뢰가 시장 경제를 만드는 핵심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관점과 매우 다르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상호 작용하며 그런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과 신뢰의 요소를 제거하고, 가시적인 경험적 성분만으로 자본주의를 보면 그 핵심적인 작동 방식을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콜리어는 말한다. 그 주장을 위해 선거 이야기도 하고, 이것저것 이야기한다. 폴 콜리어의 이 책은 한국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꽤 많다.
세계화 회의론: 가치와 공동체
가치와 공동체를 강조하는 큰 흐름
세계화에 회의적인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있다. 우선 자발적 커뮤니티다. 공동체를 아주 강조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치다. 가령 라잔(Raghuram G. Rajan,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은 [제3의 기둥] (The Third Pillar, 2019, 한글 번역본 미출판)에서 지역의 자발적 공동체를 강조한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제3의 기둥인 지역 공동체가 균형 있게 작동해야 한다는 취지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 마이클 샌델도, 우리말 번역이 좀 미묘하긴 한데, ‘커먼 굿'(common good; 공동선)을 강조한다. 이들은 단순하게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이나 국가가 아니라 ‘가치 공동체’를 강조한다. 시장과 국가 간의 긴장이 있을 때 그 사이에 뭔가 새로운 공간, 가치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뭔가를 마련해야 한다는 흐름과 움직임이다.
‘급진적 유토피아니즘’을 피력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한글 2017, 영어 2016)으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 (한글 2021, 영어 2019)에서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본능만 있는 게 아니라 이타적인 본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흐만은 공동체나 가치에 기초한 행위 역시 인간적인 행위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세계화나 엘리트주의에 휩쓸리면서 그런 인간 본연의 이타성이 억압됐다고 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가치 지향과 공동체적 인간성까지 파괴했기 때문에 세계화에 의한 불안과 긴장, 포퓰리즘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2.0
좀 더 최근에는 마크 카니(전 영국 중앙은행 총재)가 은퇴하고 낸 책 제목이 [벨류] (한글 번역본 ‘초가치’, 2022)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도덕적 가치를 아주 강조한다. 라잔이 말하는 ‘공동체’나 카니가 말하는 ‘가치’는 일맥상통한다. 카니는 공정, 책임, 연대, 겸손과 같은 가치에 기반한 세계화를 해야 진정한 세계화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자본과 자유로운 기업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거기에서 나오는 경제적 혜택은 ‘세계화’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세계 모든 시민이 골고루 누린 게 아니다. 개개인에게 세계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편익을 제공하거나 어떤 피해가 있는지 기본적인 고민이 없었다는 이들의 기본 인식이다.
그래서 반(反)세계화 흐름이 생겼던 건데, 여기에서 주의할 건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세계화 자체에 반대하기보다는 현행 방식의 세계화로는 안 된다는 거다. 가령, 마크 카니의 가치에 바탕한 세계화처럼 세계화 1.0은 실패했으니 세계화 2.0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콜리어의 세계화 비판, 그 양가성
콜리어는 좀 다르다
콜리어는 세계화 회의론이라는 일련의 흐름 속에 있다. 이들은 2000년대 이후 엘리트 주도의 세계화가 특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콜리어는 이런 흐름 속에 있긴 하지만 좀 다르다.
콜리어는 지역 중심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급진적인 차원도 일부 포함하지만, 이민이나 이동에 관해서는 아주 보수적이다. 영국인 입장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래서 콜리어를 양가적이라고 지적한 건 아주 정확하다.
콜리어는 세계화 회의론의 주류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치 기반의 세계화를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이동성과 노동(인간)의 이동성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콜리어는 자본 이동을 100% 보장할 수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 이동을 100% 보장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게 첫 번째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노동을 이동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측면도 있다. 이게 만약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하냐는 질문에 관해 콜리어는 고민하는데, 이걸 고민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일자리’에 관한 관점 자체가 다르다. 일자리는 단순히 돈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소통하는 방식,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자리는 개인이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사회가 어떤 개인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 방식이 흔히 ‘일자리’를 통해 표현된다. 그렇지 않나?
고전적인 사회학 방식으로 말하면, 일자리는 돈벌이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게 아주 중요하다. 일자리는 건 개인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가족에게도 아주 중요하다. 공동체에도 중요하다.
일자리의 물질성(지역성)
일자리는 어떤 특정한 지역과 결합한다. 그런 ‘물질성’을 가진다. 그런 공간적 결합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일자리의 물질적 속성을 콜리어는 강조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일자리가 다른 지역에 있으니까 거기로 사람이 이동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사는 지역에, 그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콜리어는 일자리를 위해 사람이 이동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사람에게 오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관점으로 일자리 정책 기조를 잡아야 한다는 거다. 콜리어와는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사람이 이동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사람에게 가게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계속 있긴 했다. 가령, 영국의 전후 복지 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베버리지 보고서(1942)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자리를 사람에게 오게 해야 한다는 건 굉장히 급진적 아이디어다. 일자리 보장제라는 급진적 정책이 있는데, 사람이 어디에 있든 그 사람이 원하면 국가나 사회가 일자리를 그 사람에게 만들어줘야 하는 그런 의무가 있는 방식이다. 그걸 ‘종합 교양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그 아이디어하고 바로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자리를 사람에게 오게 해야 한다는 건 급진적이다.
그런데 진보적 좌파의 일반적인 특징이 ‘장소’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제 노동자 연대 같은 마르크스적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지역과 민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기회주의자나 계량주의자로 오히려 비판받았다. 옛날에는 특히 더 그런 게 심했다(웃음). 그래서 콜리어의 생각은 전통적인 좌파의 관점으로 보면 또 묘하게도 보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극우집단이 더 급진적일 때도 적지 않다
일자리를 장소와 결합시켜야 한다는 건 참 오묘하게도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보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유럽이나 영국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는 아주 논쟁이 될 만한 주제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지금 유럽에서 극우가 득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우 정치세력이 왜 공동체를 강조하는지, 그리고 왜 이주나 이민에 반대하는지를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미묘한’ 논의가 들어오면 정치 세력이 분열되고, 좌파 내부와 우파 내에서도 이에 관한 입장들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이유가 짐작이 될 정도로 그 오묘한 맥락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포퓰리즘이 탄생한 이유
통합 밀도와 통합 비용은 ‘반비례’
콜리어는 이민이나 이주노동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경제적 이동과 이주가 촉발하는 ‘통합’의 문제를 지적한다. 경제적 필요만을 내세워 이동하면, 통합의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가령 이주노동자가 한 사회 속에 통합하지 않고 겉돌면, 결국 전체 공동체에 균열과 분열이 생기고 통합의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로 악화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이주노동자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통합에 실패하면, 즉 통합 밀도가 낮을 수록 ‘저 외국인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배타적 생각을 품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적 통합 밀도가 높아지만 그런 불만과 배타적 공격성은 준다. 사회적 통합이 잘된 사회에서는 내국인이나 이민자 혹은 이주노동자나 ‘우리끼리’ 아웅다웅하는 게 되지만, 통합이 엉성하고 느슨한 상태에서는 ‘원래 내 것이어야 할 소유, 지위,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낯선 타자’가 된다.
그 박탈감, 그 피해의식이 포퓰리즘의 본질
그런 심리적인 배경 속에서 이민자, 이주노동자와 경쟁 관계에 있는 주로 그런 외국인에게 대체 가능한 (주로 질 낮은)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바로 포퓰리즘으로 자란다. 즉, 그런 손해봤다는 생각이 극우 포퓰리즘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 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 (웃음) 고 정태인 박사가 이런 논의를 아주 활발하게 했는데, 지금은 그런 논의가 많지 않아서 아쉽다.
우린 공동체의 물적 토대가 거의 사라졌다
한국에서 더 어려운 점이 뭐냐면 논의 출발점을 찾기가 힘들다는 거다. 공동체의 근거지가 거의 사라졌다.
유럽에는 아직 지역 공동체가 남아 있다. 특히 대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런 공동체적인 게 많이 남았다. 가령 영국에는 펍(Pub; Public House의 약자. 영국에서 발달한 술집. 지역 사랑방 역할) 문화가 있어서 항상 거기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그런 게 있다.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형태는 좀 다르지만 그런 공동체 문화가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은 행정단위로서 지역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역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걸 정서적인 사회적 공동체로 보기는 좀 힘들다. 그리고 또 하나 차이가 나는 게 있는데 주거 형태다. 아직도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나 이런 걸 가보면, 거기도 물론 아주 큰 대도시긴 하지만 아직도 약간의 공통체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는 그런 공동체적 요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라잔이 말하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기둥으로서 공동체, 그 물적 토대가 한국에는 거의 남아 있질 않다. 그래서 좀 애매하다. 그래서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논의를 한국에 접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국, 인구 규모 큰데도 노동이동성 아주 높은 나라
우리나라는 노동이동성이 아주 높은 나라다. 우리는 임금 격차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쉽게 쉽게 이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전에 내가 강원도형 최저임금이 비현실적이고, 게토화 위험이 크다고 말한 게 바로 이런 이유다. 노동 이동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마치 홍콩이나 싱가포르 정도 규모의 도시국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인구 5천만 명 수준의 나라에서는 아주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콜리어를 포함해서 세계화 비판 담론에서 ‘공동체’에 관한 강조는 우리에게 직접 접목하기는 쉽지 않지만, 화두로서는 의미가 있다. 특히 공동체에 관한 고민이 부족한 우리로선 진지하게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이주노동자가 좋으냐 나쁘냐 수용할 거냐 거절할 거냐, 그런 논의를 할 여건이 되질 않는다. 무슨 소리냐면, 이주노동자는 ‘상수’다. 지금 당장도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노동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유럽 상황은 반면교사다. 콜리어가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영국 상황을 해결해 보려는 정책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물론 그 해결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콜리어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주로 노동당에 훈수 두는) 정치평론가이기도 하다. 콜리어가 공동체와 지역을 강조하는 건 학자적 비전이면서 동시에 정치 참여적 비전이기도 하다.
나는 앞서 한국 이민청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이주노동자를 ‘수입’하는 절차나 그들이 절차를 어겼을 때의 법적 규제에 그 시스템이 한정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비판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주노동자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 ‘시민’으로 봐야 한다. 그런 체계적인 ‘통합 서비스’를 준비하고 제공해야 한다.
- 2024년을 준비하라: 노인-노동시장-이주노동자 묶는 마스터플랜 필요하다 (제네바 오전 8시, 2023.12.27. 중에서 특히 ‘윤석열 정부의 향방…법이냐 경제냐’.
이주노동자는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 낯선 타지가 아니라 우리 경제 시스템의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자, 사회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우리와 통합해서 살아가야 할 이웃이다. 그들은 낯선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동료시민'(사실 ‘동료시민’이라는 말은 외국인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는 약간 배타적 뉘앙스를 풍긴다)이다.
스웨덴과 핀란드 처럼 이민자, 이주노동자와의 성공적인 사회적 통합을 이룬 사회마저도 지금은 극우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포퓰리즘 선동을 일삼는 세력에 정권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처럼 이주노동자와의 통합 시스템이 부실한 나라에서는 지금 당장 이 문제를 최우선으로 준비하고, 외국 사례를 실천적으로 배워야 한다. 시간이 없다.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
경제적 자립과 자율성 확보 어려운 이유
지금까지 여러 번 살핀 것처럼 콜리어는 지역의 공동체적 자산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분권화된 사회의 자산을 중요하게 여긴다. 영국의 지역 선거는 중앙당의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짐으로써 한국보다는 훨씬 ‘덜’ 정치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국에서는 지역과 정치가 더 밀착한 관계를 맺는다.
결국은 지역에 정치적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정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지역에서 어떻게 일자리가 만들어지는가. 하나는 인프라 투자다. 좋게 표현해서 인프라 투자지, 대부분은 건설업자나 지역 유지들이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돈 챙길 수 있는 토목공사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공공서비스다. 한국은 지금 그 두 가지로밖에는 지역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의 그 두 가지 방식으로 돈과 일자리를 끌어오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국 중앙정부에서 지역에 ‘시혜적으로’ 돈을 나눠주는 구조다. 그래도 지역사회 공동체가 중요한 게 뭐냐면, 그런 재원이 확보됐을 때 그 재원을 어떤 원칙과 철학으로 지출할 것인가. 어떤 곳에 돈을 쓸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걸 ‘고민하는 주체’가 바로 지역 공동체다. 그런 고민의 주체가 존재하고 역량이 존재해야 그 지역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게 없으면 그 지역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수직이고 중앙 통제적 시스템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 토목공사를 한다고 치자. 청년층 일자리가 없다 혹은 중장년층이 일자리가 없다, 그러니 그런 분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사업으로 예산을 쓰자. 그런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논의와 합의 그리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지역에 있을까? 없다.
지금은 중앙에서 다 결정해 놓은 상태다. 참여예산제가 있긴 하지만, 다 결정해 놓은 절차에 ‘요식행위’로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 핵심은 사업 자체를 만들 때 그 지역 공동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거다.
지역 사업은 공동체 스스로 (테마파크, 축제 그만하자)
지역 경제 활성화한다고, 맨날 축제하고, 몇십, 몇백 억 쓰고… 정작 우리 동네는 일자리가 없어서 젊은 사람이 없고… 정말 젊은이가 없어서 고민이라면, 축제를 하면 안 된다. 그 축제 준비하는 일자리는 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차지한다. 우리 지역 일자리가 아니다. 축제를 열어봤자 일 년에 고작 며칠, 일이 주일을 위해 그 많은 돈을 쓴다는 건 낭비다.
만약 100억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건지, 100억 예산이면 1년 동안 100명을 고용할 수 있는 큰돈이다. 항구적으로 그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을 기획해야 한다. 매년 100억의 세금을 지역 활성화를 위해 집행할 수 있다면, 그러면 찾아오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그 기회를 찾기 위해 모이고, 거기에는 젊은 사람들도 반드시 포함돼 있을 거다. 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지역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존재와 역량이 필수적이다.
행정에 사로잡힌 공동체
그런데 우리나라 공동체는 이미 행정적으로 포섭된 상태다. 아까도 말했지만, 공동체 논의는 물적 기반이 소실된 상태로 본다. 기존 공간을 재구성하거나 기존 공간을 확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적 경제는 이런 면에서는 아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에 ‘경제적 단위’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단위는 무슨 거창한 게 아니라 먹고살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들조차도 정치화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지역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인 존립 조건 및 지속 가능성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다. 중앙에서도 고민이 필요하고, 지자체에서도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현실적 해법은 어쩌면 싱가포르?
지금까지의 경로를 고려하면, 한국은 싱가포르 모델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싱가포르, 완벽한 중앙집권적 해법
오늘 주제만 놓고 보면 우리의 미래, 우리의 해법은 사실상 싱가포르 모델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싱가포르는 완벽한 중앙집권적 해법을 시스템적으로 완성했다. 모든 개개인의 삶에 국가가 개입한다.
가령, 싱가포르의 사회 주택도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다. 사회 주택이 성립하려면, 부동산 시장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완전하게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그게 가능한 나라다. 그게 가능한 시스템, 정치적·경제적 체계를 갖췄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그게 가능하다.
싱가포르, 시장적이면서도 국가적인
싱가포르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모순적이다.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국가적 통제에 익숙하다. 그래서 싱가포르에는 지역의 공동체나 그런 게 별로 없다. 이주 노동자 비중도 높다. 그런데 국가가 통제하고 간섭하는 시스템이다!
폴 콜리어가 책에서도 리콴유(李光耀, 1923-2015, 싱가포르의 정치인, 독재자, 싱가포르 경제의 아버지. 현대 싱가포르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됨)를 굉장히 높에 평가하는 이유는, 리콴유가 정치적 독재나 권위주의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사회의 ‘통합’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부패와 전면전을 벌여서 싱가포르를 21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제1장 새로운 불안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운 리콴유는 집적의 경제학과 윤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정책에는 이렇게 말하는 그의 식견이 반영되었다. “지가 상승은 경제 발전과 공적 자금으로 건설한 사회간접자본이 초래한 결과인데, 나는 그로 인한 이득을 민간의 토지주들이 누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제7장 지리적 분단: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부록: 몇 년 전 메모
- 이 인터뷰의 주제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어 이상헌 박사의 몇 년 전 메모를 옮깁니다. (편집자)
“최근 몇 년 동안 쏟아져 나온 인기 저작들을 보면,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시에 경계하면서 (최근에는 이 둘이 이란성 쌍둥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넓은 의미의 ‘자발적 공동체’의 복원 내지는 건설을 주장하는 큰 흐름이 형성되는 듯하다.
라잔(Rajan)처럼 공동체(시민사회)를 명시적으로 제3의 축(the third pillar)으로 끌어올리기도 하고, 샌델(Sandel)처럼 더 포괄적으로 ‘커먼 굿(common good)’의 관점에서 논하기도 하고, 애쓰모글루(아제모을루 )와 로빈슨(Acemoglu & Robinson)은 이런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어려움을 [좁은 회랑] (Narrow Corridor, 2019)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설명했다. 급진적 유토피아를 역설했던 브레흐먼(Bregman)이 최근에 인간이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는 책(Humankind)을 낸 것도 이런 큰 흐름에 있는 것 같다(책의 마지막 부분이 다소 ‘처세술’ 느낌이 나서 여전히 아쉽긴 하다).
경제학자들의 목소리가 특히 높다. 얼마 전에 영국중앙은행 총재였던 마크 캐니(Mark Carney)가 낸 책의 제목은 [벨류; Value(s)] (한국어본 제목은 ‘초가치’)다. 7가지 가치를 제시하는데 그중에는 공정(fairness), 책임감(responsibility), 연대(solidarity), 겸손(humility)도 포함되어 있다. “가치에 기반한 세계화”를 주장한다.
찰스 굿하트(Charles Goodhart),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zucato), 브렛 크리스토퍼스(Brett Chistrophers),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 미노슈 샤피크(Minouche Shafik)와 같은 애당초 주류에서 조금 거리를 유지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더 보탤 말도 없다.
며칠 전 읽었던 폴 콜리어(Collier)와 존 케이(Kay)의 신작은 이런 흐름을 ‘극대화’했는데, 책 제목이 [탐욕은 죽었다] (Greed is dead, 2020). 운율을 살린 것이지만, 빨갛고 선명하게 새겨진 책 제목은 낯설다. 무슨 뜻인지 머리로는 알겠으나, 가슴은 ‘저게 뭐야’ 한다.
책이 나오는대로 아마존에 주문해서 바지런하게 읽고 있지만, 이 책들은 대부분, 그리고 철저하게 미국이나 영국을 대상으로 한다. 샌델의 책이 미국 정치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라면, 콜리어와 케이(Collier & Kay)는 영국 정치의 재구성을 꿈꾼다. 자신에 속한 ‘공동체’에 목청 높이는 것이라서, ‘이방인’ 독자는 소외감마저 느낀다. 이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 빈정거리게 된다.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 ‘시민사회’, ‘연대’가 한국에서는 무얼까 자꾸 묻게 된다.
미국과 영국 노동자는 자기 동네에서 일자리를 잃으면, 멀리 일하러 구하러 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 노동시장 유연성의 대표적인 나라들로 꼽히지만, 실제 물리적 이동성은 낮다. 잘 배우고 잘 나가는 엘리트는 주구창창 이동하지만, 나머지는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역공동체’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한국 노동은 유동적이고 글로벌하다.” (이상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