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케이스 02. 미연방대법원

  1. 50년간 약속을 미룬 대가: 미연방대법원의 역습
  2. 뒤집힌 판결, 변절한 작가, 멈춘 시스템: ‘로 대 웨이드’ 폐기로 본 미국
  3. 업데이트 멈춘 미국, 이제 롤 모델이 아니라 반면교사 (끝)

캡:콜드케이스

뒤집힌 판결, 변절한 작가, 멈춘 시스템

‘로 대 웨이드’ 폐기로 본 미국

민노: 앞서 연방대법원의 위상과 역할, 특히 정치형성적 기능에 관해 이야기해주셨는데요. 연방대법원 문제를 일단락하면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낙호: 보수가 좀 더 강력해지고 극우화하는 동안에 민주당 쪽은 관료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함정에 빠지다 보니, 시민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한마디로 정치가 망가졌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정치가 망가지는 과정에서 대법원이 오히려 좀 더 각광을 받았던 시기도 있죠. 2000년 초반에 그런 경향이 있었어요. 미 의회에서 수백 명이 서로 싸우고, 일반 시민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법적인 용어들로 논쟁하는 것보다는 연방대법원 판사 9명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 기다, 아니다 딱딱 결론을 내주는 모습이 훨씬 명료하게 다가왔죠.

미국에서 보수, 진보란…

민노: 먼저 전제로 짚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리버럴)를 구별하는 고유한 기준 같은 게 있을까요.

김낙호: 미국에서 보수, 진보라고 할 때요. 법적인 관점에서 보수는 기본적으로 각 주의 자치를 좀 더 강조합니다. 연방 차원의 포괄적인 규정, 통합적인 법체계를 추구하기보다는 말이죠.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70년~80년대식의 자율적인 경쟁을 옹호하죠.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특정한 누구(특히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더 보호하고 정부가 보조해 주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죠. 그럼에도 낙태나 동성결혼과 같은 전통적인 이슈에 관해서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적 관점을 굉장히 옹호하죠. 이게 소위 미국 보수의 모습입니다.

AK Rockefeller, “USA Gun”, CC BY SA

민노: 총기에 관해선 어떤가요.

김낙호: 총기에 관해서도 보수의 기본 논리는 각 주에서 맘대로 알아서 해라. 연방은 간섭하지 마라. 이런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요. 매사추세츠주는 총기 규제가 아주 강력하단 말이죠. 그런데 바로 다른 근처에 있는 주에서 기관총을 트렁크에 실어서 가지고 들어오면 그걸 어떻게 막아요?

민노: 못 막죠.

김낙호: 그래서 어차피 연방 차원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한데, 보수 쪽에선 그런 연방 차원의 규제를 반대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가령 총기와 관련해서 보수적인 법원의 논리는 헌법 원전을 문자 그대로만 적용해야 한다는 소위 원전주의를 표방하는 방식입니다. 마치 각 종교에서 각 경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발상으로 보시면 됩니다.

민노: 그렇다면 미국식 보수주의는 각 주의 자치를 존중하고, 헌법을 원전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취한다는 건가요?

김낙호: 그렇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우익적인 주들이 자기들 맘대로 낙태도 금지하고, 총기 사용에 관해서 관대한 정책을 쓸 수 있기 때문인 거죠. 즉, 정치적 맥락과 목적이 끼어드는 겁니다.

민노: 아, 그렇다면, 각 주의 자치권이나 헌법 원전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그저 ‘정치적인 수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김낙호: 그렇죠. 그것이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것은 6:3으로 미연방대법원의 보수와 진보의 균형이 깨진 뒤 연이어지는 판결들(낙태권 폐기, 소수 학생 보호 정책 위헌 판결 등)로 판명되고 있는 셈이죠.

민노: 미국 보통 사람들에게 연방대법원 판결이라는 게 입법이나 행정의 영역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 점이 궁금합니다.

김낙호: 대중들이 믿기에 그 정도로 단순화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하죠. 좀 전에 말씀드렸듯, 아무래도 일상생활 영역에서는 결국 주법이 제일 중요합니다.

민노: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미연방대법원은 우리나라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역할을 겸유하고 있는데요.

김낙호: 실제 판결 내용들을 보면 헌법재판소에 가까운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어떤 법이나 행정적인 결정이 헌법에 합치하느냐 아니냐는 논리로 움직이고요. 한국으로 치면 헌재 결정에 해당하는 판결이 훨씬 많죠. 하지만 그럼에도 워낙 판례 중심 사회다 보니까 개별 사건들이 연방대법원에 그 개별적 특정을 유지한 채 올라가는 경우도 있죠.

프로퍼블리카의 폭로


민노: 앞서 연방대법원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판결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미국 헌법 자체에 기반해서 판단해야 하는 점 등)를 설명해주셨는데요. 기본적으로 이 판사들은 엘리트잖아요. 그런 정치경제사회적인 기반에서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소위 말하는 기득권 계층이니까요. 이런 점은 어떨까요.

김낙호: 그렇죠. 프로퍼블리카(미국의 탐사보도 매체)가 최근 그것과 관련된 사건을 폭로했죠. 세무 자료나 여행 기록 같은 걸 열심히 조사해서 연속 보도를 했어요. 대법원 판사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우익에 속하는 클래런스 토머스(흑인 남성)나 새뮤얼 알리토 같은 판사가 대법원에 계루 중인 판결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억만장자 친구들에게 아주 초호화로 융숭한 접대를 지속적으로 받았아요. 그걸 보고하지 않고 숨겨 왔고, 프로퍼블리카가 그걸 폭로한 거죠.

연방대법관 클래런스 토머스(왼쪽)가 20년 넘게 공화당의 억만장자 후원자 할렌 클로우로부터 호화 휴가를 접대받았다고 폭로한 프로퍼블리카. 프로퍼블리카 해당 기사 캡처.
“새무얼 알리토 판사는 후에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공화당 억만장자와 호화 낚시 휴가를 보냈습니다.” 프로퍼블리카 보도 캡처.

민노: 프로퍼블릭카 보도 여파가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김낙호: 발칵 뒤집혔죠. 2010년대 특히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벌어진 날치기 임용 때문에 대법원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점차 하락세를 그리고 있었는데, 아주 쐐기를 박는 그런 사건이었죠.

민노: 그런데 그 정도로 법관이 이해상충 상황에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면 사회적으로 자진사퇴 압박이 상당할 것 같은데 말이죠.

김낙호: 당연히 자진사퇴하라는 사회적 압박은 있지만, 법적으로 사퇴를 강제할 수는 없죠. 종신제니까요. 그리고 한 명이 사퇴하면 생길 정치적 파장이 너무 커져서 더욱 기를 쓰고 사퇴하지 않는/못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프로퍼블리키가 고발한 두 극우 판사들 중 하나라도 스스로 사퇴한다고 하면… 미국 상원 다수당이 민주당이고, 대통령도 민주당이란 말이죠. 그러면 보수 6 대 진보 3 구도가 이제 보수 5 대 진보 4로 바뀔 수 있잖아요. 그런 역학 때문에 모든 보수 세력들이 당연히 그런 자진 사퇴를 막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폭로된 부패 사건마저도 그 사건을 부풀려진 것일 뿐,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총력 방어로 들어간단 말이죠.

미국 연방대법원. 2022년 6월 이후~ 현재 로버츠 대법원장의 대법원.
뒷 줄(왼쪽부터): 에이미 코니 배럿,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
앞 줄(왼쪽부터): 소니아 소토마요르, 클래런스 토머스와 대법원장 존 로버츠, 새뮤얼 알리토,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

민노: 프로퍼블릭카 같은 탐사전문매체가 이런 큰 사건을 보도하면, 미국의 폭스뉴스 같은 보수 언론이나 뉴욕타임스와 같은 리버럴 계열 언론의 반응은 어떤가요?

김낙호: 뉴욕타임스 같은 곳에선 후속 보도들을 아주 활발하게 하죠. 하지만 거꾸로 폭스뉴스 같은 곳에서는 ‘방어’ 보도를 아주 활발하게 하죠.

민노: 방어 보도요?

김낙호: 이런 식이죠. 친구랑 놀았는데, 그 친구가 하필 억만장자일 뿐이다. 그럼 친구랑 놀지도 말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양극화한 진흙탕 싸움으로 유도하는데에 아무래도 폭스뉴스 같은 매체는 도가 텄죠. 더불어 메시지 자체를 공격하지 못할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프로퍼블리카에 대한 공격도 많았죠.

민노: 프로퍼블리카에 대한 공격이요?

김낙호: 프로퍼블리카의 ‘후원자’ 중 한명인 조지 소로스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요. 조지 소로스가 유태계라는 이유로 반유태주의로도 넘어가고요.

민노: 프로퍼블리카의 태생적인 한계 내지는 약점을 공격하는 거네요? (참고: 프로퍼블리카는 억만장자 허버트 샌들러의 기부로 2007년 설립됐다. 샌들러재단는 매년 1000만 달러를 프로퍼블리카에 기부한다.)

김낙호: “약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격이 성공했다는 거죠. 심지어 후원액으로 볼때 소로스가 무슨 대단한 ‘물주’가 아님에도(참고: 2018년 기준으로 매출의 2% 미만, 현재는 0.5% 미만임) 말이죠. ‘물주’ 후원자를 공격해서 실제 매체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진흙탕 싸움으로 오염시키고, 희석시키는 겁니다. 그게 폭스뉴스 같은 매체가 지난 20년 동안 미국 미디어 환경에서 진화 혹은 퇴화해온 아주 비극적인 코스죠.

민노: 미국에서는 그런 메커니즘이 구조화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어떤 이슈이든 그 의미와 상관 없이 그저 자신의 이해관계만으로 진영의 진흙탕 싸움으로 만드는 미디어 구조가 완성됐다? 그런 취지의 말씀, 맞나요?

김낙호: 그렇죠.

스스로 추락하는 미연방대법원


민노: 미국 연방대법원의 권위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은 현재 어떤 상태인가요?

김낙호: 그게 지난 십수년간 특히 지난 4~5년간 굉장히 곤두박질 했죠.

민노: 특히 보수 6: 진보 3으로 균형이 무너지면서?

김낙호: 그렇죠. 그전에는 9명의 현자들이 엄격한 절차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그런 신비로운 ‘아우라’가 있었던 말이죠. 그런데 최근 몇 년동안 하는 짓을 보니까 이건 그토록 경멸하던 의회보다도 더 하단 말이죠.

민노: 미국 연방대법원의 권위, 신비로운 아우라를 말씀하시니 저는 아주 재미있게 본 한 미국 드라마가 생각납니다. [보스턴 리걸] (2004~2008)이라는 법정 드라마에서 연방대법원에서 변론하는 걸 정말 엄청나게 떨리고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묘사하더라고요. 드라마 자체가 굉장히 냉소적이고 코믹한데도(극본: 데이빗 E. 켈리), 대법원에 관해선 꽤 인정하는 느낌이 들더란 말이죠.

“법 아래 정의는 평등하다.” 미연방대법원은 미국 건축가 카스 길버트의 설계에 의해 1935년 지어졌다. 카스 길버트는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위키미디어 공용.

김낙호: 그럼요. 어쨌든 로 대 웨이드 판결(1973) 하나만 하더라도 그걸 뒤집는 데 50년이 걸린 셈이니까요.

민노: 그 50년 동안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마무리하지 못한 걸 앞서 함께 비판했지만, 한편으로 50년 동안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유지됐다는 것도 대법원의 권위와 영향력을 방증하는 걸 수 있겠네요.

김낙호: 대법원 판례가 한번 생기면 그게 법에 준하는 강력한 효력을 가졌단 말이죠. 그게 얼마나 강력했느냐면, 입법부가 50년 동안 입법을 방치할 정도로 강력하게 그 권위와 효력을 인정받았던 거란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권위를 지금 불과 몇 년 동안 대법원 스스로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 대 웨이드(1973), 뒤집히다… 50년을 낭비하다


민노: 앞서 ‘로 대 웨이드’ 판결(1973)이 뒤집힌 배경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역학 구도에 따라 연방대법원 판사의 구성이 달라졌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2022년 6월 24일 낙태 합법화 판결로 널리 알려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50년만에 뒤집은 미 연방대법원의 결정, ‘도브스 대 잭슨’ (2022) 판결의 의미에 관해 말씀해 주실 차례 같습니다.

김낙호(캡콜드): 우익 친화적인 연방대법원 판결의 논거는 대부분 이렇습니다.

  1. 연방은 규제 권한이 없다.
  2. 각 주가 알아서 해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연방제 국가로서의 근간이 워낙에 강하게 작용하다보니 연방법으로 규정한 큰 틀에서 뭔가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항상 그런 식으로 뒤집는 거죠. 가령 이번 경우에도 보수당인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는 주에서는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주 법을 바꾸면 되니까요.

민노: 주 자치를 인정해라. 연방은 간섭하지 마라! 이런 식의 논법이겠네요?

김낙호: 그렇죠.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주 법이나 조례 같은 것을 만드는 거죠. 그게 지금 미국 절반 정도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공화당이 주 정부, 주 입법부까지 장악한 주라면 이제 낙태권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사실상 없애는 방향으로 돌아갔고요. 위스콘신주처럼 아예 로 대 웨이드가 뒤집히면 낙태를 바로 금지할 수 있도록 법안을 준비해 놓은 곳들도 있죠.

“제인 로”(가명, 실명 노마 맥코이, 왼쪽 위) 대 헨리 웨이드(오른쪽, 헌법소원 피고, 당시 텍사스 댈러스 카운티 지방검사). 제인 로 아래로 소송을 진행한 변호사 사라 웨딩턴(왼쪽), 변호사 린다 커피(오른쪽). 위키미디어 공용.

민노: 이 사건을 바라보는 소회랄까요, 개인적으로 논평하신다면요.

김낙호: 우선 50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했을 때 그 기반이 전반적으로 취약했던 건 어느 진영에 있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판결의 사회적 함의가 중대했고, 특히 여성 인권에 한 획을 그은 판결이었기 때문에 그 판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앞서 강조한 것처럼, 대법원 판결을 바탕으로 입법부가 훨씬 더 정교하게 낙태 자체와 관련 제도를 연구해서 낙태법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민노: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김낙호: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문제니까요. 그게 가장 큰 이유였죠. 그러니까 이번 ‘도브스 대 잭슨’ 판결도 마찬가지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도 그 자체로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취약점을 가지고 있던 판결을 뒤집으니까 뒤집힌 거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50년을 무익하게 날려 먹었다는 생각이고요. 연방 차원에서 낙태권이 헌법적 권리로 인정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민노: 그렇다면 지난 50년 중에서 민주당 집권기의 그 시간 동안 민주당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하시는 건가요?

김낙호: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유는 뻔하죠. 앞서 말했듯,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하니까요. 낙태법 하나를 입법한 뒤에 다음 정권을 잃을 걸 각오해야 했는데, 정치공학적으로는 민감한 문제가 된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강행해야 할 사회적 변화가 있는 거고, 저는 이 낙태권 입법화도 그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못 한 거죠.

민노: 미국 일반 국민들의 반응을 스케치한다면 어떨까요?

김낙호: 낙태권 자체에 관한 근본적인 차원에서라면, 미국 국민은 여론조사를 하면, 60~70%는 낙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여론이 형성된 지 오래됐습니다.

전체 미국인의 69%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레드 스테이트, 블루 스테이트를 막론하고 전체 미국인의 의견이에요. 그런데 지금 대법원은 그걸 뒤집으려 하고 있어요. 더 늦기 전에 의회가 나서서 로 대 웨이드가 보장한 임신중절권을 연방법(law of the land)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Elizabeth Warren, 민주,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뉴스페퍼민트,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파기 임박, “중간선거에 영향 없을 것”, 2022년 7월 20일. 에서 재인용
YouTube 동영상

김낙호: 반반도 아니에요. 다수가 이미 낙태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임신 6개월까지 인정할 거냐, 임신 4개월까지 인정할 거냐, 거기에서 차이가 나죠. 낙태 전면 금지를 주장하는 여론은 사실상 굉장히 소수에 속하는데, 그 소수가 굉장히 정치적인 영향력이 강한 거죠.

민노: 낙태 찬반이 반반은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김낙호: 낙태 완전 금지는 소수에요. 그럼에도 그 소수 입장이 전면에 등장해서 결국 로 대 웨이드 판결까지 뒤집어 냈고요. 이제 뒤집히자마자 작년(2022)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아주 완전히 깨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민주당이 선방해서 하원 선거(213:222)와 주지사 선거(24:26)에선 약간 밀렸지만, 상원 선거(51:49)에선 다수당이 됐죠.

미국 연방정부 제공.

민노: 2022년 중간선거에서 상원 선거 승리에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 영향이 컸다고 보세요?

김낙호: 그럼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그럼에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번복한 일을 공화당의 온전한 패배로 연결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보수적인 우익 정권이 지배하는 주에서는 낙태 금지를 열심히 추진하고 있으니까요. 상원에서는 패배했더라도 ‘실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죠.

민노: 미국 전체로 보면 낙태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60~70%) 설명해 주셨는데요. 남부의 보수적인 주에서는 아무래도 낙태 찬성 의견이 높을까요? 아니면 보수적인 주 안에서도 낙태에 관한 의견은 나뉘는 편인가요?

김낙호: 보수적인 주라고 하더라도 도농 격차가 심한 편이에요. 그러니까 텍사스도 당장 댈러스 같은 대도시나 오스틴 같은 교육 행정 도시 같은 경우에는 젊은 도시의 느낌이 강하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주 전체를 보면, 아무래도 비도시 인구가 다수이다보니 계속 보수적인 정권이 유지되는 거죠.

“트럼프는 마약” 비판한 ‘힐빌리’ 작가, 트럼프에 붙어 상원의원 되다


민노: 지금 말씀하신 도농 격차는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던 ‘러스트 벨트'(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백인 노동자의 박탈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J.D. 밴스의 수필집 [힐빌리의 노래: 위기에 처한 어느 가족과 문화에 관한 기록] (2017)가 떠오르기도 하네요(‘힐빌리; hillbilly’는 백인 촌뜨기, 심하게는 백인 쓰레기를 의미). 밴스가 책을 출판하기 직전에 “트럼프는 힐빌리의 마약”이라고 트럼프를 비판했던 것도 생각나고요. 물론 2016년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를 비판하지만, 결코 힐러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자신의 힐빌리 정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요.

20세기 대부분 동안 세계 최대 철강 제조업체 중 하나였던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 베들레헴 스틸의 녹슨 철강 더미. 1982년 베들레헴 스틸은 생산을 중단했고, 2001년에 파산 신청했으며, 2003년 해산되었다.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 영화 [힐빌리의 노래] (2020, 넷플릭스) 속 한 장면. 글렌 클로즈(왼쪽, 아카데미상 수상자)과 에이미 애덤스 등 연기파 배우가 대거 출연했다. 넷플릭스 제공.

김낙호: 그 작가X, 지난 2022년 중간선거에서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해서 당선했습니다.

민노: 아, 몰랐는데요. 놀라운 소식이네요. ‘힐빌리의 노래’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는데요.

김낙호: J.D. 밴스가 [힐빌리의 노래]에서 드러낸 몇 가지 관찰이 있죠.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인프라가 무너진 쇠락한 비도심 지역에서 사람들은 복지 시스템에 기대서 생활하죠. 그 쇠락의 사이클을 밴스가 자기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적 서사로 정밀하게 묘사했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굉장한 장점인데, 그런 경제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우익화하고, 편협한 시각과 견해를 가지는 과정을 잘 묘사해 놓고, 그걸 너무 따뜻하게만 수용하면서 정치적으로 정당화했단 말이죠.

민노: ‘러스트 벨트’ 백인의 극우화, 편협하고 공격적인 시각을 오히려 정당화했다는 건가요?

김낙호: 그렇죠.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사회라면, 그런 편협하고 적대적인 사고의 ‘고리’를 끊어서 그런 ‘힐빌리’들이 제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고 함께 고쳐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텐데요. 오히려 밴스의 책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우리 ‘힐빌리’ 백인의 삶을 바라봐 주고, 긍정해 줬다는 식으로 진행했단 말이죠. 그래서 러스트 벨트 출신 힐빌리들이 자신의 쇠락을 정치적 극우화의 땔감으로 쓰는 걸 정당화하고 조장한 셈이죠. 밴스 자신은 그런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이용해서, 트럼프를 비판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트럼프에 기대서 상원의원이 됐고요.

“트럼프는 힐빌리의 마약”이라고 비판했던 어제의 작가는 오늘 ‘트럼프의 꼬마’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구글 이미지 검색 화면 갈무리.

민노: 밴스의 변절(?)은 드라마틱하네요. [힐빌리의 노래]가 정치적으로 악용된 과정을 우리식으로 비유하면 어떤 걸까요?

김낙호: 가령 특정한 A 지역 사람을 차별하고, 욕하는 B 지역 사람이 있다고 치면요. B 지역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불쌍한 사람들이야. 다 알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B 지역 사람들 욕하지 마. 이러는 거죠. 거기에 그치지 않고, B 지역 사람들이 독재를 찬양하는 것, 극우적으로 공격적이고 편협한 생각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야. 문제가 분명히 있는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뭉개 버린단 말이죠. 밴스와 그의 책은 대충 그런 정치적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업데이트 멈춘 시스템, 그 취약점 남용하는 사람들


민노: 최근 우리나라에선 권영준 대법원 후보자가 서울대 교수 시절 18억 원을 받고 로펌에 의견서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면 어땠을까요? (참고: 인터뷰 당시엔 후보자 신분이었지만, 2023. 9. 26. 현재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상태.)

김낙호: 이상적이라면 당연히 그런 전력을 사전에 대통령실이 잡아내서 아예 대법관 후보에서 제외시켰겠죠. 하지만 현재 미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트럼프가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는데, 닐 고서치 같은 경우엔 보수적인 성향이야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청문회 등의 인준 절차를 거쳐서 임명됐어요.

민노: 나머지 둘은 어땠나요.

김낙호: 브렛 캐버노 같은 경우에는 대학생 시절(1980년대) 음주 성추행 의혹이 있었단 말이죠. 그것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공식적으로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밀어붙였어요. 청문회는 잠시 뒤로 미루고 해당 의혹을 제대로 조사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더 속도를 냈죠. 그래서 지금 미국은 ‘만약 미국이라면 어땠을까’를 참조할 수 있는 그런 모델이 전혀 되지 못해요.

연방대법원 판사로 지명되어 백악관에 초대받은 브렛 캐버노와 캐버너 가족 그리고 박수치는 트럼프. 2018년 7월 9일. 백악관 제공.

민노: 그럼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김낙호: 미국을 우방으로 여기는 것까지야 뭐 괜찮지만, 미국을 ‘모델’로 생각하는 건, 지금 현실의 미국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민노: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의 권위가 추락하고, 현실에서도 한국의 권영준 대법원 후보자(인터뷰 당시 기준)보다 더한 사람이 연방대법원 판사로 지명되는 게 미국의 현실이고… 그렇단 말씀이죠?

김낙호: 그럼요.

민노: 이런 추세는 당분간은 쉽게 바꿀 수 없겠네요. 아니면 변화나 혁신의 계기가 있을까요?

김낙호: 그런 추세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게 우선 현실에서 보수 6 : 진보 3이고요. 트럼프가 지명한 3명의 보수 대법관이 다 젊단 말이죠. (참고로 브렛 캐버노 1965년생, 닐 고서치 1967년생, 에이미 코니 배럿 1972년생)

민노: 쉽지 않겠군요.

김낙호: 미국의 체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가 수업에서 종종 이야기하는 건데, 미국 민주제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굉장히 혁신적인 것이었다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OS(운영체제)는 240년 가까이 된 거란 말이죠(참고로 미국의 성문헌법은 1787년에 채택되고, 1788년 발효했다).

민노: 240년 된 운영체제라….

김낙호: 240년 된 운영체제인데, 마지막 업데이트가 1990년대고요. 그런 운영체제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그 시스템의 취약점들을 이미 수도 없이 발견했고, 그것들을 미친 듯이 어뷰징하고 있는 게 현재 미국의 현실이라는 거죠.

(계속)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