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케이스 02. 미연방대법원
- 50년간 약속을 미룬 대가: 미연방대법원의 역습
- 뒤집힌 판결, 변절한 작가, 멈춘 시스템: ‘로 대 웨이드’ 폐기로 본 미국
- 업데이트 멈춘 미국, 이제 롤 모델이 아니라 반면교사 (끝)
캡:콜드케이스 02. 미연방대법원
업데이트 멈춘 미국
이제 롤 모델 아니라 반면교사
민노: 트럼프 이후 보수 6: 진보 3으로 균형이 깨진 연방대법원의 변화 혹은 퇴행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 vs. 하버드대학교’ 판결에 관해 여쭙고 싶습니다.
- 사건: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 대 하버드 대학교
Students for Fair Admissions, Inc. v.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 쟁점: 소수계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 Affirmative Action)이 수정헌법 14조에 위반하는지 여부
- 결정: 수정헌법 14조에 위반한다.
- 다수의견: 로버츠, 토머스, 알리토, 고서치, 캐버노, 배럿 (6인).
- 보충의견: 토머스
- 보충의견: 고서치, 토머스
- 보충의견: 캐버노
- 반대의견: 소토마요르, 케이건, 잭슨 (3인).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도입한 어퍼머티브 액션은 인종, 성별,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우대조치를 제공함으로써 차별과 불이익을 시정하려는 정책이었다.
손영호, 어퍼머티브 액셔에 관한 일 고찰: 정책적 타당성과 찬반 논쟁을 중심으로, 2017.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자 및 그 사법권에 속하게 된 사람 모두가 미국 시민이며 사는 주 시민이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면책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주에도 법의 적정 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그 사법권 범위에서 개인에 대한 법의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미국 수정헌법 14조
김낙호(캡콜드): 본격적으로 판결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전에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평등과 정의에 개입하느냐, 아니면 모두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할 것인가. 미국 사회는 6,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축적된 차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한 요구에 부딪혔습니다. 50~60년대 흑인민권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이 개화하면서 성숙해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죠.
민노: 그렇죠.
김낙호: 노예제가 철폐된 뒤에도 사실상 흑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계속해서 존재했어요. 살 수 있는 구역을 나누고, 버스를 타도 흑인 구역과 백인 구역을 나눴으며, 심지어는 공공장소에 있는 식수마저 유색인종용과 백인용을 나눴죠. 눈에 보이는 차별보다 더 심각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적인 차별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너희들은 모두 공정하게 경쟁해라. 그 경쟁에서 뒤처지면 그건 너희들이 못나서 그런 거다. 그건 오히려 너무 바보 같잖아요? (= 그렇죠. ) 그래서 흑인에 관한 ‘적극적인’ 우대 정책을 시행하게 했어요.
김낙호: 여기서 착각하기 쉬운 건데요. 미국 대학은 적극적인 흑인 우대 정책을 오히려 반기는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인재풀을 다양한 관점과 배경으로 채워서 더 새로운 결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 좋다고 하니까 점점 더 많은 학교가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인종 쿼터로 우리나라로 치면 농어촌특별전형과 비슷하죠. 소수인종 흑인과 히스패닉 등에 인용 쿼터를 할애하거나 추가점을 가산하는 식으로 선발한 거죠.
그런데 이런 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하면서 미국 대학 입시에서 특히 엘리트 대학들에서 백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비백인 우수 인재들이 다수 입학하다보니 백인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백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아시안 학생들이 입시 사정에서 불공정을 토로하는 일종의 동맹을 맺은 거죠.
민노: 법적 근거는 뭐죠?
김낙호: 애초에 인종으로 차별하면 안 되지 않느냐. 그런데 저쪽 흑인과 히스패닉 인종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점수를 더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죠. 그리고 연방 대법원에서 이겼고요.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 백인 학생과 아시안 학생의 동맹
민노: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이라는 단체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요?
김낙호: 단체로서의 위상은 사실 별거 없고요. (= 소송을 위해서 급조된 단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나름으로 적극적인 우대 정책을 부수기 위한 운동은 사실 꽤 오래됐어요. 최소한 10년 이상은 됐고, 지금 미연방대법원의 보수:진보가 6:3이 됐으니 확 밀어붙인 거죠.
민노: 이 판결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어떤가요?
김낙호: 사실 소수계 우대정책 폐지를 찬성하는 여론이 꽤 커요. 애초에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정책은 아니었어요. 실제로 다양한 인재풀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에 특히 엘리트 사립대학들이 계속 운영을 해왔던 거죠. 대중적 지지가 크거나 논리적 정당성이 견고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번 미연방대법원 판결은 사회적인 공분을 사는 그런 류의 판결은 아니에요, 사실.
민노: 아, 그렇군요. 미디어 반응은 어떤가요?
김낙호: 미디어 별로 경향성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뉴욕타임스만 해도 꽤 신중하게 접근하는 편이에요.
민노: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유는 뭘까요?
김낙호: 이번 연합이 주효했던 게 특히 아시안 학생들을 끌어들였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손쉽게 소수 인종 차별이라고 할 수 없는 기반을 마련한 셈입니다.
민노: 김낙호 교수도 직접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셨는데요. 이런 정책 영향을 받았나요?
김낙호: 대학원부터는 사실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는 게 중요한데, 대학은 사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인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양한 입학 사정을 시도하고 싶어하는데요. 그럼에도 학부 입시가 자신의 경력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소위 좋은 학부를 나와야 나중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엘리트를 지향하는 그런 학생들에겐 꽤 중요한 이슈였던 거죠.
판결의 현실적 의미, ‘간판’ 추구에 부합
민노: 그런 계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상 학생이라면 대부분 아니겠어요?
김낙호: 한국만큼은 아니죠. 왜냐하면 당장 미국 대학만 하더라도 하버드대학과 같은 엘리트 대학은 애초에 너무 경쟁률이 높고, 학비도 비싸요. 대학에 진학해서 좀 더 나은 계층으로 이동하겠다는 학생들은 대체로 아이비리그와 같은 사립 명문대학보다는 지역 주립대를 오히려 더 많이 노리고, 법적으로 소송까지 한 그 학생들 그룹은 훨씬 더 좁은 범위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노: 아이비리그와 주립대학을 학생들이 좀 다르게 보나요?
김낙호: 아이비리그 대학을 목표로 하고, 그런 대학들을 통해서 살아가는 삶은 아무래도 좀 다르죠.
민노: 그러면 이번 판결은 좀 더 현실성 있는 주립대학 같은 학교에 입학해 실속을 챙기려는 학생들보다는 간판이 훨씬 더 중요하고, 그런 타이틀을 따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판결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까요?
김낙호: 그럼요. 사실 그게 현실입니다. 엘리트 대학들일수록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인재를 모집하지 않으면 금방 부자 백인 가문 출신들 학생들로 학교가 가득 찹니다. 그런 식으로 부자 백인 출신으로 ‘순혈화’하면, 아웃풋이 안 좋아진단 말이죠.
민노: 그런 취지의 연구 결과가 담긴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일대학에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기숙사 배정에서도 다양성을 고려하고, 또 다른 학교는 다양한 학과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부딪힐 수 있도록 학교 동선을 설계한다고 하더군요.
김낙호: 말씀한 내용을 살짝 보충하면요. 가령 주요 주립대 같은 경우는 해당 주에서 입학하는 학생은 타 주에서 오는 사람들보다는 경우에 따라 등록금이 적게는 1/3에 불과하단 말이죠. 그래서 그 주 안에 있는 다양한 주민들, 그런 학생들이 인종적인 배경이든 계층적인 배경이든 다양하게 지원하고, 많이들 합격해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슨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다양성이 확보된단 말이죠. 하지만 하버드나 예일 같은 곳은 아주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획일화할 수 있단 말이예요.
명문 사립대학엔 발등불, ‘자소서’ 등 우회로 찾을 것
민노: 하버드나 예일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이 판결 영향을 받을 걸로 보세요?
김낙호: 지금 당장 영향받죠. 판결이 났으니까 당장 소수계 우대정책을 포기해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지금 다들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다양성을 확보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고요. 그래서 추진하려는 정책 중 하나가 자기소개서입니다. 자신의 인종이나 양육 환경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자소서에 쓰면 그걸 사정에 반영하는 식으로 일종의 ‘우회로’를 만들려고 굉장히 머리 싸매고 노력 중이에요.
민노: 가령, 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종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잘 극복했다? 이런 자기소개서에 가점을 줄 거라는 말씀인가요?
김낙호: 그렇게 극복했다고만 하면 그건 너무 한국식 자기소개서고요. (웃음) 예를 들면 흑인 가정에서 살면서 일상적인 사회적 차별, 문화적 편견을 보고, 겪고 자랐기 때문에 나는 일상화된 이중적 차별이라는 문제에 대해 사회학적인 해결책이 없는가 고민을 하게 됐고, 그런 연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식이 되겠죠.
민노: 아, 어떤 말씀인지 알겠어요. 저도 그냥 예를 든 거예요. (웃음) 우리나라 중앙일보 같은 곳에선, 정말 한국식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내 자식 하버드 갈 수 있는 확률이 한 1%’라도 올랐을까? 기사 내용을 보면 그런 질문을 하고 있더군요.
김낙호: 아까 예로 들어주신 그런 식 자소서를 쓰면 절대 못 들어가고요. (웃음)
민노: 어쨌든 한국 학생이 하버드 입학할 확률이 1%라도 높아지긴 했나요? (웃음)
김낙호: 별로 안 높아졌을 겁니다. (웃음) 그런 사립 명문 대학들은 인종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별의 별 수를 낼 거고요. 그런 다양성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좋은 인재 중 한 명으로 자격을 가지는지 어필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아무튼 주립대학들보다는 아무래도 경쟁률이 20대 1, 30대 1까지 올라가는 소위 명패 가치가 뛰어난 명문 사립대들이 문제죠.
아시아계 이슈라기보다는 히스패닉 ‘신분 사다리’ 문제
민노: 미국에도 자녀의 입시에 ‘목숨 거는’ 분들이 많이 있나요?
김낙호: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그런 아이비리그 대학을 가득 채울 정도로 충분히 있죠.
민노: 그렇군요. 좀 다른 질문인데, 이번 판결로 아시아 학생들보다는 백인 학생들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분석을 하는 한국 언론도 있던데요. 타당성이 있는 분석, 전망으로 보시나요?
김낙호: 정말 무슨 근거로 그런 분석을 하는지 제가 오히려 굉장히 궁금한데요. 너희들이 소수 인종인데 너희가 다수 백인 편에 서가지고 그렇게 뒤집었단 말이지? 너희들 얼마나 잘되나 보자. 사실은 그런 식의 악담에 가까운 이야기고요. 실제로 어느 쪽이 더 유리해질지에 관해선 뚜렷한 모델은 사실 없고, 우선 단기적으로는 백인 학생보다는 아시안 계열이 어느 정도 이득을 볼 수는 있어요. 왜냐하면 소위 말하는 ‘입시 공학’으로 워낙에 빨리 적응을 하니까요.
민노: 그렇군요.
김낙호: 그런데 장기적으로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소수계 우대정책이 없어진 상태에서 이제 각 대학들이 원래 운영하는 아이비리그식 ‘레거시 입학'(부모가 동문인 경우에 자녀 우대) 방식이나 기여 입학과 같은 학벌 대물림 방식이 문제가 될 수 있죠. 아무래도 그런 입학 방식은 부유한 백인층이 훨씬 더 유리할 테니까요.
민노: 이 판결이 미국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나 관심도에서요. 전국적인 뉴스였나요?
김낙호: 전국적인 뉴스이기는 한데 관심 순위에서 초미의 관심사, 이런 정도는 전혀 아닙니다.
민노: 아시아 커뮤니티 쪽 반응 같은 것도 미디어에서 짚어줬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었나요? 이를테면 코리안타운이나 차이나타운에서는 이번 결정을 환영한다거나 하는 그런 입장을 표명하거나. 그런 게 있었나요?
김낙호: 아시안은 그렇게 관심의 중심이 되는 쪽은 아니라서요. (웃음)
민노: 그래요? (웃음)
김낙호: 이 사안에서 정말로 이제 집중 이슈가 된 건요. 히스패닉 아메리칸이 대학을 통한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공격받게 됐고, 이런 경향이 특히 직장에서의 인종 다양성 정책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다, 뭐 이런 쪽에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 쪽으로 가고 있죠. 아시안의 입시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고요. (웃음)
민노: 특히 히스패닉 쪽에서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라는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더 걱정하고 있다?
김낙호: 엘리트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 쪽으로 번지면, 그때는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하는 거 거든요. 기업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종 다양성을 배려해 직원을 뽑는단 말이죠. 그런 관행도 많고요. 그런데 그런 기업 방침을 주 법으로 금지해버린다? 그러면 아주 그냥 골치 아파지는 거죠.
민노: 만약에 어떤 주 정부가 기업의 다양성 정책을 금지하는 걸로 이번 판결을 근거로 주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단느 말씀인가요?
김낙호: 그렇죠. 그런 식으로 확대되면 그때는 진짜 큰 문제가 되는 거죠.
연약했던 미국 민주주의… 어떻게 보면 ‘그 정도’ 나라
민노: 말씀처럼 그렇게 된다면, 그땐 정말 전국적인 이슈가 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짧게 다시 논평을 주신다면 이번 판결 어떻게 보시나요?
김낙호: 우선 소수계 우대정책이라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더 큰 구조화된 차별을 제때 바로잡지 못해서 개별 학교 차원에서 도입한 것인데요. 그렇게 개별적으로 도입할 게 아니라 제도적 입법으로 했어야 했던 거죠. 그렇게 사회 전체의 제도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저 얼기설기 주먹구구에 가깝게 운영해왔던 거고요. 그게 가장 큰 아쉬움입니다.
민노: 로 앤 웨이드 폐기 판결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아쉬움을 전해주셨는데요.
김낙호: 그러니까 미국에서 수많은 것들이 사회 제도로서 제때 마련되지 못하고, 그 적기를 놓친 게 너무 아쉽죠. 마치 구멍 난 양말을 땜빵하듯 그렇게 계속 수십 년 동안 움직여 왔고, 그걸 사회 진보로, 사회가 진보했다고 착각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민노: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진보의 토대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아니 미국인이 생각했었던 것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취약하고 연약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김낙호: 그렇죠. 그리고 그게 바로 이제 한국에서도 배워야 할 교훈인 것인 것 같아요.
민노: 미국 사회에서 이제 상당히 오래 사셨잖아요? 미국 사회를 한마디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적이지 않다, 이렇게 단정하기는 어렵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어떤 설명도 되지는 않겠지만, 최근의 경향은 보수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나요, 어떤가요?
김낙호: 세계가 전반적으로 우익화하고 있긴 하니까요. 그런데 기존에 가졌던 민주제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미국만큼 깨진 데는 없을 정도다라는 생각이 들긴 하죠.
민노: 그 믿음을 깨는 상징적인 사례,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낙호: 우리가 이야기한 로 대 웨이드 폐기 판결만 해도 그렇고요.
민노: 아주 상징적이죠.
김낙호: 그럼요. 낙태권이라는 건 당연히 보장되는 것. 우리가 이 정도는 해냈다고 생각했던 건데, 해내긴 ‘쥐뿔’이었던 거죠. 차별을 막는 제도도 사실은 부실하기 짝이 없고, 무엇보다 상징적인 사건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사건이죠.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 폭도들이 말 그대로 의회에 쳐들어왔단 말이죠.
민노: 말 그대로 폭동이었죠.
김낙호: 그럼요. 선거에 불복하면서 의회에 쳐들어갔단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정도 나라라는 거죠.
그럼에도 미국의 힘…그건 뭘까?
민노: 민주주의 체제가 그 뿌리에서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슈퍼 파워를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힘이랄까,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유산이랄까, 그런 건 뭘까요?
김낙호: 기본적으로는 판이 크다는 거죠.
민노: 판이 크다?
김낙호: 미국으로 들어오면, 크게 한탕 해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만큼 세계 곳곳에서 인재들이 들어와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허용해줬고요. 그런 접근법으로 세계 큰형 노릇을 하려고 한 거고요. 세계 큰형 노릇을 하려고 했으나, 예를 들어 우리가 맨날 ‘미제'(미국 제국주의)라고는 하지만은 실제로 지배하지는 않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제3세계에 전쟁을 유발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지난 6~70년 동안 계속 이어져 왔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제국으로 군림하기보다는 일종의 ‘상위 리그’처럼 인력을 끌어왔단 말이죠. 열심히 잘만 뛰면 미국이라는 최상위급 리그에 와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게 사실은 2차 대전 이후 계속 미국이 세계를 주도한 공식이죠.
민노: 지금 말씀하신 걸 들으니 연상되는 게 실리콘 밸리 유력 기업의 CTO, CEO 중에서 인도인이 꽤 많아졌다는 생각도 들고요.
김낙호: 그렇죠. 인도계가 많죠.
민노: 미국적 포용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김낙호: 포용력에 대한 환상이죠. (= 환상이요?) 그러니까 포용력의 이미지를 가꿔냈던 거죠. 실제로 많은 성공 사례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도 결국은 국가로서 우익의 폐쇄주의라든지 그런 밑바탕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트럼프 현상이 결국 발생한 거라고 봅니다. 이제 불법 입국자를 막겠다고 남쪽 국경에 철조망 깔겠다는 접근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런 극우적 메시지, 이민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식의 흐름은 여전히 미국도 없는 게 아닙니다.
민노: 어쨌든 민주당이 트럼프 재집권을 막으면서 그런 일련의 트럼프적 현상이나 흐름이 많이 차단되고 중단되지 않았나요?
김낙호: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신나서 일어났던 목소리들이 훨씬 더 이제 용기백배 고무돼서 표면으로 드러났었죠. 지금은 그게 살짝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고요. 가라앉았다고 하기도 그렇게 좀 뭐한 게 당장 인터넷에서도, 폭스뉴스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은 차고 넘쳐요.
트위터를 보더라도 머스크 같은 경우가 딱 그쪽 계열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우익적인 세계관이 반항적이고 쿨하다고 생각해서 그거를 동네방네 퍼트리고, 그래서 트위터를 그 모양으로 만든 거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미국이 지금까지 슈퍼리그 모델이었다고 해서 극우적인 문제가 없는 게 아니고, 그런 문제는 늘 잠재해 있었다는 겁니다.
방치된 구옥 미국, 이제 롤 모델 아니라 반면교사
민노: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죠.
김낙호: 사회 진보는 생각보다 체계 자체가 탄탄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빨리 역진할 수 있어요. 단단해 보이는 제도도 사실 계속 개선하지 않으면 모순이 누적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오남용하고, 결국은 엉뚱한 방향으로 퇴행합니다. 이 두 가지를 특히 강조하고 싶네요.
더불어 ‘운영체계’ 비유를 좀 더 강조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미국은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란 말이죠. 우리가 임시 정부부터 100년이 좀 넘고, 실제 민주제 정권으로서는 한 70여 년 언저리인데, 미국은 그것보다 훨씬 더 된 250년 언저리란 말이죠. 그래서 지금은 시스템이 아주 엉망이고요. 구옥(舊屋)도 이런 구옥이 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업데이트해야 했는데, 그 업데이트를 잘 못하다 보니 수많은 취약점이 발견됐고, 그 취약점을 온갖 정치 플레이어들이 효과적으로 어뷰징하고 있단 말이죠. 근본적인 업데이트를 못 하게 막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같은 사회에서 배울 교훈은, 우리 기본 헌법 시스템이나 법률들이나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계속 평가하고, 필요하면 패치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거죠.
미국은 그런 의미에서 롤 모델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파악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