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제네바 오전 8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전하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오늘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노동시간’ 본격 썰 1탄.


제1차 세계 대전 때 일이다. 영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가담하다 보니, 전시물자 공급이 문제였다. 총동원령을 내려도 부족현상은 계속되었다. 초과근로도 제약 없이 늘리고, 관련 예산지원까지 해주었다. 게다가 전쟁 중이니 애국주의 열기가 대단했다. 그런데도 물량은 계속 부족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정부는 버논(Vernon)이 이끄는 연구팀을 공장에 보내서 그 이유를 분석하게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노동자는 초과근로가 생기자, 일의 양을 자동으로 조정했다.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 애국주의 구호가 난무하는 공장에서 스스로는 전쟁에 “봉사”한다고 믿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생산량이 노동시간 증가한 만큼 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생산성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노동자 개인에게도 고달픈 것이 바로 장시간 노동이다.

이상헌, 제네바에서 온 편지: 초과근로는 왜 비생산적인가, 2014년 4월 7일.

이상헌 박사가 10년 전에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글 중 일부입니다. 초과근로의 비생산성을 일화적 사례를 곁들여 명쾌하게 설명한 글이었죠. 몇 개월 전에도 짧게나마 ‘노동시간 주권’에 관해 이상헌 박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노동시간은 중요합니다. 오늘 제네바 인터뷰에서는 이상헌 박사의 화두 중 하나인 노동시간 문제를 좀 더 깊은 호흡과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인터뷰를 마치고 70분짜리 명강의를 들은 느낌이었습니다. 몰랐던 많은 걸 배웠고, 정리하고, 다시 질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 오늘 제네바 인터뷰에서 독자 여러분이 가장 흥미롭게 생각할만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초과근로 문제에 관한 해법으로 기업과 노조가 ‘비정규직’에 합의한 과정은 무엇일까?

이상헌의 제네바 오전 8시 [ep. 13]



안내 및 알림 그리고 용어

이 글은 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제네바 시각 오전 8시에서 9시 10분까지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이상헌 박사와의 협의 아래 답변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 내용을 좀 더 잘게 나눴습니다. 목차 링크를 통해 궁금한 테마를 골라 읽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1. ‘노동’을 주로 사용하되 노동에 해당하는 ‘근로'(근무)를 혼용합니다.
2. 노동자와 근로자, 초과노동과 초과근로 등 표현도 위와 마찬가지입니다.
3. 이는 이미 널리 쓰이는 용어와 표현에 익숙한 독자를 배려하려는 취지입니다.

‘연간’ 노동시간이 중요하다

일단 우리는 주 단위 노동시간’을 주로 이야기하곤 하는데, ‘연간’ 노동시간이 중요하다. 연간 노동시간에서는 평균 휴가 일수가 중요한데, 유럽은 3, 4주 휴가를 다녀온다. 그래서 연간 노동시간이 확 준다. 스위스는 휴가가 4, 5주가량 된다. 프랑스도 그쯤 될 거고.

많이 줄긴 했는데… 휴가는 짧은 편

그래서 주당으로 비교할 때와 연간으로 비교할 때와 차이가 많은 게 한국이다. 우리가 통상 1주일이나 2주일 정도 휴가를 다녀온다. 유럽과는 차이가 크다. 그런 유의해야 할 차이가 있지만, 연간으로도 한국은 2018년 이후 2천 시간 미만으로 진입했다.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KDI, OECD 연간근로시간 비교분석과 시사점, 김민섭, 2023. 12. 19.

1. 안전 건강 관점 (장시간 노동)


왜 줄었을까? (KDI 보고서)

중요한 건 왜 줄었을지 하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 노동시간을 분석한 KDI 보고서는 1) 자영업자가 많고 2) 단기간 노동이 많다는 점, 그러니까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 때문이라는 보는 것 같다(아래 보고서 링크와 도표 참고).

관점, 우선 경제성보다는 안전과 건강(✔)

다소 의욕이 강해 보이는 보고서다(웃음). 의도는 충분히 알겠다. 다소 아쉬운 건 KDI 보고서의 관점이다. 노동시간이 줄었다고 하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보고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1) 생산성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2) 안전과 건강 그리고 후생의 관점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노동시간을 문제 삼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관점은 별론으로, 사회적으로 관점으로 보면 ‘장시간 노동’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가 고통받으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고통받는다. 잠재적인 위험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안전과 건강과 관련해서 우리가 걱정하는 건 주 40시간, 48시간 일하는 분이 아니다. 장시간 노동자를 걱정하는 거다.

우리는 왜 노동시간을 문제 삼는가. 그 관점이 아주 중요하다.

Business vector designed by Freepik

‘장시간 노동’이 중요하다 (ILO+WHO 연구)

노동자의 안전, 보건, 후생을 비롯해 그 가족과 사회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장시간 노동이다. 그게 가장 중요한 지표다. 그게 KDI 보고서에는 안 나와 있다.

장시간 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ILO와 WHO가 2021년 5월에 발표한 공동연구 보고서가 있다.

  • 주 55시간 이상 근무자(A), 주 35시간~40시간 근무자(B).
  • 허혈성 심장질환 사망 위험성은 A가 B보다 17% 높고, 뇌졸중 사망 위험성은 A가 B보다 35%가 높다.
  • 2000년~2016년,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허혈성 심장질환과 뇌졸중 사망자는 각각 45%, 19% 증가했다.
  • 일과 관련된 전체 질병 중 1/3이 장시간 노동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모든 나라 정부·사용자·노동자는 장시간 근무가 조기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WHO)

50%(1980) → 11%(2021) 그래도 많은 편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초 1주일에 54시간 일하는 장시간 근로자가 취업자의 절반을 넘었으나, 지난해(2022) 10% 남짓한 정도로 낮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18시간 미만 단시간 근로 비중은 0.5%에서 8%로 높아졌다.

남재량, 고용률은 노동시장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월간 노동리뷰 2023년 10월호.
재인용 출처: 남재량, 고용률은 노동시장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월간 노동리뷰 2023년 10월호. 강조 표시는 편집자.

위 도표처럼 80년대만해도 54시간 이상 노동하는 취업자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이제는 11% 정도다. 많이 낮아졌지만, 그래도 남미 국가들 빼고 나면 여전히 최고 수준으로 높고, 그리스보다 높으며, 유럽의 장시간 노동 국가들보다 높다. 요약하면, 노동시간은 점차로 줄고 있지만, 장시간 노동자는 많이 줄었어도 여전히 많은 편이다(참고로, 우리나라 장시간 노동 기준은 54시간이고, OECD 기준은 50시간).

왜 줄었나 (법정노동시간)

외국의 경우에는 꾸준하게 노동시간이 줄었다. 영국은 개별 협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노동시간이 줄었고,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줄었다. 한국은 프랑스와 비슷한 패턴인데, 법정 노동시간을 줄일 때마다 노동시간이 그 법정시간에 끌려와서 줄어들었다. 즉, 법이 바뀔 때마다 노동시간이 ‘점프’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리고 ‘이빨 없는 호랑이’라고 실효성에서 문제가 많다고 비판받긴 하지만, 어쨌든 법정노동시간 변화에 맞춰 노동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래서 법정노동시간에 관한 논의에 기업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과노동 보전 노동시간 단축 방식’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법정노동시간이 줄고 전체 노동시간이 줄어도 ‘초과노동'(초과근로)은 잘 줄어들지 않는다. 예전에 한창 노동시간을 연구했을 때 이런 한국적 패턴을 ‘초과노동 보전 노동시간 단축 방식’이라고 이름 붙인 적이 있을 정도다(웃음). 가령 법정근로시간이 주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어도, 주 44시간에 일했던 초과근로가 10시간이었다면 40시간으로 법정근로시간이 줄어도 초과노동은 10시간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게 아주 묘하다. 이게 어떻게 보면 기업은 기업대로 생산을 유지하는 방식이고,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특히 노조가 있는 경우에는 초과근로를 통해 임금을 유지하는 방식이다(이 부분이 아주 중요. 후술하는 ‘비정규직’ 문제와 연결됨. 편집자).

최근에는 단시간 근로의 비중이 늘어서(약 8%, 2021)가 늘어서 그 양상이 아주 복잡해졌다. 분포가 넓게 퍼져 있기 대문에 주 평균이 얼마인지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 중요한 건 장시간 노동, 특히 주 40시간 이상 노동에서 장시간 근로자의 비중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걸 주의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 취업 기회 측면 (단시간 노동)


단시간 노동, 여성 취업 등 위해 필요

두 번째로 노동시간을 취업 기회와 관련해서 볼 때, 여성이 좀 더 쉽게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 단시간 노동을 늘리는 건 당연히 필요하다. 유연노동제와 같은 것도 필요하고. 그래서 이런 건 앞으로도 늘 거다.

하지만 ‘보호 결여의 위험’ 노출

그런데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단시간 노동의 문제는 대부분 안전망이 없다는 거다.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없어서 지불해야 할 비용이 큰 경우가 있다. 그런 위험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문제다. 그래서 고용보험의 사각지대, 사회보장의 사각지대를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바로 단시간 근로자들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 적지 않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아직 큰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한 상태다. 장시간 노동이 안전과 건강 등 후생의 문제에 노출돼 있다면, 단시간 노동자들은 ‘보호 결여의 위험’에 노출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 (통계적 착시)

초단기 노동자는 노동시간을 좀 늘리고 싶어 할 테니 장시간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좀 떼어주면 안 될까? 이건 한마디로 통계적 착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있는 장시간 노동시간을 떼어 저기 있는 단시간 노동시간에 주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런 건 통계적 숫자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서로 다른 업종,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통계 속 관념화된 숫자를 서로 나누듯, 현실 속에서 노동시간이나 사람을 서로 떼어주고 옮겨가고 그럴 수 없다.

현실적 방안: 장시간 노동 줄여서 새로 고용

일자리 나누기 논의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통계(장시간 노동, 단시간 노동)로 일자리나 노동시간을 나눈다는 건 실무에서는 쉽지 않다는 거다. 현실성 있는 방안은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거기에 새로운 사람을 데려오는 거다. 즉, 일자리를 늘리는 것.

3. 생산성 관점 (50시간 법칙)


노동시간과 생산성, 누가 맞을까?

  • 기업: 노동시간 생산성이 낮아서 근로시간을 줄이면 기업 망한다. 줄이기 힘들다.
  • 노동자: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생산성이 낮아진다.

두 가지 의견이 완전히 갈린다. 두 주장은 인과관계를 달리 해석한다. 기업은 노동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거고, 노동시간이라도 늘려 생산성을 벌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노동자는 초과근로로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서로 정반대다.

오늘날, 누구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기업 주장은 오늘날 현실성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나라가 이른바 ‘선진국’이고,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0위 정도 한다면, 더는 생산성 부족 핑계를 노동시간에 돌리긴 힘들다. 민망하다. 베트남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한다(웃음).

주 50시간 기준, 노동 줄이고 생산성 늘리고

결국 노동시간을 줄이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동시간을 집약적으로 쓰자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관련 연구도 많다.

관련 연구에서 통상 이야기하는 건 주 50시간이다. 주 50시간을 기준으로 거기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진다. 물론 생산성 증가 효과는 50시간에서 멀어질수록 낮아지긴 한다. 주 50시간 일하는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2~3시간을 줄일 때 증가하는 생산성 수치와 주 35시간 일하는 사람이 2~3시간 줄일 때 증가하는 생산성은 차이가 있다(당연히 전자가 높다).

주의할 점은 일반적으로 너무 노동시간이 적은 경우, 주 30시간 그 밑으로 더 내려가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보면, 50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자의 초과근무를 줄이면 꽤 효과가 높을 것으로 본다. 어차피 50시간 이상 초과근무해봤자, 해당 노동자는 버논의 연구(Industrial fatigue and efficiency, 1921) 결과가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노동 강도와 집중도를 떨어뜨려서 결국 전체 생산성은 50시간 미만으로 일했을 때와 비슷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낮아질 수도 있다.

노동시간이 늘어나면 집중력(생산성)은 당연히 줄어든다.

4. 초과근로와 비정규직 (한국적 해법)


일시적 주문 폭주 → 초과근로 → 기업·정규직 윈윈

생각해 보자. 왜 초과근로가 필요할까. 기업 입장에서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주문이 폭주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게 초과근로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고, 노동자 입장에서도 수입이 는다. 서로 윈윈이다. 둘 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기업과 노동자, 둘 다 행복한 상황은 이 ‘주문 폭주’가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경우에 한정된다. 문제는 이 주문 폭주가 구조화할 때 생긴다.

주문 폭주 일상화, 고용보다 초과근로가 싸다?

주문 폭주 상황은 왜 구조화하는가. 일시적인 주문 폭주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 장기화한다고 치자. 그러면 기업은 직원을 새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추가 고용과 기존 노동자 초과근로를 비교하면, 초과근로 쪽이 비용이 덜 든다. 초과근로에 따른 인센티브(1.5배, 2배)를 고려해도 그렇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야근 같은 초과근로가 아주 가끔 있는 일일 줄 알았는데, 그게 상시적인 일이 된다? 그러면 문제는 첫 번째 문제(건강과 안전)로 돌아간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이런 경우에 노동자 입장에서는 오래 못 버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아지고, 건강에 위해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장시간 노동의 일상화는 필연적으로 건강과 안전에 위협이 된다.

한국적 문제 해결: 비정규직! 위험 이동!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한 방식은 뭔가?

초과근로 노동자의 업무를 상대적으로 좀 더 쉬운 업무에 배치하는 거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어려운, 힘든 업무는 누가? 정규직 노동자는 초과근로를 고려해서 좀 더 쉬운 일을 맡기거나 초과근로에서는 쉬운 일로 돌리고,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의 초과근로 상황을 고려해 좀 더 힘들고 기피하는 업무를 맡기는 거다.

이게 바로 한국적 문제 해결 방식이다!

임금의 하방 경직성: 정규-비정규 이원화

노동자는 한번 높아진 임금에는 쉽게 적응하지만, 한번 적응한 임금을 다시 내리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이걸 ‘임금의 하방 경직성’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는 정규직-비정규직 이원화 시스템에 동의한다.

정규직의 입장… 돈이냐 건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그걸 모두 해결해주는 게 있으니… 바로 비정규직!

비정규직은 기업과 정규직의 ‘구조적 해법’ (밑줄 쫙~!)

논의 편의상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해보자. 기업과 정규직 모두에게 초과근로 문제가 초래하는 문제를 구조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주는 구조적 해법이 바로 비정규직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비정규직은 ‘해법’이고, 장시간 노동과 그로 인한 초과수당에 익숙한 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비정규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해법’이다.

비정규직이 구조적인 해법으로 편입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어려운 거다.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서 기업과 노조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 (비정규직 외의) 새로운 구조적 해법을 찾는 것은 별론으로, 이 비정규직 문제를 점진적으로, 부분적으로 풀자고 하면 아예 문제 해결이 어려운 거다. 이건 구조적으로 기업과 대공장, 대기업 정규직의 이해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큰 돌파구를 마련하기 힘든 구조다.

비정규직의 해법? 정규직뿐! (…..)

그렇다면 비정규직의 해법은 무엇인가? 그건 정규직이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 현재로선 비정규직을 탈출(?)하는 일은 그 개인에게 맡겨진 미션이다. 그 개인에게 최선의 방법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힘으로’ 정규직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정규직 문제는 기업과 정규직 모두에게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라서 이걸 구조적으로 풀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그렇다고 당장 비정규직이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표를 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정규직과 비교해서 차별받는 건 맞지만, 그래도 중소기업보다는 임금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제도적 해법?

개별 노동자나 개별 노조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산업 전체를 엮어서 산별로 논의해야 한다. 개별 기업별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 동종업종 모든 기업에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법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이미 알고 있지만, 성공적이진 않다.

지금까지도 법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게 ‘2년 유예’ 제도다. 그게 조금 도움이 되긴 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 하는 점이다.

문재인(당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인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하며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2만여 명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청난 후폭풍에 휩싸였다. 당시 모습. 2017년 5월 12일. 청와대 제공.

비정규직은 ‘무빙 타겟’

법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달라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법안은 효과는 있었지만, 구조적인 수준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를 구조적인 상수로 생각하고, 관련 법의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컨설팅해주는 회사도 많다. 어떻게 보면 그런 컨설팅 회사가 시민사회 움직임보다 더 빠르고 더 창의적으로 움직인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비정규직 문제는 ‘무빙 타켓’이다. 그래서 더 해결이 어렵다. IMF 이후로 30년 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쉽지 않다.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대기업/대기업노조 잡아서 족치자?

대기업을 잡아서 족치자고 해봤는데, 기업 족친다고 해결이 안 된다. 왜냐하면 기업도 노조 눈치 보면서 이 해법(비정규직)을 찾았기 때문에 한쪽을 족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노조를 비난하는 것도 해법이 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자칫 비슷한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될 수도

이 문제는 계속 공론화가 필요하고, 모두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왜? 내버려두면 금방 더 나빠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정규직이 대기업과 대기업 노조의 구조적 해법이지만, 자칫 모든 사회의 구조적 해법이 될 수도 있다.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비정규직이 시민사회와 연대해서 이렇게라도 계속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도 이 정도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당분간 영원한 숙제다.

북유럽, 덴마크의 경우

북유럽의 해법은… 가령, 덴마크는 노조 조직률이 67%(OECD, 2021 기준)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같은 시기 노조 조직률이 14% 정도였다. 덴마크 정도 되면 기업 단위가 아니라 산별로 혹은 중앙에서 전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논의한다. 집중화된 방식으로 협상하고, 협상할 때 모든 노동자를 정규직, 비정규직 구별없이 포괄적으로 협의한다. 그래서 분절, 부분적 차별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다.

다만, 이제 북유럽에서 문제가 되는 건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라기보다는 이주노동자다. 그게 지금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다. 그 파열음이 점점 더 커진다. 이주노동자도 노조에 많이들 가입하는데, 노조의 임금협상 효과를 계산하면, 자국 노동자가 훨씬 더 그 효과가 크고, 이주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작다.

덴마크 코펜하겐 야경. 덴마크의 노조 조직률은 무려 70%에 육박한다.

한국의 노동시장 분절화

한국의 노동시장 분절화(계층화)와 비교하면 물론 우리가 훨씬 더 심한 편이긴 하다. 개별 기업 단위보다 상위로, 가령 산별로 올라가야 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게 쉽지 않다. 그나마 금속노조가 조금씩은 하고 있긴 한데….

민노총이든 한노총이든 비정규직 기금을 만든다고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구조적 해법을 찾기는 힘들고, 정치적 동력도 예전보다는 떨어진 상태다. 그래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이게 정말 어려운 이유는, 현장 노동자 입장은 다를 수 있다. 활동가도 온도차가 있고.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봐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다들 좋을 것 같지만, 정규직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반대 여론과 논란이 얼마나 컸나. 그 사회적인 논란을 생각하면 정치권에서 이 사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방증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인국공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

사후약방문이다. 최저임금이랑 비슷하다. 문재인 정부가 너무 상징적으로 접근한 게 아닌가 싶다. 최저임금도 그렇고,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선언 등으로 표현된 노동정책도 그렇고, 자영업자 정책과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했다. 한 곳을 푸시한다고 해서 다른 곳이 저절로 바뀌진 않는다. 제도적 틀을 만들고 종합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인천공항공사만 진행하니까 제도적인 진전이 없었다고 본다. 최저임금이든 비정규직이든 전체 로드맵이 부재했다고 본다. 그 점이 아쉽다. (‘인국공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 2024. 3. 18. 추가 질의 및 답변을 보충)

나는 피눈물, 너는 로또?

노동시장의 계층화가 구조화했다. 정규직까지 올라간 사람은 정말 자신이 노력해서 정규직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입장에선 정치적인 해법, 법률 하나 규정 몇 개로 비정규직이 갑자기 정규직이 되는 건 ‘로또’라고 생각하는 거다. 자신은 죽기 살기로 노력했는데, 누군가는 로또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런 방식을 지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하다. 정규직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해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이런 정치적, 제도적 해법에는 항상 30~40% 반대가 있을 거라는 거다. 50~60%가 찬성하더라도 항상 30~40%라는 무시할 수 없는 반대가 있을 거다.

그걸 감수하고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정치적 동력이 있는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다. 계속 관심을 가지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문제, 큰 방향성을 이야기한다면…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비정규직은 제한해야 한다. 어려운 공기업도 있지만, 좋은 공기업도 많다. 그런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다니는 직원은 자기가 누리는 혜택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누구든 아니겠는가, 원래 사람이 그렇다. 그걸 조율할 수 있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공기업에 대해선 세련되지만 강력한 방식이 필요하다.

사기업에 관해선 어려울 수 있지만, 공기업에 대해선 좀 더 강제적인 수단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고, 그런 수단이 현실에서도 필요하다. 현재로선 기존 직원의 양보가 필요할 수 있다. 임금을 10%를 늘릴 수 있지만, 노사가 5%로 합의하자, 그 대신 나머지 5%에 관해서는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나가자, 이런 식의 점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비정규직 문제, 큰 방향성을 이야기한다면…’ 2024. 3. 18. 추가 질의 및 답변을 보충)

5.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은 윤석열 공약집에 있던 아이디어다. 연봉이 높으면 노동시간 제한에서 예외로 하는 제도다.
  • 미국은 연봉이 10만7432달러를 넘는 고연봉 임원과 관리직, 전문직 등은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천광암(동아일보 논설주간)은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한 이런 제도적 바탕 위에서 애플이 나올 수 있었고, 테슬라가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고연봉 노동자의 경우 노동시간보다 성과가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만든 제도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진 핵심 인재들만이라도 획일적인 52시간 규제의 족쇄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 윤석열은 한때 주 120시간도 일하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가 철회한 바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는 제안인데 총선이 끝나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이상 슬로우레터 2023년 12월 18일 중에서)

EU ‘주니어 닥터’ 사례

일반적으로 경영진에 속하면 개별적인 협상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노동법 적용이 안 된다. 나도 ILO 조직에서는 관리자에 속하기 때문에 스태프 유니온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웃음).

‘화이트칼러 이그젬션’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온 거냐면, 일부 화이트칼라층에는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하자, 특히 유럽에서는 의사의 노동시간 논의, 그중에서도 인턴과 레지던트 경우에 유럽의 노동시간 지침의 예외를 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즉, 주니어 닥터(인턴과 레지던즈)의 노동시간 규제에 관한 게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의 주요 사례다.

원래 유럽의회에서 권장하는 주 최장 노동시간은 48시간 정도다. 그런데 그 규제에서 주니어 닥터는 예외다. 쟁점이 된 건 주니어 닥터의 ‘대기시간’이다. 대기시간을 노동시간에 포함할 것인가, 포함하지 않을 것인가. 대기시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의사들은 주장했다. 유럽재판소까지 갔다. 결국 대기시간도 노동시간에 포함됐다.

‘과로사’하기 딱 좋은 아이디어

미국은 노동법이 너무 모호해서,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각종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유럽에 가깝다. 그래서 미국을 참고로 삼아서 판단하면 아주 곤란하다.

왜냐? 원칙적으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아주 위험한 아이디어다. ‘화이트 칼라는 성과로 말해야지, 시간으로 평가하면 안 되지!’ 말은 좋지만, 성과를 평가한다는 게 아주 어렵다. 노동시간을 지우고, 성과로 평가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노동시간을 규제하지 않으면 기업은 직원의 노동시간을 방치하면서도 독려하고, 화이트칼라 자신도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오버’하게 된다. 기업의 방치과 결합해서 장시간 노동이 구조화한다. 그렇게 하다가 과로사하는 거다. 과로사(karoshi)라는 조어가 만들어진 나라인 일본 사례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과로사는 이제 그만!” 위키미디어 공용. 2018.

노동시간을 굳이 법으로 규제하는 이유

노동시간 규제를 굳이 법으로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왜 기업과 노조가 자율적으로 노동시간을 정하지 못하게 하느냐면, 당사자에게 맡기면 1) 협상력에서 차이가 있고, 2) 사안을 근시안적으로 볼 여지가 크다.

근시안적으로 사안을 본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수입, 승진을 주목할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과 수익만을 생각할 수 있다. 노동자든 기업이든 1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시간 노동의 ‘누적 효과’가 중요하다. 그걸 바탕으로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게 노동시간을 법으로 규제하는 이유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 법이라는 수단으로 강제하는 거다. 법적 강제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이런 관점으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판단해야 한다. (끝)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