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14.]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인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분석합니다.
‘캡콜드케이스’ 인터뷰를 위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팩트풀니스]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재단에서 일하고 싶어서 읽은 건 아니올시다). 두 책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독서는 즐겁지 않았다. 나는 인터뷰 직전에 이렇게 메모했다. 그리고 그 메모 사항을 하나씩 캡콜드(김낙호 교수, 드렉셀대학교 커뮤니케이션과)에게 물었다.
- 너무 거시적. 미시적 세계 설명력 부족.
- 선택적 팩트
- 철학적 빈곤 (68혁명,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 동어반복
- 비약 (상관관계)
이 두 권의 책은 신낙관주의를 대표하는 책이기도 하다. 캡콜드는 무슨 일이든 하기 위해선 ‘희망의 시나리오’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다만 합리적 이성에 관한 이들 신낙관주의자의 과도한 자신감이 ‘트럼프 음모론’으로 대표되는 미디어 퇴행 현상에 대한 묵인이나 사후 정당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캡콜드는 게이츠 재단으로 상징되는 착한 부자의 ‘인류 구원 프로젝트’가 가지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비용 편익적 성과 중심의 시장주의적 세계관을 운영체제로 탑재함으로써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계도 함께 이야기했다. 하나씩 살펴보자.
캡:콜드케이스 [ep. 14]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려면 꼭 읽어야 할 두 권의 책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 이 글은 2024년 9월 24일 밤~25일 새벽에 있었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으로 맥락화하고,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왜 게이츠 재단의 필독서인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두 권 있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2011, 스티븐 핑커)
- [팩트풀니스] (2018, 한스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 올라 로슬링)
왜 빌 게이츠는 이 책을 재단에서 일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읽어야 한다고 할까. 희망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함께 하자고 이끌고 추동하기 어렵다. 희망의 시나리오가 있어야 더 좋은 세계,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자고 말할 수 있다. 빌 게이츠가 생각하기에 이 두 권의 책은 재단이 하려는 공적 프로젝트에 좋은 거시적 청사진을 제공한다. 인류의 폭력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뭐 그런.
하지만 세상이 더 나아졌다는 걸 과학적으로 판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왜 이 두 권의 책이 게이츠 재단의 필독서인지 살펴보자.
희망이 필요했던 시기
이 책을 쓴 시기, 그러니 2010년쯤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2008년 금융 위기로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그리스와 스페인 경제가 박살 나는 그 상황을 떠올려 보라. 세계화된 세상이 멈추고 망할 것 같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 세상이 나아지기는커녕 그 반대로 부정적인 전망이 팽해 하던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의 증거였다. 그리고 이 책들은 정확하게 그걸 제공한다.
효과적인 시장 박애주의
게이츠 재단은 신낙관론적 세계관이 가지는 기능적 역할에 주목했던 걸로 보인다.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되자! 그러면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그 기본 발상은 ‘효과적인 이타주의‘로 명명할 수 있다. 그것은 그냥 순수한 이타주의가 아니라 효과적이고, ‘시장적인’ 방식의 이타주의를 표방하는 일군의 흐름이다.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게이츠 재단은 ‘투자’한 만큼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을 원한다.
사실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건 좌파나 우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 그런 세계관을 품은 사람은 좌파적 성향이 강하고, 기본적으로 세계의 진보를 계급적 욕망의 충돌로 해석해 왔다. 그 충돌을 통해 새로운 방법론을 도출하는 변증법적 정반합의 사적 유물론의 사관으로 역사적 발전을 해석한다. 그런데 세상을 더 낫게 하려는 방향성과 그런 세상이 사실은 늘 갈등의 총합이라는 것이 일견 모순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핑커나 한슬링의 책은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좌파에는 비판적이다.
그런데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기능적이고 시장주의적 방향성을 가진 게이츠 같은 사람, 게이츠 재단에 좌파의 갈등적 세계관은 어울리는 방법론이나 철학이 아니다. 효과적이고 기능적인 접근 방식을 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즉, 그런 문명낙관론에 대한 수요라는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게이츠 재단이 사업을 모색하는 방식은 신기술 개발, 기아 퇴치 등 돈을 투자해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그렇게 기능적이고 시장주의적인 박애를 상징한다. ‘팩트풀니스’와 ‘착한 천사’는 그 이론적 배경 중 하나로 작동한다.
1. 아주 큰 이야기
이 두 책이 거시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이미 21세기의 미시적 세계의 모습은 구석구석이 좀 전체적으로 망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희망의 거대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아랍의 봄’마저 이집트와 튀니지의 부분적 민주화를 빼고는 뭔가 제대로 된 성과가 없었다. 세계는 미시적으로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미시적인 것에 대한 반론으로는 거시적인 통계로밖에 갈 수 없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사람들에게 뭔가를 끌어내고 변화를 모색하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은 살아생전에 뭔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패배주의는 변화를 끌어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동기는 순수한 거네?
동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본다. 공익적 목적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미시적으로는 긍정적 성과들을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숫자로 지표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거시적 통계를 계속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책의 통계들은 ‘희망의 시나리오’라는 목적성에 이끌려, 그 모든 거시적인 통계 지표와 지수는 선택적 팩트 취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하나의 방향성으로 거시 통계들을 취합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한다.
그래서 경제사의 거대한 흐름과 문명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면서도 각 분야에 관해서는 뭔가 취사선택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거다. 이 두 책은 그래서 양적 데이터에 집중하고, 질적 평가는 취약해지는 공통점이 있다. 가령 전쟁 중 인종학살에 관해 말한다면, 고대에도 현대에도 인종학살은 있었을 텐데, 그 숫자를 비교하면 당연히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질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고대에서는 생존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탈이었다면, 2차 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은 인종적인 편견과 현대적 관료제라는 행정 기술이 결합한 다양한 방식이 개입했다(독가스 방 등).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해서 이뤄지는 살해가 더욱 야만적이지 않나. 지금 가자지구는 또 어떻고.
질적 해석, 못하나 피하나
문명론적 진보를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질적 해석을 피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능력적인 한계 탓에 질적 해석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신낙관론을 대표하는 이 책 두 권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노씨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비판적 질문들은 신낙관론의 공통 요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 철학적 빈곤
문명 비관론에 대한 일차적인 반박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빈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핑커는 ‘선한 천사’ 마지막 장에서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있다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어 한다.
선한 천사, 트럼프 등장 전에 쓰인 책
스티브 핑커가 그런 순진한 낙관주의를 ‘선한 천사’에서 피력할 수 있었던 건 그 책을 쓴 게 ‘트럼프 등장’ 이전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2016), 다시 대선에 도전하려는(2024) 이런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를 목도했다면, 그렇게 순진하게 인류의 IQ가 과거에 비해서 아주 높아졌고, 그래서 폭력은 줄어들었으며 합리적인 세계의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글쎄.
그래서 ‘선한 천사’는 미국의 극우화가 트럼프로 꽃 피우기 전의 상황에 관한 반응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본다. 이 책의 장점이나 단점을 모두 차치하고, 이 책에는 트럼프 지지 현상의 광기가 반영되지 않았다. 합리적 이성에 관한 믿음으로 충실한 민주당 지지자 스티븐 핑커가 ‘트럼프 대통령’ 현상을 접하고 난 뒤에 이 책을 썼다면, 그래도 좀 내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능이 높을수록 합리적일 거야! 핑커가 틀렸다
한국 예를 들면, 전체적으로 학력은 높아졌지만, 온라인에서 정치적 이슈를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생산적이고 합리적 대화와는 거리가 먼 모습, 편견과 선입견의 갑옷을 입고, 더 진영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더 편협한 모습만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젊은 층에서는 정치적 혐오만을 세대적인 적대감으로 드러내거나 하는 모습… 이런 모습은 ‘합리주의에 충실하게 진보한 세계’와는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정보 능력은 높아졌지만,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더 가학적이고 폭력적으로 당파성을 표출하는 사람들, 이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핑커는 지능이 높아지고,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해지면 폭력성도 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적어도 온라인 토론(?) 공간을 보면, 핑커가 틀렸다. 게다가 온라인 토론이 그냥 온라인에서 말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토마 피케티 vs. 스티브 핑커
토마 피케티는 핑커처럼 거시 자료에 바탕을 두면서도, 탐색 범위를 좁혀서 하나의 범주에 관해 그 자료들을 활용한다. 민노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토마 피케티가 보기에도 공정성이라는 큰 흐름에서 인류는 진보했지만(여기까지는 핑커와 같다), 그런데도 자본 격차와 질적 모순은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을 피케티는 인정한다(이 지점에서 핑커의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통계적 환원주의와 갈라진다).
한국 사회만 해도 절대적인 빈곤은 줄어들고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이 심화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공동체가 양극화의 모순, 세대 갈등의 모순, 진영화한 소통 부재의 모순을 해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3. 신낙관주의의 ‘선한 동기’과 그 한계
거시 데이터를 무시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미시적 세계의 모순만을 직시하면서, 세상은 똥이야! 라고만 한다면, 세상을 바꿀 동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신낙관주의의 ‘선한 동기’ 자체는 폄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는 효과적 박애주의 활동가에게는 그런 동기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우선해서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시장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거고, 그런 시장주의적 접근이 효과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기능적 시장주의의 한계 (예: 코로나 백신)
다만, 게이츠 재단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신기술, 구호품 제공 같은 것에는 친화적이지만, 효과적인 정치적 시스템을 개선하고 사회적인 모순을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것에는 효과적이지 않다.
그런 게이츠 재단의 태도와 철학, 방법론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가 ‘코로나’ 백신에 관한 게이츠 재단의 접근법이다. 특허 제도 자체는 완화하지 않으면서, 즉 시장주의는 보호하면서도 백신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게이츠 재단의 태도는 코로나 초기에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즉, 게이츠 재단 방식은 기업 백신의 독점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식이라고 비판받았다.
백신을 효과적으로 백신이 필요한 곳에 전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백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 그런 눈에 보이는 기능적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문제, 제도적인 문제,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문제까지 해체해서 새롭게 다시 정립해야 한다. 당장 미국만 해도 우익 공화당 정권이 정치적 득실 때문에 코로나의 심각성 폄하하고 백신 음모론을 뿌려대서 초반 대처가 엉망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제도, 정치, 시스템의 측면에서는 별로 개선이나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이 많다. 단순히 기술을 개별하고 물량을 보급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 해법을 사회 전체에 퍼뜨리고 다시 반복하지 않게 하며, 유사한 문제가 발생해도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시스템 개선이다. 그걸 잘 못하고 있다.
시스템 개선, 못하나 외면하고 있나
떡볶이(제도적 접근, 철학적 접근, 근본적 접근, 시스템적인 접근)가 안 팔리니까 떡볶이를 안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똑똑한 사람이 많다고 세상이 진보하는 건 아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좋은 방향성을 가지려면, 정치와 같은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구조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점에 관해 핑커나 게이츠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신낙관주의자의 과도한 확신과 자신감
핑커 본인도 빠지는 함정이 뭐냐면, 가령 워크(woke), 한국에서는 대충 PC(정치적 올바름)로 통칭하는 움직임에 대한 반대다. 인간 지능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래서 인간은 합리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충분히 만들 역량이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전 모델’로 돌아가서 수많은 생각을 펼쳐 놓고 그 생각을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경쟁시켜도 무방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조너선 화이트(바른 마음)나 야스차 뭉크(위험한 민주주의) 같은 학자들이 이런 그룹으로 묶일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반페미니즘, 나치주의와 같은 목소리조차 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본다. 그런 입장을 2010년대 후반부터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개인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우익으로부터 칭찬받게 됐다. 우익들이 진보적인 세력에 비해 열세를 가지는 게 시대적으로 촌스럽고 밀려난 이데올로기, 가령 남성 우위 등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인데, 신낙관주의에서 파생한 이쪽 사고방식은 그런 세계관도 무시하지 말고 일단은 펼쳐 놓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우익들이 좋아할 수밖에.
이들은 문명화 단계에서 폐기된 것, 가령 인종주의와 같은 문화사회적 금기까지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상한 이념적 자유방임주의에 빠진다. 합리성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현실 사회는 이런 이론적인 것과는 다르다. 합리적으로 토론하기보다는 그런 금기가 노출되면,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호응’하고 ‘편승’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게 트럼프 시대의 교훈이기도 하고.
트럼프 시대의 촉진제? 그건 아니다
이념적 자유방임이 트럼프 시대 이후의 퇴행적 시대정신과 오히려 부합하는 건 시대적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낙관주의의 이념적 자유방임은 다소 엘리트주의적 느낌이 강하기에, 주류 대중에게 대단히 호응받은 흐름인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게 트럼프 시대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트럼프 시대에 다시 고개를 든 온갖 흉한 사회사상들의 사후 정당화 도구로 쓰이는 것은 맞다.
희망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
‘팩트풀니스’나 ‘선한 천사’ 같은 책을 읽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왜 이런 책이 나오게 됐는지, 그 맥락을 함께 잘 헤아려서 그 미덕과 한계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 왜 빌 게이츠가 이 책들을 칭찬했을까. 왜 오바마가 추천했을까. 게이츠도 오바마도 사회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 책들에는 그런 맥락이 있다.
균형감각을 위하여
들숨과 날숨
절망론과 낙관론은 양자택일은 아니다. 거시적으로 진보해도 미시적으로는 나빠질 수 있고, 그 역도 존재한다. 흐름과 양상은 양면적인 경우가 많다. 거시 통계만으로 문제가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안 나아지니까 절망하면 정말로 멈춰 서게 된다. 게다가 그 한 걸음 전진을 멈추는 순간, 두 걸음 뒤로 밀려난다. 결국은 어느 한쪽만 필요한 세계는 없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들숨과 날숨이 둘 다 이뤄져야 숨 쉴 수 있는 것처럼.
신낙관론의 위상
빌 게이츠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더는 쉽게 낙관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건 분명하다. 로 &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고, 트럼프는 다시 대선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 & 웨이드 판결 폐기 이후에, 트럼프 시대 이후에,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까지 겪은 후에 이 책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큰 틀에서는 비슷한 책이 나왔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좀 더 일찍 비판받았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선한 천사’는 진화심리학자인 핑커가 사회문명론으로 영역을 넓힌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자기 분야 바깥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약점이 노출되고, 많은 사회학자가 이를 비판했다. 비유가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뉴라이트 역사관의 근간을 마련해준 낙성대연구소의 전문 분야는 경제학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역사 사회학으로 판을 넓히다가 이상한 논지들을 양산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
[리얼 유토피아] 한국 사례집이 필요하다
[리얼 유토피아]는 ‘팩트풀니스’나 ‘선한 천사’에는 부족한 철학적 기반이 단단한 책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적 입장을 넘어 어떻게 실천적 활동가들이 좌파적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에 관한 사례 연구집인 이 책은 아쉽게도 에릭 올린 라이트 교수가 암으로 별세하면서 프로젝트도 멈췄다.
네오맑시즘의 거두인 에릭 라이트가 주도한, 희망의 사례에는 위키피디아, 참여 예산제, 기초소득 등이 포함된다. 딱 봐도 빌 게이츠가 좋아할 법한 사례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큰돈을 투자해서 눈에 보이는 큰 성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종류의 사업은 아니다.
특정 사례를 통해 눈에 보이는 스펙터클한 성과에 감격하기보다는 ‘리얼 유토피아’ 속 사례들을 한국에서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얼 유토피아 한국 사례집이랄까. 이런 시도는 솔루션 저널리즘과도 연계할 수 있다. 저마다 다양한 영역에서 해법을 찾아가는 사람을 연결하고, 함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나라 태양광 사례, 지역 맥주를 통한 지역 활성화 시도 등이 그 사례로서 포함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장주의적 성공보다는 공동체적 주인의식으로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들을 발굴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이런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팩트풀니스’나 ‘선한 천사’와 같은 빌 게이츠식 판타지를 주지는 않으니까(웃음). 이런 책을 읽는다고 빌 게이츠 같은 거물의 성공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대리만족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직접 작은 것들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건 거대한 성공이 주는 판타지보다 더 재밌고 보람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역사는 세계는 진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