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36.] 다시 화두는 돌봄노동-청년-노인-이주노동자다. 2024년, 귀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노동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안전망은 녹아내린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간의 복수’를 맞이할 차례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노동과 인간. (⏰18분)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36]
2025년, 시간의 복수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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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12월 20일(금), 12월 27일(금)에 각각 진행한 인터뷰를 함께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요한묵시록, 16:18.
윤석열 탄핵 정국, ‘안개 속의 풍경’
지금은 ‘안개 속의 풍경’이다. 윤석열 정부는 친노동적인 모든 걸 반대했고, 친기업적인 걸 모두 찬성했다. 그런 맥락으로 윤석열 정부하에서 진보적인 쪽에 있는 사람도 중도에 속한 사람도 모두 똘똘 뭉쳤다. 그래서 전선이 아주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윤석열 탄핵이라는 블랙홀이 모든 걸 빨아들이고 있다.
윤석열 퇴진 이후 그 전선이 희미해지면, 복잡한 관계의 역학이 안개를 뚫고 그 실체를 드러낸다. 가령, 마루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새해(2025)가 되어 마루 노동자는 ‘마루공’이라는 이름을 정부로부터 처음 ‘공식 인정’받는 기쁨을 누리겠지만, 여전히 건설 노동의 피라미드 구조, 계층화 구조 바닥에 있다. 여전히 마루공의 노동 현실은 안개 속 풍경이고,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더 미묘하고 복잡한 역학들 속에 놓여 있다.
윤석열 이후, 그런 복잡하고 미묘한 역할을 고려한 ‘노동 정책’이 필요할 건 불문가지다. 그러니 더 섬세해야 한다. 그 역할을 조율하는 일은 아주 힘들 텐데, 윤석열식 세계에서의 2차원적인 대립 구조가 3차원 세계의 실제로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개 속의 풍경’이지만, 그 안개가 걷히면 복잡한 실체와 미묘한 구조가 드러날 테고, 그 모순의 구조를 해결하고 조율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부여될 것으로 보인다.
시효 다한 ‘노사정’, 재건축이냐 리모델링이냐
우선 하나만 전제하자. 나는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보지 않고, 제네바라는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이상 떨어진 ‘밖에서’ 한국을 바라본다. 그 장단점은 별론으로, ‘그 거리’를 우선 이야기하고 싶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정책, 가령 노사정위원회 시스템 같은 것은 직접 정책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중요하고 상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제 그런 거버넌스 틀, 대화의 공간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 시효를 다하고 시스템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인지는 여부에 관해선 아직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여전히 노사정과 같은 ‘대화 공간’이 필요하긴 한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는 유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대화의 공간’이 필요한 건 분명하다. ‘노사정’ 시스템을 운동장으로 비유한다면, 그걸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할지 전체적으로 다시 리모델링해야 할지를 지금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현재의 노사정 시스템이라는 운동장으로는 어렵다. 그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다시 비유하면, 기존 노사정 운동장은 2차원적 대립을 전제로 설계됐다. 노동자과 기업, 자본과 노동의 대립항을 기본 구도로 설계된 시스템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승윤 교수가 말한 것처럼, 그 경계가 녹아내리는(액화노동) 시대다. 일과 노동의 경계, 노동과 휴식의 경제, 제도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현재의 ‘노사정’ 운동장은 더는 안전하게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사정 운동자는 새롭게 출현한 ‘플랫폼노동자’가 그 운동장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조력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 새롭게 출현한 노동의 형태를 끌어안고 노사정 위원회를 운용해야 하는데, 현재 시스템으로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현재 노사정 시스템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같은 딱지를 붙여 놓고, 조금씩 ‘예외’를 설정해, 가령 ‘출입증 소지자는 출입 가능’, ‘당일 한정 출입 가능’ 등으로 그 문호를 확대해 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시스템이라서 그렇게 문화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것으로는 완전히 새로워진 디지털 경제 시스템과 그 기술 혁신이 반영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포섭할 수 없었다. 노사정 운동장의 가장 큰 표지판은 여전히 ‘관계자 외 출입금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7년 체제의 연장선에서 ‘노사정’ 시스템은 이제는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87체제, 특히 정치 체제, 권력 체제에 관한 시효 논의가 많다. 87체제의 일부로서 경제와 노동에 관한 골격, 그 시스템의 시효가 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령 산업재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한국적 시스템을 돌아볼 때 단순히 기업을 악마화해서는 그 실패와 모순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노사정’ 시스템의 실패를 곱씹어야 새로운 대안 모색이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속도보다는 방향… 중간층의 헤게모니
잘한 것도 있다. 떠밀려서 한 것도 많다. 개혁은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한다. 야당 의원들의 구성도 균일하지 않다. 노동 친화적인 사람도 있고, 기업친화적인 사람도 있고…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야당이 이니셔티브를 행사한다고 할 때, 이런 역학 속에서 조율된 안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윤석열의 극단적인 파국 이후, 그 ‘바통’을 야당에 넘길 때, 노사정 체제를 이야기하는 게 잘 안될 가능성이 크다. 시민단체는 정치권이 미덥지 못하고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속도보다는 방향이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노동계도 균일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 복잡한 역학의 타협점이 정책이다. 논의에서 배제되는 ‘노동 시장 밑바닥’은 그럼 스펙트럼의 중간값을 취하는 정책적 방향성에 따라 체계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타협은 항상 ‘중간쯤’에서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중간값에 속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선거에서도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동, 경제 정책에서도 ‘중간값’을 선호하는 경향은 유사해 보인다. 스펙트럼의 양 끝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자라고 해서 같지 않다. 완전히 다르다. 수직적으로 바라보면, 바닥층을 어떻게 보호할지가 아주 중요하다.
기본 프레임은 ‘협상력 없는 노동자’ 보호
유럽의 노동 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노동 정책은 중상위 노동자는 협상력이 있으니 별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전제한다. 그게 기본 방향이다. 가령 대기업 사무직이나 대공장 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은 정책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가장 두텁게 보호받는다. 거꾸로인 셈이다.
사실 기업과 노동자는 직접 협상하면 가장 좋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자는 별로 없다. 그렇게 협상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공공적 성격의 노조법과 같은 제도가 있다. 그래서 협상력이 부족한 노동자를 법적 보호 대상으로 포섭한다. 유럽에서 공공정책이라고 하는 건 그런 협상력이 부족한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협상력 부족한 노동자의 저임금, 그 가족, 건강을 어떻게 보호할지를 중심으로 노동 정책을 설계한다. 그게 기본적인 노동 정책의 기본 프레임이다.
그런데 한국은 협상력이 부족한 하층 노동자가 아니라 ‘중간층’을 겨냥하고 중간층 눈치를 보는 ‘경향’을 띤다. 지금은 중간층보다는 노동 하층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따져봐야 할 순간이다. 아니다. 이미 그래야 할 시간을 많이 지나쳤다. 지금도 늦었지만, 더 늦춰선 안 된다.
2025년, ‘시간의 복수’
나는 돌봄, 노인, 청년, 이주노동자를 연결해서 연구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적 공론 대상으로 될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지금으로선 낙관적이진 않다. 거대 정치 이슈가 너무 많다. 돌봄, 노인, 청년, 이주노동의 문제는 학구적 논의기도 하고 실천적인 논의이면서 동시에 무엇보다 정치적인 논의인데, 정치적인 공간이 열릴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현 상황은 일부이긴 하지만 약간은 내전스러운 상황이다. 양쪽에서 칼을 뽑아 들었기 때문에 ‘돌봄-노인-청년-이주’의 문제가 악화한 상태로 방치될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이 염려된다. 정치적 공간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공간이 닫히고 있는 형편이다.
슬로우뉴스가 민주노총과의 기획으로 윤석열의 ‘노동’ 분야 패악질을 잘 정리했는데, 이제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계층, 특히 노동 하층부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역량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윤석열 탄핵과 그 이후의 권력 재편이라는 정치적 의제에 빨려 들어가 소멸하고 있다.
돌봄-청년-노인-이주노동자는 여전히 화두다
1년 전 2024년을 전망하면서 돌봄과 청년과 노인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노동계의 화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밑바닥 노동을 걱정했다. 그 걱정은 변함이 없고, 지난 1년 동안 윤석열 정부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노인도, 청년도, 이주노동자도… 학점에 비유하면 F 학점을 주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시험도 치르지 않고, 출석도 하지 않으며, 과제도 제출하지 않은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부가 이렇게 손을 놓고 있어도 학계든 시민사회든 의미 있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모든 걸 빨아들여 녹여버리는 ‘용광로’ 같다. 전혜원 기자나 이승윤 교수처럼 의미 있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고, 시민사회에서도 고민하는 분들이 많지만… 공론장으로 나와 정책 책임자가 시민을 향해 이야기하는 그런 ‘함께 논의’하는 수준으로 올라오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다양한 노력이 보이고는 있지만, 공론으로 나오지 못한 채로 수면 아래 머무는 것 같다.
비극적인 사건들이 터지면, 그래도 사안을 살펴보고, 슬픔을 나누고, 그런 이야기들을 술자리에서 나눴지만, 언젠가부터 김건희 이야기, 윤석열 이야기, 사회적인 논의라기보다는 권력자의 뒷이야기나 몰락에 관한 이야기… 그렇게 2년을 보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의 민폐는 정치에 한정하지 않고, ‘담론’ 차원에서도 논의의 가능성을 파괴적으로 잠식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너지는 운동장을 보면서 새로 운동장을 지어야 할지 말지 고민해야 할 시간에 계속 바깥으로 놀러 다니면서 시위하는 느낌이랄까.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민노씨 말처럼 ‘시간의 복수’가 있을 거다. 내년(2025)에는 그 복수가 반드시 온다. 그것도 질서 있는 형태가 아니라 굉장히 혼란스러운 형태로 올 가능성이 크다. 후폭풍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책이나 제도를 하는 작업은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 왕도가 없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제대로 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다. 요령이나 속성이나 왕도가 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치는 훨씬 더 높아질 거고, 밀린 숙제를 해달라는 욕구는 아주 강해질 거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시간의 복수’를 견디면서 견고한 정책화 과정을 만들어야 가야 하는, 모순과 불일치의 과정을 잘 감내해야 하는데, 상대편 공격을 견디면서 그걸 실현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남태령 대첩은 실마리가 될까
‘남태령 대첩’과 같은 형태의 연대는 늘 있긴 했다. 가령 ‘넥타이 부대’라든지. 하지만 이번 연대가 더 각별해 보이는 것은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은 여성(2030여성) 그룹과 농민 그룹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여전히 그런 저변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합이 전농의 당사자 문제, 2030여성의 당사자 문제를 ‘연대’로 시너지를 내서 ‘해결’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좀 달리 생각해 볼 문제다. 여성과 농민과 성소수자, 청년 백수와 투명인간이 서로 만났다는 것만으로 공론의 장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묶어야 하는 역할은 이들 당사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의 몫’이다. 그다음 단계(정치)로 넘어갈 수 있을지는 항상 모든 시대의 실험대였던 것 같다.
‘해법’으로서의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적인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한데, 내년에는 정치적인 전개 상황에 따라 유동성이 있지만, 아직은 판단은 유보적이다. 하지만 이런 저력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는 아주 큰 의미가 있다.
2030여성이 광장 친화적인 이유와 2030 남성의 ‘착시’
2030 여성이 집회에 적극적이고, 20대 남성은 줄어드는 현상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고용 상황을 이야기하면, 아무리 고용 상황이 좋아진다고 해도, 지난 인터뷰(‘노인과 청년 그리고 포퓰리즘의 나무’)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청년 일자리는 좋아지기 힘들다.
문제가 어떻게 복잡해질 수 있느냐면, 좋은 일자리가 제한되고, 그런 일자리를 분배할 때, 오히려 20대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좀 더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느냐. 2030 남성의 보수화 경향과 2030 여성의 진보화 경향이 더 굳어질 거다. 20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공격적인 반응도를 높일 가능성도 크다. 당장 군입대 문제가 다시 튀어나올 수 있고, 젠더 갈등은 좀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시나리오인 셈이다. 2025년, 최악의 지옥도를 가정하면 이렇다.
노인과 청년이 싸우고,
이주노동자와 다시 청년과 노인이 싸우고,
2030 남성은 2030 여성과 싸운다.
노동시장의 분절화를 방치하면,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이지 않으면, 그런 계층화, 단절과 갈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어쩌면 보수적인 정치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제공할 수도 있다. 마치 홉스적 상황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 귀결은 결국은 국가 권력(리바이어던)의 정당화였던 역사적 전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문화적인 방식, 소통의 방식, 대화의 방식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운동장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 그런 수평적이고 문화적이며 통합적인 방식의 메커니즘, 정책, 방법론을 함축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운동장’이 없다.
거리에 쏟아져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연대한다는 건 그럴만한 여지가 있어야 한다. 젊은 남자에 비해서 젊은 여성은 연대의 ‘연결 고리’가 많은 편이다. 페미니즘, 출산, 경력 단절, 여성부 폐지, 반여성적 정책… 그런 고리가 많다. 그런데 한국 남성에게는 서로를 묶어줄 수 있는, 어깨동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삐져 있다고 해야 하나. 정치적인 무정부상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탄핵 집회에서 20대 남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현상을 일반화해서 문제화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과잉해석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좀 더 열심히 탄핵 집회에 참여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고, 그걸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좋지만, 20대 남자들이 너무 적어 보인다는 걸 탓하는 건 별로다. 순작용보다는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 있다. 물론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권하는 것은 좋겠지만.
노동시장과 관련해서 보면, 청년은 모두 어렵다. 이게 기본이다. 물론 남성은 차별과는 좀 멀리 있기는 하다. 여성이 전반적으로 차별에 훨씬 더 가깝다. 노동시장 전체를 보면, 통계적으로 여성은 차별받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남성은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우대받았는데, 그때보다는 상대적으로 그 우대가 줄어들고 있다. 이것도 팩트다. 자기(남성)는 조금씩 하강하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조금씩 상승한다. 그래서 남성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이거 너무 변화 속도가 빠른 거 아닌가하고 ‘현기증’을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착시’랄까. 사회 현상이 늘 그렇다.
우는 아이 달래는 방법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예컨대 흑인들의 권리가 조금씩 확보되면서 백인들이 느꼈던 게 그런 느낌이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여전히 흑인이 구조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계층의 그런 반발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건 ‘착시’니까 니가 눈을 제대로 떠야지! 니가 눈이 나쁘니까 안경을 바꿔! 이렇게 비판하고 정색하는 게 전적으로 옳은 방식인지, 아니 그게 효과적인 방식인지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이런 의료적 대응(안경을 바꿔)보다는 다른 방식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의료적인 대응에 더해서 정책적인 대응을 함께 가져가야 더 효과적이다. 의료적인 대응(옳은 대응, 과학적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2030 남성을 상식과 팩트의 방향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비난만 하지 말고 당근(정책적인 지원)을 함께 가져갈 필요가 있다. 그런 정책적 밸런스가 필요하다. 정치의 관점에서 그런 걸 조율해야 한다. 그런 게 바로 정치의 필요성이다. 그 정책 대상이 가진 ‘편견’ ‘문화적 요소’까지도 고려해서 정책을 설계하고 전략적으로 로드맵을 짜야지, 단순한 데이터만 가지고 정책을 마련해서는 안 된다.
남태령이라는 상호 공존과 존중의 ‘공간’
우선 청년이라는 건 인구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인 청년은 일반적으로 교육 과정을 마친 취준생을 가리킨다. 이들은 성인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훈계 대상’이 아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누군가를 훈계하고 계몽할 수 있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청년이나 중년이나 노년은 인구학적 특성 분류일 뿐이다. 중년이나 노년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별도의 자격을 부여받는 건 아니다.
훈계? 기성세대야말로 ‘깨몽’하시고
청년이라는 구성원에게 사회가 혹은 기성세대가 훈계할 수 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역사적으로 이런 방식이 성공한 적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지금 기성세대도 당대의 기성세대를 오히려 비난하면서 성장했지, 기성의 기성세대에서 훈계를 받고 비판받고 ‘깨몽’한 게 아니다. 결국은 ‘스스로 내부에서 바뀌어야 한다’. 외부에서는 자극을 주고, 지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이 청년을 혹은 여성을 바꾸게 할 수는 없다.
정책이 해야 하는 건 청년 내부에서 역동적인 활동과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독려하는 것이지 어떤 구체적인 방향성을 정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결론은 좋든 싫든 그 사회가 맞닥뜨려야 할 미래일 뿐이다. 다른 연령층에서도 청년들이 결정하는 방향성에 적응할 생각을 해야지 그 청년의 생각을 바꾸거나 그 방향성을 부정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 특히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를 자신의 프레임과 방향성에 ‘흡수’하려고 하는데, 기성세대야말로 ‘깨몽’할 필요가 있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의 담론에 맞추고, 서로 대등하게 대화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남태령이 성공적인 사회적인 이벤트였던 조건은 생각해 보자. 2030여성이 거리에 나섰고, 농민이 트랙터를 끌고 나왔을 때 서로 어울리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런 ‘공간’에서 연대가 확장한 것이지, 어떤 목적 때문에 방향성을 정했기 때문에 연대가 확장한 건 아니다.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는 공간, 그런 공간에서의 상호 존중을 통해 연대가 확장한다.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이 그 자신으로 온전하게 인정받는 공간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성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 존중의 공간을 마련해야 ‘연대’가 확장할 수 있다.
2030 젠더 갈등을 풀어낼 ‘공간’
잘 모르겠다. 당사자끼리 해야지. 세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공간’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역할, 거기까지다.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평론가들은 원래 역할이 그렇고, 그럴 수 있겠지만… 하지만 정치적인 역할을 가진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방향성이나 목적성을 정하지 말고 그저 서로 어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너무 서로에게 ‘훈수’가 심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한 훈수와 훈계가 심한 편이다. 물론 실제 대화에서는 그런 경우는 드물긴 하지만, 사회적인 이슈를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젊은 친구들 청년들을 한심하게 공격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태도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유럽의 어느 나라였다면, 그런 논의와 대응 방식을 보고 정말 ‘뜨악’할 거다.
한국 사회에서는 성공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획일적인 목표 지향의 삶이 개인이 추구해야 하는 선이다! 이 전제를 없애면 청년이 추구하는 목적은 다양하게 확장한다. 자신의 취미 생활, 친구들과의 관계, 여유 있는 생활… 다양한 가치 체계를 가진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다양한 가치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시나리오를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획일적인 시나리오를 강요함에도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젠더 격차는 아직 심하다. 이건 청년이 만든 게 아니다. 그걸 해결해야 할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는데, 그 부담을 청년에게 던지고, 그 해결마저 청년에게 강요한다. 뭔가 잘못됐다.
갈라진 세계, 청년의 계층화…어떤 넌센스
청년 문제도 예를 들면, 거친 예시인데, 남자가 여자에게 밀린다는 건 대학생들 이야기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좀 처지는 시기가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전체 생애 주기를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진다.
그런데 고등학교나 지방대나 전문대를 다니다가 중소기업, 하청기업, 파견직에 취업한 청년의 문제를 바라보자. 치명적인 결함, 위험을 겪는 건 남성 청년들이다. 이건 통계적으로 드러나는 진실이다. 대부분은 젊은 남자들이 위험한 현장에서 죽는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죽음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은 젊은 남자의 죽음이다.
청년 일자리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건, 그 자리에선 남녀 차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거다. 남자라고 편하거나 여자라고 불편한 게 아니다. 여기에선 젠더를 이야기하는 것도 사치다. 부질없고 의미 없다. 모두 힘들고 모두 어렵다. 이 문제는 젊은 세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젊은 세대의 미래를 걱정한다고 한다면 가장 신경 써야 할 분야가 여기다.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 실습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치자. 그러면 특성화고등학교 전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정도의 발언이 나와야 정상이다. 학교 실습 과정에서 학생이 죽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런 사회적인 비극이 발생했다면, 단호하게 정책적 메시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는 다양한 ‘기성세대’의 이해가 연결돼 있다. 당장 교사 문제부터 행정 파트, 그리고 기업들까지. 하지만 이런 사건이 나와도 학교를 없애자는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정책 당국이 현 상황을 점검해 보고 체크해보겠다. 학생 입장에서는 ‘그렇구나… 어른들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러지 않겠나. 하지만 ‘특성화학교 없애겠다’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학생들도 뭔가 할 이야기가 생기지 않겠나. ‘학교는 없애지 말라’ ‘학교 없애면 나는 일반 고등학교에 가냐?’ 이런 이야기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내부에서 토론하고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런 이야기 하는 입을 막고 학생들이 분노해 이야기하는 것마저 두려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건 넌센스다.
경계가 희미해지고 안전망이 녹아내리는…액화노동
노동이 기존의 표준화된 모습과는 다르게 변화하는 현상을 ‘액화노동'(Melting Labou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노동의 개념을 전통적으로 구성하던 여러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는 이 현상은, 기존에 유지되어온 법 제도를 공부하면서 더 확연하게 관찰되었다. 액화노동은 비표준적(non-standard)이고, 비정형적(atypical)인 노동 형태를 포괄한다. 여기에는 비정규직, 하청노동부터 근로자성 자체가 형해화된 프리랜서와 플랫폼노동, 긱노동, SNS 크리에이터, 그리고 ‘세분화된 일감을 맡는’ 다양한 형태의 크라우드노동(crowd work)까지 포함된다.
이승윤, ‘연구 노트: 불안정노동의 다양성과 액화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경계 없는 노동, 흔들리는 삶], 2024. 중에서
1. 누구를 위한 유연화인가
이승윤 교수가 제안한 ‘액화노동’이라는 개념은 노동유연화의 진화를 ‘표현’한 측면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는 ‘플렉서블'(유연한, 탄력적인)이라는 표현을 새로운 시대의 노동을 설명하면서 자주 활용했다. 그렇게 노동은 점점 더 말랑말랑해졌다. 그 말랑말랑해진 상태가 이제 더는 형체와 형태 없이 녹아내린 상태로 등장한 게 ‘리퀴드'(액체)나 ‘멜팅'(용해)과 같은 표현이다. 즉, 친기업적 관점에서 플렉서블이 쓰였다면, 노동자의 입장을 반영하고 유연화한 노동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이승윤 교수가 ‘액화노동’이라는 표현을 제안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가치 중립적으로 질문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노동 유연화’인가. 이게 첫 번째 질문이다.
2. 디지털, 일과 노동의 경계… ‘고체노동’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 질문을 받아서 답하면 노동 유연성은 전적으로 기업에만 유리하거나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플렉서블’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유연근무제와 같은 노동 형태는 노동자에게도 유익하다. 즉, 한국에서 많이 쓰는 표현으로 ‘워라벨’을 위해 노동시간을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면 그건 당연히 노동자에게 유리하다. 그러니까 노동 유연성을 이야기할 때는 기업에 유리한 게 있고,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액화노동’ 논의의 문제의식은 좀 복잡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플렉서블의 요소가 ‘디지털화’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노동을 통제하는 플랫폼이 경제적으로 차지하는 위상이 강해지면서 일과 생활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제 노동자가 직장이 있든지 집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스마트폰 앱으로 접속해서 장소 구별 없이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 출현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알고리즘을 통한 기술 통제는 강해지고, 노동은 더 말랑말랑해지며, 녹아내린다. 즉, 오늘날 노동은 기존 시대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기술적 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직장(일)과 집(일상과 휴식)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일상생활과 일이 섞이게 됐다. 육아 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아이를 돌본다. 그건 유연화의 긍정적인 측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기존의 긍정적 유연화가 이제는 아예 일과 업무가 뒤섞여서 노동자에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전통적으로 안전적인 일자리 개념 대신에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 그런 차원에서는 단순한 유연화가 아니라 아예 일과 노동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리퀴드'(액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노동에 관한 기존의 안전장치들이 새로운 기술적 진화에 의해 사라지고 녹아내리다는 측면에서 ‘멜팅'(용해, 액화노동)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정노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불안정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지향을 밝히는 것이다. 액화노동 역시 ‘고체노동’을 상정한 표현일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을 묘사하는 개념으로서는 이미지가 강해서 좋은데, 그 표현이나 개념에 관한 적절성에 관한 해석은 별론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이렇다.
그럼 고체노동으로 돌아갈 건가? 고체노동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아직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연구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