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41.] 이제 변수 아닌 상수가 된 극우. 그 극우와 마주하며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에코를 다시 읽는다는 이상헌. 그가 말하는 극우 대응 공동체 전략. (⌚10분)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과의 인터뷰는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당한 날 오후, 스위스 시각 기준으론 오전 8시, 우리 시각 기준으론 오후 3시에 진행했다. 이상헌은 인터뷰 초입에 평소와 다르게 이메일을 살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축전’이 쇄도했다고 했다.

‘축 윤석열 파면’

이메일이 날아온 국가들은 여러 곳이었겠지만, 그 내용은 대동소이했으리라. 어느 나라라고 밝히긴 좀 그렇지만, 몇몇은 한국이 부럽다고도 했다고 한다. 이상헌은 윤석열 파면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 한국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요즘 다시 에코(이탈리아 사상가, 기호학자이자 소설가)를 읽는다고 했다. 이제는 변수 아닌 상수가 된 극우와 마주하며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극우 대응 전략을 알고 싶어서. 이제 이상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41]

윤석열 이후,
극우와 마주하며 사는 법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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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4월 4(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 점수 70점으로 회복

좀 늦어지긴 했지만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윤석열 파면 결정으로 그래도 까먹은 점수를 상당히 회복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점수는 100점 만점에서 80점 정도는 했었는데, 30점 까먹었다가 20점 정도 다시 회복했다. 물론 개인적인 평가다.

  • 비상계엄 전: 80점
  • 비상계엄 후: 50점
  • 윤석열 ‘만장일치’ 파면: 70점

한국에 관한 전 세계의 기대와 관심은 여전히 큰 편이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이 크다. 한국의 회복탄력성을 경탄하는 친구도 있고, 민주주의를 침탈하고 헌정질서를 유린한 대통령을 결국 몰아낸 한국민의 저력을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다. 윤석열 파면 소식은 미국이든 유럽이든 그들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외신’인 건 물론이다. 내가 속한 ILO를 예로 들면, 간부들에게 주요 국제 뉴스를 ‘브리핑’하는 담당부서가 있는데, 거기에서도 윤석열 파면은 가장 중요한 소식 중 하나다.

만장일치 파면 결정으로 세계 민주주의의 ‘호프’ 한국이 까먹은 점수를 어느 정도는 회복했다.

이제 극우는 ‘상수’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여전히 과제는 많다.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이제 극우랄까 보수적 극단주의랄까, 그런 세력을 상수로 놓고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게 유신 독재에 대한 향수이든,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퇴행적 이끌림이든 극우적 세력이 ‘자기 정당화 기제’, 즉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마련하고 지적 근거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게 이번 계엄/탄핵 국면에서 드러났다고 봐야 한다.

‘극우’라는 표현을 남용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기준과 경계를 고민하지 않고 극우라는 표현을 남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굳이 ‘트롤’에게 먹잇감을 줄 필요도,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할 이유도 없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기보다는 극우의 경계에서 혼란해하는 이들에게 공동체의 ‘인게이지먼트’ (포용이나 관용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포섭’이랄까?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좀 어렵긴 하지만) 범위를 좀 더 넓히는 전략을 써야 한다(이에 관해선 후술).

다만 극우로 불릴 만한 세력, 폭력성과 배타성이라는 극우의 조건에 부합하거나 그런 폭력과 배제를 마다하지 않는 세력이 실존한다는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은 예전에도 지금에도 계속 존재했으며, 지금은 스스로 자신에게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런 역할을 자임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역사적 사명(?)에 대한 대중의 추인을 요구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제 그런 세력을 상수로 두고 한국 사회의 공동체 전략을 짜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란수괴 윤석열 옹호하는 개신교 극우 그룹을 대표하는 전광훈.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다시 읽는 에코: 한국와 이탈리아

요즘 움베르트 에코(1932-2016)를 다시 읽는다.

이탈리아는 제1차∙제2차 대전 내내 파시즘이 나라를 휩쓸었고, 패망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전후 이탈리아 민주주의 시스템은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비쳐졌지만, 에코는 이탈리아에는 항상 파시즘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에코의 경고는 우익 파시즘을 향한 것만은 아니고, 좌우 양쪽에서 파시즘 세력이 잔존해 사회를 좀먹는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에코의 80~90년대 칼럼을 읽으면 이탈리아에 숨겨진 파시즘을 다시 드러내려는 작업을 수행한다. 가령 에코는 이들 파시즘이 레지스탕스를 비판하는 방식을 분석하는데, 우리가 영웅으로 떠받들던 레지스탕스가 알고 보니 전쟁 중에 바람을 피우고 인간 말종이었다는 식이다. 그 영웅의 사생활과 개인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역사적 정당성에도 흠집을 내려는 시도인데, 이런 시도가 일회적이지 않았다는 게 에코의 지적이다. 이런 레지스탕스 망신 주기식 역사적 정당성의 파괴 공작은 조직인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와 유사한 방식이 한국에서도 진행됐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독재군부정권, 뉴라이트가 흔히 구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선현들을 이렇게 덧칠한다.

  • 알고 보니 빨갱이었네.
  • 알고 보니 테러리스트네.

이탈리아도 비슷했다. 테러와 공산주의를 덧씌우는 것에 더해 개인의 사생활을 가져와 사실 영웅은커녕 인간 말종이라는 식으로 ‘메신저'(사람, 개인)을 공격함으로써 그 사람이 수행한 역사적 진실, 그 메시지(레지스탕스 활동의 역사적 의미)마저 폄하하는 것이다. 에코는 그런 이데올로기 작업 위에서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이 출현했다고 본다.

한국도 그런 이데올로기 선동과 조작 작업이 꾸준히 있었고, 그 과정에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도 비슷하다. 윤석열 당선과 계엄 그리고 탄핵과 파면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도 그 이데올로기적 조작과 선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취약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이탈리아나 그런 극우적 선동과 역사적인 퇴행 혹은 역사적 정당성에 덧칠하기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나 취약계층(노인과 청년)이 끌려 들어온 점도 비슷하다. 유럽 극우 정당을 보면, 여성이 리더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프랑스, 핀란드 등) 이들의 생물학적 성이 여성일 뿐이고, 대체로 정서적으로는 ‘마초이즘’에 바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 극우를 변수나 예외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극우 세력을 상수로 두고 공동체의 미래를 디자인해야 한다. 극우 세력을 줄이겠다는 것도 맞고, 단호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된다.

‘인게이지먼트(포섭)’ 전략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미국도 유럽도 극우 억제에 실패했다. 기본적으로는 유럽은 단호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과 그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단호함이 중요하지만, 그 단호함만으로 극우 세력의 힘이 줄어든다고 가정해선 안 된다. 줄어들게 하기 위해선 민주주의적 처벌의 단호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법적 단호함이 정치적 단호함은 아니다.

왜 평범한 대중, 아니 소외된 대중, 특히 노인과 청년이 극우적 성향을 품게 됐는지, 왜 그런 성향을 띠게 됐는지. 마르크스의 유산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런 의식 상태, 성향과 태도(상부구조)의 기반에 어떤 ‘물적 토대’가 존재하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그 물적 토대를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 물적 토대가 바뀌면, 의식(상부구조)은 저절로 바뀐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전략을 투 트랙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처벌할 것은 처벌한다는 원칙적 단호함.
  2. 극우를 ‘인게이지먼트(포섭)’하는 것.

이 둘은 양자택일이나 이분법적 선택은 아니다. 물론 ‘포섭 전략’만을 구사하는 건 너무 유약하고 나이브한 방식일 수 있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있고, 이율배반도 아니며,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라고 봐야 한다. 주동 그룹과 선동 그룹에 대해선 법적인 단호함으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소되고 않는다. 이들 선동 그룹에 이끌리는 이들의 ‘물적 토대’를 파악하고, 그 물적 토대를 변경시키면서 공동체에 ‘포섭’하려는 체계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비유하면, 극단적 비유이긴 한데, 사이비 종교 교주를 처벌하면, 그 조직이 와해될 것 같지만 그 골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교주가 감옥에서 출감하면 너무 자연스럽게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교주에게 단호하게 한다고 해서 그 조직이 와해되는 건 아니다. 그 사이비 조직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유지된다고 전제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를 그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어떻게 무사히 구해와야 할까. 정말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본질적인 해법은 이미 존재한다. 그 가족이나 친구가 사이비 종교 ‘바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이비 종교 안에서만 자기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사람이 사이비 종교 바깥으로 나왔을 때 다시 ‘무존재’가 된다면, 그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나오는 게 두렵고, 거기에서 나오기 싫은 게 당연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주를 처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 집단에 빠진 사람을 그저 ‘그 몸’만 빠져나오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이비 집단 바깥’의 세상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사람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사이비 바깥에서 찾을 수 있도록, 강제하고 강요하지 말고 찬찬히 도와야 한다.

유럽의 해법? 우리식 해법을 찾아야 한다

유럽은 이미 사회의 극우화를 겪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니 다양한 사례들이 존재하고, 효과적인 대응 방법들도 연구된 게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식 해법을 찾아야 한다. 현상적으로는 유럽 사례와 우리 사례가 비슷해 보여도 그 현상을 만들어낸 구조가 다르고, 각 사회의 조건 속에서 현상이 드러나는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우리는 우리식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가령 거꾸로 예를 들면 명확하다. 지금 극우나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는 미국이나 유럽이 한국의 윤석열 ‘파면 선고’에 이르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거다. 유럽은 스페인 내전 때 계엄령을 발동한 바 있지만, 지금 유럽의 국가 원수가 친위 쿠데타를 감행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설사 그런 계엄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 계엄에 분노한 시민들이 지하철을 타고 달려와 국회에서 계엄군의 총구를 막서는 ‘영화 같은 풍경’은 펼쳐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 실시간 생방송으로 온 국민이 지켜봤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수많은 국민이 국회에 ‘맨몸’으로 달려 갔다.

만약 유럽에서 친위쿠데타가 벌어지고, 계엄군이 총을 들고 국회를 봉쇄하려고 했다면? 여기(유럽) 사람들은 아무리 계엄군에 저항한다고 해도 맨몸으로 달려가서 그 총을 막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그 대신에 시민군으로 무장해서 어떻게 총을 들고 저항할지를 생각한다. 즉, 유럽 사람들에게 계엄은 곧바로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내전이다. 그런 유럽의 시선에서 맨몸으로 계엄군의 총구를 막는 한국 시민들의 모습이 얼마나 놀랍고 낯설게 보일지 상상해 보라.

한국은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계엄과 군사’를 동원했다는 윤석열의 변명(이른바 ‘계몽령’)도 해괴하지만, 그런 계엄군을 시민들이 지하철 타고 달려와서 ‘맨손’으로 막았다는 것도 유럽의 시각에서는 너무너무 ‘영화적’이다. 그런 모습을 미국에서 유럽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한국 모습을 미국이나 유럽 정부가 극우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참고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미러링과 적대적 공생

에코와 더불어 내가 요즘 열심히 살펴보는 앨버트 허시먼(1915-2012, ‘반동의 수사학’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극우의 미러링 이미지가 있다는 거다. 유럽에서 파시즘이 득세하는 동안에 그 미러링은 공산 혁명이었다. 파시즘은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편 극단주의인 공산주의를 ‘명시적인 적’으로 삼았다.

또 다른 방식이지만 본질에서는 파시즘 미러링과 같은 미러링이 현재 유럽에 벌어지고 있다. 현재 유럽의 극단주의 미러링은 고도의 엘리트주의다. 일반 대중의 집단주의 방식을 반대편에서 보면, 엘리트주의와 서로 자연스럽게 그 힘이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미러링으로 작동한다. 에코의 ’80-’90년대 저작에는 그런 미러링에 관한 비판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에코의 비판적 우려에도 불구하고(혹은 에코의 비판적 우려에 부합하게도) 그 시대에 ‘희대의 사기꾼’ 베를루스코니(1936-2023)가 등장한다. 지금 현재 이탈리아 정계가 트럼프와 친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참고: 베를루스코니 재임 기간(제50대 총리)
    • 1기: 1994년 5월 10일 ~ 1995년 1월 17일
    • 2기: 2001년 6월 11일 ~ 2006년 5월 17일
    • 3기: 2008년 5월 8일 ~ 2011년 11월 16일

가십 투쟁, 가십 정치

우리나라는 그런 미러링에 해당하는 적대적 공생 구조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게 걱정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어떤 개인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해소하는 방식을 보면, 명망가를 찾아가고, 결국 문제 해결은 ‘광장’에서 찾는 방식이다.

민노씨가 언급한 리오타르(1924-1988)의 ‘작은 이야기’와 ‘연결’에 관해서는, 모더니즘 시대의 공통성과 균일성이 포스트모던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는 그 지적이 맞지만, 지금은 그것도 넘어선 것 같다. 가령 양쪽의 극단주의를 보면, 개인의 작은 이야기들, 사소한 사건을 아주 큰 이야기로 확대하고 뻥튀기한다.

예전에는 추상적인 원리, 거대 담론, 가령 민주주의나 합리주의 등의 문제로 싸웠다면, 지금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 싸운다. 과장하면 ‘가십’으로 서로 싸운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는다. 가십 투쟁, 가십 정치랄까. 거대 담론이 아니라 ‘가십’으로 싸운다.

에코의 레지스탕스 덧칠 전략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혼한 남자 레지스탕스가 솔로 여자와 ‘불륜'(우리식으로 보면) 관계라고 치자. 그런데 그 레지스탕스가 훌륭한 리더였고, 영웅적으로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까 ‘불륜남’이구먼! 그런데 그 사람이 종전 직전에 총살됐다고 했을 때, 결국 당신은 영웅이 아니라 인간 말종이었구려! 그런 걸로 싸운다.

그런 인간적 흠결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 영웅도 사람이니까!, 이제 그걸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인간적인 미숙함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런 ‘가십’을 통해 역사적 평가를 뒤집는다. 유럽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역사적인 평가를 부정하는 방식이 ‘가십’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건 예외적인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그런 방식으로 한국의 친미 세력이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긍정성을 공적 업적으로 확보하는 게 아니라 상대편이 알고 보니 쓰레기였다는 네거티브 전략으로 획득하려고 한다.

다시 ‘인게이지먼트’에 관하여

인게이지먼트는 관용이 아니다. 포용도 아니다. 가정적 사례로 설명해 보자.

A가 조직폭력단에 ‘속아서’ 들어갔다고 치자. 그렇게 5년 동안 조폭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목이 감옥에 갔다. 그러면 조직원 A가 갑자기 조폭 집단에서 탈퇴하고 ‘평범한 생활인’이 될까? 속아서 들어왔어도 5년 동안 A는 그 조직 속에서 ‘정체성’을 획득했다. 그렇게 ‘조폭’으로 정체화된 A가 다시 사회로 나서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게이지먼트’ 기회와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인게이지’할 것인가.

우선은 대화다. 왜 A가 속아서 그런 조직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내부에서는 어떻게 스스로 정체성을 획득해 갔는지 A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사람을 관용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쪽 철학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 법적 방식도 정치적 방식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방식이랄까. 그런 과정이 내가 생각하는 ‘인게이지먼트’다.

대화의 방식이 문제다. 고민해야 한다. 저쪽을 ‘인게이지’ 한다고 할 때, 예를 들면, 내가 이쪽에 있으니까 저쪽을 처벌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를 굳이 우리 쪽에 대고 할 필요도 없다. 저 사람 저렇게 된 건 우리들 때문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작업은 성찰적인 반성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불필요한 작업이다.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는 메신저가 굉장히 힘든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메신저인지 당사자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신저 역할을 할 때는 그 역할에 충실히 해야 한다.

여담이지만, 에코는 90년대에 이미 PC주의가 도덕주의로 포장한 권위주의로 변질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PC주의가 그 내용과 철학으로는 맞긴 하지만, 그걸 적용하는 과정에선 더 조심해야 한다. 이건 ‘인게이지먼트’ 전략에도 그대로 참고해야 할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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