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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낸 보고서를 너도 나도 읽어보겠다며 길다란 줄이 이어지는 상황,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영국에선 한 번 있었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주인공이다.

베버리지 보고서(1942)의 표지. 영국식 복지국가를 상징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상징하는 전후 노동당의 복지정책에 초석을 제공한 보고서.
베버리지 보고서(1942)의 표지.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전후 집권 노동당의 복지정책에 초석을 제공한 보고서.

전후 영국 국민의 희망과 믿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갈 때 정부의 주문을 받은 베버리지는 피폐해진 살림살이의 보전과 국가의 부흥를 위한 사회보장 체계의 강화를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영국 국민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 인기는 전쟁 영웅 처칠의 보수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예산 부족을 명분으로 보수당이 미온적으로 대처한 반면, 노동당은 적극적인 실천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베버리지 보고서에는 보편 복지의 실질적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전쟁에 지친 영국 국민에게 베버리지의 복지 강화 방안은, 사실 현재에 비하면 보고서의 복지 수준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우 정당하며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되었다.

금번 코로나 사태를 맞아,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략 70% 1,400만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이 발표되었다. 600만 가구는 제외된다. 커트라인이 생긴 만큼 호오가 불거지는 것은 필연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 중 하나는 국가 및 정부에 대해 대대적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심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국가에 대한
‘70%’ 커트라인으로 국가에 대한 대대적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전쟁 시기는 아니더라도, 전쟁을 제외하면 가장 큰 스트레스의 시절이다. 그 정도는 다들 다르겠지만, 불가항력의 전염병 재난에 맞닥뜨려 지치고 힘들다는 것은 동일하다. 국가 및 선출 권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바로 이런 시기에, 베버리지 보고서가 그러했듯, 시민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70% 선별’의 한계와 실망감  

국가나 행정부 또는 공공 시스템이 어차피 존재해야 한다면, 늘 그에 대한 불만을 달고 사는 것보다는 긍정적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한데 70%라는 재난지원금 커트라인은 코로나 사태로 압박을 받고 있는 상당수 시민에게 불만을 초래한다. 이것은 단지, 세금을 냈는데 지원금은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관점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불가항력의 재난 시기에 국가보다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30%를 배제하는 기준선은 적잖은 사람들에게 이 위안을 빼앗는 역작용이 있다.

스웨덴의 사례에 비춰보면, 행정 부문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일은 없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행정 시스템이 가장 발달한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행정 부문에 대한 불만은 항상 압도적이다. 그 대신 (보편과 선별을 혼합하는) 복지 시스템에 대한 만족도와 기대감이 늘 높게 나온다. 이번 70% 커트라인은 상당수 시민으로 하여금 우회적으로 행정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희석시킬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매우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보편적 재난지원금은 모든 국민의 동등한 권리라는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보편 정액수당이 아동수당이다. 타당한 이유를 들어 아동수당을 선별화하려는 정치권의 시도가 빈번했지만, 번번이 압도적인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모든 아동의 동등한 권리이므로 그냥 내버려 두라’였다. 선별을 하지 않아 발생하는 결함은 다른 ‘보편+선별 복지’로 보완하는 가운데 아동수당은 온전한 형태의 보편 정액수당으로 남아 있다. 초유의 전 국민적 재난의 시기에 국가가 이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웨덴 국민은 행정 부문에 관한 만족도는 낮지만, 복지
스웨덴은 행정 부문에 관한 국민의 만족도는 낮지만, 보편과 선별을 혼합한 복지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와 기대감은 늘 높게 나온다.

낮은 복지 기대감  

70% 기준선에 대해 언론과 대중은 누가 받고 못 받느냐에 주목한다. 지원 수준이 적절한지는 따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현재에도, 장기적으로도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온갖 사회문제는 허술한 사회안전망이 기저에 깔려 있다. 사회안전망이 발달하지 못하는 데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적다는 것도 커다란 원인이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영국 국민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기에 복지 제도가 성장할 수 있었듯이, 복지 발전에는 그를 원하는 시민의 열망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여러 조사들은 한국 국민 다수의 복지에 대한 기대감이 미약함을 보여준다. 이 미약한 기대는 재난지원금 커트라인에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한국은 여타 국가에 비해 평소 복지 수준이 낮을뿐더러, 이번 재난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도 낮은 수준이다. 대중의 인식과 정책 담당자들의 생각이 미약한 복지 기대감에서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선별을 하는 이유도 실종돼 있다. 4인 가구 기준 최대 지원금이 100만 원이고, 최빈층이 몰려 있는 1인 가구에는 최대 40만 원 정도가 논의 중이다. 선별은 지원 수준을 높이기 위함인데, 한국의 평소 허약한 복지와 넓은 사각지대를 감안하면 적절한 지원은 아니다.

원래 국가에 대한 기대감이 높지 않다.
원래 국가에 대한 기대감이 높지 않다.

70% 재난지원금 외에도 살림살이 지원이 이뤄질 예정이다. 이는 다행이지만, ‘경제 방역’에서는 사회보장체계가 발달한 여타에 비해 저조한 성적표를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런 문제가 재난지원금 커트라인처럼 쟁점이 되지는 못한다. 낮은 복지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커트라인에서 배제되는 이들 가운데는 서운해하지 않겠다는 의견도 있다. 정권의 고심을 이해하는 의사일 수도 있고, 선별 지원이 더 적절하다는 시각일 수도 있다. 이는 모두 나름의 일리를 갖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지원받을 기대감이 작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살림살이 위협이 더 크냐 작냐를 떠나, 이렇게 거의 전 국민이 유형무형의 피해를 입는 상황에서는 국가만이 이를 가장 광범위하게 또 가장 효과적으로 보듬을 수 있고, 이는 곧 국가 및 선출 권력의 중요한 존재 이유다. 이런 이유가 확고한 합의를 이루었을 때,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이들에게 충분한 선별적 지원도 해줄 수 있다.

‘경제 방역’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는 경제침체를 동반하고, 이는 적자 재정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경제가 수축된다고 해서 반드시 정부의 빚을 늘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과 기업도 필요하면 빚을 내야 하듯, 민간 부문의 침체기에는 정부가 빚을 내는 일이 유용하다.

평소 복지 수준이 낮은 한국에는 더더욱 정부의 빚이 늘어야 할 이유가 있고, 이 빚은 단순히 재난지원금뿐 아니라 여러 정부 주도의 사업, 대표적으로 경기 부양의 효과가 큰 토건사업에 쓰여야 한다. 세계 경제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을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내부적으로 진정되면 이에 대처할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부총리의 발표를 보면, 정부의 빚을 늘리는 데 극도로 소극적이다. 사회간접자본(SOC; social overhead capital)를 비롯한 세출 조정으로 최대한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재난지원금 사안에서도 그렇지만, 적자 재정에서도 국가나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고 있다. 보건 방역에서 거둔 큰 성과가 경제 방역에서 빛을 바랜다면, 그 피해는 선별 지원의 대상자들이 가장 크게 입게 된다.

한술 더 뜨는 제1야당은 상황이 무척 심각하다. 구시대 인물을 총괄선대위원장인지 뭔지에 또 옹립해서는 경제부총리보다 훨씬 극심한 긴축 재정적 방안을 내놓고 있다. 이 구시대 인물은, 전에도 그래 왔는데, 기초 숫자를 보지 않고는 아무말을 늘어놓는다. ‘내가 맘대로 하면 다 잘돼’가 핵심일 뿐인 군상이 이 당, 저 당에 마치 구원자인 양 등장하는 사태, 이번으로 끝이기를 바란다.

동전 돈

70% 커트라인에 ‘비전’은 존재하는가

정부의 70% 커트라인 재난지원금 방침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간의 최대 관심사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이런 쪽의 점을 치는 데는 젬병이라 딱히 할 말은 없다. 악영향이 조금 더 크겠지만, 미미하지 않을까 한다. 다만, 현 정부여당에게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번에도 분명해졌다.

현 정부 여당의 핵심 지지 소득계층이라 여겨지는 이들을 재난지원금 대상에서 대거 배제한 것은 일면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봐야겠지만, 미래를 보며 국가의 긍정적인 존재 의의를 뭇사람들에게 전하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낮은 복지 기대감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로서 재난지원금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복지 발전에 중요한 징검다리 하나를 놓을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토니 주트(‘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의 저자; 역사학자, 수필자)의 말을 차용하면, 한국에서는 실업 수당과 의료 지원, 사회적 편익, 기타 공식적으로 규정된 서비스 등을 받기 위해 본능적으로 국가 혹은 정부에 시선을 잘 돌리지 않는다. 민간 중개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권위와 복종 말고는 시민과 국가를 묶어줄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은 결국 삶의 밑바닥에 이른 사람들에게 불충분한 지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이 필요한 이유다.

이번 70% 커트라인 재난지원금은 미래지향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관점에서 재난에 대처하고 이를 통해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는 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정책 결정이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런 관점에서도 재난지원금을 조명하는 글을 써주시면 좋겠다. 당장 바뀌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물의 온도를 조금씩이나마 높여가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19의 절망을 이겨낼 희망이 절실하다.
코로나19의 절망을 이겨낼 비전과 희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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