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하게 수집했다고 헌법재판소가 판단한 당신의 DNA 정보를 수사기관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신에게 그 DNA를 삭제해달라고 청구할 권리를 법원이 부정한다면요? 그리고 당신이 결국 죽어야만 그 DNA를 삭제할 수 있다면요?
우선, 다소 복잡한 사건의 진행 경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건 진행 경과
2015년: 노사분쟁과 강제 DNA 채취
- KEC 소속 노동자 H 씨
- 평조합원으로서 직장폐쇄의 철회를 요구하며 공장 점거 농성.
- H씨를 비롯하여 이때 채취 대상이 된 KEC 노동 조합원은 48명.
- H 씨는 DNA감식시료채취 요구받음.
- H 씨는 이에 불응 → 채취 위한 영장 집행됨.
2016년: 헌법소원과 헌법불합치
- H 씨 DNA 채취영장 발부 과정를 문제로 헌법소원 청구.
- 이유: 1) 절차적 권리 보장되지 않음 2) 불복절차 규정 없음
- 결과: 헌법불합치(2016헌마344) 판결
2019년: 검찰총장의 삭제 거부와 행정소송 및 위헌법률심판제청
- H 씨, 헌법재판소 결정을 근거로 2019년 검찰총장에 DNA 신원확인정보 삭제 청구.
- 검찰총장이 이를 거부.
- 2019년 6월 11일, 검찰총장의 DNA 삭제 요청 거부는 위법 처분을 주장하며 거부처분 취소를 요청하는 행정 소송 제기.
- 동시에 채취 대상자에게 삭제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DNA를 보관하도록 한 DNA법 해당 규정에 대하여 위헌법률심판제청.
- 소송 과정에서 H 씨 DNA 채취 영장을 청구한 검사는 물론 영장을 발부한 법원도 영장의 필요성과 상당성에 대한 심리를 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됨.
2020년: 행정법원의 위헌법률심판제청 기각과 청구 각하 → 항소 및 헌법소원 청구
-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6월 12일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기각하고, 삭제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H의 청구를 각하하는 판결 선고.
- 6월 29일 H 씨, 서울행정법원 판결에 항소하고, 현행 DNA법에 대해 헌법소원 청구(청구 사유: DNA법이 재범의 위험성과 무관하게 DNA를 보관하고 이를 삭제할 수 있는 근거 조항도 마련하지 않고 있기 때문).
DNA법과 인권
DNA법(디엔에이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해선 입법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과도한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중범죄자의 재범을 막기 위한 입법이었음에도 실제로는 중범죄자라 볼 수 없는 노동자와 활동가, 학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대학생들에게까지 강압적으로 DNA 채취보관을 강행하는 등 광범위한 남용이 계속되어왔기 때문입니다.
DNA법 제13조에 따르면 당사자가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형인 등이 재심에서 무죄, 면소, 공소기각 판결 또는 공소기각 결정이 확정된 경우 또는 구속피의자가 검사로부터 혐의없음 등의 처분을 받거나, 법원의 무죄, 면소, 공소기각 등의 판결이 확정된 경우에 한하여 삭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채취 대상자의 재범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DNA가 채취되면 대상자의 사망시까지 영구무한으로 보존됩니다.
개인의 생존권, 노동권을 위해 싸웠던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DNA 신원확인정보를 사망시까지 보관하는 것은 대상자가 생존하는 동안 재범의 위험성이 계속 상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은 대상 범죄의 경중 및 그에 따른 재범의 위험성에 따라 관리기간을 세분화하는 등 충분히 가능하고 덜 침해적인 수단을 채택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음으로써 침해 최소성의 원칙에 반합니다. 더불어 범죄예방의 필요성이라는 공익과 사회적 낙인 등으로 침해되는 사익과의 균형 등을 고려할 때 침해당하는 사익이 훨씬 더 커서 법익 균형성의 원칙에도 반합니다.
또한,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DNA법 제13조가 규정하는 삭제 조항 외에 “수형인 등의 DNA신원확인정보 삭제 사유를 규정하고 있지 아니하다”며 “삭제를 요구할 조리상 신청권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애시당초 삭제 조항이 존재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로 제대로 입법하지 않은 국회의 책임(‘입법 부작위’)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입장
헌법재판소는 2011헌마28 결정을 통해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위헌의견입니다.
- “대상자가 재범하지 않고 상당기간이 경과하는 경우에는 재범의 위험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 “대상자의 사망 시까지라는 불확정의 장기간 DNA를 컴퓨터 파일의 형태로 보관할 경우 그만큼 정보의 유출, 오용 및 오염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 따라서 사망시까지 DNA를 보존하도록 한 규정은 위헌이다(헌법불합치).
그리고 이정미, 이진성, 김창종, 서기석 재판관은 다음과 같은 소수의견을 더불어 제시합니다.
-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범죄예방의 필요와 사회적 낙인으로 침해되는 사익과의 균형 등을 고려하여 일정 기간 재범하지 않은 적절한 범위의 대상자의 경우에는 DNA 정보를 삭제할 수 있도록 입법하는 것이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더욱 바람직하다.”
중범죄자 DNA가 아닙니다
DNA 신원확인정보는 국가가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됩니다. 공권력의 속성상 이 데이터는 확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사기관의 이원적 구조로 인해 오남용의 문제도 존재합니다. 대상자가 사망시까지 DNA 정보를 장기간 보관하는 과정에서 정보의 유출, 오용 등의 위험이 현실이 되는 경우 대상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등 대상자가 실제 입는 불이익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 최근 널리 알려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경우에서처럼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중범죄자가 아닌, 노동자와 활동가 등의 집회·시위, 생존권 투쟁 등의 행위에 대하여 검찰은 지속적으로 DNA 정보의 채취 보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18년 헌법재판소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19년 해당 법이 개정되었지만, 검찰은 올해 초에도 용산 철거민에게 DNA 감식시료 채취를 요구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형사라면, 검사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범죄를 다시 저지를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그런 ‘예비’ 범죄자의 DNA 정보는 ‘미래의 범죄’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당연히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DNA 정보는 동시에 수사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DNA 정보는 물론 강력한 정보입니다.
하지만 DNA 정보가 만능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여러 정황과 물리적 조건들을 합께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즉, 이미 보관된 DNA 정보는 어떤 ‘선입견'(낙인 효과)를 수사기관에 부여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릴 위험성을 높입니다. 강력 범죄를 처벌해야 할 사회적 필요는 인정하지만, 재범 가능성이 낮은 노동자와 학생의 노사쟁의나 시위 등에까지 그런 ‘잠재적’ 공익을 강제하고 강요한다면, 이는 그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가 그 절차상 위법과 ‘사망시까지 DNA를 보존하도록 한 규정”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마당에 그렇게 위법하게 채취된 DNA 정보의 삭제마저 불허하는 검찰이 존재하고, 그런 검찰의 위법한 조치를 취소해달라는 청구마저 법원으로부터 거부(각하)당하는 형편입니다.
이래도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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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원문은 진보넷 등이 작성한 성명서입니다. 슬로우뉴스 원칙으로 필자의 동의을 얻고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 편집하고 의견을 더했습니다. 이 글은 ‘내 DNA의 주인은 누구인가’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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