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없는 당신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 한국에서 여성이 결혼 조건으로 배우자의 경제력을 고려하는 일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할뿐더러, 정치·경제적인 관점으로 보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즉, 결혼에 있어 여성이 마치 남성보다 특히 더 ‘돈에 환장한’ 부도덕하고, 타락한 존재인 양 바라보는 시각은 부당하다. 이것은 대단한 철학이나 윤리론을 끌어들일 일도 아니다. 무슨 사회과학적 통계 분석을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니다.
진실을 손쉽게 기만하면서, 가식적인 위선으로 정신승리하곤 하는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한국사회에서 지금까지 용케도 버텨온 당신, 그런 당신의 체험적 진실만으로도 충분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글에선 어떤 재밌는 통계를 판단 재료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볼까 싶다.
‘한국 여성들, 남자 돈 보고 결혼한다’는 기사
발아점은 이렇다. 나는 몇 시간 전에 지겨울 만큼 통속적이지만, 한편으론 ‘뭘까’하는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기사를 접했다. [한국 여성들, 남자 돈 보고 결혼한다](코리아타임즈, 원제: Korean women marry for money, 2013년 1월 9일 자).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 한국 여자, 돈에 환장한 영혼이 없는 존재. 여느 미끼 기사제목들과 비교하면 점잖기 짝이 없는 이 기사가 웅변하는 것 같은 목소리, 결국 그거 아닌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런 타성에 젖은 폭력적인 시각이야말로 문제라고 본다. 그게 내가 앞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왜 그런가. (한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시궁창 같은 결혼 환경에 처한) 한국 남성의 심리적인 박탈감에 편승해 그 박탈감 이면에 자리한 자연스러운 폭력성에 호소하는 이런 미끼 제목,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이런 손쉬운 쌈마이 관극틀은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사에서 소개되는 건 국가통계포털(KOSIS)의 ‘같은 듯 다른 듯 남과 여'(이하 ‘남과여’). 기사는 ‘한국 여성들, 남자 돈 보고 결혼한다’는 제호 아래로 몇몇 파편화된 통계자료들을 기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남과여’는 “생활시간 조사와 청소년 가치관 조사 등 15종의 통계에서 발췌한 99종의 통계지표를 통해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주제에서 남녀가 어떻게 다른지 생생히 보여주는”(링크) 서비스다.
가사분담에 관한 인식과 실제, 그리고 결혼 조건
일단 한번 보시라. 이 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들을 가급적 모두 캡처했다. (주: 자료들은 모두 흥미롭고, 잘 정리되어 있지만, 별도의 퍼머링크가 제공되고 있지 않고, 플래시로 제작된 자료들이라서 복제 및 배포가 어려운 점은 유감이다. 더불어 조사기관 출처와 방법에 관한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한 별도 설명이 없는 점은 아쉽다. 현재 ‘국가통계포털’ 첫 화면에서 전체 자료를 볼 수 있다)
나는 자료 보고 거의 울 뻔 했다(정말 ‘제록스가 흑흑, 울었다’ 수준으로 눈물 나는 자료들). 한국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야말로 돈 때문에 결혼하기도 어려운 신세다. 그게 자료들에서 그야말로 다채롭게 표현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결혼이 반드시 문화와 관습, 제도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간단히 나열식으로 통계 자료들이 내포하는 의미를 정리하면 이렇다.
- 남녀 불문하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하기 어렵다.
- 30, 40대 남성은 여성보다 두 배 더 (돈버는) “일”한다. 그만큼 고생한다. 하지만 반대해석하면 두 배 더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 남녀 불문하고,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은 전향적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사노동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한다.
- 한쪽은 “일”인데, 다른 한쪽은 “가정관리, 가족돌보기”다. 가정관리, 가족돌보기는 ‘일’이 아닌가. 이런 구별(차별)적 용어가 적당한지 의문이다.

여전히 자본주의사회의 이등시민인 여성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자기 혼자만의 방](1929년)이라는 에세이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주디트’라는 누이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녀에게 셰익스피어만큼의 재능이 있었다면이라고 가정적으로 질문한다.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적 번영에 바탕한 위대한 대영제국의 이등시민, 그 영광스런 사회의 소모품으로 그녀의 재능과 열정은 아무렇지 않게 짓밟힐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진술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발언이 이어진다. “투표권과 돈―이 두 가지 가운데 돈이 훨씬 중요한 것임을 나는 고백한다.”
그녀는 고모에게 유산으로 매년 받게 되어있는 500파운드의 의미를 여성의 자립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연결지어 생각한다. 그것은 그녀의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애쓰며 고된 일을 하는 것도 없어지고 증오와 쓰라림도 사라졌다. 나는 남성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남자에게도 알랑댈 필요가 없다. 어떤 남자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게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 나의 두려움과 쓰라림은 점차 동정과 관용으로 변해 갔으며 일이 년이 지나자 동정과 관용도 사라졌고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 즉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찾아왔다. (349쪽)
이어서 울프는 말한다. 주디트는 셰익스피어처럼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조혼을 강요당할 것이며, 그녀의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울프는 ‘지적인 자유는 물질에 의존한다’고 하는 자명한 진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울프의 지적은 ‘지금/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자기만의 공간과 돈’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꼭 필요한, 인간다운 삶과 창조적인 행위를 위한 최소 요건인 것이다.
한국 여성을 ‘돈에 환장한 영혼도 없는 속물’이라고 바라보는 태도는 부당하다. 그 태도는 한국이라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시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남성 일반의 박탈감을 심리적으로 보상하는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긴 한다. 하지만 그 보상심리에 편승한 자극적인 인식틀은 결국은 진실을 외면하고, 남녀관계를 적대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유교적 폐습으로 남아 있는 남녀유별과 남존여비의 무의식적 잔재를 강화한다. 그리고 ‘돈 버는 기계’로 사육되는 상처받은 짐승 같은 존재인 한국 남성의 박탈감, 그 심연에 억눌려 있는 폭력성을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이 시대의 신은 돈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 싫다. 무섭다. 그건 정말 천박하고 소름끼친다. 하지만 그 물신주의 자체인 사회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메커니즘을 우리는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편승하는 것과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 물신주의 사회에 깊이 내재된 남녀 차별의 관성으로 성차별적 제도와 관습, 문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지고, 또 파생한다. 이성애자 남성의 잠재적 반려인 이성애자 여성을 돈에 환장한 속물 취급하는 시선은 그런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감상적으로 무화시킨다. 그 점에서 이런 시선들은 무지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교활하게 폭력적이고, 위장적이다. 남녀불문하고 이런 피상적인 시선, 당신의 아름다운 연애 혹은 결혼에 하나도 도움 안 된다.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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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와 웹페이지
- [보도자료]_같은듯_다른듯_남과여.pdf
- 버지니아 울프, 「자기 혼자만의 방」- 미리엄 슈네어 편 『여성의 권리』, 강기원 역, 문학과 지성사, 1981.
- 민노씨.네, 버지니아 울프와 [자기 혼자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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