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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유럽연합의 골치덩어리가 됐다. 제2의 이탈리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셀 바르니에(전 프랑스 총리)가 99일 만에 물러난 데 이어 프랑수아 바이루(전 프랑스 총리)가 반년 만에 물러났고 세바스티앵 르코르뉘(프랑스 총리)는 27일 만에 물러났다가 4일 뒤 다시 복귀했다. 돌아온 총리를 두고 두 차례 불신임 투표가 있었지만 겨우 부결됐다.

4일만에 돌아온 프랑스 총리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위키미디어 공용.

영국의 BBC는 “프랑스가 유럽의 새로운 환자(sick man)가 됐다”고 평가했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게 왜 중요한가.

  • 핵심은 재정 건전성이다. 국가 부채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반발이 거세다.
  • 결국 지지율이 깡패다. 지지율 없이는 어떤 개혁도 밀어붙일 수 없다.
  •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장률이다. 성장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지금은 잘 나가던 시절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구 고령화 충격도 겹쳤다.
  •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마크롱 정부 7명의 총리.

  • 2017년 마크롱 1기 때만 해도 지지율이 64%를 찍었다.
  • 유류세 인상에 반발해 노란조끼 시위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지면서 23%까지 떨어졌다.
  • 2020년 코로나 펜데믹 때 지지율이 올라서 2022년 연임에 성공했지만 연금 개혁이 지지율을 끌어내렸다.
  • 그리고 올해 들어 급기야 내각이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가브리엘 아탈(전 프랑스 총리)은 마크롱의 ‘젊은 피’ 카드로 불렸지만 긴축 예산안을 두고 갈등하다 사임했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프랑수와 바이루는 하원의 불신임 투표가 가결돼 물러났다.
  • 국방부 장관 출신의 세바스티앵 르코르뉘는 위기 돌파형 총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블로콩 투(Bloquons Tout·모든 것을 멈추자))’ 운동에 맞설 정치력이 없다. 장관 시절에도 언론 노출을 꺼려서 별명이 ‘수수께끼(l’enigme)’였다.
  • 마크롱 임기는 2027년까지다. 임기를 채우겠다는 입장이지만 동력이 없는 상태다.
  • 연금 개혁을 중단한다고 약속한 뒤 르코르뉘의 불신임을 막았지만 내년 예산을 두고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 마크롱 1기에서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드 필리프는 “마크롱은 임기를 채우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면서 “그게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품위있는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집정부제의 한계.

  •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Semi-présidentiel)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에 가깝다.
  • 한국은 국무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가 동의하는 구조인데 프랑스는 대통령과 총리가 행정권을 나눠맡는다.
  •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을 맡고 총리가 나머지를 맡는다. 의회에서 불신임하면 총리가 사임해야 한다. 집권 여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총리가 버틸 수 없는 구조다.
  • 최근 마크롱의 지지율은 20%를 밑돌고 있다. 노란조끼 때보다 더 인기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원집정부제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되면 총리를 야당에 넘겨주지 않는 이상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모두가 긴축을 반대한다.

  • 마크롱 정부는 300억 유로의 지출 삭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집권 여당인 앙상블은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지만 의석 수가 27% 밖에 안 된다.
  • 좌파 연합 NFP는 긴축을 반대하고 복지 확대와 부자 증세를 요구한다.
  • 극우 성향의 RN도 증세와 긴축을 모두 반대한다.
  • 프랑스의 재정 적자는 GDP 대비 6% 수준이다. 국가 부채는 114%다. 유럽연합의 부채 상한은 60%다.
  • 국채 금리도 급등했다. 성장률 추락과 높은 국가 부채, 작동하지 않는 정치의 삼중 함정에 빠져 있는 상태다. 연금 개혁도 노동 개혁도 모두 실패했다.

마크롱의 패착.

  • 마크롱 1기 때 의욕적으로 법인세와 소득세, 부동산세를 줄였다. 그때부터 마크롱의 몰락이 시작됐다.
  • 연간 500억 유로의 세수가 줄었는데 불가피한 지출이 늘었다. 코로나 팬데믹 대응에 1700억 유로를 썼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서 에너지 보조금으로 720억 유로를 썼다.
  • 긴축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상황이다. 국채 금리가 오르니 차입 비용이 늘고 정부 지출이 줄고 경기 둔화에 세수 부족의 악순환에 빠졌다.
  • 프랑스의 정치 불안이 유럽연합 전체의 금융 불안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유럽연합의 연결된 위험.

  • 유로 존에 묶여 있으니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경기 부양이 필요한 나라들도 재정 정책에 한계가 있다.
  • ECB(유럽중앙은행)의 긴축 기조가 재정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 프랑스발 불안이 이탈리아나 스페인, 벨기에 등으로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 그나마 다행인 건 프랑스는 저축률이 높고 소비 성향이 낮은 나라다. 가계 저축률이 18%나 된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도 많다.

“아무도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다.”

  • 프랑수아즈 프레소(르몽드 칼럼니스트)가 이런 글을 썼다.
  • “우리는 공공 지출에 완전히 중독돼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부가 불만의 불을 끄고 사회적 평화를 구매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이제 이 제도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낡은 복지국가의 종말에 와 있다. 하지만 아무도 대가를 치르거나 개혁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극우 포퓰리즘에 발목 잡힌 유럽.

  • 프랑스가 구조 개혁에 실패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24% 의석을 확보한 극우 정당 RN이다. 다음 선거에서 RN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인 Afd(독일을 위한 대안) 지지율이 집권 여당인 기민-기사연합에 맞먹는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다. 프리드리히 메르츠(독일 총리) 지지율은 반년도 안 돼 50%가 꺾였다.
  • 유럽 전역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민 제한과 긴축 반대, 보호 무역 강화 등의 의제가 사회 갈등을 키우고 정치 불안이 투자 심리 위축과 금융 불안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한국에 주는 교훈: 골든 타임이 다가오고 있다.

  • 한국의 국가 부채는 지난해 기준으로 GDP의 49%다. 복지 지출은 GDP의 15.5%로 프랑스의 절반 수준이다.
  • 프랑스가 고부담-고복지 체제라면 한국은 저부담-저복지 체제다. 한국은 아직 여유가 있지만 인구 고령화의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 기획재정부는 2035년이면 국가 부채가 GDP 대비 71.5%까지 늘어날 거라고 보고 있다. 복지 지출도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다.
  • 만약 이재명 정부의 계획대로 성장률을 복원하고 분모를 늘리면 지출을 늘리면서도 부채 비율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 거위 털을 뽑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개혁의 동력은 정치적 신뢰다. 사회적 연대도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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