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영화와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내겐 너무 까칠한 매니저 – 비서진'(2025).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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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함을 예능으로 포장한 사회
SBS 예능 〈내겐 너무 까칠한 매니저 – 비서진〉은 단순한 관찰 리얼리티가 아니다.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 어떻게 유희로 변환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그램은 배우 이서진과 김광규가 ‘매니저’로 변신해 다른 스타의 일정을 챙기고, 감정의 기복을 맞추는 과정을 보여준다. 1화의 주인공은 개그우먼 이수지, 2화는 배우 엄지원이다.
‘까칠한’이라는 단어는 이미 관계의 위계를 예고한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스타)과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매니저) 사이의 권력 구조가 웃음의 밑바탕을 이룬다. ‘센스’와 ‘케미’라는 단어로 포장된 이 프로그램은 결국 감정의 불균형을 유희의 언어로 번역한다. 이 웃음의 본질은 불편함을 미화하고, 긴장을 재미로 돌려놓는 사회의 풍경이다.
한국 예능은 오래전부터 관계의 온도를 관찰해왔다. 그러나 〈비서진〉은 단순히 친밀함을 그리지 않는다. 감정을 다루는 능력, 즉 타인의 기분을 읽고 맞추는 기술이 어떻게 ‘프로페셔널함’으로 변하는지 보여준다. 까칠함은 매력으로, 눈치는 센스로, 피로는 유머로 포장된다. 그 안에서 웃음은 감정노동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1화 ― 웃음 뒤의 긴장
첫 회에서 이서진은 “매니저 일이 뭐가 어렵겠어?”라며 자신만만하게 출발한다. 그러나 이수지는 첫 만남에서 “매니저는 내가 원하는 걸 미리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이서진은 “그건 예언이지”라며 웃어넘긴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눈치와 불안이 섞여 있다. 상대의 감정을 읽고, 오해받지 않게 대응하며, 자신의 감정은 끝내 감춰야 하는 상황. 그가 보여주는 웃음은 진심이라기보다, 사회적 연기다.
〈비서진〉의 첫 회는 바로 이 감정의 미묘한 줄타기를 드러낸다. 감정을 관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표정을 지워야 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관계의 중심에 선다. 웃음은 불편한 감정을 정리하는 기술이 되고, 감정의 통제는 센스로 포장된다. 이 프로그램의 첫 장면은 결국, 감정의 리허설로 시작된다.

2화 ― 감정의 권력과 유머의 윤리
2화의 주인공은 배우 엄지원이다. 그녀는 철저하고 세심한 인물로 등장한다. 매니저 김광규가 20분 지각하자, 엄지원은 웃으며 말한다. “이제 오세요? 손풍기를 챙겼다고요? 가을인데요?” 시청자는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사람은 눈치를 본다.
김광규는 “제가 센스가 부족했네요”라며 스스로 낮춘다. 이 한마디가 상황을 정리하지만, 동시에 감정의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그는 불편함을 유머로 바꾸어 관계를 유지하고, 프로그램은 그 장면을 ‘센스 폭발’이라는 자막으로 소비한다. 감정의 피로가 웃음으로 포장되는 순간, 노동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예능이 감정노동을 가볍게 만드는 방식이다.

감정을 기술로 바꾼 사회 ― ‘센스’의 정치학
〈비서진〉의 중심 언어는 ‘센스’다. 센스 있는 매니저는 칭찬받고, 눈치 없는 매니저는 실수 캐릭터가 된다. 감정을 읽고 조율하는 능력이 곧 생존의 자격이 된다. 감정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웃음을 유지하는 능력, 공기를 읽는 눈치, 불편함을 유머로 전환하는 태도 ― 이 모든 것은 오늘날의 감정 기술이다.
‘센스 있다’는 말은 결국 ‘감정을 효율적으로 억제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 능력은 조직과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인성의 표준이 된다. 감정이 기술로, 기술이 경쟁력으로 변한 사회에서 감정의 진정성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능력, 웃음을 유지하는 힘이다. 〈비서진〉은 바로 이 감정의 기술화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준다. 감정의 피로는 ‘프로정신’으로, 감정의 억제는 ‘센스’로 불린다. 웃음은 감정의 통제 위에 세워진다.

“가족 같아요” ― 친밀함의 감정 규율
매회 마지막에는 거의 빠지지 않는 멘트가 있다. “이제 가족 같아요.”
하지만 ‘가족 같다’는 말은 언제나 감정노동의 덫이다. 가족이라는 언어는 위계를 부드럽게 포장하면서, 감정의 경계를 지운다. 불편함을 말하기 어렵게 만들고, 피로를 ‘정’으로 바꾸며, 관계의 긴장을 미덕으로 돌린다. 이 말이 반복될수록 시청자는 따뜻함을 느끼지만, 실제로 그 따뜻함은 노동의 가려진 이름이다.
‘가족’은 감정의 책임을 공유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부담을 아래로 밀어 넣는다. 이 구조는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방송국에서도 익숙하다. “가족이니까 이해하자”는 말은 감정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가장 부드러운 장치다. 〈비서진〉은 이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다. 스타와 매니저의 관계가 마무리될 때 “가족 같다”는 말이 흐르면, 그들의 피로는 훈훈한 음악 속으로 흡수된다. 감정의 경계는 사라지고, 감정노동은 따뜻한 미담으로 전환된다.

카메라의 시선 ― 감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비서진〉의 카메라는 언제나 스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수지의 표정, 엄지원의 농담은 클로즈업된다. 그러나 매니저의 얼굴은 자막과 배경음악 뒤에 숨는다.
“긴장한 서진”, “센스 부족 광규.”
이들의 감정은 직접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편집은 스타의 표정을 중심으로 리듬을 만들고, 매니저의 반응은 웃음의 장치로만 사용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있지만, 감정을 감당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없다. 이 시선의 불균형은 한국 예능의 오래된 구조를 반영한다. 웃음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감정의 주체는 권력을 가진 쪽에 있다. 〈비서진〉은 그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유머처럼 포장한다.

웃음의 윤리 ― 거지가 된 왕자의 리허설
〈비서진〉의 관계는 마치 〈왕자와 거지〉를 뒤집은 이야기 같다. 배우 이서진은 원래 ‘왕자’의 위치에 있다. 그는 오랜 경력과 사회적 명성을 가진 인물이며, 늘 감정을 관리받는 쪽이었다. 그런 그가 프로그램 속에서 ‘매니저’라는 역할을 맡으며 일시적으로 ‘거지의 옷’을 입는다. 왕자가 거지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이 역할 전환은 진짜 뒤바뀜이 아니다. 이서진은 여전히 웃음의 중심, 즉 카메라의 주인공이다. 그의 서툰 매니저 생활, 낯선 눈치 보기, 피곤한 표정은 모두 예능적 재미로 소비된다. 왕자가 거지의 일을 흉내 내며 보여주는 서투름은 ‘인간적 매력’으로 칭찬받는다. 그러나 그 웃음의 구조 속에서 실제 거지 ― 즉, 진짜 매니저의 노동 ― 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서진은 잠시 거지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결코 왕자의 신분을 잃지 않는다. 그의 ‘고생’은 체험일 뿐이고, 그 체험은 웃음을 낳는 콘텐츠가 된다. 결국 왕자는 다시 왕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거지는 여전히 감정을 관리하는 자리에 남는다. 이 프로그램의 리허설은 ‘권력의 전복’이 아니라 ‘권력의 재확인’이다.
예능의 편집은 이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 자막과 효과음은 이서진의 어색한 모습에 “센스 부족 왕자님”이라는 웃음을 붙인다. 그 불편한 장면은 시청자에게 익숙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역시, 권력의 차이를 웃음으로 봉합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서진〉은 결국, 왕자가 잠시 거지가 되어보는 리허설극이다. 감정의 위계는 농담으로, 불편함은 케미로, 긴장은 재미로 변한다. 그 웃음의 방향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왕자는 웃음을 통해 자신의 여유를 증명하고, 거지는 웃음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비서진〉의 웃음은 그렇게, 권력의 차이를 잠시 흔드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 질서를 더 단단히 봉합한다.

방송노동자의 현실 ― 웃음 뒤의 피로
〈비서진〉에서 이서진은 잠시 거지의 옷을 입었지만, 진짜 거지, 즉 현실의 매니저들은 카메라 밖에 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이동하고, 촬영 일정을 조율하며, 스타의 기분과 감정을 관리한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현장에서 그들은 언제나 배경이 된다.
프로그램 속에서 이서진의 고생은 ‘체험 예능’으로 소비된다. 그가 운전을 실수하거나, 주문을 틀리거나, 지각을 하더라도 그 모든 장면은 자막과 음악으로 유쾌하게 편집된다. 시청자는 그 어색함에 웃고, “왕자님도 고생하네”라며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진짜 노동의 피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진짜 매니저의 하루는 다르다. 그들에게 감정은 일의 일부이자 생존의 조건이다. 스타의 불편한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일정이 밀리면 비난의 화살은 그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늘 웃어야 하고, 긴장 속에서도 공기를 읽어야 한다. 감정은 그들의 업무 매뉴얼이자 방패다.
〈비서진〉은 이런 현실을 리얼리티로 포장하지만, 결국 ‘왕자가 거지 체험을 하는 예능’으로 머무른다. 체험은 하루로 끝나지만, 노동은 매일 반복된다. 이서진은 다시 스타로 돌아가고, 매니저들은 여전히 그를 관리해야 한다. 웃음이 끝나도 감정의 노동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는 역설적이다. 가장 리얼한 것은 실제 매니저의 피로인데, 그 피로는 언제나 편집된 장면 뒤에 감춰진다. 시청자는 그들의 미소를 보지만, 그 미소가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이 조율되는지는 보지 못한다.

〈비서진〉의 웃음은 이 피로를 부드럽게 감춘다. 왕자가 흉내 내는 거지의 역할은 재미있지만, 진짜 거지는 여전히 노동 중이다. 웃음은 현실의 불평등을 잠시 희석시키지만, 그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한국 방송노동의 축소판이다. 감정을 상품으로 다루고, 웃음을 생산하기 위해 감정을 관리한다. 매니저의 센스, 스타의 까칠함, 시청자의 공감 ― 모두가 하나의 감정 시스템 안에서 순환한다. 〈비서진〉은 그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유쾌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 속에서 사라지는 얼굴들을 은근히 가린다.
웃음이 프로그램의 표면이라면, 그 표면 아래에는 감정의 피로, 노동의 무게, 관계의 긴장이 층층이 쌓여 있다. 〈비서진〉은 그 무게를 드러내지 않은 채, “괜찮아요, 이건 예능이니까요”라는 말로 봉합한다. 그러나 시청자의 마음 어딘가에는 남는다. 저 웃음이 끝난 뒤, 누가 다시 왕자의 옷을 입고, 누가 계속 거지의 일을 할까?

시청자의 공모 ― 왕자의 체험에 공감하며 함께 웃는 사람들
〈비서진〉의 웃음은 단지 화면 속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웃음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청자다. 시청자는 이서진이 어색하게 매니저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그의 서투름을 인간미로 받아들인다. ‘왕자도 이렇게 고생하네.’ 인간적으로 위로받는다.
그러나 그 위로의 방향은 위로 향한다. 우리는 왕자가 거지의 옷을 입었을 때 안도한다. 왜냐하면 그 일시적인 ‘가면’은 오히려 현실 속 권력의 강고함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왕자는 결국 다시 왕자의 자리를 되찾을 것이고, 그 일시적 불편함은 서툰 교훈과 웃음을 남긴 채 끝난다. 시청자는 그 권력의 리허설, 결국 현실로 이어지는 그 가면의 권력을 합리화하는 공모자다.
우리 일상도 다르지 않다. 직장과 학교,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관리하며 산다. 눈치를 읽고, 분위기를 맞추고, 웃음으로 불편함을 봉합한다. 〈비서진〉의 웃음은 바로 그 훈련의 미러링이다. 시청자는 프로그램을 보며 잠시 위로받는다. ‘나도 저럴 때 있지’ 그러나 그 순간, 감정노동의 구조는 다시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왕자가 잠시 거지가 되어보는 체험은 결국 거지가 영원히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반전 없는 반전이 바로 한국 예능의 현실이며, 시청자는 그 익숙한 리허설을 또 한 번 웃으며 받아들인다.

웃음 이후의 질문 ― 감정의 무게를 다시 묻다
〈내겐 너무 까칠한 매니저 – 비서진〉은 한국 사회의 감정 체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작은 실험실이다. 감정은 관리되고, 관리된 감정은 기술이 되며, 그 기술은 다시 웃음의 상품으로 팔린다.
이서진은 잠시 거지의 옷을 입었고,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끝난 뒤 남는 것은 질문이다. 감정을 다루는 사회에서 웃음은 누구의 노동으로 유지되는가? 그 웃음을 지탱하는 사람은 언제쯤 자신의 감정을 쉴 수 있을까?
〈비서진〉은 감정을 드러내지만, 그 감정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불편한 감정은 유머로 전환되고 눈치와 피로는 ‘센스’와 ‘케미’로 바뀐다. 프로그램은 감정노동의 현실을 흉내내지만 결국 그 현실을 다시 웃음의 상품으로 되돌린다.
웃음은 예능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러나 웃음이 권력의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가 될 때, 그 웃음은 더 이상 가볍지 않다. 〈비서진〉은 바로 그 지점을 보여준다. 감정을 관리하는 사회, 웃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매니저가 된다.
결론은 단순하고 현실은 잔인하다. 감정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감정 노동자, 그러니까 인간을 소모한다. 〈비서진〉은 그 소모의 현실을 가장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한 한국 사회의 감정 리허설이다. 왕자가 잠시 거지가 되어 웃고, 시청자가 그 웃음을 모방하거나 관음적으로 소비하며 안도할 때도, 현실의 노동은 여전히 화면 밖에서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