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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기형도, ‘오래된 서적’ 중에서

사실 언론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사실은 하나의 조각일 뿐이다. 그 파편들조차도 시공간이라는 틀, 독자의 서로 다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조건 속에서 달리 해석된다.

명료한 사실, 명료한 해석을 의심해야 한다. 물론 사실은 신성하다. 그렇지만 그 사실조차도 반드시 진실인 건 아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해석하고 대화할 뿐이다. 그래야 한다.

단 한 줄


젊은 마르틴 부버(종교철학자, ‘나와 너’의 저자)는 한 랍비의 초대를 받는다. 부부 동반으로 어린 자녀와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부버는 한 질문을 만난다. 신은 존재하는가. 부버는 답하지 못한다. 저녁 식사는 끝나고, 그는 가족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선다. 하지만 가던 길을 멈춘다. 더는 걸음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정지 속에서 얻은 깨달음.

내가 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나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다면, 그 관계 속에서 나에게 신은 존재한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한 비유이며 동시에 현실이기도 하다. 참여연대는 나에게 ‘언론을 욕망하는 독자’에 관한 글을 청탁했다. 내가 ‘그’ 독자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향실 효과, 확증 편향, 조지 오웰(1984)과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와 닐 포스트먼(매체 평론가) 그리고 페북의 알고리즘과 클릭 저널리즘, 당파성과 기계적 중립의 위선에 관해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때 나에게 언론을 욕망하는 독자는 하나의 지식이나 관념에 불과하다. 그런 지식으로서의 독자, 목적어가 된 독자는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언론을 욕망하는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 관계 속에서 나에게 언론을 욕망하는 독자는 존재할 수 있다. 그것만이 현실이다. 나머지는 무시해도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나와 너’

그렇다면 누가 언론을 욕망하는 독자인가. 그것은 나이면서 모두이다. 나 아니면서 누구도 아니다. 누구나 어떤 특정한 사건, 특정한 시공간 속을 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특정한 사건과 시공간의 구조와 흐름 속에서 존재는 ‘구성’된다. 그렇게 구성된 존재는 일정한 패턴과 속성을 가지지만, 그 패턴과 속성조차도 이내 변한다.

기사 속에서 몇 개의 수사와 몇 개의 단어 몇 개의 문장성분으로 분석되고 박제될 수 있는 고정된 세계와 인간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특정한 사건들의 맥락 속에서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들’이다.

어떤 독자가 조중동이라면 치를 떤다고 치자. 어떤 독자는 경향과 한겨레에 치를 떠는 독자라고 치자. 그때 남는 건 뭔가. 그때 남는 건 ‘라벨링’이다. 나에게 조중동이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당신에게 경향이라는 한겨레라는 딱지를 붙이면, 그때 남는 건 대화와 관계가 아니라 그저 그 딱지 붙이기 그 자체다. 그래서 그런 라벨링이야말로 대화와 관계의 반대말이고, 지성과 희망의 반대말이다.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2004)는 무서운 영화다. (이하 약한 스포일러)

한 아이가 죽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지만, 그 상상력조차도 너무너무 현실이다. 놀라운 점은 [아무도 모른다] 속 그 세계에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악당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한 아이가 죽는다. 천사 같은 아이가 죽는다. 아무런 죄 없는 아이가 죽는다.

남은 아이들은 죽은 아이를 트렁크에 담아 아이가 보고 싶어 했던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공항으로 데려간다.

악당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그 악당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응징하면 된다. 그런데 그 악당이 관계이고 구조이며 무관심 속에서 자라는 악을 키우는 숙주라면, 그런 세상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그 악당을 응징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아이는 죽어야 하고, 남은 아이들은 그 죽은 아이의 마지막 소원을 지키기 위해 그 아이를 트렁크에 담아 공항으로 가야 한다.

그게 우리가 만든 세계다.

그 무시무시한 세계는 마치 우리가 만든 언론의 구조와도 같다. 존재해선 안 되는 어떤 악당이 있어서 이 세계가 죄 없는 아이를 죽이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죽음에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관여돼 있다.

꾸란에는, 왠지 좀 역설적이고 묘한 느낌인데,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하는 나치에 부역하는 독일인 이야기 [쉰들러 리스트] (1993, 스티븐 스필버그) 홍보에 사용된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한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모든 백성을 구하는 일이고, 한 명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모든 백성을 죽이는 일이다.”

꾸란
[쉰들러의 명단] (Schindler’s List, 스티븐 스필버그, 1993)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은 적 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흉터처럼 내 어딘가에 있다.

가령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에 관해서 말하면, 나는 그 가해자들이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 내 안에 있는 흉터는 그렇게 말한다. 사이버렉카로 불리는 신상털이 유튜버가 돈을 벌기 위해서 그 가해자들의 신상을 까발리고, ‘기레기’로 불리는 수많은 언론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그 유튜버들을 중계하는 일을 나는 흥미롭게 지켜본다. 나는 그 사이버렉카와 기레기를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옳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더 많은 가해자의 신상을 까발려달라고 원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939)에는 살인욕과 정의감을 모두 품은 인물이 나온다. 그 흥미로운 인물은 표면적으로는 낮의 법(정의)을 상징하지만, 그 심연에서는 밤의 욕망(살인)을 상징한다. 그건 마치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의 신상을 폭로하는 유튜버를 바라보는 내 모습 같다.

하지만 정의감은 정의가 아니고, 피해자의 요청마저 무시하는 사이버렉카와 기레기의 행태는 집단 성폭행 가해자의 폭력성과 본질에서 완전히 동일하다. 그들의 돈 벌고 싶은 욕망은 피해자 위에 있다. 그렇게 이 세계엔 응징과 정의의 외침은 가득하지만 피해자의 용서도 가해자의 뉘우침도 없다. 응징하는 사람과 응징당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런 세계에 누군가 남아 있을 리 없다.

각 첫 영국 출판본(1939), 1940년 미국 출판본, 2002년 한글 출판본 표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이중의 역설을 말한다. 모든 정의가 성취됐지만, 거기에 정의는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고, 어떤 피해자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이중의 역설을 소설 제목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소설이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불거진 ‘사적 제재’ 논란에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범인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정의감으로 위장된 살인욕의 대상을 곤충 채집하듯 주의 깊게 모은다. 하지만 그 죽음의 섬에 초대된 사형집행 대상에는 범인 자기 자신도 포함돼 있다.

정의감만 넘치는 시민과 그런 시민을 이용하는 사이버렉카와 그런 사이버렉카를 이용하는 기레기와 이 모든 것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무능한 공권력과 그 무능보다 끔찍한 반성도 치유도 용서도 없는 불관용의 시스템이 만든 세계.

지금 우리가 도착한 세계는 정의감을 외치는 마이크로 넘치는 정의도 용서도 화해도 없는 세계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게 우리가 곧 보트를 타고 도착할 죽음의 섬인 것이다.

언론을 자신의 정의감으로 가두려는 독자의 욕망이 넘실거린다. 거기서 빠져나오긴 어렵지만, 그래도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욕망을 내버려두면, 결국 아무도 남지 않으니까. 소설 속 동요는 그 무섭도록 텅빈 세계를 잘 보여준다.

열 꼬마 병정이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었네. 그래서 아홉이 남았네.

아홉 꼬마 병정이 밤이 늦도록 안 잤네.
하나가 늦잠을 잤네. 그래서 여덟이 남았네.

여덟 꼬마 병정이 데번에 여행 갔네.
하나가 거기 남았네. 그래서 일곱이 남았네.

일곱 꼬마 병정이 도끼로 장작 팼네.
하나가 두 동강 났네. 그래서 여섯이 남았네.

여섯 꼬마 병정이 벌통 갖고 놀았네.
하나가 벌에 쏘였네. 그래서 다섯이 남았네.

다섯 꼬마 병정이 법률 공부 했다네.
하나가 법원에 갔네. 그래서 네 명이 남았네.

네 꼬마 병정이 바다 항해 나갔네.
‘훈제 청어'(가짜 힌트)가 잡아먹었네. 그래서 세 명이 남았네.

세 꼬마 병정이 동물원 산책 했네.
큰 곰이 잡아갔네. 그래서 두 명이 남았네.

두 꼬마 병정이 볕을 쬐고 있었네.
하나가 홀랑 탔네. 그래서 하나가 남았네.

한 꼬마 병정이 외롭게 남았다네.
그가 가서 목을 맸네.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네.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939)

가짜 응징만 남은 세계


지식은 대화와 포용보다는 독선과 차별에 이끌리기 쉽다.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는 그렇다.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희망은 오로지 희망 없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앎은 무엇보다 정의와 복수를 외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해와 관용과 용서의 도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이 말하는 정의가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들의 정의는 대체로 그 시공간 속에서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안녕과 지배를 문화적으로 포장하는 언어였다. 그 언어는 딱딱한 껍질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 껍질을 깨뜨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냉소는 쉬운 방법이고, 게으른 변명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해야 한다. 가령 좋은 책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가끔은 기사를 찾아 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글은 참여연대가 펴내는 ‘월간참여사회’ 2024년 7월-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참여연대에 양해를 구해 슬로우뉴스에도 공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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