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양당+지역주의 타파 고민 없는 정치공학적 계산, 최병천도 유시민도 모두 틀렸다.
민주당은 결국 병립형 비례제로 갈 것인가.
최병천(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이 권역별 병립형을 밀고 있고 몇 차례 논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최병천을 몇 차례 띄웠고 이대로 가면 국민의힘이 과반을 얻는다는 공포가 확산되면서 병립형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이탄희(민주당 의원)가 위성정당 금지법을 발의하면서 연동형 포기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이재명(민주당 대표)의 판단만 남은 상태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내년 총선의 성격을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 워낙 복잡한 이슈지만 본질은 간단하다.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국민의 1%도 안 될 거라는 냉소적인 이야기도 돌지만 그래서 더 관심이 필요하다.
- 최근 돌고 있는 이런 저런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시나리오일 뿐 핵심은 기세다. 국민의힘이 참패한다면 민주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정권 심판 여론의 승리다. 민주당 단독으로 과반을 노리느냐, 민주당의 외연을 넓혀 중도를 공략하느냐의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논란을 키울수록 좋다. 민주당의 분열에 편승하면서 정권 심판의 전선을 모호하게 만드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연동형과 병립형.
- A 후보가 5만 표를 득표해서 당선되고 B 후보가 4만 표를 득표해서 낙선한다면 B 후보를 찍은 유권자 4만 명의 표는 죽은 표가 된다.
- 병립형 비례제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 수를 나누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제는 정당 득표율과 비교해서 지역구 의석이 적은 정당에 비례 의석을 우선 배정하는 방식이다.
- 만약 C라는 정당이 정당 지지율은 높은데 지역구 의석이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다면 연동형에서는 그만큼 의석 수를 더 채워줄 수 있다. 연동형에서는 지역구 의석이 90석만 넘어가도 비례에서 추가 의석을 확보하기 어렵지만 병립형에서는 비율에 따라 나눠갖는다는 게 차이다.
최병천의 주장.
- 최병천은 애초에 연동형 비례제로 위성정당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탄희가 낸 위성정당 금지법도 우회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위성정당을 만들고 합당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당선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비례 후보를 낼 수도 있다.
- 최병천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 첫째,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안 내고 국민의힘만 내면 손해다.
- 둘째, 어차피 위성정당을 막을 방법이 없다.
- 셋째, 떴다방 정치를 부추길 뿐 군소 정당에도 도움이 안 된다.
천호선의 주장.
- 천호선(사회민주당 사무총장)은 최병천의 계산이 애초에 전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천호선은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크게 앞설 거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 천호선의 시뮬레이션에서는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50석을 확보할 거라 국민의힘이 지역구에서 100석에 그치면 위성정당에서 27석을 확보하더라도 민주당이 크게 앞설 거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 천호선의 주장은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 첫째, 어차피 지역구에서 앞서면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만들거나 말거나 제1당을 지킬 수 있다.
- 둘째,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고 범진보비례연합 정당을 만들면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만들더라도 전체 민주진보 진영의 의석 수는 크게 손해 보지 않는다. 병립형과 큰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 셋째, 병립형을 선택하면 민심을 잃고 더 크게 질 수도 있다.
유시민과 박태웅의 주장.
- 이에 앞서 유시민(전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박태웅(한빛미디어 의장) 등의 주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유시민은 자매정당 노선이란 전략을 제안했다. 총선 이후 합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민주당이 비례의석을 내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위성정당과 다를 바 없다. 천호선의 범진보비례연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유시민의 자매정당은 조국 신당을 고려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유시민의 주장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 첫째, 위성정당 금지법은 어차피 안 된다. 국민의힘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통과되더라도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 둘째, 연동형에서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만들면 민주당도 정당방위 차원에서 자매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조정훈(시대전환 의원)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단독으로 위성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 셋째, 병립형으로 갈 이유가 없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거면 연동형으로 놔두고 위성정당이나 자매정당을 만드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 박태웅은 최근 여론 조사를 근거로 내년 총선은 “21대 총선과 비슷하거나 더 유리할 수 있는 지형”이라며 병립형으로 가자는 주장을 “공포 마케팅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 박태웅은 유시민과 달리 좀 더 명분을 강조한다. “정치는 신뢰자본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매번 약속을 어기고도 정치를 계속할 수 있나. 자칭 수권정당이 그래도 되나.”
권역별 비례제라는 대안.
- 민주당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명분을 살린 대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의문이다.
- 민주당 입장에서는 과거로 복귀한다는 비판을 피하고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지역 대표성을 보완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이를 테면 전국을 수도권과 중부권, 남부권 3개 권역으로 나누거나 서울과 수도권, 충청·강원, 전라·제주, 경북, 경남의 6개 권역으로 나누는 등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민주당 비례의원이 나오고 호남·제주에서 국민의힘 비례의원이 나올 수 있다.
- 명분이야 그럴 듯 하지만 유시민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당이 욕을 먹는 건 마찬가지고 정치 불신과 냉소를 불식시키기에도 부족하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꽃놀이패 같은 상황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욕은 민주당이 먹겠지만 국민의힘은 의석 수에 큰 차이가 없다.
- 조선일보는 국민의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권역별 비례제도 워낙 논쟁 요소가 많은 제도라 이미 논의할 시기를 놓친 측면이 있다”며 “민주당이 권역별 비례제를 얘기하는 건 과거로 선거제를 되돌리면서 비판은 좀 덜어보려는 꼼수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 권역별 비례제가 정치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최병천은 “진보정당을 포함한 소수정당은 현재보다 추가 혜택은 없지만 그렇다고 불이익도 없다”고 강조했다. 연동형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지난 총선과 비교해서 손해 볼 게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도 궤변이다. (당장 지난 총선에서 100% 연동형으로 갔다면 정의당 의석은 6석에서 16석으로, 국민의당은 3석에서 10석으로 늘었을 것이다.)
- 어쨌거나 민주당은 권역별 비례제로 가기에도 계산이 복잡한 상황이다. 논의가 무르익기에는 시간도 많지 않다.
더 깊게 읽기: 연동형의 딜레마.
-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연동형 비례제가 이상적인 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 정당 지지율을 반영하는 의석 분포라는 큰 취지를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지금의 연동형 시스템은 지역구에서 100석 이상이면 비례대표를 주지 않는 구조다. 만약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00석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비례대표 후보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 연동형에서 의석 배분은 다음과 같다. 정당 득표율 대비 지역구 의석 비율에서 부족한 만큼 47석을 나누는 방식이다. 지역구 253석 가운데 무소속 의석을 뺀 의석 수에 정당 득표율을 곱한 다음 지역구 의석을 빼고 이걸 전체 필요 의석 수 대비 비율에 따라 47석을 배분하면 된다.
- 계산이 조금 복잡하지만 D라는 정당이 지역구에서 80석을 확보할 경우 정당 지지율이 33%를 밑돌면 비례의석을 1석도 가져갈 수 없다. 만약 지역구에서 100석을 확보했다면 정당 지지율이 41%가 돼야 비례 의석을 1석 확보할 수 있다. 44%가 되면 2석, 46%가 되면 3석, 48%가 되면 4석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 만약 지역구 의석이 120석이라면 정당 지지율이 49%가 넘어야 1석을 확보하게 된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 등 거대 양당 입장에서는 사실상 비례의석이 의미가 없게 된다.
민주당의 복잡한 계산.
- 민주당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건 두 가지 계산 때문이다. 첫째, 욕을 먹지 않아야 하고 둘째, 의석도 잃지 않아야 한다.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는 이재명의 말이 이런 고민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욕 먹을 일을 하면 의석을 잃게 되고 의석을 잃으면 이재명의 대권 도전도 날아간다.
- 유시민은 아예 작정하고 위성정당을 만들거나 자매정당을 키우자고 제안하고 있다. 결국 조국 신당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느냐 의석 수를 뺏긴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 이재명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병립형으로 가고 싶겠지만 막판에 유시민의 제안을 받는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다. 병립형으로 가려면 넘어야 할 고비도 많고 반발도 많을 텐데 연동형은 그냥 내버려두면 가게 돼 있다. 결국 위성정당을 대놓고 만드느냐 우회적으로 만드느냐의 선택이 남아있을 뿐이다.
- 명분을 잃어서는 안 된다(연동형으로 가자)는 주장에는 이미 민주당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지만 총선 판도를 두고 여전히 전망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한다.
- 정의당을 비롯해 이준석 신당이나 (만약 창당한다면) 조국 신당 등 입장에서는 연동형 비례제로 가되 민주당이 비례대표를 내지 않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리하다.
- 민주당이 연동형을 선택하되 위성정당을 내지 않는 시나리오도 있지만 이재명의 결단이 필요하다.
- 이준석(전 국민의힘 대표) 입장에서는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민주당 이탈 표 가운데 이준석 신당으로 올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판을 흔들면 흔들수록 좋다.
- 국민의힘과 윤석열(대통령)은 이준석 신당을 찍어누르는 게 급하다. 민주당-조국 신당의 관계와 다르다. 민주당은 자매정당을 만들 수도 있고 범진보 연합도 만들 수 있지만 국민의힘은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식물 정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민주당이 병립형으로 가자고 나서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설 가능성이 크다.
- 어차피 지난 국회에서 민주당이 당시 미래통합당의 반대를 묵살하고 단독으로 처리한 선거법이라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위성정당을 내지 않을 이유가 없고 병립형으로 가더라도 명분을 신경쓸 이유가 없다.
‘떴다방’ 정당의 난립을 막을 방법이 없다.
- 결국 내년 총선의 룰은 민주당의 의지와 이재명의 결단에 달렸다.
- 조국(전 법무부 장관)이 며칠 전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유시민 전 장관이 병립형보다는 준연동형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그랬다고 해서 유 전 장관이 나쁜 사람인가.” 조국 입장에서는 유시민의 제안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재명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불체포 특권 번복 이후 약속을 안 지킨다는 비난이 거센 상황이라 병립형으로 돌아가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 만약 민주당이 연동형에 남기로 선택한다면 위성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어디까지가 위성정당이고 어디서부터 아닌가를 두고 계속해서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 이재명이 유시민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연동형에 남기로 하면 위성정당으로 쏠리는 만유인력을 막기는 쉽지 않다. “정당 투표에서 민주당을 찍으면 사표가 된다”는 논리가 돌고 ‘떴다방’ 정당으로 표가 쏠릴 가능성이 크다. 지난 총선 때 열린민주당처럼 공천을 받지 못한 민주당 인사들이 위성정당을 표방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
- 선거를 100일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아직까지 선거 룰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위성정당으로 재미를 봤던 거대 양당의 직무 유기와 자리 계산에 골몰한 의원들의 집단 이기주의가 만든 결과다.
해법은 양당+지역주의 타파와 대표성 강화.
- 무엇이 민주주의에 부합하는가를 따지면 된다.
- 병립형으로 복귀는 명백한 퇴행이고 연동형은 위성정당을 막을 수 없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이탄희의 위성정당 금지법은 통과될 가능성도 낮지만 유사 위성정당을 막을 방법이 없다.
-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역시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역주의를 해소한다는 명분(호남에서 국민의힘 의원, 대구에서 민주당 의원 등)은 있지만 거대 양당 구조를 바꾸는 데는 한계가 명확하다. 권역별 비례제를 도입하려면 비례 의석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장기적으로 중선거구제나 대선거구제를 도입해 다당제로 가고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비례 의석을 늘려서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 승자 독식 구조를 넘어 사표를 줄이고 대표성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다.
- 지난 6월 국회 정치개혁특위 공론조사에서는 600명의 시민 참여단이 숙의 토론을 벌인 결과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27%에서 70%로 급증했고, “의원정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65%에서 37%로 줄었다. 워낙 복잡한 이슈지만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큰 방향에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다.
- 공론조사를 설계했던 박원호(서울대 교수)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일부 정치인들이 선거제 개혁 필요성을 설득하는 대신 ‘의원 수 확대는 국민들이 반대한다’는 구호만 되풀이하며 정치혐오를 부추겼다.” 서복경(더가능연구소 대표)은 “‘국민들이 싫어하니까 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말만 하고 왜 줄이거나 늘려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은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 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CBS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냐? 노무현은 멋있게 여러 번 졌잖아요. 저런 소리야말로 자기가 무슨 놈의 노무현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야. 완전히 노무현을 부정하는 얘기 아니겠어요?”
- 멋있게 진다는 건 뭘까. 일단은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겠지만 멀리 보고 당장의 실리 보다 더 큰 대의를 노린다는 의미다. 애초에 잘못 꿴 단추인 데다 더 큰 대의를 노리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당장 다음 총선의 숫자가 급한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이재명에게 1년 뒤를 내다 볼 여유가 없다는 게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 여론의 요구는 명확하다. 누구나 지지 정당이 있겠지만 국민들의 뜻을 더 잘 반영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당장 내년 총선도 절박하겠지만 계속해서 큰 방향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게 큰 정치다. 이재명이 이런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아니면 유시민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일까. 민주당 28일에 처리한다는 김건희 특검법도 변수다. 특검법 통과와 대통령 거부권 여부, 선거법 개편까지 어쨌거나 보름 안에 결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