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구성원 동의 없는 언론사 사장 선임 안 된다는 새로운 원칙.
목차.
이준석(전 국민의힘 대표)이 신당 창당을 선언하면서 첫 번째 공약으로 공영방송 개혁 방안을 내놨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정책 없는 선거라는 비판이 많은데 그나마 공약다운 공약이 나온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 지난해 말 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방송 3법에 윤석열(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뒤다. 다음 국회에서 다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이준석 개혁안, 어떤 내용인가.
- 첫째, KBS와 MBC, EBS 등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할 때 구성원의 임명 동의를 의무화한다.
- 둘째, 공영방송 사장 자격 조건에 10년 이상 경력을 의무화한다.
- 셋째, 수신료를 폐지하되 조세 지원을 한다.
-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쪽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방송의 독립을 보장하는 게 보수의 가치에도 맞다. 민주당에는 문재인 정부 때는 뭐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언론노조가 환영한다고 했다.
- 확인해 보니 이준석과 윤창현(언론노조 위원장)이 만났다고 한다. 국민의힘이 보기에는 좌파의 소굴 같은 곳이고 그동안 국민의힘의 모든 방송 정책이 언론노조와 대결 구도였다.
- 언론노조의 의견을 듣는다는 건 쇼잉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이준석의 공영방송 개편안은 언론노조 주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민주당 방송3법과 어떻게 다른가.
- 방송 3법의 핵심은 공영방송 이사 수를 늘리고 국회 추천을 줄이는 것이다.
- KBS 이사회는 11명이고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는 9명이다. 이걸 21명까지 늘린다는 거다. 국회 추천은 5명으로 줄이고, 학회 6명, 시청자위원회 4명, 직능단체(방송기자연합회) 6명 등이다.
- 사장 선임도 국민 추천으로 바꿔서 100명의 추천 위원회에서 심사를 하도록 했다.
- 이준석의 제안과 비교하면 취지는 다르지 않지만 이준석이 좀 더 공격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임은 어떻게 해도 되지만 구성원들이 동의해야 한다는 거라, 임명 동의를 통과하려면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 방송 3법이 이사회 구성을 바꾸는 방식이라면 이준석 안은 이사회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고 이사회가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이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든 구성원들이 반대하는 사장을 꽂을 수 없는 구조다.
- 국민의힘(과거 자유한국당)은 MBC를 노영 방송이라고 비난하곤 했는데 사실상 노영 방송을 허용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로 들릴 수 있다. 구성원들의 자율성이 크게 반영되는 구조다.
박민 방지법이라고도 하던데, 만약 이게 되면 낙하산 사장을 꽂는 게 불가능해지나.
- 임명 동의가 관건이다.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사장으로 꽂을 수 없다면 애초에 사장 후보를 찾을 때부터 구성원들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 지금 윤창현(언론노조위원장)이 2017년 SBS 본부장 시절 사장 임명 동의를 끌어낸 바 있다. “우리가 반대하면 사장 못한다”, 이게 노조 구호였다. 이게 걸림돌이 돼서 SBS는 7년 동안 사장을 못 바꿨다. 임명이 안 될 게 뻔하니까. 결국 단협을 해지하고 파업 직전까지 갔다가 폐기했다.
수신료 폐지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다. 이게 가능한가.
- 윤석열은 정권 출범 이후 KBS 사장이 안 물러나니 수신료와 전기요금 통합 징수를 없애 버렸다. 이준석은 내친 김에 수신료를 없애고 정부 지원으로 가자는 제안을 내놨다.
- 국민들이 낸 수신료로 운영하는 것과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재원 구조를 어떻게 명문화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합뉴스 보조금이 깎인 것처럼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 근본적으로 공영방송 수익 구조와 재원 확보에 관한 질문이 필요하다. 수신료가 연간 7000억 원 정도인데 이걸 모두 세금으로 지원할 건가.
이준석이 왜 지금 이걸 들고 나왔을까.
- 윤석열 정부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인데 둘다 무너졌다는 비판이 많다. 감세와 긴축 재정 등 경제는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공영방송 낙하산 논란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한국 사회의 오래된 숙제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맞고 ‘꼴통’ 보수와 차별화하기에 좋은 아이템이다. 중간 지대를 넓히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 이준석의 포지션이 애초에 중도 무당층이고 반윤석열과 반이재명이라, 이런 식으로 양당 정치의 한계를 파고드는 전략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실행까지는 갈길이 멀지 않나.
- 이준석 신당이 단독으로 추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대통령이 방송3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상황에 실제로 입법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필요한 질문: 문재인 정부 왜 못했나. 그리고 윤석열 정부 왜 못하고 있나.
- 일단 어느 정권이나 권력을 잡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30년 간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니 당연히 민주당이 정권 연장을 할 거라고 봤을 것이다.
- 또 문재인 정부 때 임명한 사장들이 특별히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급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고대영(전 KBS 사장)이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해임 무효 소송을 냈다가 승소한 적 있다. 정연주(전 KBS 사장)가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소송해서 승소했지만 돌아가지 못했던 것과 정확히 같다. 일부 잘못은 있지만 법으로 보장한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를 채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 핵심은 공영방송의 독립이 정권의 선의로 보장되는 게 아니라 그냥 애초에 개입을 원천 차단하는 방식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거다.
언론운동 진영, 언론노조도 그때는 뭐했느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언론노조가 진행한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외국 기자들이 물었다. 왜 그때와 지금이 다른가.
- 보수 언론의 기회주의적 행태 때문이라고 했지만, 진보진영에서 상대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건 사실이고 대선을 앞두고 방송법 개편을 밀어붙였지만 때를 놓친 것도 사실이다.
- 강준만(전북대 교수)이 이런 말을 했다. “민주당은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의 힘을 빌리거나 협업할 수 있지만, 국민의힘은 그게 불가능하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다르지 않은데 노조의 도움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의 차이라는 지적이다. 거꾸로 말하면 국민의힘도 언론노조와 손을 잡고 방송 개혁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고 윤석열 정부가 공영방송 독립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다.
공영방송의 영향력도 많이 줄지 않았나.
- 시청 점유율과 채널 선호도 모두 크게 떨어진 상태다.
- 하지만 여전히 공영방송 신뢰도는 높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MBC와 KBS가 1~2위를 차지한다.
BBC와 KBS를 비교하곤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
- BBC는 수신료 안 내면 과태료에 형사 처벌까지 받는다. 1인당 154파운드, 연간 20만 원 정도다.
- BBC 이사회는 14명. 이 가운데 4명은 국무부 장관 자문을 받아 왕이 임명, 나머지 9명은 이사회 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다. 정부나 의회가 개입할 수 없는 구조다. 예산이 8조 원에 이르고 수익의 74%를 수신료에 의존한다.
- 다만 2016년 브렉시트 이후 갈등이 폭발했고 수신료 폐지 여론이 높다. 2027년부터 수신료를 완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고 재정지원을 할 건지 말 건지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어떻게든 재정 지원을 하기는 하겠지만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 NHK도 수신료로 운영된다. 연간 1만3650엔, 12만 원 정도다. 일본도 수신료 거부 운동이 많았지만 아직 유지하고 있다.
- 핵심은 사장 선임 과정에 정권의 영향을 차단할 수 있느냐, 그리고 정권과 맞서더라도 사장의 임기가 보장되느냐다. 한국은 집권 여당이 추천하는 이사들이 이사회 의결권의 과반을 확보하고 힘으로 밀어붙이지만 BBC는 애초에 특정 정당의 입장이 관철되는 구조가 아니다. 방송 독립은 결국 사장의 독립이다.
미국 PBS와 NPR은 어떤가.
- PBS와 NPR 둘 다 비영리 재단이고, 재원은 90%가 기부금이고 10%는 수익 사업이다.
- 지배구조나 재원의 문제는 부차적이고 결국 실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연대와 공존, 다양성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제대로 된 공영 방송이 필요하지 않을까.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의제를 제안하는 언론, 여기에 국민들이 기꺼이 돈을 낼 것 같다.
KBS 운영이 방만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 51%가 억대 연봉자다. 연봉이 많은 건 문제가 아니지만, 수신료에 의존해서 혁신을 외면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 KBS도 매출의 47%가 수신료 수입이다. 광고는 2TV에서만 받는데 18%를 차지한다.
- 종편을 중심으로 KBS 광고를 없애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광고 파이를 나눠먹겠다는 발상이지만 줄어든 광고 수입을 보전할 만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비극의 악순환이다. 해법은 뭐라고 보나.
- 문재인 정부는 법을 그냥 놔두고 시민추천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 사장 추천 절차를 공개적으로 진행했는데 역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건 다르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 방송사 사장을 정부가 임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만들고 이 원칙을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 이준석의 제안도 큰 방향에서는 맞다. 대통령이 임명하더라도 구성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다는 건데, 좀 더 근본적으로 방송을 정치에서 완전히 독립시키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본다.
- 언론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높은 퀄리티를 낸다는 게 수십 년동안의 경험으로 입증된 결과다.
- 대통령이 낙하산 사장을 내려보내는 낡은 관행을 바꾸는 게 핵심이고 이준석이 제안한 것처럼 그 과정에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전망은?
- 총선에서 민주당이 과반을 확보하면 다시 시도할 수 있지만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이 선방하면 아예 쟁점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 강준만이 제안한 것처럼 민주당 주도로 밀어붙일 일은 아니고, 공영방송의 독립이 여야 모두에게 좋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