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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가 거의 매일 열렸던 2016~17년 겨울의 광화문 광장. 그곳에는 언제나 장애인들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인 2012년 8월 21일부터 ‘장애인권 3대 적폐’인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수용시설 폐지를 위한 농성이 광화문 광장 지하도에서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 농성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각 의제에 대한 민관협의체 구성을 약속받으면서 1,842일 만인 2017년 9월 5일에야 종료됐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와 수용시설 폐지(탈시설)를 외치고 있다.

탈시설장애인 긴급 기자회견. 2024.11.08. 명동성당 앞. – 주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새 정부 새 정책에도 장애인 없다

작년 12.3 불법 비상계엄이 일어난 밤. 국회 앞 현장에 가장 먼저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장애인들이었다. 그날은 다름 아닌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활동가들과 회원들이 국회 근처에서 1박 2일 농성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2021년 12월 3일부터 시작된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행동’은 새 정부가 들어선지 4개월이 지난 지금도 계속 이어져 지난 13일로 930일차를 맞았다. 이 행동을 중단할 만한 그 어떤 의미 있는 만남이나 약속, 혹은 정책 제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린 그 사건들을 사람들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며 혁명에 비견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변화를 실감할 수 없었다. 장애인권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무도한 정부와, 장애인권을 정치적 수사로만 활용하고 뒤로 미루는 기만적인 정부가 번갈아 자리를 바꾸었을 뿐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의 모습. 2016. 11. 19. 광화문. 사진 옥토.

예컨대 광화문 농성의 성과로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 탈시설이 포함되었지만, 대통령 임기를 불과 9개월 남겨둔 시점에서야 내놓은 ‘탈시설 로드맵’은 시설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거주시설의 변형안에 다름 아니었다. 그마저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아예 모든 정책과 공식 문서에서 ‘탈시설’이라는 용어가 삭제되었고, 장애인 사회서비스의 신자유주의적 시장화 정책‘개인예산제’가 추진되었다.

📌 개인예산제

개인예산제(personal budgets)는 장애인이 복지 서비스를 받는 총량을 예산으로 환산해, 그 안에서 본인이 필요한 서비스나 재화를 직접 선택하고 이용할 수도록 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화 정책이다.

이 제도는 전장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 발표된 이재명 정부의 123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어 2027년 본 사업이 예정되어 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한 정부를 자처했지만, 그 국민 속에 적어도 장애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건 분명한 듯하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마’

국민·시민에서 배제되거나 2등 시민으로 격하되고 있는 건 장애인만이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청(소)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목소리들은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비판적 언명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최근 낸 책 ‘장애학의 시선’(오월의봄, 2025) 뒤표지에는 “우리가 원하는 건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는 책 서문의 “장애학이 추구하는 건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일부 바꾼 것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상당히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을 원하고 지향하며, 이를 위해 분투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떤 맥락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담고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인간다운 삶을 찾아 탈시설을 감행한 장애인 당사자 아홉 명의 목소리를 담은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마’(삶창, 2013)라는 책이 있다. 사실 이 사회는 늘 장애인을 ‘위해서’라는 말을 해왔다. 장애인에게 치료와 재활을 강요하는 것도 장애인을 위해서이고, 시설에 수용하는 것도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사회가 장애인을 ‘위해서’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실상 비장애 중심 사회를 굳건히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때 염두에 둔 첫 번째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라는 책 제목은 미국의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제작한 포스터에서 따온 것이다. 그 포스터에는 이 문구에 이어 ‘내 얘기를 들어!’라는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장애인을 위하고 동정하는 세상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으로서 장애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원한다.

중심과 위계가 해체된 세계를 위해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떤 세상인가.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을 위한 세상이다. 그런 존재들의 몸, 규범, 가치가 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와 반대로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을 위한 세상일까?

‘이갈리아의 딸들’(황금가지, 1996)이라는 소설이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체계가 완전히 뒤바뀐 여성 중심의 가상 세계 ‘이갈리아’를 그린 작품이다. 저자 게르드 브란튼베르그(Gerd Brantenberg)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활동가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세계 이갈리아는 여성해방운동이 추구하는 목표이자 이상향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학자 김고연주는 한국 사회에서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은 이 작품에 대한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갈리아라는 나라는 현실의 여성 독자들에게 통쾌할지 몰라도 여성들이 원하는 나라는 아니다. 또한 남성 독자들에게 불쾌할지 몰라도 남성들이 그 면면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다. 결국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냐고. 그런 세상은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김고연주, ‘이갈리아의 딸들은 새로운 시작이다’, 핀치, 2016. 12. 19.

마찬가지로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이 에이블리즘(비장애중심주의)을 비판하며 염두에 두는 건 장애인이 중심이 된 세계는 아니다. 우리는 중심과 위계가 해체된 세계, 다양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계를 원한다.

‘장애인을 위한 세상’을 넘어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모든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인데, 인간을 성별이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여성’, ‘흑인’으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빈민 등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K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를 장애인으로만 환원할 때, 그것이 바로 장애차별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는 장애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자, 성소수자이며, 노동자이자 빈민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이 그렇듯, 장애인도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장애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K를 위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나? 적어도 ‘장애인을 위한 세상’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즉 노동자 계급이 차별받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데 장애인의 노동권만 온전히 실현되는 세계는 불가능하며, 노인과 청소년과 홈리스와 이주노동자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데 장애인만 시설에서 해방되는 세계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다시말해,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은 만인의 노동권이 보장되는 세계를 건설하는 일이며, 장애인이 시설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은 그 누구도 시설에 갇힐 필요가 없는 세계에 다가서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능력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비장애중심주의 내지 장애차별주의를 뜻하는 ‘에이블리즘(ableism)’은 철자에서 드러나듯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함축한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장애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으며, 역으로 장애차별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다른 세상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세상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라기보다는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다. 그런 세계가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이에 대해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질문하며, 이 세계를 변혁하려는 지향을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변혁’이라는 말이 다소 무겁고 비장하게 느껴지지만,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두 가지는 꼭 언급하고 싶다.

첫째,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은 지금과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애학에서 쓰이는 조어 중 ‘싯포인트(sitpoint)’라는 것이 있다. ‘서 있는’ 지점을 뜻하는 ‘스탠드포인트(standpoint)’와의 대비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존재의 상이한 관점을 드러내는 용어다.

이 용어는 높은 곳에 서서 군림하는 위로부터의 정치가 아닌,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눈높이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함축한다.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이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일정한 비전과 윤리를 담지하고 있다면, 그건 이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둘째, 지금과 다른 세상은 기존 질서와 토대가 한 방에 무너지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저항 속에 ‘차별의 재생산이 조금씩 실패하면서’ 온다. 장애인들이 갖은 탄압과 욕설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 또 다시 출근길 지하철로 향하는 이유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차별 없는 세계를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변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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