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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태양 너머’를 상상하게 되었을 때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박훈, 초판: 1995, 개정판: 2014, 민음사)의 가장 중요한 논제는 ‘메이지 유신을 서구화로만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일 테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18세기 이후 사무라이들이 사대부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체제 자체를 변혁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전근대적이고 극복해야할 것으로 흔히 인식되던 ‘유학’이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비서구 사회에서 근대와 전통은 대체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 근대화는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근대화’를 새롭게, 아니 오히려 옛 방식대로 다시금 인식해보는 게 좋은 시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근대를 전통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식으로 과거를 전복하고 새로운 것을 온전히 만들어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근대를 전통을 뒤집은 게 아니라 전통이라는 토양에서 발아한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 마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주의를 찾으려 했던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독일어: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은 1904년~1905년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에 연재되었고, 1920년에 책으로 나왔으며, 1930년에 탤컷 파슨스에 의해 같은 제목(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으로 영역본이 나온 뒤로 사회학의 고전이 됐다. (사진은 1934년 편집본 표지)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1905년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에 연재되었고, 1920년에 책으로 발간됐으며, 1930년에 같은 제목의 영역본이 나온 뒤 사회학의 고전이 됐다. (사진은 1934년 편집본 표지)

먼저 그렇다면 ‘전통’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축의 시대 

전근대적 생활양식 전체를 전통이라고 포괄하면 너무 막연할 것이다. 여기서 쓸 수 있는 좋은 틀은 ‘축의 시대’라는 개념이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고등 종교가 유라시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개념은 논란이 여전히 있긴 해도 종교와 문명을 이해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이 시기에 등장한 고등 종교들이 이전의 종교와는 무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는 말 그대로 신화적 사회였다. 초기 국가에서 통치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신의 후손이라고 강조했다. 켄트 플래너리와 마커스 조이스는 [불평등의 창조]에서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평등 사회는 성과에 따라 지위에 차등을 두는 사회로 전환되었고, 지위의 항구적 차이가 생기자 상류층들은 ‘조상의 은덕’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했고, 끝내는 ‘혈통 자체가 다르고, 신과 이어져 있기에’ 세습이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하늘의 신이 곧 지상의 왕이 되는 제정일치 사회, 신왕(God-king)이 통치하는 국가가 등장했다. 이 사회에서 신왕은 절대적 권력을 가졌으며, 불평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신이 원하는데 가지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초기 전쟁의 군사지도자들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신화를 조작한다.

초기 전쟁의 군사지도자들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신화를 조작한다.

하지만 축의 사상은 무언가 다른 논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왕은 더는 신이 될 수 없었고, 그의 가계도 신과 상관 없었다. 이렇게 된 데는 ‘신’이 갖는 의미가 달라진 게 컸다. 축의 시대 이전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적, 도덕적인 판단을 거의 내리지 않았다. 자연현상을 주관하고 권력을 제공하고 은덕과 저주를 내리는 것이 그 시절 신들의 ‘역할’이었다.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를 보면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갖고, 능력의 제약도 많다. 그저 초능력이 조금 더 있는 영웅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고등 종교의 신은 이와 전혀 다르다. 야훼, 알라로 대표되는 일신교 문화권의 신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두 신은 인간으로 상상되기 힘들고, 천지 만물을 주관하고 심판을 내리는 전능한 신이다. 아라 노렌자얀은 이를 두고 “거대한 신(big god)”, “도덕적 신(moralizing god)”으로 표현했다. 성격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강조하는 다르마, 중국의 상제, 천명 등의 개념은 일신교의 논리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여준다. 세상을 주관하는 논리가 있으며 그것이 만물을 규정하고, 사회적 도덕과 윤리도 그런 이유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축의 사상은 훨씬 사회적, 윤리적인 면모가 강했다. 동시에 축의 사상은 ‘원리’를 강조했기에 그 시대 기준으로는 주술적인 면모를 제거하는 ‘합리화’ 기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순장과 같은 잔인한 풍습이 사라진 것도 축의 사상의 공이다. 원리에 따라서 그런 주술을 용납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세계라는 거대한 바퀴의 중심이 되는 되는 사상과 종교는 '축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태어났다.

세계라는 거대한 바퀴의 중심이 되는 되는 사상과 종교는 ‘축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축의 사상은 왜 만들어졌고 그렇게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일까? 신왕으로는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국가, 통치 원리로서 민족신화를 넘어서 보편성을 획득해야 했던 제국의 고민, 유목민의 침공으로 더 많은 이들을 동원해야 했던 필요성, 사회와 인간의 의미를 더 고차원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해준 물적 풍요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는데, 여전히 활발히 논쟁 중인 영역이기에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국가의 팽창, 이민족의 유입과 투쟁, 물적 풍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다소 타협하고 넘어가겠다.

여하간 이렇기에, 근대 사상의 주요한 근거가 전통 종교에서 도출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축의 사상은 그 고대 시대에 이미 주술을 몰아내고 세상에 원리를 세웠으며, 원리 하에서 인간의 본질적 평등함을 내세웠다. 농업 제국에서는 그것이 사회를 최적으로 유지시켜주는 선에서만 적용되었지만, 많은 민중 항쟁이나 체제 변혁가들이 종교의 도덕에 기대서 저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축의 사상이 통치와 저항 양측에 논리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럽 초기 근대의 사상가들이 천부인권, 자연권 등을 강조하며 신 앞에서의 평등을 이야기 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왜 근대성은 서양에서 출현하였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제시된다. 축의 사상은 유라시아의 복합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을 근대성까지 끌어올린 건 그렇다면 왜 서구 사회인가? 근대성의 기원을 종교에 둔다는 것은 결국 유럽의 기독교 혹은 그리스-로마 전통에 본질적 우위를 상정하는 서구중심주의를 반복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그 같은 설명이 지배적이기도 하였다. 나 또한 이런 식의 설명이 전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서구 근대는 서구의 전통과 종교를 바탕에 두고, 마치 지층이 쌓이는 것처럼 등장한 것이지 무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다만 비서구 사회가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열등’하거나 근대성과 상반되는가? 그렇게 보는 것 또한 무리다. 이슬람, 불교, 유학과 제자백가 등에서는 근대성과 이어질 수 있는 재료들이 많다. 물론 이 전통들이 무척 억압적 요소, 미신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만큼, 그 수준으로 가지고 있다고 봐야 공정할 것이다. 21세기의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은 자국의 과거보다 타국의 현재와 훨씬 더 공유하는 게 많지 않은가?

서구와 비서구의 분기를 만들어낸 것은 수세기 동안 서구 사회에 가해진 압박이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지구적으로 확대되는 무역 네트워크, 화약 도입으로 촉발된 군사혁명지정학적 경쟁의 격화, 그로 인해 강해지는 국가, 통념 파괴적인 지식의 폭발적 팽창이 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요컨대, 제국의 등장과 유목민의 위협, 물적 풍요가 축의 사상을 만들어냈다면 대서양 경제와 군사 혁명은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통해 기독교 교리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끄집어낸 것이다. 그 같은 압력을 받지 못한 이슬람권이나 중화권이 같은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묘사한 그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묘사한 그림.

동양의 ‘흥미로운’ 대답: 무타질라와 사공학 

하지만, ‘같은 압력을 받지 못했으니 같은 결과가 안 나온 것이다’라는 것은 너무 부실한 답변 아닐까? 같은 압박을 받았는데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유력한 비서구 문명인 이슬람권과 중화권에서 등장했던 흥미로운 조류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는 압바스 왕조 시기의 무타질라(학파)다. 압바스 왕조 시기는 이슬람의 황금 시대로서, 당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지던 경제적, 과학적 발전은 이미 상당히 유명하다. 경제사학자 셰브케트 파묵은 압바스 황금기가 이슬람 성립 직전에 중동과 동지중해를 강타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비롯한 전염병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다는 설명을 했었다. 마치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토지 대비 노동력을 줄임으로써, 생존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고 이것이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상업의 발전과 경제적 팽창 조류에 맞물려 바그다드에서는 독특한 신학 조류가 유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무타질라파다.

무으타질라 학파 또는 무타질라 학파는 바스라와 바그다드에서 번성한 이슬람의 사변 신학파로, 8세기 우마이야조에서 시작되어 9세기 무렵 압바스조 치하에서 칼리프 알마으문 치하에서 절정기를 맞았다.(참조: 위키백과, '무으타질라파')

무으타질라 학파 또는 무타질라 학파는 바스라와 바그다드에서 번성한 이슬람의 사변 신학파로, 8세기 우마이야조에서 시작되어 9세기 무렵 압바스조 치하에서 칼리프 알마으문 치하에서 절정기를 맞았다. (캡션 출처: 위키백과, ‘무으타질라파’ 중에서)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무타질라파는 인간 이성과 논리를 이슬람의 절대적 준거로 삼아야한다고 했으며, 지금은 악명 높아진 이슬람의 꽉막힌 샤리아 해석과는 정반대되는 개방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쇄적 전통과 대비되는 인간 이성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이 같은 신뢰는 무타질라파를 이슬람의 역사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으나, 압바스 왕조가 쇠락하면서 점차 사회적 인기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적 신학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슬람 과학도 이 시기 정체하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의 근대 사상을 받아들인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키려 했을 때 무타질라파를 다시 불러내면서 재조명 받게 된다.

두번째는 남송에서 유행하였던 사공학파(事功學派)다. 남송은 금, 대리, 이후에는 몽골과 대치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강제 받았으나, 동시에 상업적 농업과 거대한 산업 경제를 이루었던 국가였다. 남송이 처한 이런 독특한 상황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양한 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어주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유학, 나아가 소위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조류였다. 이 조류는 깨우친 도덕적 인사들로서 사대부, 그들이 참여하는 정치, 그리고 유교 원칙에 따라 사대부와 협치하는 도덕적 군주 등을 강조했다. 주자학은 남송 멸망 이후 급속하게 세를 확대하면서 마침내 동아시아 전역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송에서 주자학은 진량, 섭적 등이 주도하는 사공학과 경쟁해야만 했었다. 사공학파는 상업이 고도로 발달했던 송의 중심지, 절강에서 발달하여 절동학, 절학 등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남송이 당면한 지정학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국가 권력을 강화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상업에 대한 자유방임을 통해 국부 전체를 늘려야 한다는 파격적 주장을 주로 하였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량과 주희의 왕패 논쟁인데, 진량은 전통 종교가 보통 강조하는 동기 윤리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결과 윤리를 더욱 강조하고, 특히 ‘고대의 이상’보다는 당면한 현실에서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며 그 예로 한고조와 당태종을 들었다. 이슬람권과 다소 유사하게, 사공학파는 서구 근대 사상과 전통 중국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근대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다시 불려나와 재해석되곤 하였다.

진량(陳亮; 1143년~1194년)은 유물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진량(陳亮; 1143년~1194년)은 유물론철학을 바탕으로 국방력 강화와 상업에 대한 자유방임, 그리고 동기보다는 결과 윤리를 강조하며 현실적 성취를 강조했다.

만약 압바스 황금기나 남송 시대에 아메리카 발견과 지구적 상업 네트워크의 등장, 화약 도입으로 인한 군사 혁명과 항구적인 지정학적 경쟁을 맞이했다면 무타질라파나 사공학파를 뛰어넘는 다른 무언가가 나올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국가는 기후변화, 내륙아시아에서 제기되는 위협에 굴복하였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물은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타고 서유럽으로 유입되어 마침내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2. 메이지 유신: 근대화, 서구화, 기축화(基軸化)

이런 맥락에서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서는 유학이나 주자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저자는 이것을 ‘유교적 근대’나 ‘근대의 맹아로서 유교’로까지 해석할 수는 없으나, 사무라이들이 사대부처럼 변하고, 그에 따라 공론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정치 변혁의 토양이 무르익은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서구 근대는 일본에서 유학화가 일어나면서 정치 의식이 고도로 발달하고 있을 그 무렵에 도입되었다. 또한, 서구의 숱한 개념은 유학과 중국 고전에서 차용한 용어들을 경유하여 번역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일본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을 전범으로 근대화에 매진한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청 제국 vs. 일본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은 축의 사상으로서 원형적 근대성을 제공하던 유학을 적극 수용하던 일본 사회가 시의적절하게 서구와 대면하여 서구 근대성마저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까? 그렇게 볼 여지가 분명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던 청 제국이 다소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일본의 특수성은 역시 두드러진다. 건륭제 말기부터 청 제국에서는 유학을 배운 신사층이 역시 지역의 서원 등을 통해 조직되었고, 개중 과거 급제자들은 한림원을 통해 역시 유교 원칙에 따른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주창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서구에 대한 강경책 일변도를 고집하여 아편전쟁이 발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고, 서구화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저항하였다. 물론 중국에서 신사층이 일본에서 사무라이보다 인구 비율이 낮았던 점, 막부가 사라지자 실권 없는 천황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던 유신 세력과 달리 청 제국에서는 황실을 비롯한 숱한 기득권과 맞닥뜨려야만 했던 점, 민족적 다양성으로 인해 계속해서 분쟁을 겪어야 했던 점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물적 조건이나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1860년의 중국은 일본보다 명백히 운신의 폭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의 핵심 소재인 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청대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 학습한 유학은 근대화에 그리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답을 제공한다. 이 책은 송이 사회 영역에서 완전한 자유화, 보편적 도덕윤리로 통제되는 정치권력을 통해 송이 ‘근세’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달성한 반면, 일본은 이 같은 보편적 흐름에 역주행하여 폐쇄적이고 정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갔다고 주장한다. 요나하 준에 따르면 이 같은 일본적 경향이 가장 절정에 치달았던 떄는 에도시대였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차이가 서구 근대를 마주한 중국과 일본의 분기를 설명할 수 있다.

중국화 하는 일본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저 / 최종길 역 | 페이퍼로드 | 2013년 07월 17일

중국화 하는 일본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저 / 최종길 역 | 페이퍼로드 | 2013년 07월 17일

중국 판본의 ‘근세’ 사회를 달성했던 중국은 서구화를 달성해야할 필요성에 공감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완결적인 세계관과 원리를 갖추고 있었기에 그것을 파괴하고 다른 것을 도입한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어차피 그런 방향의 ‘근세’에 도달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그런 세계관과 원리에 더 유연할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에도시대 후기에 중국적 근세를 추구하다가 서구적 근대로 껑충 뛰는 곡예가 가능했던 것이다.

‘축의 시대’ 틀로 본 일본의 근대화 

개인적으로는 요나하 준의 ‘중국화’‘에도시대화’라는 용어를 흥미롭게 생각하지만, 좀 더 보편적인 용어로 바꾸어내 설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축의 사상’이라는 틀로 말이다.

앞에서 축의 시대 이후와 이전을 비교하던 것을 다시 떠올려보자. 축의 시대 이전에 정치 권력은 신의 후손이기에 정당화되었다. 사회에 도덕과 윤리를 부여하는 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초월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축의 시대 사상이 사회를 재편하자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세계를 주관하는 원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정치 권력은 그 원리를 대리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신은 몹시 추상적이고 거대한 존재로 변화했고, 인간 사회의 윤리 문제에 답을 내리는 존재로 변했다. 특히 질서와 원리가 만물을 관장하면서, 인간 사회는 상대적으로 평등해졌고 주술적 요소가 세계에 대한 설명에 개입하는 빈도도 낮아졌다.

이 도식에 의거하면, 흥미롭게도 일본은 전형적인 축의 시대 이전 사회다. 천황은 그저 왕조의 개창자이기에 통치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일본의 시조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자손으로 땅 위에 강림한 존재기에 권력을 갖는다. 기실 이 같은 신화는 고대 한반도 국가, 특히 고구려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고, 초기 국가는 모두 공유하고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한반도 국가들이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건국 신화’가 고려와 조선에서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변화가 없었기에 그대로 잔존하게 되었다.

동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아마테라스 (퍼블릭 도메인)

동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아마테라스 (퍼블릭 도메인)

여기서 일본도 불교와 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일본도 고대 국가를 발전시켜나가면서 중국에서 기원한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 논리에 따라 사회를 재조직한 것이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의 관위(官位; 관직과 신분의 위계)와 차별화되는 일본의 관위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일본에서 축의 사상은 확실히 무언가 다르게 수용되었다. 요컨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정립된 축의 사상이 한, 당, 송을 거치며 점차 그 논리를 광범위하게 확산시켜나가는 ‘역사 발전’을 겪었다면 일본은 어느 순간 그런 확산이 멈췄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율령제가 형해화되고 봉건제가 부활하였으며 유학자가 아니라 무사들이 통치권력을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독특한’ 경로를 걸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는 유학이 사회를 전면 재편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민족과 외부 압력의 부재가 그 원인이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사실 일본이 다이카 개신(大化改新,646년)1을 선포하고 동아시아 축의 사상을 수용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그 같은 압력은 명확히 존재했다. 동쪽에는 아직도 복속되지 않고 있던 에미시(蝦夷; 에조)2인들이 있었고, 서쪽에는 활발한 교류와 군사적 투쟁을 이어갔던 것이 확실한 한반도 국가들이 존재했다. 즉, 일본인들은 동쪽에서 이민족을 복속시켜야했고, 서쪽에서는 축의 사상을 앞서 수용한 국가들과 경쟁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보편성을 제공하고, 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어주는 축의 사상을 받아들일 압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일본의 도호쿠 지방 및 홋카이도 지역에 있는 에조(에미시; Emishi) 지역 주민은 일본인(야마토 민족)에 의해 이민족으로 취급됐다.

일본의 도호쿠 지방 및 홋카이도 지역에 있는 에조(에미시; Emishi) 지역 주민은 일본인(야마토 민족)에 의해 이민족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8세기 이후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아오모리가 정복되면서 적어도 쓰가루 해협 남쪽에서 이민족의 위협은 사라졌다. 삼국이 통일되고, 일본의 예상과 달리 통일신라가 현해탄을 건너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면서 일본에 외부 압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반도가 만주를 통해서 북방 민족과 계속해서 투쟁해야만 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경험인 셈이다. 사회에 긴장감을 부여해주고 엘리트층을 끊임없이 소모시켜주는 외부 변경이 사라지면서, 중앙집권적 율령제는 점차 귀족이 대리 통치하는 섭관 정치로, 나아가 막부가 통치하는 무가 정권으로 이행했다. 유학, 혹은 불교 같은 ‘원리’는 통치권력의 근간이 될 수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던 것이다.

동북지역정복전쟁(에도 정벌)의 양상을 표현한 지도 (원본 출처: 야마 하루오)

동북지역정복전쟁(에조 정벌)의 양상을 표현한 지도 (원본 출처: 야마 하루오)

물론 천황이라는 통치권력의 근간이 존재하기는 했다. 축의 사상이 일본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쨌든 권력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성을 이어받은 천황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일본 국가와 사회가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게 되자 그 같은 신화적 권력이 일상에서 갖는 중요성은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신토가 만들어지면서, 불교를 배제하고 새로운 ‘신토 만들기’에 돌입하기 이전까지, 신토에서 천황의 자리는 그리 크지도 않았다.

통가 왕국와 일본의 공통점 

이 같이 통치원리가 사실상 실종되고 누가 주권자이고 실권자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모습은, 아마 축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고도의 복합 사회를 장기간 유지한 일본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실제 그저 상징으로서 존재만 하는 천황과 실권을 가진 막부의 이중 체제는 중국, 조선의 유학자들로 하여금 일본을 ‘불가해한 사회’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이었으며, 일본과 접촉한 서구인들도 그 체제의 난해함에 ‘천황은 교황이고, 막부가 왕이다’는 자기네식 해석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유사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저 유라시아 문명 사회에 없을뿐이다. 일본에서 태평양으로 더 동쪽으로 나아가면 있는, 폴리네시아인들이 건설한 통가 왕국에서는 막부 시기 일본과 유사한 통치 구조를 발전시킨 바가 있다. 통가는 신에게서 혈통을 이어받은 신성 추장인 ‘투이 통가’가 다스렸었다. 하지만 막대한 권위를 지닌 투이 통가가 암살당했을 때 권력이 붕괴할 것을 우려하여, 24대 투이 통가인 카울루포누아는 자신의 동생을 ‘투이 하아타칼라우아’로 임명하고 따로 왕가를 잇도록 하였다. 투이 하아타칼라우아는 신성은 없는 ‘세속 추장‘으로서 정치, 군사 실무를 관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리하여 점차 통가 왕국의 실권은 투이 하아타칼라우아로 넘어오게 되었고, 투이 통가는 의례만을 주관하게 되며 실질적 권력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이 통가는 이후에도 신성 가계로서 이어진 반면, 투이 하아타칼라우아는 새로운 방계 가문인 투이 카노쿠폴루에 권력을 이양하면서 사라졌다.

현 통가 왕국의 왕 아호에이투 투포우 6세(재위: 2012년~2020. 4. 2. 현재, 사진은 2015년 7월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현 통가 왕국의 왕 아호에이투 투포우 6세(재위: 2012년~2020. 4. 2. 현재, 사진은 2015년 7월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통가와 일본의 경험을 단순히 ‘신성과 세속의 이중권력체제’로 묶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회의 유사점이 시사하는 바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두 사회는 보편적 원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일원적 권력이 부재했다. 사회는 여전히 신성한 ‘혈통’으로 대변되는 가계가 다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 압력도 없는 상황에서 그 신성한 가계가 변동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사회가 계속 팽창한다면? 일상적 통치 업무를 관장할 새로운 세속적 권위가 각광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였을 것이다.

18세기, 과잉생산된 엘리트의 불만 

이 같이 인근 대륙의 동아시아 사회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폴리네시아 사회와 이상한 공통점을 갖던 일본은 18세기 이후 갑작스럽게 ‘유학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진다. 어쩌다 이런 갑작스러운 이행이 일어났을까? 이는 아마 전란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가 200년 가량 지속되면서, 과잉생산된 엘리트의 불만이 표출될 창구로서 주자학이라는 축의 사상이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변경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과잉생산된 엘리트를 변경으로 보내 그들을 소모시켜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

변경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계속된 내전으로 과잉 생산된 엘리트를 가지치기 했다. 하지만 변경도 없는 사회에서 평화가 200년 지속된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같은 질문은 특히 도쿠가와 막부의 승자연합(winning coalition)에 배제되어 있던 하급 사무라이와 도자마 번을 끝없이 자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자연합으로서 도쿠가와 막부가 너무나 강력했기에,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천년 전에 도입되었다가 일본에서는 잊혀졌던 중국의 축의 사상이었으며, 이를 학습하여 기존 승자연합이 통치하던 꽉 막힌 사회에 무언가 변화를 주고자 꿈틀거렸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도시에 문해력을 갖춘 과잉생산된 엘리트가 출현한 현상 그 자체였다. 그들은 기존 승자연합을 깨고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사상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1750년부터 1850년까지 100년 동안 주자학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재발견한 축의 사상을 내면화하고 있을 그 무렵에, 구로후네가 나타났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던 ‘붓을 든 사무라이’들이 행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과 조선이 서구화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일 무렵 일본이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밀어붙인 것을 설명해준다. 요나하 준이 말한 ‘중국화’를 하던 중 이루어진 ‘서구화’를 더 보편적인 언어로 바꾸자면, 메이지 유신은 ‘기축화’를 경유하여 이어진 ‘서구화’와 ‘근대화’였던 셈이다.3

승자연합에 배제되어 불만이 가득했던 사무라이들은 축의 사상을 익히면서 보편적 원리에 의해 통치되고, 공론으로 움직이는 좀 더 개방적인 정치 구조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변화를 통해 바깥 세상에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지정학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마침내 막부가 사라지자, 그들은 가장 중요했던 목표, 즉 새롭게 구성된 승자연합에 들어간 뒤 일본을 바꾸어내어 대외적 위협에 대응한다는 목표만 남겨두고 수단은 급격히 바꾸기 시작했다. 유학보다 더 강력한 서구 사상과 문명이 그것이었다.

물론 반대로, 기존에 존재하던 축의 사상의 ‘유산’에 집착하던 중국과 조선은 그 유산의 권위가 철저히 파괴될 때까지 더욱 많은 갈등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축의 사상 수용과 서구 근대 수용이 시차를 거의 두지 않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던 일본에서 유학과 서구 사상은 모두 권력 장악과 국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조선과 청에서 유학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고, 그렇기 떄문에 서구 사상은 배척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천하의 바람직한 원리였던 것이다.

19세기 일본, 유학을 ‘경유’한 서구 수용 

그러나 역시 어떤 변화도 진공에서 만들어질 수는 없기에, 일본의 서구 수용 역시 철저히 유학을 경유하여 이루어졌다. 종래 유학을 공부했던 이들이 서구로 유학을 가 서구 사상을 유학의 언어로 번역했으며, 중앙집권적 국가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과거제’를 변주한 고등문관시험과 ‘군현제’를 변주한 폐번치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혹자의 표현대로 ‘빅토리아적 유교와 유교적 빅토리아’를 경험하고 있던 셈이었다. 이 모든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유학 또한 축의 사상으로서 근대성의 원형적 면모를 갖고 있던 덕택이었다. 신토와 무가의 언어로는 ‘freedom’, ‘republic’을 번역하기 난망했지만, 유학의 언어로는 ‘자유’와 ‘공화’를 만들어낼 수 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19세기의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와 ‘서구화’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고대 문명이 발전시킨 ‘축의 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한, 엄청난 충격이 몰아치던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설명하던 원시 신앙은 체계적인 가치와 도덕,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를 제공해주는 축의 시대 종교로 발전했고, 그 종교 중 기독교가 서구 사회가 마주한 도전에 조응하며 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 사상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을 100년 남짓한 시간에 끝냈으니, 사실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진정한 ‘압축 성장’을 이룬 국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엔도 슈사쿠의 [사일런스] (1966)에서 먼저 일본에 당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다 막부에 의해 배교를 택한 페레이라 신부는 후일 들어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역시 배교를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이 땅에서 선교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기독교의 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은 태양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종족이다!”

사일런스 (마틴 스콜세지, 2016)

엔도 슈사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 (마틴 스콜세지, 2016)

언제나 현실 너머를 상상하며 세계 만물을 포괄하는 절대적 진리를 갈구하는 기독교가 감각으로 인식되는 자연현상만을 상상하는 원시신앙인 신토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상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를 좌절시킨 그 막부는 기독교 대신 유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였고, 마침내 축의 사상의 원리가 글과는 담을 쌓던 사무라이들에게 퍼졌을 때, 막부 권력은 더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제 일본 사회도 ‘원리’가 규율하게 된 것이다.

막부는 그렇게 유학을 퍼트림으로써 사실상 ‘자살’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인들이 ‘태양 너머’를 상상하게 되자, 극동의 섬나라는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참고 문헌:

  •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초판: 1995, 개정판: 2014, 민음사)
  • 요나하 준, [중국화하는 일본] (2013, 페이퍼로드)
  • 윌리엄 로, [하버드 중국사 청] (2014, 너머북스)
  • 호이트 틸만, [공리주의 유가] (2017, 교육과학사)
  • 켄트 플래너리, 마커스 조이스, [불평등의 창조] (2015, 미지북스, 영어 초판: 2012)
  • 피터 터친, [초협력사회] (2018, 생각의힘, 영어 초판: 2016)
  •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2013, 글항아리, 영어 초판: 2010)


  1.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일본 아스카 시대의 고토쿠 오키미 2년, 일본 연호로 다이카(大化) 2년(646년) 봄 정월 갑자 초하루(1일)에 발호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토대로 한 정치개혁 운동이다. (출처: 위키백과, ‘다이카 개신’ 중에서)

  2. 에미시(일본어: 蝦夷) 또는 에비스(えびす) 또는 에조(えぞ)는 일본 혼슈의 간토 지방,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지역에 살면서 일본인(야마토 민족)에 의해 이민족시 되었던 민족집단을 일컫는 말. (출처: 위키백과 ‘에조’)

  3. 기축(基軸): 어떤 사상이나 조직 따위의 토대나 중심이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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