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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에 낭만을 잃어버린 낭만닥터: 이천엘리야병원 응급실장 최석재 인터뷰

여기는 경기도 이천 장호원. 그중 이천엘리야병원은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하는 유일한 종합병원으로 이천 남부뿐 아니라 경기 여주, 안성 일부, 충북 음성 북부 등에서 응급환자가 몰린다. 한동안 이곳의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단 한 명. 최석재 응급실장뿐이었다. 그는 부임하고 지난 2년간 응급실 체계를 만들기 위해 혼자서 주 6일간 하루 15시간을 일했다. 배경만 보면 ‘낭만닥터 김사부’의 ‘돌담병원’이 떠오른다.

최석재 실장이 이천엘리야병원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응급의학과 의료진도 충원되었으며, 숙련도 높은 간호사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며칠 전 이천엘리야병원은 응급실 폐쇄 결정을 내렸으며 결국 최석재 실장도 퇴직하게 되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최석재 실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응급의학과 전문의로서 걸어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응급실 체계와 실상, 그리고 이천에서 그가 마주한 현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 인터뷰이: 이천엘리야병원 최석재 응급실장
  • 인터뷰어: 글렌다 박 기자 

 

이천엘리야병원 최석재 응급실장

이천엘리야병원 최석재 응급실장

 

 

=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응급의학과 전문의 겸 작가 최석재입니다. 현재는 경기도 이천 장호원읍에 있는 작은 시골병원에서 응급실을 지키며 환자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인기과의 경쟁에 밀려 선택하게 된 ‘응급의학과’

 

= 의사 ‘최석재’의 어린 시절의 꿈도 의사였는지 궁금합니다.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초등학생 때의 저는 짓궂고 호기심 많은 어린이였어요.

한번은 필통에 붙어있는 온도계가 오르내리는 게 신기해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방에 뒀다가 하며 놀다가 그 안에 든 물질이 궁금해 온도계를 깨고 안쪽의 물질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고, 결국에는 맛을 보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부모님과 함께 가천대 길병원 (당시 인천 길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습니다.

같이 맛을 봤던 동생과 함께 둘이 응급실 침상에 나란히 누워 콧줄을 넣고 위세척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특히 콧줄이 식도를 넘어갈 때 느껴졌던 차가운 젤 느낌이 생생하네요. 다행히 ‘학용품 온도계에 수은을 썼을 가능성보다는 알코올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 입원 없이 귀가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 날 많이 놀라셨죠. 아이들 키워보니 그 마음, 어땠을지 짐작이 된달까요?

중학생 때엔 공부에 재미를 붙여 나름대로 노력을 열심히 했었습니다. 언어 과목에는 크게 재능이 없었고 수학, 과학만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녔던 중학교에 있던 과학고 외고 진학반에서 매일 방과 후에 모여서 공부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과학고 지원을 하려 하니 영어 성적이 되지 않아 원서 자체를 쓰지 못하게 되었어요.

영어 성적이 되지 않았으니 외고를 가는 건 더 적성에 안 맞을 것 같아 포기하고 부천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때 만났던 과학반 친구들과 지금껏 친하게 지내고 있고 이 모임에서 아내를 만나 훗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때엔 1학년 때 농구, 축구 하느라 매일 땀에 젖어 있었던 기억이 있고, 2학년 때부터는 성적으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생겨서 책상에 항상 붙어있었습니다. 3학년 말에 대학교 원서를 쓸 땐 담임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서울대학교 보내겠다’라고 관심도 없는 ‘모 학과를 지원하라’라고 하시면서 특차 원서를 써주지 않으셨어요. 당시 고등학교마다 서울대학교를 몇 명 보냈는지에 따라 플래카드로 자랑하곤 하는 게 있었는데 그 때문에 학생의 적성과 관심 분야보다는 대학교 이름에만 매달리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국,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추천서 받아 카이스트도 합격하고 의대도 합격했는데, 고민하다 의대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의대 성적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거든요. 가천의대 2기로 입학을 했는데 당시 가천의대는 신생 의과대학으로 인천 길병원이 모 병원이었고, 차 의과대학교와 함께 6년 전액 장학금 혜택으로 이슈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인천 강화도에 있는 의대 예과 캠퍼스에 방문해 시설을 직접 보고 선배님들과 만난 뒤 푹 빠져서, 입학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있어요.

2005년 가천대 의과대학 졸업 당시

2005년 가천대 의과대학 졸업 당시

= 2000년대 전, 후반은 일명 ‘피, 안, 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인기 있는 과로 떠오르던 시절이었는데 특별히 ‘응급의학과’로 진로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수련의 시절, 당시에는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도 인기가 있었지만, ‘정, 재, 영’이라고 불리는 정신과와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의 인기가 점차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저도 응급한 환자가 없고, 삶의 질 측면에서 좋아 보이는 재활의학과에 관심을 가지고 의예과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재활의학과 봉사활동에 참여해 환자분들과 대화하고,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을 보면서 재활의학과 전문의로서의 꿈을 꾸고 있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쟁에서 밀리면서 당시에 가장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응급한 환자만 골라서 봐야 하는 응급의학과까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응급의학과 선배들이 “의외로 좋은 과”라고 ‘한 번 해보라’고 설득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감사한 제안이었지요.

수련의로서 배울 땐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내 눈앞에서 쓰러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놓을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일할 때 밤새워 열심히 일하고 나면 평일에 가족들과 함께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도 우리 과만의 장점이고요. 이후로 응급의학과에 대한 인식도 좋아져 후배들 지원도 끊이지 않고, 나름 인기과가 되었어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응급의학과도 이제 나름(?!) 인기과가 되었습니다.

응급의학과도 이제 나름 인기과가 되었어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환자를 알면 알수록 ‘강박증’과 ‘두려움’ 생기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 응급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전공의 시절은 솔직히 힘들었어요. 지금은 전공의 특별법이 생겨 주 88시간 이내로만 근무하게 되었지만…. 실상 많은 과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저희 전공의 시절엔 24시간 올 근무를 하고 의국 회의와 환자 차팅 정리를 마치고 나면 낮에 6시간 동안 잠만 자고 다시 나와 근무를 해야 했어요. 다음날에 20시간 정도 오프를 가지고 다시 올 근무가 시작되고…. ‘올 나이트 오프’라고 했죠.

3년 차가 되어 이보다 좀 나은 스케줄로 근무할 때는 28시간 일하고 20시간 쉬고, 다시 28시간 일하는 루틴이 되어갔죠.

가천대 길병원이 권역응급의료센터로서 당시 연 9만 명의 환자가 오는 국내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엄청나게 환자가 많은 응급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근무가 시작되면 자리에 앉을 시간이 없어요. 계속 돌아다니는 거죠.

1년 차가 당장 해야 할 일들만 겨우겨우 헐떡이며 하고 있으면, 2년 차는 1년 차가 놓친 사고 날만 한 일을 챙겨주는 식으로 커버하고, 3년 차는 아무리 연락해도 안 내려오는 다른 과 전공의들 닦달하는 전화만 온종일 붙잡고 싸워요. “당장 내려와!” 이러면서요.

그러니 근무 시작하고 저녁이 되면 화장실 언제 갔는지도 잊어버려요. 근무 끝나고 화장실 가보면 노랗다 못해 불그스름한 소변을 보고 있고. 한 동료는 한 달 동안 응급실 근무를 하면 체중이 10kg 빠진다고 불평했어요. 외부 병원 파견 가면 다시 10kg 쪄서 돌아오고.

그런 와중에 2년 차 후반에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짧았던 5일간의 신혼여행 다녀온 뒤로는 집에서 남편 자는 모습만 보니 많이 힘들어했어요. 전공의 때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너무 많아요. 아픈 기억인 경우가 많죠. 

신혼여행에서 만나서 친해진 동년배 친구가 갑자기 심정지가 되어 환자로 들어와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있기도 하고, 배가 아파서 온 할아버지 진찰을 세심하게 하지 못해 갑자기 패혈증으로 넘어가 사망하는 바람에 보호자께 멱살을 잡히기도 했고요.

갑상선 질환 과거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젊은 여성에게 응급처치가 늦어져 심정지가 발생하게 하여 자책했던 기억도 있어요.

그래도 응급실에서 환자 보는 일이 힘들고 아픈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에요.

아이를 낳자마자 호흡곤란이 오면서 의식이 없어진 심부정맥 혈전증 산모를 살리겠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기억, 굴착기에 부딪혀 가슴에 심한 타격을 입은 아저씨, 잠깐 심정지가 왔지만 심낭천자술로 살리고 심장 수술 바로 들어가서 결국 걸어서 퇴원시켰던 환희에 찬 경험, 허리 아프다고 온 정신지체 젊은 여성이 알고 보니 출산 임박한 산모여서 급히 아기 받느라 정신없었던 날의 기억까지.

그렇게 하나하나 제 기억 속에서 경험으로 쌓여서 환자 볼 때 철저하게 보지 않으면 사고 난다는 강박증을 앓게 되었어요. 아마 응급의학과 전문의라면 다 저와 같을 거예요. 알면 알수록 두려움을 갖게 된다잖아요? 까딱하면 어떻게 나빠질 수 있는지 아니까.

그래서 후배들에게 언제나 “꼼꼼하고 철저하게 봐야 한다”, “한 명 퇴원시킬 때 0.1% 이하로 안전한지 생각하고 보내라”, 저도 모르게 잔소리하게 됩니다.

2017년 [응급실에 아는 의사가 생겼다] 출간 후 R5 영상 촬영하며

2017년 [응급실에 아는 의사가 생겼다] 출간 후 기념 촬영

 

‘대학’이라는 둥지를 떠나 사립병원으로 향하다

 

최석재 실장은 전공의과정을 마친 2011년, 가천대길병원을 떠났다. 1999년 가천대학교 의예과 학부생으로 입학해 대학과 대학병원에 둥지를 튼 지 12년 만이었다. 그는 3년 공중보건의로서의 군 복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김포뉴고려병원의 응급의학과장 겸 CS혁신팀장으로 근무했다.

= 가천대길병원에서 펠로우과정을 하며 학교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사립 종합병원 행을 택하셨어요.

졸업한 학교 병원에서 대학교수로 남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응급의학과 특성상 대학병원에 더 있다고 뭘 특별하게 배우거나 하진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전공의들에게 진료 업무는 다 맡겨둔 채 당직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교수의 모습으로 사는 건 더 싫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전공의로서는 교수님이 당직실에서 안 나타나 주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옆에서 감독하고 있는 사람 있으면 안전할진 몰라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받잖아요?

아마 제가 의국에 남았으면 성격상 뒷방에 못 있고 스테이션에 서서 계속 전공의들 스트레스 줬을 거예요. 제가 전공의 3, 4년 차 때 그랬었거든요.

그리고 응급의학과 의사는 의외로 대학이 아닌 사립 종합병원에 봉직의로 있을 때 더 대접받아요. 대학병원에서는 다른 과에 환자 입원시키려면 사정사정하거나 싸워가면서 억지로 진행해야 하지만, 종합병원에서는 다른 과 과장들이 알아서 자기 환자 챙기고, ‘더 치료할 건 없나, 입원할 환자 없나?’ 찾는 모양새가 나타나거든요.

그러니 중환 환자를 응급 처치해서 해당 과에 입원시켜주는 과인 응급의학과 과장은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말로라도 대접받게 되죠.

김포로 오게 된 계기는 순전히 의국 선배님 소개 덕분이었어요. 김포뉴고려병원 응급실을 응급의료기관에서 응급의료센터로 키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이 많이 되었죠.

선배님이 응급실장이었지만 어지간한 병원 일은 제가 맡아서 했어요. 심폐소생술 위원회를 조직해 입원한 환자들 갑자기 상태 나빠지면 뛰어 올라가 조치할 수 있게 시스템을 정비하기도 하고, 보건복지부에서 진행하는 의료기관평가 2주기 인증에 참여해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종합병원의 역할이 뭔지 알게 되는 좋은 기회도 있었어요.

또한, CS 혁신팀장을 맡아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행복한 직장 만들기에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을 헤드헌팅 업체에서 좋게 봐주셔서 나중에 이천병원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지요.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근무하던 김포 병원에서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근무하던 김포 병원에서

= 김포에서 근무하는 동안 메르스 사태를 맞았었는데 그 당시에 얼마만큼 긴박한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2015년 퍼진 메르스는 2020년의 코로나19가 전국, 아니 전 세계를 강타해 전 지구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제가 김포에서 근무하던 2015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국이 심각한 두려움에 빠졌었지요. 점점 확진자가 나오는 지역이 넓어져서 경기도 김포에도 메르스 의심 환자가 내원할 것이 예상되었어요.

당시에도 지금의 선별 진료소처럼 열나는 환자는 응급실 외부에서 천막을 치고 방역복을 입고 진료를 봤었는데, 옆 도시 병원의 호흡기내과 외래 간호사라는 분이 새벽에 “열이 난다”며 우리 응급실에 오셨어요.

긴장하고 방역복을 잘 입고 검사를 했지만, 결과가 나올 때까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장모님 댁에 보내 놓고 저 혼자 자가격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제 자가격리 한 지 2일이 지났을 때 인후통과 열이 나기 시작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병원장님께서 “확실하게 하자”며 “검사해보자” 하셔서 불안한 마음으로 검사하였고, 결국 음성 판정을 받아 진료에 복귀했었습니다.

 

‘응급센터’의 꿈을 안고 이직한 이천엘리야병원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 위치한 이천엘리야병원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 위치한 이천엘리야병원

= 김포에서 2년 전 이천으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천이라는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긴다고 마음 먹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 같아요.

김포에서 좋은 기억을 안고 경험을 쌓아가고 있을 때 헤드헌팅 업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천에 지금은 시골병원이지만, 앞으로 3년 안에 300병상의 종합병원을 준비하는 병원이 있다”며 “역할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약속을 잡고 원장님을 만났는데 “응급센터를 만드는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꼭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당시 계약서에, “응급의료기관이 되어 응급실 환자가 늘면 연 3천 명 환자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1인과 간호사 3인을 충원해달라”는 요구를 넣었습니다.

이런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병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비용을 줄이기에 집중하게 되면서, ‘일하고 싶은 응급실’이 아니라 ‘못 나가서 억지로 버티는 응급실’이 되는 것을 경험했었거든요.

이천엘리야병원에서 그는 2년 간 응급실장으로 주 6일 15시간 씩 일했지만, 돌아온 건 ‘응급실 폐쇠 통보’였다.

이천엘리야병원에서 그는 1년 간 혼자 일하고, 총 1년 6개월을  응급실장으로 주 6일 15시간 씩 일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온 건 ‘응급실 폐쇄 통보’였다.

= 이천엘리야병원 응급실 근무 환경은 어떠했나요?

이천은 지도를 보면 호리병처럼 생겨서 이천 도심이 북부, 장호원읍과 율면, 설성면이 남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천 남부에는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이 전혀 없는 현실이고요. 그렇다 보니 이천 남부뿐 아니라 근처 경기 여주시, 안성시 일부에서도 119를 통해 우리 응급실로 환자들이 실려 왔고, 충북 음성군 북부지역 또한 우리 응급실로 응급환자들이 실려 오는 상황입니다.

여기 응급실이 없으면 119구급차량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충주 건대병원이나 광주 참조은병원까지 나가야 해요. 우리가 환자를 살리려면 사고 이후 한 시간 이내 처치를 해서 수술방까지 올려야 한다는 ‘골든아워’를 이야기하는데요. 환자 발생하고 신고 장소에 가는 데만 15분, 현장 처치하는데 또 15분이 걸리는데 이송하는데 한 시간을 추가로 잡으면, 중증 환자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건 자명한 일이겠죠.

그래서 처음 1년은 응급실에 지원하는 우리 과 동료도 없고 해서 혼자 주 6일 동안 밤 근무를 했습니다. 일요일 낮에 김포 집에서 출발해 장호원에 도착하면 밤에 15시간 일하고 1시간 씻고 아침 먹고 8시간 자고. 일, 월, 화, 수, 목, 금요일까지 하고 토요일 아침에 바로 운전 못 하니까 한잠 자고 저녁에 김포로 출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 아이들 얼굴 보고 아내 얼굴 보고 다시 장호원으로 출발하는 강행군이었죠.

점점 응급실 자리가 잡혀가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3인이 함께 일하게 되어 응급의료기관만 받으면 안정된 응급실로 만들 수 있겠다 싶던 차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네요.

최석재 실장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이의 아빠이자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다.

최석재 실장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이의 아빠이자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다.

=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신데요. 지방에서 거처를 두고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로서 가족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지방에서 근무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서 애 셋을 다 보는 건 무리가 많이 되니까요.

그래서 장모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마침 하고 계시던 식당을 접으려던 차여서 운이 좋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저도 근무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는 낭만닥터를 몰아냈고, 이제 그 피해는 시민의 몫이 되었다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 피해의 여파는 엄청났다. 식당, 카페 등의 자영업자는 손님이 없어 불황이고, 연극 무대는 취소되었으며, 미술품 전시도 취소되고, 음악 공연도 취소되었다. 영화 개봉은 한없이 미뤄지고, 영상 장비에 익숙하지 않았던 교수들은 부랴부랴 온라인 강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피해의 직격탄을 가장 크게 맞은 건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으로 밝혀진 병원, 식당, 영화관 등의 자영업자였다.

제주지사는 제주를 여행한 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유학생 모녀에게 1억3천여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만큼, 확진자가 방문하게 되면 업체가 임시폐업하는 것은 물론 확진자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영업장에 확진자 방문 이후 방역을 하고 더 깨끗이 소독을 했다고 아무리 밝혀도 사람들은 방문을 꺼린다.

이천엘리야병원엔 응급실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사망해 응급실 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 수는 절반이 넘게 줄었다. 그러나 사망한 환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아니었다.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명백한 ‘가짜뉴스’였음에도 병원은 경영난으로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병원 운영의 어려움이 닥치자 가장 먼저 응급실 폐쇄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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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엘리야병원 응급실 전경

이천엘리야병원 응급실 전경

= 처음 병원에서 응급실 폐쇄 결정 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코로나19 사태 터지고부터 환자가 급감했기 때문에 불안하긴 했습니다. ‘이대로 유지가 어려울 텐데….’ 하고 말이죠. 그래서 과장들끼리 자체적으로 “몇 달간 자진 감봉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원장님께 말씀드렸는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장님으로부터 ‘응급실 폐쇄 결정’이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병원장님의 결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에요. 병원이 살아야 다음이 있는 거니까. 운영하는 처지는 직원 입장과 다를 수밖에 없겠죠.

다만, 아쉬운 것은 나라에서도 다양한 지원책을 내고 어려운 시기 버틸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는데, 의료 취약지역에 좋은 병원을 만들어서 지역 주민들께 봉사하겠다는 목표를 되새긴다면, 그런 지원책을 받아서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충분한 노력을 했는가에는 의문이 듭니다.

정말 아쉽네요.

= 앞으로의 거처는 어떻게 되나요?

저를 필요로 하는 병원을 찾아야죠. 어딘가에는 있겠지요. 헤드헌팅 업체에도 부탁해 놓았으니,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코로나19 사태로 병원들이 상황이 좋지 않으니 바로 소식이 있진 않네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최석재의 소신과 희망

 

= 수련의 때는 성적이 되지 않아 원하는 과를 가지 못했다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된 지금은 어떤가요?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낼 때면 소신이 흔들릴 때도 있을 법도 한데요.

저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 들어 밤새는 응급실 진료를 하는 건 무리가 아니냐”고 걱정하는 동료도 있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젊게 살면서 밤 근무 훌륭히 해내시는 선배님들도 자주 볼 수 있어요. 통증 치료도 익히고 있어서 혹시 뽑아주는 병원 없으면 차선책으로 할 일도 만들고 있습니다. 설마 할 일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던 맨바닥에서 우리 과의 초석을 다지셨던 응급의학과 1기 선배님들의 인터뷰 모음집인, [응급의학과 1막 22장; 개척자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학회의 요청을 받아 만들게 되었는데요. 그 책을 편집하면서 우리 과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더 굳건해졌습니다.

수련의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시 응급의학과를 선택할 것 같으냐고요? 
네. 저는 다시 선택할 것입니다.

제 판단과 술기로 꺼져가는 환자의 생명을 그 즉시 살려낸다는 것의 의미는 바이탈 다루는 메이져과 의사라면 다 동감하시겠지만, 어떤 다른 직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희열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 시간 거리에 경기도 의료원 이천병원과 안성병원이 있지만,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위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이천엘리야병원은 4월 13일을 마지막으로 응급실이 폐쇄된다.

30년 전 우리나라는 정부의 언론탄압과 규제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희생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광범위한 경로와 무차별한 규제에 진상이 확실하지 않은 뉴스가 활개 친다. 이 기사를 마치며 나는 ‘정보’라는 드넓은 바다에 ‘등대’가 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또 다른 ‘가짜뉴스’의 피해자 ‘최석재’가 나오지 않기를. 숭고한 의지가 ‘사람을 살리는 것’에 향해 있어, 존경받아야 마땅한 제2, 제3의 ‘최석재’가 나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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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글렌다 박
초대필자, 기자, 작가

[AVEC G] (www.avecg.net) 발행인. 'CALAMUS GLADIO FORTIOR(펜은 칼보다 강하다)'; 글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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