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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증의 탄생

  1.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ft. 생각, 말, 글)
  2. 대화의 파토스와 에토스 vs. 글의 로고스
  3. 논증이냐 아니냐: 고등학교와 대학 글쓰기의 차이
  4. 왜 이것은 논증이고, 저것은 논증이 아닌가
  5. 논증의 다섯 가지 요소: 일상 대화에서 찾는 논증의 원리
  6. 냉소적인 방관자 ‘독자’ 설득하기: 실용 논증과 개념 논증
  7. 가치 있는 주장을 위한 세 가지 조건
  8.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생각의 오류 (ft. 비판적 상상력)
  9. 우리가 원인을 잘못 판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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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의) 글쓰기는 고등학교와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가.
대학(에서의) 글쓰기는 고등학교와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가.

대학에 입학하고 첫 작문 과제를 제출했을 때 받은 피드백을 기억하는가? 상당히 많은 이들이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다. 공 들인 과제에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과제물에 적힌 교수의 코멘트는 대개 충격적이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는 고등학교에서 요구하는 글쓰기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의 핵심은 바로 ‘논증’에 있다.

고등학교 글쓰기: 요약과 의견 

고등학교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란 대개 어떤 내용을 요약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들이 논증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1. 요약

남이 쓴 글이나 강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 안 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풀어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는 대부분 ‘요약’이고, 요약을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들은 대부분—주제가 복잡해지고 글의 길이가 늘어나기는 했지만—고등학교 때처럼 요약만 잘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가르쳐 준 것 말고 자신의 생각을 쓰라고 요구한다. 내 주장을 말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또 남들도 거기에 동조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한다. 이유와 근거를 더 많이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대학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주장의 ‘독창성’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타당한 이유와 근거로 뒷받침할 줄 아는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에 대해 반박할 줄 아는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부터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논의를 합리적으로 전개해나갈 줄 아는지 눈여겨본다.

물론 논증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요약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흉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고등학교 글쓰기의 한 축인 '요약'은 다른 표현으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그 공부는 주어진 정보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습득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다.
고등학교 글쓰기의 한 축인 ‘요약’은 선생님께서 가르쳐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습득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다.

2. 개인의 의견 (내 생각)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하는 글이다. 논증과 다른 점은, 남들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오라고 하면, 대학 신입생들은 대부분 이런 글을 써온다. 이런 글을 쓰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이건 내 생각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야.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그걸 굳이 옹호하고 방어해야 돼? 나는 내 생각대로 살고 너는 네 생각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걸로 충분한 거 아냐?’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든 그건 내 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아니 이유가 있든 없든, 남들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대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에 들어서는 순간, 개인의 생각은 더 이상 자유로운 권리의 대상이 아니라 질문하고 따지고 검증해야 하는 주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고등학교와 대학의 핵심적 차이다. 남들의 까다로운 질문공세에 답하고 방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스스로 질문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무엇을 전공하든 대학교육이 학생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덕목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증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법을 함께 찾아가는 시민 소양으로서 의심과 합리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민 정신의 토대 위에서 학문 공동체가 작동하고, 졸업 후 경험할 기업이나 사회 조직들이 작동하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공부 상상력 청소년 꿈 희망
대학에서의 글쓰기는 시민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필수 덕목으로서 ‘논증’을 요구한다. 

세상을 가득 채운 ‘타락한 논증’ 

사실 우리는 논증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증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TV, 라디오,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매일매일 온갖 정치토론과 공방이 쏟아진다. 하지만 언론은 대부분 사소한 말꼬리를 잡아 침소봉대하며 상대방을 공격하고 헐뜯는 이야기를 마치 정당한 논쟁거리인양 중계한다.
  •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우리 주변을 공기처럼 에워싸고 있는 온갖 광고들 역시 논증이다. “이걸 사!”라는 궁극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 감정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온갖 과장된 주장들을 쏟아낸다.

사나운 목소리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논증이든, 알랑거리며 상대방을 유혹하는 논증이든, 결국 똑같은 결과를 야기한다. 사려깊은 사람들이 논증에 뛰어드는 것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정치집단은 막말을 하고 추태를 벌이며 정치판을 어지럽게 만들어 사려 깊은 유권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지킨다. 건강한 시민의식과 성숙한 토론문화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비합리적인 여론이 세상을 휩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논증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논증이 최악의 형태로 타락한 모습에 불과하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갈수록 진실의 힘은 더욱 커지듯, 나쁜 논증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좋은 논증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물론 아무리 완벽한 논증이라고 해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라면, 더더욱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세계에서 결국 힘을 발휘하는 것은 논리나 근거가 아닌 권력과 세력이며, 따라서 합리적인 논증이나 토론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러한 비관적 생각은 논증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을 때 세상이 훨씬 합리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엄연한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소수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데 성공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허약한 논증은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대중에 의해 결국 실패를 맞이할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때로 몇몇 정치집단은 막말을 통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혐오를 부추기고 (자신을 뽑을 리 없는) '사려 깊은 유권자'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유포한다.
정치 토론과 공방은 대개 ‘논증’의 형태를 띠지만, 그것은 대개 논증이 최악의 형태로 타락한 모습에 불과할 때가 많다. 때로 몇몇 정치집단은 막말을 통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혐오를 부추기고 (자신을 뽑을 리 없는) ‘사려 깊은 유권자’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유포한다.

논증의 세 가지 효능

1. 문제 해결의 열쇠

논증이 최선의 형태로 발현될 때, 논증은 시민들이 힘을 모아 합리적인 결과에 도달하는 수단이 된다. 물론 논증을 하다 보면 치열하게 달아오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좋은 논증이라면 그 과정과 결과 측면에서 다른 형태의 설득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상대방을 강압하거나 회유해서 마음에도 없는 결론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논증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 협력한다는 뜻이고, 머리를 맞대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을 찾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논증은 상대방을 공격하지도 않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와 근거를 서로 주고받으며 검증해나갈 뿐이다.

논증은 물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논증의 효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합리적 개인’은 곧 ‘합리적인 시민’이 되고 이들이 모여 ‘합리적 사회’를 만들어낸다. 비합리적인 사고와 억지주장과 가짜뉴스와 선전선동이 판치는 세상일수록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주장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은 빛나는 법이다. 오늘날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흔들리는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지키는 최고의 덕목은 바로 비판적 판단 능력이다.

논증은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논
논증은 상대방을 공격하지도 않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장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며 서로 검증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갈 뿐이다.

2. 민주주의 시스템의 ‘핵심 기술’ 

비판적 사고와 좋은 논증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우리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혼란스러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다. 독재자는 논증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자신의 결정에 대해 토를 달지 않을 것이며 억지를 부려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치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대표자를 뽑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하고 해법을 찾아줄 사람을 뽑는 것이다. 언론이나 정치평론가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 또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논증이 타당한지, 또 그들이 그러한 논증에서 도출한 해법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우리 대신 관찰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는 언론은 존립할 가치가 없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해 그들이 대답할 때 제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논증은커녕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사람, 더 나아가 문제를 찾기 위해 뭘 질문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대표자로 뽑았을 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순간, 민주주의사회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독재의 어원은 '혼자 말하기'고, 동어반복에 기반한다.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나는 옳으니까. 그래서 독재는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독재의 어원은 ‘혼자 말하기’고, 동어반복에 기반한다.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나는 옳으니까.’ 그래서 독재는 ‘논증’할 필요가 없다. 반면, 민주주의는 그래서 논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온갖 토론과 논쟁으로 소란스러운 시민사회국가에 비해…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과학적’ 전체주의는 언뜻 훨씬 합리적인 사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20세기를 거쳐 간 전체주의적인 세 지배체제—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비합리적 요소를 품고 있다. 진정한 토론이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버트 콩퀘스트) [footnote]Robert Conquest, Reflections on a Ravaged Century*. New York: Norton, 2001: 83, 84.[/footnote]

3. AI 시대의 생존 경쟁력 

민주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단순히 어떤 주장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넘어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정당성과 정합성까지 평가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인재들에 대한 수요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그러한 인재들이 공공영역에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동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측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탁월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 무엇보다도 그렇게 얻은 결론을 명확하고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진국들은 대학에 비판적 사고능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는 것을 핵심적인 교육 목표로 삼도록 요구한다. 다른 이들의 논증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스스로 합리적인 논증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갈수록 귀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

논증할 수 있는 능력은 AI 시대의 핵심 생존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논증할 수 있는 능력은 AI 시대의 핵심 생존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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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공부’ 적합도 (자가 테스트) 

다음 진술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체크해보자.

  1. 어떤 사실에 관한 질문에는 한 가지 정답만 존재한다.
  2. 가장 이상적인 과학은, 어떤 문제에 대해 한 가지 정답만 갖는 것이다.
  3. 깔끔하게 정답이 떨어지지 않는 문제에 골몰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4. 강의든 토론이든, 교수가 알아서 가장 효과적인 교수법을 선택해 가르쳐야 한다.
  5. 좋은 선생은 학생들이 정해진 트랙에서 벗어나 헤매지 않도록 인도해야 한다.
  6. 교수들이 허황된 이론에 대해 덜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사실에 초점을 맞춰 가르치면 대학에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선생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배운 사실을 정확하게 기억해서 말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삼는다. 다시 말해 정답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교수들은 대부분 그런 정답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이 더 많은 질문을 하기를 원한다. 자신이 읽고 들은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주장에 어긋나는 이유나 근거를 찾아내 반론을 제기하는 학생을 좋아한다.

대학 도서관 공부

위의 질문 중에 동의하는 진술이 많을수록, 당신의 대학 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추구하는 교육적 가치와 계속 충돌할 것이고, 질문만 퍼붓고 정답은 별로 제시하지 않는 수업이 불만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교수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것은 학생들에게 확정된 사실이 아닌 열린 진실, 기계적으로 외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닌 회의적인 탐구를 향한 열정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대학은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건강한 시민과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footnote] M. P. Ryan.“Monitoring Text Comprehension: Individual Differences in Epistemological Standards.” *Journal of Educational Psychology* 76 (1984): 250.[/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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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논증의 탄생: 21세기 민주시민을 위한 비판적 사고, 토론, 글쓰기 매뉴얼] (조셉 윌리엄스)에서 발췌한 내용을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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