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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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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1095년-1291년)을 통해 예기치 않게 자신들의 뿌리를 찾은 유럽에는, 급속도로 문자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태동한다. 암흑시대를 지배하던 구술 문화·여성적 가치가 새롭게 개화된 문자 문화·남성적 가치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며 황금기가 펼쳐진다. 바로 이 시기(1000-1300년)를 유럽 역사에서 중세 성기(中世 盛期; High Middle Age)라고 한다.

제2차 십자군 원정(1147년 – 1148년) 중 이나브 전투(Battle of Inab)를 묘사한 그림. 누르 앗 딘 휘하의 시리아군은 안티오키아의 레몽 휘하의 십자군과 그들과 동맹을 맺은 알리 이븐 와파의 군대를 1149년 6월 29일 격파했다. (출처: 장 콜롱브, 세바스티앙 모메로, ‘해외 원정’, 14세기 작품)

암흑에서 깨어난 유럽 풍경: 여성의 활발한 사회 참여  

중세 성기 유럽은 전반적으로 평화로웠다. 국경선은 유동적이었으며, 종교전쟁도 없었다. 유대인도 이방인이긴 하지만, 중요한 공동체 일원으로 어울려 살았으며, 접경지대에서는 무슬림에게도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다. 학자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의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창조적인 사람들, 영적인 사람들, 총명하고 박식한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 여자들이 아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였다.

중세 건축 현장 방문을 묘사한 그림. 현장 건축가가 건물주에게 건물 건축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을 그렸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전체 서양 문화를 놓고 볼 때 사춘기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이 기간에는 격정이 있었다. 눈을 크게 뜬 호기심이 사상, 운동, 신념의 자유와 결합하면서 봄날의 아지랑이를 피워올렸다.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여자를 찬미하는 기사도를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했으며, 로맨스 소설이 크게 유행했다. 마리아 숭배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건하고, 이타적인 종교적 이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1209년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San Francisco de Asís; 1181-1226)는 온화, 숭고, 청빈의 원칙에 기반한 프란치스코 수도원을 세운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그 시대 신앙 세계를 뒤덮었던 무수한 신비주의 운동 중 하나였다.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 1373-1438), 나자렛의 베아트리체(Beatrice; 1200-1268), 마르그리트 두앙(Marguerite d’Oingt; 1240-1310),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Mechthild; 1207-1282), 스웨덴의 비르지타(Bridget; 1303-1373), 몬타우의 도로테아(Dorothy; 1347-1394), 흐로츠비타(Hrotsvitha; 935-973) 등 여성 성직자들이 활발하게 신비주의 운동을 펼쳤다. 민중은 물론 교황도 이들의 활동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권력지향적이었던 중세 교황들이 가장 싫어했던 가톨릭 성인 성 프란치스코.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그의 이름을 땄다.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성자부터 시계순으로 마저리 켐프, 베아트리체, 마르그리트 둥아, 메히트힐트, 비르지타, 도로테아, 흐로츠비타.

이 시대에 여자의 영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녀원이 급속도로 늘어났지만, 수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만큼 많은 여자들이 수녀가 되고자 했다. 작센 지역의 대수녀원장들은 방대한 영지를 관리했다. 몇몇 수녀원에서는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지역 방언을 문자로 기록한 여류 작가들의 글이 널리 읽혔다. 예컨대 1395에서 1405년까지 10년 동안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 1364-1430)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몇몇 수녀원들은 뛰어난 필사본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크리스틴 드 피장이 강의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여왕이 백성을 다스렸고, 귀족 부인들이 영지를 관리했으며, 품위있는 여자 사업가들이 땅을 매매했고, 여자 은행가들이 고차원적 금융 거래를 했다. 일하는 여자들은 새로운 상업길드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했으며, 지역의 관리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를 시행하는 지역도 점점 늘어났는데 이러한 투표에도 여자들이 적극 참여했다. 심지어 여자가 전쟁에 나가 군대를 이끌기도 했다.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던 종교의례에서도 여자들은 조용히 다양한 역할을 맡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자들이 일하고 배우는 것을 남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 사제 결혼 금지와 여성 혐오 

그러던 중 교회 내부의 학식이 높고 고집 센 남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역동적인 중세의 문화의 중심을 여자가 아닌 남자로 옮겨가기 위한 모의를 시작한다. 1073년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오 7세(Pope Gregory VII; 1020-1085)는 교회 내부가 썩었다며 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선포한다.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성직을 파는 관행이 만연했는데, 교황은 성직자에게 독신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면 그러한 관행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성직 매매를 ‘육체적 타락이 낳은 더러운 전염병’이라고 일컬으며 전례가 없는 조치를 취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개혁안이 담긴 27개조의 교황령(1074)을 내린다. 그 주요 내용은 성직 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 금지 등이 포함됐다. 무엇보다 아내와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성직자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을 평신도들에게 줬다.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황제로 하여금 교황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카노사 성에 가도록 한 ‘카노사의 굴욕'(1077)을 연출한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황제 권력에 대한 교황 권력의 우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황제는 카노사의 굴욕 이후 로마를 탈환(1084)하고, 그레고리오 7세는 폐위되어 망명지 셀레르노에서 객사(1085)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을 기점으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1세기가량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위 그림은 하인리치 4세가 카노사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하인리히 4세를 모습을 묘사한 상상화.

그레고리오 7세의 포고령은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평신도들은 교황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신들의 교구의 사제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리공의회에서 주교들은 교황의 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부당하다’고 비난하며 맞섰다.

그레고리오 7세는 결국 무력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그는 외국 귀족들을 끌어들여 기존 주교들을 무력으로 몰아내주면 그 지역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결혼한 성직자들은 결국 아내와 자식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생계를 위해, 또 몇몇 성직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워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성직자의 아내와 자식들도 엄청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댔다. 성직자로 남고자 하는 이들은 아내와 인연을 끊고 가족을 내쫓았다.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사생아가 되었다. 이렇게 내쳐진 이들과 그 자식들은 기아, 매춘, 중노동, 살인, 자살의 공포에 직면해야만 했다.

교회개혁 세력들은 또한 여성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당시 가장 열광적인 개혁파였던 피터 다미안(Peter Damian; 1007–1072; 개혁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사,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노골적인 여성 혐오를 드러낸 피터 다미안 추기경

“내 너희에게 말하노라. 성직자의 유혹, 낙원에서 버림받은 악마의 식욕을 돋우는 살, 마음의 독, 영혼의 죽음, 죄악의 가장 친근한 동료, 우리 파멸의 원인인 너에게. 내 오랜 고대의 적 여인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암캐들, 암퇘지, 부엉이, 올빼미, 흡혈귀, 암늑대… 음탕한 입맞춤으로 더러운 영을 위한 침상에서 살찐 돼지들을 위해 뒹구는 창녀들아 내 말을 들어라.”(피터 다미안, 재인용 출처: Gods Word to Women)

“I speak to you, O charmers of the clergy, appetizing flesh of the devil, that castaway from Paradise, poison of minds, death of souls, companions of the very stuff of sin, the cause of our ruin.  You, I say, I exhort women of the ancient enemy, you bitches, sows, screech-owls, night-owls, blood-suckers, she-wolves, … come now, hear me harlots, prostitutes, with your lascivious kisses, you wallowing places for fat pigs, couches for unclean spirits.” (피터 다미안, 재인용 출처: Gods Word to Women)

11세기 렌의 주교는 이렇게 썼다.

“간교한 적[사탄]이 우리에게 퍼트린 셀 수 없이 많은 형상 가운데… 최악은 여자, 썩은 줄기, 사악한 뿌리, 타락한 샘… 꿀과 독이다.”

이제 교황청의 복도는 남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유럽의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은 남성 전용 클럽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개혁은 또한 수도원의 풍경도 크게 바꿔놓았다. 당시에는 수사와 수녀가 함께 기거하는 수도원(double monastery)이 많았는데, 이런 수도원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남녀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클뤼니 수도원과 시토 수도원, 곧이어 등장하는 군대식 운영으로 유명한 도미니코 수도원이 접수한다. 대수녀원장들은 모두 대수도원장 밑으로 편입되어 까다로운 통제를 받는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조차 여자를 가차없이 격리하는 데 동참한다. 시토 수도원의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는 자신들의 정책을 이런 말로 옹호했다.

“여자와 늘 함께 생활하면서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안에서 이성과 마주칠 일 없도록 깨끗이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문자를 교회운영의 중심으로 삼는 조치를 취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에 성당 부속학교를 설립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옥스퍼드, 파리, 볼로냐, 피사, 하이델베르크 등에 성당 학교들이 개설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학의 모태가 된다. 성당 학교에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누구나 다닐 수 있었지만, 단 여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입학이 불가능했다.

성당 학교 학생들은 모두 가톨릭 성직자가 입는 카속(cassock)을 입어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학 졸업식에서 입는 학사 가운의 기원이다. 오른쪽은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입은 카속.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단순히 여자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 성기가 시작되면서 꽃피우기 시작한 지적 자유를 꺾어버렸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학문을 교회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제 계급이 문자를 독점하지 못하면 교회가 지배하는 사회체제는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 완전히 바꿔버린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막연한 조치가 아니라 개개인들의 운명을 바꿔놓는 매우 구체적인 조치였다. 그것을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비극적 사랑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4)는 당대의 자유로운 인문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으로 발휘하며 강단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는다. 마침내 동료들의 추천으로 파리성당학교 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시를 썼는데, 특히 그의 연가(love song)는 매우 유명했다.

아벨라르의 가상 초상화 (1836년작)

1117년 아벨라르의 명성이 치솟는 와중에,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사랑하는 16살 고아 소녀가 그의 삶에 나타난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제 풀베르(Fulbert)의 조카딸 엘로이즈(Héloïse; 1092?1100?-1164)였다. 그녀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매우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녀의 삼촌은 그녀를 명망가에 시집보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엘로이즈를 파리로 데려와 아벨라르를 개인교수로 붙여준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따라, 성당 학교의 학장도 성직자와 똑같이 순결한 삶을 살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길고 지루한 여름날 오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의 마법에 빠졌고, 결국 순결 서약을 깬다. 학구적인 이 스승과 학생은 책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경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 엘로이즈(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 1882년 작). 이들의 로맨스는 인기있는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사랑은 그들을 경솔하게 만들었고, 곧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무성해질 때쯤 더욱 당혹스럽게도 엘로이즈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그녀의 삼촌 집에서 은밀히 빼내 브르타뉴에 있는 자신의 가족이 사는 집에 숨긴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낳고, 아스트롤라베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천문 관측 기구로 아벨라르가 리옹에서 1112년에서의 연구에 썼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에게 ‘아스톨라베’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진은 11세기(1080년)에 제작된 아스트롤라베.

아벨라르는 자신의 경력을 포기할 결심을 하고 청혼하지만, 엘로이즈는 그의 경력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는 정부(情婦)로 남겠다고 고집한다. 아벨라르가 학장이나 성직자로 경력을 유지하려면 그의 아내는 수녀가 되어야 했다.

한편 삼촌 풀베르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엘로이즈는 고집을 꺾고 비밀리에 결혼을 올린다. 아기는 아벨라르의 누이에게 맡기고 그들은 파리로 돌아온다. 부부는 따로 살면서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풀베르는 아벨라르를 파멸시키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선 아벨라르가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은밀하게 퍼트려 성당학교 학장으로서 명성을 크게 훼손한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위해, 자신은 결혼한 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스스로 매춘부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밀회를 엿보는 풀베르. (장 비뇨, 1819년 작)

결국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 수녀원으로 몰래 돌아간다. 자신의 계획을 망친 풀베르는 마침내 밤중에 자객들이 보내 아벨라르를 제압한 뒤 거세한다. 거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아벨라르는 충격과 치욕과 절망 속에서 수도사가 된다. 엘로이즈 역시 결국 수녀가 된다.

거세당하는 아벨라르

아벨라르는 세상에서 격리된 채 오랜 세월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의 모범적인 자세를 보고 교회의 권력자들은 그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여 다시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엘로이즈 역시 수녀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고, 마침내 대수녀원장 자리에 오른다.

아벨라르는 나중에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불행했던 운명을 회고하는 [내 고통의 역사]라는 책을 펴낸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슬픔과 비교하면 당신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벨라르)

비애에 가득한 이 책은 엘로이즈의 손에도 들어갔고, 이 책을 읽고 그녀는 편지를 쓴다. 그녀의 편지는 오늘날까지도 연애문학사상 가장 감동적인 글로 여겨진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스승, 그녀의 오빠가 아닌 남편에게.
그의 딸이 아닌 시녀, 그의 누이가 아닌 아내가.
아벨라르에게, 엘로이즈가.

사랑하는 이여,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쓴 당신의 편지를 최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눈물 없이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 그 일들이 새삼 제 마음속 슬픔을 한없이 가득 채웁니다.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우리에게 자주 편지하셔서 당신이 아직도 겪고 있는 파멸의 고통을 들려주소서. 적어도 우리만은 당신이 슬퍼할 때나 기뻐할 때나 당신의 동반자로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소중한 이여.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는 버릇도 관심도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단지 결혼서약을 지키거나 지참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내의 이름이 아무리 신성하고 합법적이라고 해도, 친구라는 말이―당신에게 치욕이 되지 않는다면―첩이나 매춘부라는 말이 내게는 더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겠습니다. 온세상을 다스리는 아우구스투스가 내게 결혼의 영광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게 세상을 모두 준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내가 영원히 다스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 더 귀중한 것, 더 숭고한 것은 그의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첩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나 철학자 중에 누가 당신의 명성에 비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보기 위해 어느 왕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이 안달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당신을 보기 위해 서두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부인, 어떤 시녀가 당신이 자리에 없을 때 당신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당신이 자리에 있을 때 가슴을 불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여왕, 어떤 힘있는 귀부인이 나의 기쁨과 나의 침실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내 말에 귀 기울여주세요. 그저 당신이 쓴 글―당신이 듬뿍 담겨있는 글―을 읽는 동안 매혹적인 당신의 이미지가 떠올라 당신 곁에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랄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니까요. 어린 소녀였던 내가 혹독한 수녀원에 들어간 것은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온 몸을 바쳐 헌신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앞에서, 나는 당신에게 간청하오니,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몇 마디 위안의 글이라도 써서 당신이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안녕히, 나의 모든 것이여.

암흑 시대에서 깨어나면서 유럽은 한동안 여성성과 남성성이 균형을 이루는 평화로운 시기를 누린다. 하지만 그러한 균형을 깨고자 하는 교회가 다시 세력을 장악하면서, 여자들은 그동안 누리던 권리를 잃고 만다. 이제 집단적으로 남성성이 여성성을 압도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앞으로 닥쳐올 재앙과 비교할 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비극은 한낱 사치스러운 로맨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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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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