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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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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뒤 ‘교회의 아버지들'(敎父)우상 파괴를 명령한다. 광신자들이 커다란 망치와 칼을 휘두르며 거리로 헤집고 다니면서 2000년 동안 축적되어온 고대 문화를 대표하는 귀중한 조각상과 그림들을 모조리 파괴한다.

문제는, 그 대상이 종교적인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교적 상징만을 가려서 파괴했지만, 나중에는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실제로 교부들은 이교도 신은 물론, 일체의 형상을 모조리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탄생한 뛰어난 미술 작품들이 이때 모두 파괴된다. 프락시텔레스(Praxiteles; 기원전 370–330), 파이디아스(Pheidias; 기원전 480-430), 리시포스(Lysippus; 기원전 390-300)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조각가들의 작품들은 오늘날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모든 미술은 그들의 탁월한 작품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모방에 불과했다. 또한, 스핑크스의 코를 떼어내고 밀로의 비너스에서 두 팔을 잘라낸 것도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 광신도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된다.

프락시텔레스는 실물 크기로 여성의 누드를 처음으로 조각한 기원전 4세기 아티카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뒤에 모두 파괴됐다. 위 사진 속 작품들은 플락시텔레스의 작품을 모방한 로마시대 모작들. 왼쪽부터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쉬고 있는 사티로스’, ‘아기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는 헤르메스’, ‘아폴로 사우록토노스’

십계명 중 제2계명: 우상(형상)에 대한 증오

이러한 조치를 밀어부칠 수 있었던 데에는, 모세의 십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너희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
  3. 야훼, 너의 하느님 이름을 망령되게 불러서는 안 된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

모세의 십계명은 유대교 신앙의 핵심으로, 십계명에 구현된 윤리는 동시대 다른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계명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독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일단 다른 신을 모두 배척하라는 계율이 맨 처음에 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두 번째 계율은 기이하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율이라고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바울로가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사도행전 17:17) 그림은 렘브란트가 그린 사도 바울로 (1633)

이 계명의 핵심은 그림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채색화는 물론 단순한 드로잉도, 어떤 종류의 미술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보더라도, 이처럼 자연을 재현하는 미술을 금지하는 문화는 존재한 적이 없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율이 두 번째로 나온다는 것은 고대 히브리 사람들이 살인보다 미술이 훨씬 위험한 행동이라고 간주했다는 뜻이다. ‘우상’(ido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idolum)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라틴어는 ‘이미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eidõlon)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 ‘우상'(idol) ← 라틴어(idolum) ← 그리스어 ‘형상'(eidõlon)

그래서 타종교를 배척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극단적인 열정은, 사실 종교적 믿음이나 교리나 의례 때문이 아니라 ‘형상’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예컨대 구약성서 열왕기하 10장 30절에서 야훼는 우상을 섬긴다는 이유로 바알 사제를 살해한 예후를 칭찬한다. 또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사람들이 가나안을 침공하기 바로 전 야훼는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그 땅에서 주민을 모조리 쫓아내고 돌에 조각한 우상과 쇳물을 부어 만든 우상을 깨뜨려버려라. 서낭당도 모조리 허물어버려라. (민수기 33:52)”

이미지와 형상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강렬한 적개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알파벳의 엄청난 유용성을 깨달은 몇몇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기술(‘알파벳’)이 그림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로 인해 확산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생각하는 법은 알파벳을 읽어내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다. 대중들이 이미지를 버리고 글자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버나드가 정리한 1689년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알파벳 비교본을 찰스 모튼이 1759년에 업데이트한 버전. 알파벳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자음 또는 모음을 나타내는 문자 체계로 한글도 일종의 알파벳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ㅎㅏㄴㄱㅡㄹ’이라고 알파벳 표기식으로 써도 유의해서 읽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외국인이 한글을 ‘코리안 알파벳’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

고대 유럽 문명의 종말: 히파티아 살인 사건(415) 

313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본격적으로 이교도들의 흔적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 380년, 필레의 이시스 신전 폐쇄
  • 390년, 대주교 테오필루스의 지시에 따라 광신도 무리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방화. 소장된 기독교 출현 이전의 고대 문헌들이 모두 이교도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 391년,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약탈
  • 425년, 테오도시우스2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모든 유대교회당을 폐쇄.
  • 529년,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해체.

사랑과 관용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이제 옹졸하고 포악한 종교가 되고 말았다.

415년 봄, 찬란했던 고대 문명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대의 국제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신플라톤학파의 거두이자 수학자로 유명했던 히파티아(Ὑπατία; Hypatia; 355년 – 415년)가 있었다. 그녀는 또한 오르페우스교를 지지하는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품위, 미모, 유창한 화법은 남녀를 막론하고 많은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는 1,000년 가까이 축적된 그리스 문명의 지혜와 학문과 과학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대주교로 부임한 키릴은 히파티아의 국제적 명성과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키릴은 니트리아 수도사들에게 그녀를 납치해오라고 명령한다. 수도사들은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에 매복해있다가 길을 막고 마차에서 그녀를 끌어내 교회로 끌고 갔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하는 히파티아의 죽음’. 1866년 출판된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저명한 학자들의 삶] (루이 피귀에)에 포함된 삽화. 히파티아에 대한 공격을 상상한 그림으로 인종차별적 분위기를 품고 있으므로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수도사들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손과 발을 사방으로 벌려 묶었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굴 껍질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고문을 했다. 살을 파내 뼈가 드러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그녀가 죽자 수도사들은 사지를 잡아당겨 시체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예술품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초기 인류 문명의 지혜와 지식을 축적해놓았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한 줌의 재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의 학문과 사상의 전통의 상징과도 같았던 대학자 히파티아를 참혹하게 죽임으로써 유럽의 고대 문명은 문자 그대로 소멸한다. 이후 유럽은 기독교의 강력한 통제 아래 문맹의 시대, 암흑의 시대로 들어간다.

왼쪽 그림은 찰스 킹슬리의 소설 ‘히타피아'(1853)의 한 장면을 묘사한 찰스 윌리엄 미첼의 히파티아(1885). 오른쪽은 에버트 허바드가 쓴 히타피아 전기(1908)에 쓰인 줄스 모리스 가스파르의 가상 초상화. 이 초상화은 이제 히타피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여겨진다.

사막의 종교개혁: 이슬람의 등장

유럽이 잠에 빠져있던 569년 아라비아 반도의 건조한 고원에 자리잡은 먼지투성이 도시 메카에서 예언자 무함마드(570-632)가 탄생한다. 고아였던 그는 총명했지만, 글을 배우지 못했다. 사막을 횡단하는 상단으로 일하는 삼촌을 따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상술을 금방 터득했다.

무함마드는 무수한 여행을 하는 와중에 유대인들과 영지주의 기독교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는 이 두 집단의 단단한 결속을 몹시 부러워했다. 아랍인들에게는 볼 수 없는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이러한 영적인 굳건함이 그들이 믿는 성스러운 문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 두 집단의 믿음을 보면서 아랍인들이 처해있는 문맹, 우상숭배, 정치적 분열은 절망적일 만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였다.

40살이 다가올 때 무함마드는 세속의 일을 등지고 메카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 들어가 이따금씩 오랜 시간 명상을 했다. 610년 어느 날 밤 홀로 동굴에 있을 때 그는 신의 현현을 체험한다.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글이 쓰여진 비단 천을 들고 낯선 남자가 나타나 내게 말했다.

“읽어라.”

나는 “못 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비단 천으로 내 목을 조였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더니 나를 풀어주고는 다시 말했다.

“읽어라!”

… 그리하여 나는 큰소리로 읽었고, 마침내 남자는 나를 떠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 글은 내 마음속에 새겨져있었다. 나는 길을 나섰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하늘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무함마드야! 너는 알라의 메신저이며, 나는 대천사 지브릴이다.”

610년 메카 히라산(무함마드 계시 이후 ‘빛의 산’이라는 뜻의 ‘자발 안누르’로 개명됨)에서 지브릴(히브리어로 ‘가브리엘’) 선녀에게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자신의 체험을 주변사람들에게 전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무엇보다도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말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추종자들은 점점 불어났고, 그들 앞에서 계시를 암송했다. 소수였지만, 글을 아는 사람들은 이 예언자의 독특한 시적 표현들을 견갑골과 양피지에 받아적는 ‘영리한’ 작업을 시작한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알라는 지고하며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다른 신들, 특히 여신을 섬기는 것은 용납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신을 버리는 대가로, 무함마드는 이전 종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매우 중요한 개념을 약속하는데, 바로 ‘사후의 삶’이다. 알라는 자신만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 낙원에 갈 수 있지만, 다른 신을 숭배하는 불신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낙타의 견갑골에 잉크로 새긴 꾸란

예언자 무함마드는 알라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가르쳤다. 여자도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적법한 직업을 가지고 소득을 관리할 수 있으며, 법적으로도 남자와 동등하다(꾸란 4:4, 4: 32).

무함마드 탄생 이전 아랍인들은 여러 신을 믿었다. 주요한 숭배 대상 중 하나는 메카에 있는 ‘카바'(Kaaba)라고 하는 커다란 정육면체 검은 돌이었다. 이곳은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랍인들의 성지였다. 이 메카의 성소는 네 개의 석상이 둘러싸고 있는데, 하나만 남신이고 나머지 세 개는 모두 여신이었다.

무함마드 역시 이미지를 배척했지만, 더 많은 개종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양보로서, 카바는 알라를 위한 성소라고 재정의함으로써 검은 돌에 입 을 맞추는 이슬람교 이전의 관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메카에 있는 카바(Kaaba)는 오늘날에도 무슬림의 주요 성지로 여겨진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슬람의 확장

아랍인들은 알라의 계시가 쓰여진 글을 경배했다. 무함마드는 일찍이 꾸란을 직접 읽는 이들은 알라가 각별히 눈여겨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을 찾아 집을 떠나는 자는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이다.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성스럽다.

그전까지는 문자를 익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베두인(유목생활을 하는 아랍인) 사람들이 갑자기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깨어났다. 이슬람 전역에 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학교에서는 오로지 이 책 하나만 가르쳤다.

유일신을 찬양하는, 알파벳으로 쓰여진 책 ‘꾸란’은 아랍인들에게 단일한 목적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종교적 열정은 그들 속에 잠자고 있던 호전적 특성을 일깨웠고, 무슬림들은 지구 끝까지 뻗어나갈 기세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나가면서 주변의 ‘오랑캐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무슬림은 새롭게 정복한 지역 사람들에게 아주 단순한 선택권을 주었다. 참수냐 개종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머리를 내놓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개종을 선택한 이들 중 상당수는 마음에 우러나는 자발적인 개종이었다. 많은 지역의 주민들이 망설임없이 단체로 이슬람에 귀의하기도 했다. 유럽 중부지역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서 고민하던 다신교도들에게, 남쪽에서 밀려오는 이슬람교의 물결은 제3의 선택지가 되었다.

이슬람은 그 자체로 상당한 호소력이 있는 종교다.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고나서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에스파냐, 프랑스남부, 아프가니스탄, 인도,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위 지도는 2014년 현재 무슬림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을 표시한 것.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용맹한 아랍인들 편에 서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아랍인들의 새로운 신앙은 기존의 두 종교 기독교와 유대교보다 훨씬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초기 이슬람교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인 이유는, 위계적인 사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민주적인 종교라는 점이다. 이슬람이 내세우는 기본교리는 ‘관용’과 ‘평등’이다. 의례도 매우 간소해 따르기 쉬웠다. 이슬람의 성직자 ‘이맘’은 다른 종교의 사제 계급과 달리 결혼도 하고 가족도 꾸리고 세속적인 직업도 갖는 평신도에 불과하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이슬람에 귀의하면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규율. 알라에 대한 믿음을 맹세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씀을 하루에 다섯 번씩 읽거나 암송해야 하며, 단식을 하고, 기부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돕고, 매년 한 번씩 메카로 순례를 가야한다. (출처: nouracademy)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귀의하면서, 글을 읽고자 하는 무슬림들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이러한 흐름을 촉진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712년 아랍군이 중국의 비단길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는데, 여기서 전리품으로 ‘종이’라는 진귀한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초기 칼리파 시대의 영토와 사마르칸트

자신들의 방언으로 쓴 신성한 경전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종이라는 매체가 결합하면서 마침내 이슬람 세계에 황금시대가 펼쳐질 토대가 마련된다. 글을 쓰기 위해 희고 평평한 낙타의 견갑골을 모으는 수고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책은 곧 넘쳐나기 시작했고, 예배를 드리는 모스크는 곧 도서관이 되었다. 794년 처음 제지공장이 세워졌는데, 이후 100년이 지났을 때 바그다드에만 서점이 100곳 넘게 있었고, 도서관도 수십 곳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슬람제국의 황금시대

또한, 786년 칼리프의 자리에 오른 하룬 알 라시드(766-809)는 이슬람 세계의 세종대왕이었다. 학문에 정진한 현명한 통치자로서 그는 이슬람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 제국의 시, 과학, 의학, 수학, 건축, 철학은 마법의 양탄자 위에 올라탄 듯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나갔다. 지식의 습득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너그러운 그들의 종교는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하룬 알 라시드(763-809, 재위 786-809;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는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어 사라센 문화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천일야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이슬람 제국은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로마 등 주변의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자신들의 말로 번역하고 집대성했다. 신학, 철학, 수학,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의학, 화학, 문학, 건축 등 모든 학문이 꽃피웠다.

문맹의 유럽과 지적인 이슬람의 조우

학구적인 아랍인무식한 유럽인 사이에는 단단한 장벽이 놓여 있었다.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경계였다. 이것을 깬 것이 바로 십자군 운동이다. 1096년 첫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을 때 서유럽인은 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후레자식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선조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고대 문명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출생기록은 그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생각한 무슬림의 손에 있었다.

기독교도가 이 성전에서 획득한 예상치 못한 전리품은, 바로 자신들의 뿌리를 찾게 된 것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그리스와 히브리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다. 엄청난 논쟁과 더불어, 전에 없던 개방적 사고가 11-12세기 유럽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세속의 유럽이 마치 문자의 키스를 받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살육과 광기로 예루살렘을 포위해 공격한 아스칼론 전투(1099)를 묘사한 그림 (C.W. Sharpe,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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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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