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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혐오, 강간, 동성애
-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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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태어난 뒤 기독교가 성립하는 시기에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인기있던 종교는 바로 오르페우스교와 유대교였다.
오르페우스교와 유대교
오르페우스교는 그리스 디오니소스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타락과 방종으로 물든 속세에 환멸을 느낀 신도들에게 단순하고 정직하게 연민을 베풀며 살라고 가르쳤으며, 그 대가로 사후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구원’을 약속했다. 로마제국의 혼란이 심해질수록 오르페우스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AD 70년 유대지역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로마제국은 이들을 진압한 다음 헤롯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을 로마 전역으로 뿔뿔히 흩어놓는다. 종교적인 이유로 알파벳을 숭상한 덕분에, 유대인은 대부분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고, 따라서 제국의 각 지역에서 이들은 관료로 등용된다. 로마제국 전체 시민 중 12% 정도를 차지하는 유대인은 탁월한 관료와 상인을 배출하는 집단으로 유명했다.
유대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활용해 자신의 종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쨌든 근면하게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높은 가치로 여기며 가족과 약자를 배려하는 유대교 교리는 당시 어떤 종교보다도 고차원적이고 세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할례’라고 하는 끔찍한 통과의례 때문에 이방인을 개종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어쨌든 유대 지역에서 탄생한 예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교 기독교는 유대교(구약)의 전통 위에서 성립되었지만, 실제로는 그에 못지않게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차용한다. 특히 기독교 예술은 거의 오르페우스교의 전통 위에서 성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 있는 예수
예수가 설교한 대상은 유대인이었지만, 그 주제는 보편적이었다.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같은 전통적인 히브리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재물, 권력, 위세, 혈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예수는 사회의 위계질서에 반대한다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녔다. 그의 눈에는 가난한 자들, 불구자들, 여자들, 노예를 소유한 부유한 남자들 모두 똑같았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인도주의적 신념을 실천했다. 당대의 무수한 정치적 종교적 개혁가들과 달리 예수는 무력 폭동을 선동하지 않았다. 서양 역사에서 비폭력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어느 바리새 율법학자가 계율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최상의 계율로 꼽은 예수의 이 대답은 그야말로 인식의 혁명이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의례에 신경쓰지 말고 진리에나 신경쓰라고 훈계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29-33)
또한, 예수는 돈과 재물은 영적인 삶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마태복음 16:26)
예수의 가르침은 특히 여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는 다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여자들을 대했다. 병약한 노파에게도 매춘부에게도, 간통을 저지른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가부장적인 유대교 율법을 따르는 사회에서 여자들은 거의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바리새들이 이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예수는 놀라운 대답을 내놓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4-6)
언뜻 보기에 이혼을 불허하는 게 여자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상황은 달랐다. 당시 유대 율법에 따르면 여자는 이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반면, 남자는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요리가 맛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
예수가 죽고난 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은 예수가 살아있는 동안 그가 남긴 말과 행동을 기억하며 사랑, 관용, 평등, 연민의 가치를 구현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죽은 예수: 바울로의 성 차별
하지만 ‘살아있는 예수’보다는 그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종교적 미스터리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신격화하고 고통, 수난, 복종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바울로이다. 바울로는 타르소스(오늘날 터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유대 율법에도 탁월한 식견이 있는 지식인(바리새파)이었다.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예수를 만난 적은 없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에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로 바꾼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글은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텍스트였으며, 이 글에 영향을 받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들이 작성된다.
문제는, 바울로가 예수의 가르침을 대부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몇몇 관점에 관해서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반영된 바울로의 관점은 바로 ‘계급’과 ‘성 차별’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코린토스(혹은 고린트)로 이주한 사도 바울로은 거기서 활발하게 전도한다. 전도 기간에 작성한 책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다. 고린토인(혹은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 (고린도전서 11: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고린도전서 14:34-35)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도 여성(아내)의 순종과 복종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에베소서 5:23-24)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데모데전서 2:12)
바울로는 노예든 사기꾼이든 범죄자든 어떤 민족에 속하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회중 앞에 나서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하지만 여자에게만은 절대 이 특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적인 바울로의 교리는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면 바울로는 ‘이브’가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불행해졌다고 맹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따르던 여자 신도들은 교회에서 뒤치다꺼리나 하는 사소한 역할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바울로의 ‘공포’ 전략: 죽음, 부활, 종말
또한, 바울로는 기독교를 더 널리 더 빨리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ㅡ죽음ㅡ을 적극 활용한다. 기독교로 개종하면 무조건 부활하여 천국에 간다고 선전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아무리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더라도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모조리 용서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손쉽게 삶의 행적을 지워주고 신분을 세탁해주는 종교는 인류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바울로는 누구든 기독교로 개종할 수 밖에 없는 아주 강력하고 급박한 주장을 하나 덧붙인다. 바로 ‘세상의 끝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종말론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순간 이승의 지위, 재산, 권력은 순식간에 날아갈 뿐이라고, 당시 흉흉한 시대에 상당히 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극렬 우익분자들의 끊임없는 폭동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였으며, 이제 막 완공된 웅장한 헤롯 성전마저 AD 70년 로마인에게 파괴된다. 유대인은 로마제국에 의해 낯선 곳으로 계속 끌려갔다. 2,000년 동안 이어지던 양자리 시대가 끝나고 새롭게 도래하는 물고기자리 시대는 더욱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했다. 종말론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이들이 곳곳에 나타났고, 이러한 분위기는 로마 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난 글 참조)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린도전서 7:29-31)
기독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다. ‘살아 있는 예수’를 믿다가는 ‘이단’으로 몰려 교회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글로 남기지 않은 예수와 달리 바울로는 중요한 것은 무조건 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로의 천재적인 교리 설계와 전도 전략 덕분에 기독교는 가장 성공한 세계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성공 덕분에 기독교는 오히려 인류 역사에 참혹한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도래한 이후 여성들의 지위는 2등 시민으로 추락하였고, 이러한 상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 성경에 기록돼 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다고 믿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잘 모르는 순박한 대중에게는 복음서 기록만으로도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에는 그보다 훨씬 높은 차원이 존재했다고 많은 이들이 믿었다. 깨달음의 수준이 높은 제자들에게만 예수가 생전에 직접 전수한 고귀한 진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부터 자신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고 이해시키고자 했다면, 예수는 왜 맥락을 생략하거나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을까? 이것은 더 높은 차원의 고귀한 가르침이 존재했다는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4)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제자들)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마가복음 4:11-12)
생전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던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실천하며 예수의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차원 높은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고,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이들의 최고 목표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주장에 관해선 ‘기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간주했다. 이들이 추구한 최고의 종교적 경지는 ‘영적인 깨달음(靈智)’을 얻는 것이었고, 그래서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불린다. 영지주의 교리는 여러 측면에서 불교와 상당히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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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영지주의
영지주의의 어원(‘gnostiko’)은 그리스어로 ‘앎’을 의미한다. 참고로 그리스인은 아는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데, 사실 경험을 통해 지식(에피스테메; episteme), 직관을 통해 얻는 지식(그노시스; gnosis)다.참고로 영어의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 **know**
- co**gni**tion
- reco**gni**ze
- a**gno**stic
- i**gno**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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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가 보기에 영지주의자들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바울은 자신이 ‘문자’로 기록한 것만을 신성한 교리로 인정했다. 바울은 자신의 교리를 강력하게 전파하고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군대식 계급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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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Orthodox)
바울로는 자신의 교리를 받드는 것이 ‘진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로 ‘정통’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통의 어원(ortho+doxa)는 그리스어로 ‘곧은'(strait)+의견(opinion)으로 정통(othodox)는 ‘바른 생각’을 의미한다. 11세기 교회가 동서로 분리되면서 로마교회는 가톨릭(Catholic)으로 이름을 바꾼다. 동방교회는 지금도 그대로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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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와 정통 교단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뒤 30년도 되지 않아 교리전쟁을 시작한다. 탁월한 지도자들과 교리 전도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이들은 한동안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며 번성했다. 하지만 313년, 저울추가 급격하게 기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통 교단을 국교로 공인한 것이다.
영지주의의 몰락
이 시기 로마제국은 이미 쇠락해 가는 상황이었다. 군인이기도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처럼 상명하복 질서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운영되는 정통 교단을 좋아했다. 로마의 군사적 역량을 소생시키는 데 종교적 힘을 조금이라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십자가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이 표식을 앞세워 세계를 정복하라.”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니, 정면으로 거스르는 문구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되자마자 정통 교단이 황제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바로, 군대와 경찰을 달라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정통 교단은 이 기회를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데 최대한 활용한다.
정통 교회는 곧바로 군대를 앞세워 로마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교도의 신전은 물론, 이교도와 연관된 형상을 모조리 파괴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이교도의 예배는 모두 금지되었다. 유대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불교를 믿는 이들도 꽤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추방해버린다.
하지만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칼날은, 같은 형제자매였던 영지주의자들을 위해 아껴두었다. 정통 교단 교도들은 군대와 함께 영지주의자가 많이 사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약탈하고 파괴하고 무차별 살육한다. 그리고 367년 정통 교단은 영지주의 복음서를 모조리 불태우라는 공식적인 지시를 내린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지 100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영지주의는 역사 속에서 사리진다. 정통 교단 권력자들은 자신들만이 교회의 진정한 승계자라고 선언하고, 스스로 기독교의 성인 자리에 오른다. 영지주의가 다시 싹 틀 수 없도록 가차없이 완벽하게 뿌리까지 모조리 뽑아버린 덕분에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20세기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통 교단의 승리는 서양문명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직관을 중시하며 예수의 삶을 음미하며 평등과 사랑을 추구하였던 영지주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말 그대로 ‘청소’되었고, 남자가 지배하는 가부장제, 죄의식과 복종, 죽음과 부활을 중시하며 ‘문자’를 있는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역사를 돌아보면 주기적으로 신비주의 종교가 등장하여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레우시스,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를 받드는 신앙으로부터 수피, 카발라, 장미십자회와 같은 신비주의 비밀결사들이 기독교 변방에서 늘 존재했다. 오늘날 엘크협회, 프리메이슨, 뉴에이지 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전통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영지주의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신비주의 종교들이 서양 문화의 중심에 선 적은 한번도 없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문자’로 무장한 기독교는 언제나 ‘말’에 의존하는 종교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아버지 유대교와 어머니 오르페우스교 사이에서 태어난 종교로, 그 출산을 도운 산파는 바로 바울로이다. 바울로의 교리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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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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