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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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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33″]1509년[/dropcap]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1547)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18살 어린 나이였지만,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보여주었다. 신앙심도 깊었고, 잘생겼고, 기개 있고, 음악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신하들은 그를 경애했다.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역시 그가 뛰어난 군주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1547)

헨리는 자신보다 6살이 많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몇 번 유산을 하고난 뒤 딸을 출산하였고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따 메리(Mary)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딸이 2살이 되었을 때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와 약혼을 시킨다. 문제는 이후에도 캐서린이 계속 유산을 했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장차 사위가 될 프랑스 왕에게 왕권이 넘어간다. 자신의 라이벌에게 통치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여느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가톨릭 교회는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보니 당연히 개혁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급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1476년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이 영국에 최초로 인쇄기를 들여온 뒤 1525년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이 영어로 번역한 신약이 처음 출간된다. 또한, 루터의 설교문을 담은 소책자들도 번역·출간되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는 거센 종교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536년 윌리엄 틴들은 성경을 번역한 죄로 화형당한다. (왼쪽 그림) 하지만 1603년 즉위한 제임스1세가 그의 번역을 토대로 번역 작업을 완성하였고 이것이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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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 King James Version, 약칭: KJV, 흠정역. 여기서 ‘흠정’은 황제나 왕이 편찬한 책이라는 뜻이다.
  • 킹 제임스 성경은 오늘날 본토인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널리 읽힌다. 미국 사람들이 주로 읽는 성경 역본 통계를 조사한 미국 인디애나 대학과 퍼듀 대학의 종교 및 미국 문화 센터의 2014년 사 결과(조사자, 마크 놀 박사)를 보면, 미국 사람의 55%가 KJV를 읽고, KJV가 구식 영어를 쓴다는 의견은 16%에 불과한 반면, 31%의 응답자가 KJV에 쓰인 영어를 아름답다고 답했다. 2017년 성경 선호도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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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헨리의 태도는 달라진다. 교회는 이혼을 금하지만, 헨리는 그래도 자신이 왕인 만큼 교황이 특별히 예외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과 밀회를 즐긴다. 하지만 영국을 견제하던 숙적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이 일제히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헨리의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는다.

마침내 앤이 임신을 하자, 상황은 급박해졌다. 교황청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낳은 2세는 합법적인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이때 찾은 해결책은, 가톨릭 교회와 단절하고 대신 영국왕을 수장으로 삼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캐서린과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또다른 소득도 있었는데,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영국의 땅도 몰수할 수 있었다.

캐나다와 아일랜드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튜더스'(2007-2010, 총 4시즌)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을 중심으로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일대기를 다뤘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1532년[/dropcap] 헨리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영국국교회를 창설한다. 영국에서 가톨릭 신앙은 모두 금지되었다.

영국교회의 초대 대주교로 추대된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가톨릭 수도원을 모두 폐쇄하고, 수도사들을 추방하고, 그 땅을 압수한다.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압수한 땅을 충성을 약속한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동시에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과 결혼할 수 있는 왕위계승령(Acts of Succession)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농민들은 자신들이 1,000년 이상 지켜온 종교를 권력자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에 분노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의 가톨릭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저항이 잦아들지 않자 헨리는 본격적으로 공포 정치를 실시한다. 영국교회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고문기구를 준비했다. 영국교회에 귀의하겠다는 서약을 끝까지 거부한 카르투지오 수도사들(Carthusian Monks)은 산 채로 배를 갈라 창자를 빼내고 팔다리를 잘랐다. 이렇게 토막낸 시체들을 거리 곳곳에 내걸어 영국교회에 반대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1535년 카르투지오 수도사들을 학살하는 모습

헨리의 오랜 친구이자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휴머니스트였던 토마스 모어 역시, 영국교회에 순종하라는 서약을 거부한다. 대법관까지 지낸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헨리는 참수할 것을 명령한다. 그의 참수 소식에 영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토마스 모어는 결국 1535년 참수당한다. 밧줄을 통해 참수된 아버지의 머리를 내려 받아 수습하는 딸 마가렛을 그린 그림(루시 매독스 브라운, 1873년 작)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앤 불린이 아기를 출산하였으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앤 불린 역시 유산을 반복했고, 헨리는 그녀의 시녀 제인 시모어에 호감을 느꼈다. 또 다시 이혼을 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헨리는 앤 불린을 간통 혐의로 몰아 런던탑에 감금하였고, 앤 불린은 엉터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참수된다.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하는 앤 불린. 원래는 화형 판결을 받았으나, 헨리8세가 참형으로 감해주었다. 헨리는 그녀를 위해 단칼에 목을 배는 ‘참수 전문가’를 프랑스에서 데려왔다.

가톨릭과 영국교회 사이의 갈등으로도 한창 바쁜 와중에, 프로테스탄트도 세력을 점점 넓혀갔다. 이미지를 적대시하는 칼뱅의 교리에 기반하여 설립된 장로교와 퓨리턴(청교도)은 새롭게 탄생한 영국교회에게 그림과 조각상을 모두 파괴하고 마리아 숭배도 폐지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교회를 둘러싼 온갖 목소리들이 갈수록 커져가면서 영국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조금이나마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1530년 헨리는 영국교회 성직자 외에는 누구도 성서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1547년, 55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헨리8세는 아내를 총 6명이나 갈아치웠는데, 거기서 얻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1537–1553, 재위: 1547–1553) 딱 하나였다. 그 아들 하나 마저도 병약하여 9살에 즉위했다가 6년 만에 죽는다.

에드워드 4세(1537–1553, 재위: 1547–1553)

[dropcap font=”arial” fontsize=”33″]1553년[/dropcap] 에드워드가 죽은 뒤 헨리와 캐서린이 낳은 딸 메리 1세(1516-1558, 재위: 1553-1558)가 왕위에 오른다. 어머니를 이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영국교회개혁(왕위계승령)을 파기하고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던 가톨릭의 땅을 다시 몰수해서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준다. 추방당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교황청은 영국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영국에 돈과 인력을 쏟아붓는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메리는 아버지에게 부역했던 이들을 대상으로 또 다른 공포 정치를 시작한다.

메리는 헨리 8세를 지지하며 가톨릭에 맞섰던 이들(영국교회, 프로테스탄트)을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한다.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을 안겨줄 정도로 그녀의 복수는 가혹했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권력이 넘어가는 20년 동안 엄청난 혼란을 겪었던 영국은, 다시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더 큰 혼란에 휩싸인다. 하지만 메리가 즉위 5년만에 사망하면서 복수극은 주춤한다.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 “Bloody” Mary). 아버지에게 부역했던 영국교회와 신교도들을 상대로 공포 정치를 펼쳤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메리 1세(1516-1558, 재위: 1553-1558). 잉글랜드 왕국 최초의 여왕.

1558년 ‘블러디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바로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재위: 1558-1603)다. 가톨릭, 영국교회, 프로테스탄트가 뒤엉켜 종교적 광기를 뿜어내며 으르렁대는 피폐해진 영국을 떠맡은 20대의 젊은 여왕은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한다. 그녀의 선택은 효과가 있었는지 종교적 갈등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영국은 평화와 번영을 맞이한다. 셰익스피어가 등장했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섬멸했으며,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The “Virgin” Queen Elizabeth I, 재위: 1558 – 1603) 오늘날 영국인들이 그리워하는  ‘즐거운 옛 영국'(Merrie Olde England)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45년 집권기를 의미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1625년[/dropcap] 1625년 즉위한 찰스 1세(1600-1649, 재위: 1625-1649)가 로마 가톨릭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자, 장로교와 청교도(퓨리턴)는 폭동을 일으킨다. 종교 갈등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잠시 숨을 죽였을 뿐, 꺼진 불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국교회-가톨릭-청교도(퓨리턴)-장로교가 서로 뒤엉켜 서로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였다. 이단의 아내라는 이유로 여자들을 무차별 강간하고, 그의 아이들도 가차없이 죽였다. 청교도는 예수회 수도사들을 잡아다 목을 잘랐고, 영국교회는 장로교 신도들을 죽였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는 신교도들의 집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아나밥티스트는 모든 종파의 먹잇감이었다.

청교도, 영국교회, 장로교, 가톨릭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잡아 죽였지만, 단 하나 기이한 믿음을 공유하는 듯했다. 하느님이 인간 제물을 원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전쟁은 청교도의 승리로 끝난다. 찰스 1세는 포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59명의 청교도 재판관들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청교도 혁명파에 의해 처형당한 찰스 1세(1600-1649, 재위: 1625-1649, 그림: 안토니 반 다이크, 1636년 작).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청교도)에게 패배한 찰스 1세는 1649년 폐위되어 런던 화이트홀에서 공개처형 당한다.

영국에서 벌어진 이 대학살극은 오늘날 영국 내전, 시민 전쟁, 청교도 혁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것은 사실 종교라는 깃발 아래 자행된 야만적인 공포정치에 불과하다.

영국의 종교전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크롬웰의 독재 체제 하에서 보호받던 청교도들은 크롬웰이 죽자 다시 수세에 몰렸고,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신대륙으로 이주한다.

플리머스에서 열린 첫 추수감사절(1621)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제니 어거스타 브라운스콤, 1914년 작).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항구 플리머스로 이주한 영국 청교도 이민자 102명은 이주한 첫 해인 1620년, 그 절반가량이 사망할 만큼 큰 시련을 겪었지만, 주변에 거주한 인디안 원주민 왐파노아그 족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이듬해인 1621년 첫 추수를 마치고, 왐파노아그 족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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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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