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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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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000년 예루살렘, 솔로몬왕은 야훼에게 제사를 지내는 ‘솔로몬의 성전’을 건설한다. (지난 글 참조)

야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솔로몬. 야훼(야베)는 당시 유대 지역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던 화산신이다.  (James Tissot c. 1896–1902)

솔로몬 성전의 파괴 

그런데 BC 597년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나부쿠두리우추르; 느브갓네살)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뒤 레반트 지역까지 밀고 들어와 유대 왕국도 멸망시킨다. 그 당시 이집트 제국의 영향력 아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유대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패배하고 만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던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상당수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한다.

바빌론의 왕, 수메르-앗시리아의 왕, 세계의 왕. 히브리인들은 그를 네브카드네자르 2세 라고 불렀다. 한국어 성경에는 ‘느브갓네살'(영어: Nebukadnessar)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성서적 메타포가 풍부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의 함선 이름이 바로 ‘느브갓네살’이다(사진 위는 느브갓네살을 묘사한 부조, 아래는 영화 ‘매트릭스’ 속 느브갓네살호를 재현한 프라모델, 출처: JHS Toys).

하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은 BC539년 동쪽의 변방 국가에 불과하던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고 몰락한다. 페르시아를 세계 최초의 대제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정복왕 키루스 2세였다. 이로써 바빌로니아가 지배하고 있던 모든 영토가 페르시아 제국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만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난 뒤 매우 기이한 조치를 취하는데, 바빌론에 노예로 잡혀왔던 온갖 이방인들을 제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단순히 돌려보낸 것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도 주는 매우 관대한 조치였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을 해방하는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의 왕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이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유대인을 해방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왼쪽; Jean Fouquet, 1420-1481), 키루스 대왕은 성서 속에선 ‘고레스’로 표기된다. 오른쪽 그림은 키루수 스 대왕의 최후를 묘사한 그림으로 효수당한 키루스 대왕의 목을 받고 있는 토미리스 여왕(오른쪽 붉은 망토)의 모습이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키루스 대왕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복구한다. 여기서 유대 왕국에 복잡한 정치 역학의 변화가 발생한다.

신흥 권력층 ‘바리새인'(파리시)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성전을 복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지렛대 삼아 유대 사회에서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상한다. 실제로 이들은 솔로몬 성전으로 완벽하게 복구하지는 못하고, 그보다 작은 성전을 짓는다.

또한, 이들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문화를 향유하던 대도시 바빌론에서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살면서 선진적인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문물, 제도, 율법, 종교, 신화 등을 잘 알았기에, 이로 인해 당시 촌구석에 불과하던 유대 왕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상당한 권위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신화와 종교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신화와 역사도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신의 뜻을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표하여 대중을 교화시키는 지식인 역할을 한다. 토착 유대인들은 이들을, 페르시아의 권력을 업고 페르시아에 왔다고 하여, ‘파리시'(Pharisee)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는 자음만 표기하기 때문에 모음은 자주 바뀐다.) 파리시는 한국어 성경에 ‘바리새인’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예수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따지는 바리새인들(빨간색 타원 표시-편집자). 그림 속 바리새인들의 의복을 봐도 이들이 당대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신약성서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를 적대시하는 세력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림 출처: James Tissot, 1836-1902)

헤롯 성전 건축과 대혼란: 바리새 vs. 사두개 

BC 146년 카르타고(페니키아)를 멸망시킨 로마는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 로마제국은 유대 지역의 통치를 헤롯(Herod)에게 맡긴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헤롯은 이 지역 민심을 잡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솔로몬 성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헤로데 1세 또는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실제로 헤롯이 건설한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장장 8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공된 헤롯 신전은 실제로 로마제국 내에서 3대 신전으로 손꼽힐 정도로 웅장하고 거대했다.

BC 1,000년 솔로몬이 지은 성전(오른쪽 위)과 솔로몬 성전을 재연하기 위해 AD 60년경 완공된 헤롯이 지은 성전. 헤롯 성전은 23,000m² 면적에 자리한 복합 건물로 총 길이 1.5km에 달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헤르쿨라네움의 제우스 신전,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 (출처: 이스라엘 박물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면서 종교적인 의식은 더욱 거창해져갔다. 매일 사제 700명이 야훼를 받드는 제단을 차리고 무수한 동물을 산채로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다. 공포에 질린 동물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가운데 뿔피리소리가 울려퍼지면 사제들은 일제히 동물의 목에 칼을 내려꽂았다. 신전 바닥은 피로 흥건했고 동물을 불에 그슬리면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처럼 제사가 성행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형식과 기교는 더욱 전문화됐고,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권위 역시 갈수록 높아졌다. 유대 사회에서 희생 제의를 전문적으로 집행하던 이들은 사두개(Sadducee)인들이었다. 헤롯 성전이 완성되고 난 뒤 이들은 유대 사회 최고 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Sanhedrin)도 장악하여 최고 지배층이 된다.

오늘날 국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 산헤드린 의회당이 헤롯성전 안에 있었으니, 사두개인들이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1883년에 발행된 백과사전에서 묘사된 산헤드린 모습.

구약을 바탕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대중을 교화시키고자 했던 바리새는 끊임없이 사두개와 대립했다. 사두개는 자신들만의 전문직(제사)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민중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귀족이었던 반면, 바리새는 구약을 연구하고 율법을 설파하여 민중을 가르치고 교화하고자 하는 지식인 계급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약성경에서 예수와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이다.

예수가 처형당한 예루살렘. 사진은 20세 초 예루살렘의 모습. 예수가 활동했을 당시 로마는  페르시아 못지않게 이방인인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에 매우 관대하여 성전 운영에 대해선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성전은 로마제국이 지은 것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성전 사용료를 내야했다.

7년만에 파괴된 헤롯 성전과 ‘디아스포라’ 

헤롯 성전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은 순례객들로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 성전 앞에는 순례객뿐만 아니라 로마에 저항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동하는 극렬우익분자들도 함께 모여든 것이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성전을 지어줬더니 오히려 제국의 위협하는 골치거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특히 페사흐((Pessah; 유월절; 유대인의 이집트 왕국 노예 탈출 사건 기념에서 유래)가 돌아올 때마다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넘쳐났는데, 이 때마다 폭동이 발생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예루살렘에 군대를 대폭 증강 배치하여 성전 주변 방위를 강화했다. 이때 파견된 로마군은 대부분 그리스인들로 이뤄져있었다.

헤롯 성전은 완공된 지 불과 7년 만에 완전히 파괴된다. 서기 70년 유대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로마군이 이를 제압하면서 다시는 유대인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80년 동안 힘들여 지은 성전을 제 손으로 파괴해버린다. 또한,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을 로마제국 전역으로 최대한 뿔뿔이 흩어놓는데, 바로 이때부터 ‘디아스포라’(diaspora;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살던 땅을 떠나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런 집단)가 시작된다.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반면, 바리새인은 끊임없이 율법 연구에 전념하여 오늘날 유대교를 지키는 랍비가 된다.

헤롯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사진은 2009년 촬영한 모습. (출처: Kounosu, CC BY SA 3.0, 위키미디어 공용)

로마제국의 통치술과 관용 vs. 유대인의 저항  

로마는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그리스에 비해 창조성이 빈곤했음에도, 어쩌면 창조성이 빈곤했기 때문에, 그리스가 유일하게 갖지 못했던 기술을 소유할 수 있었다. 바로 탁월하고 효율적인 조직관리술이다. 실제로 로마는 방대한 지역과 무수한 민족들을 무려 600년 동안이나 아무 탈 없이 통제하고 관리했다.

로마제국은 새롭게 정복한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 그들을 더 빠르게 동화시키기 위해 시민권을 주었다. 로마의 시민이 됨으로써 제공받을 수 있는 법적, 상업적, 교육적 기회는 오히려 로마제국에 병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선물이었다.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로마인들은 매우 관대했다. 로마인들 스스로 그리스 신화나 종교의례를 그대로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른 문화의 종교를 거리낌없이 수용했다.

로마가 피정복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했다. 로마 황제의 초상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의를 갖춰 절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로마(그리스)의 신들을 인정하고, 황제도 그러한 신 중 하나라고 인정한다는 의미였으며, 결국 로마제국에 충성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해서 피지배인들이 믿던 원래의 신이나 종교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신교 세계관에서는 어떠한 신이든 종교든 존중받을 자격을 갖기 때문에 새로운 신이 추가된다고 해도 전혀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이 요구하는 조건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기에 소수민족들이 제국 안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거부한 유일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다.

‘성서’를 따르는 이 고상한 민족의 유별난 고집을 익히 알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들만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인정해 준다. 형상을 금기시하는 유대인의 풍습을 존중하여 이 지역에서는 로마 총독이 군중 사이로 행진할 때 황제의 초상을 가리도록 조치했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유별난 유일신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럼에도 로마제국 전역에서 이들 유대 지역에서만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난다.

절정기 로마제국의 영토는 3,250,000m²에 달하였으며 인구는 6천만 명에 달했다. 위 지도는 트라야누스 활제 시절인 AD 117년 당시 로마제국이 지배한 영토(자주색, 출처:위키미디어 공용, Tataryn, CC BY SA 3.0)

다신교와 일신교

인류의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을 돌아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신교적 세계관이 얼마나 극단적 편견인지 알 수 있다. 다신교에는 다양한 서열이 있다. 국가신, 지방신, 가족신, 더 나아가 개개인마다 신이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신이 있고, 따라서 자신의 신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사람의 신도 존중한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황금률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와 교류하고 또 그러한 교류 속에서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혜와 정의의 신 토트(Thoth)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우주의 창조자이자 장인들의 신 프타(Ptah)의 사원을 약탈하거나 불지른 일은 한 번도 없다. 마르둑 신봉자들이 바알 숭배자들을 죽이려 한 적도 없다. 전쟁의 신 아레스 숭배자과 그에 못지않게 호전적인 아폴론 숭배자들이 싸운 일도 없다. 다신교는 기본적으로관용이라는 태도 위에서만 성립한다. 오늘날 종교적 증오로 인한 범죄, 학살, 전쟁은 흔하게 일어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패배한 나라의 신전이나 석상을 무너뜨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그런 행동은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적의를 보여주고자 할 때만 가끔 나타났다. 땅, 여자,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또는 악행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전쟁을 할 수는 있어도, 종교 때문에 전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교적 믿음 때문에 전쟁을 벌이는 일은 고대 세계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신교는 인간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존재하는 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신은, 무리지어 사는 우리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신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은 유일신은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추상성은 논리적 추론의 핵심적인 요소로, 논리적 추론은 사람들을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신을 숭배하는 것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른다. 다신교 문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맹렬함과 투철함으로 무장한 잔인한 전사들이 탄생한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이방인들을 죽였다. 외모가 다르거나 옷을 입는 방식이 다르거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유일신 세계에서는 자신과 다른 ‘추상적인 관념’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죽였다. 식량이나 말을 훔쳐오기 위해 다른 마을을 습격하는 것은 (고대 세계의 한정적 자원을 고려하면) 그래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종교나 철학 같은 추상적 가치 때문에 서로 죽고죽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유일신교는 또한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모든 사람이 신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개개인이 떠올리는 신은 정말 같은 것일까? 같은 교회에 10명이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 10명이 받드는 하나님이 모두 똑같을까? 내가 믿는 신이 당신이 믿는 신과 같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무자비한 사상검증(간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인류가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지금까지 치룬 고통을 떠올려 보면, 고대의 다양한 종교들을 원시적이라고 마냥 단정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신교가 인류를 계몽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그 대신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나님, 예수, 알라의 이름으로 벌인 온갖 종교전쟁으로 죽은 사람들, 또 마녀로 몰려 산 채로 불길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놓는다면, 어마어마한 산을 이룰 것이다.

메시아는 오는가: 에세네파와 점성술 

유대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로마는 반란 선동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나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싶었다. 이때 로마인들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반란 모의자들을 산채로 매달아 죽이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은 BC 4년 갈릴리에서 유대인 2,000명을 십자가에 매단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혁명가의 산실로 유명한 ‘반골’지역이다. 2,000명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곳에서 4년 뒤 예수가 태어난다. 참고로 십자가형을 묘사한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십자가형에 사용된 나무 틀은 십자가 아니라 ‘T’자였다.

로마제국의 온갖 조치에도 유대 민중의 불안은 오히려 계속 고조되었다. 혼돈의 시기에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극단적인 교파가 융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바로 에세네파(Essene; ‘신앙심 깊은 자’란 뜻; 기원전 2세기 형성~기원전 1세기 소멸)다. 이들은 야훼가 보낸 메시아가 곧 도래하여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메시아가 강림하면 사악한 자들을 한번에 휩쓸어버릴 최후의 전쟁(아마겟돈)이 벌어지는 데 그 때 야훼의 병사가 되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믿음 위에서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모두 버리고 사막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 시기에 세상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던 것은 점성술이다. 고대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점성술에서 2,000년마다 한 번씩 바뀌는 별자리가 바로 이 때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양자리 시대가 저물고 물고기자리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무수한 점성술사들, 점장이들이 온갖 예언을 퍼트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예수 탄생 시기에 시작된 물고기자리. 이제 2,000년이 흘러 물병자리로 넘어가고 있다. 물병자리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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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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