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네이버 연재 웹툰 [칼부림] (고일권)은 조선 중기[footnote]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footnote] 대규모 반란 “이괄의 난”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이상 위키백과 참조)
엄청난 고증과 묵직한 터치가 특징인 웹툰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를 인터뷰했다. 바쁜 연재 일정을 고려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다. 아직 연재 중인 작품임을 고려해 지나치게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는 질문들은 피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답변을 보낸 고 작가에게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필자)[/box]
– 반란에는 대의명분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인정받지 못했어도 현대에는 그 의의를 인정받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반란도 있다. 이괄의 난은 대의명분이 없는 대표적인 반란으로 알고 있다. 왜 이괄의 난을 소재로 삼았는지 궁금하다.
원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씩 알아가다가 전란 이후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러다 보니 병자호란까지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조선이 친명배금정책[footnote]명나라와 친하고 청(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footnote]을 펼치다가 전쟁을 당했다’는 절대 명제와도 같은 설에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이어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고들다 보니 이괄의 난까지 오게 되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이괄의 난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조선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주변국에게도 미묘한 파장을 불러온 역사적 사건이다. 이괄의 난이 가져온 후폭풍은 정치·군사·사회적으로 훗날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응하는 조선의 움직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괄의 난이 굉장히 간략하게 다뤄지고 인식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대중들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진 ‘원인’과 달리 꽤나 복잡한 사정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SF작품도 염두하고 있었지만, 자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다보니 이렇게 사극의 소재로작품에 임하게 되었다.
–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는 이괄에 대한 미화 논란도 있었다. 고 작가는 “이괄은 역적으로 남았으므로 한계를 그리려고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향후 작품 연재에 방해가 안 되는 선에서 질문하고 싶다.
독자들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다. [칼부림]에서의 표현은 이괄의 역사적 위치를 송두리째 뒤집는 시도라기보다는 ‘창작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재평가’라는 것이다. 나의 작품이 정사가 될 수는 없고, 학문적 결과물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창작물은 창작물일 뿐이다.
사극의 특성상 극과 실제 역사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두었고 기록을 토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던 것이다. 학문적 입장에서 이괄의 평가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은 아니다.
이 부분은 독자들께서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네이버에서 “도전만화”를 하면서 이괄의 난을 빨리 이끌어내고 싶은 마음에 이괄을 인조반정[footnote]1623년 4월 11일 서인 세력이 광해군과 대북 세력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옹립한 사건[/footnote] 후 바로 평안도 병마절도사[footnote]조선 시대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이품의 무관 벼슬.[/footnote]로 부임하도록 전개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 사이에 이괄이 좌포도대장[footnote]조선 시대 종이품 무관으로 좌포도청의 으뜸 벼슬. 범죄자를 잡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았다.[/footnote]을 하면서 기찰[footnote]범인을 체포하려고 수소문하고 염탐하며 행인을 검문하던 일.[/footnote]활동을 했던 것을 표현했으면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 부분을 섣불리 들어낸 것은 ‘미흡한 창작’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이괄은 기록에서 활달한 기질을 가졌으면서도 오만했다. 아울러 군사에 밝으면서도, 무인으로서 문장에 밝았다. 이렇듯 이괄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부분들은 몰라도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역량은 꽤 평가받을 만했던 인물이다. 군사적 역량 이외에도 ‘인간 이괄’의 성격은 꽤 불같고 괄괄했던 듯하다.
나이어린 무관으로서, 범람한 짓을 많이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좌포도대장으로 있을 때는 기찰을 꽤 거칠게 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촉망받는 무인으로서 이름이 오르내렸고, 이항복은 이괄을 비롯한 3인을 키워볼 만한 인재로 광해군에게 아뢰기도 했다.
그래서 김류의 입을 빌려 ‘장수의 기질과 시정잡배의 오만함’을 함께 가진 장수라고 이괄을 평했다. 실제의 이괄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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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찰(譏察):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염탐하며 행인을 검문하던 일. 포도청에 소속돼 죄인의 탐정 수사를 맡아보던 벼슬은 ‘기찰군관(譏察軍官)’이었다.
“좌포도 대장 이괄이 기찰한다는 명목으로 군관을 사사로이 파견하여 군인을 다수 이끌고 가서 밤에 전 부사(府使) 박진장의 집에 난입, 박진장을 끌고 나오게 하였는데, 노모를 때리고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하였으며, 또 이웃에 사는 관상감 판관 정승주(鄭承周)를 포도청에 결박해 데려왔다.”
– 인조실록 1623년 5월 27일 병진 네 번째 기사 “포도청 군관들이 사대부의 집에서 난동을 부려 하옥·국문하다” 중에서
범람(汎濫)하다: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이나 물건·세력 등이 마구 쏟아져 나와 퍼진다’는 의미의 표현.
이괄은 20세에 형조좌랑에 임명됐지만, “나이 어린 무관(武官)으로 범람한 짓을 많이 저질렀으니 체차(遞差:어떤 직책에 있는 관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해달라”는 탄핵을 당한다.
– 선조실록 1606년 12월 28일 임술 첫 번째 기사 “용렬하고 무능한 각 지방 수령을 체차 혹은 파직시키다”
이항복은 도체찰사[footnote]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軍職). 의정이 겸임하였다.[/footnote]로 재직 중이던 1610년에 “강원도 회양에 진을 설치한 뒤 조방장(助防將)을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일을 주관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며, 이괄·허완·이광영을 광해군에 추천했다.
– 광해군일기 1610년 10월 10일 신사 첫 번째 기사 “도체찰사가 함흥 부근에 진의 설치와 조방장을 맡길 인물 등에 대하여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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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을 ‘영웅’으로 인식한 일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 부분은 위 질문과 더불어 할 이야기가 많다.
이 작품을 하면서 당대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서인과 인조에게 모든 멍에를 씌우는 짓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적이 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책임이 인조정권 당시의 서인에게만 책임이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잘 묘사하고 싶었다.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로 점철된 ‘꼰대 같은 조선’이 아니라 당시의 조선 사람이 피부로 느끼는 국제 정세와 개국 이래 이어져 온 명나라에 대한 인식을 서인들을 비롯한 사대부들을 통해 그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역으로 이괄에게 부여된 ‘긍정성’이 서인에 대한 반감과 대비되어 비추어지는 것은 전혀 계산하지 못했다. 17세기 초 서인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각이 매우 부정적이라는 점을 나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괄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지한 서인’을 쳐내고 싶은 현대인의 열망과도 같다. 그래서 이괄의 난에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는 듯 보인다. 창작물에서나마 이괄이 성공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괄도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조선사회가 보편적으로 가졌던 유교적 세계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난 것은 조선의 시스템 한계와 서인 정권 내 권력 다툼 속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괄도 초반에 그런 권력 다툼의 한 귀퉁이에서 기찰을 담당했던 주역이며, 서인들의 정책에 철저히 순응했던 인물이란 점이다. 그러다가 그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가차없이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괄이 서인들을 쳐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들 갑작스럽게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자주적·탈유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외세와 당당하게 맞섰을 리는 없지 않나?
이괄이 옥좌에 앉았던들 지방의 행정관·병마사 등을 비롯해 유림들의 여론은 어떻게 무마하며 설득할 것인가? 호남에서는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勤王)[footnote]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footnote]을 위해 의병을 일으킬 준비까지 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지 않고 광해군의 치세가 계속되었다면 조선은 전쟁을 면할 수 있었을까? 광해군 대에 터져 나왔던 난맥상들이 언제까지 갈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흐름이란 것이 있다. 그 흐름을 획기적으로 바꿀 패러다임이 이괄에게는 없었다. 나라를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올바르게 이끌고 건설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봐주신다면 조금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이다.
– 작품에서 인조는 얼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게 묘사한 이유가 궁금하다.
기록을 살펴보면, 인조는 말수가 적고 속을 알 수 없는 과묵하고 소심한 인물에 가깝다. 반정공신[footnote]반정 때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내리던 공신의 훈호(勳號). 조선 중종 때는 정국공신, 인조 때는 정사공신이라는 훈호를 내렸다.[/footnote]들조차 인조가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굳이 표정이나 생김새로 명확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일부 가린 것이 인조의 소심한 이미지와 맞지 않나 싶어서 그렇게 그렸다. 앞으로도 인조의 얼굴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 심지어 참수형을 집행하는 모습까지 엄청난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읽는 책이 무엇인지를 비롯해 옛 흔적들을 참고하며 재현하는 과정이 궁금하다. 치밀한 고증을 위해 공부하는 고 작가의 고충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다.
보통 대중서적들을 많이 보고 구글링(구글 검색)도 하며 여러 사이트도 돌아다닌다. 논문도 본다. 17세기 조선 연구에 매진해 온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책들과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글들도 많이 보고, 만주족 역사책도 많이 본다. 몽골과 관련된 책도 간간이 보고 있다.
17세기 동북아는 조선·명·후금·몽골·일본 등이 자국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치열하게 생존게임을 벌였던 각축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정묘·병자호란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국난극복사’적인 인식에 따른 도식화된 역사인식을 지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군사 관련 논문을 보면서 조선 후기 군사 편제나 신호 체계 등을 많이 공부하려고 한다. 내 작품에서는 적어도 몇몇 영웅급 캐릭터가 전장을 쓸어버리는 ‘만행’은 삼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의욕만 앞설 뿐이다.
그렇게 많은 자료를 봐도 헷갈리기 일쑤고, 작품에 적용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작업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틈틈이 자료를 수집하고 열람한다. 그러다가 흥미 있거나 새로운 것을 보면 일단 스크랩을 해둔다. 원고를 그리다가 자료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보통 그렇게 스크랩해놓고 정리한 것들을 열어보는데 십중팔구 또 검색하기 일쑤다. 봐도 봐도 모르겠는 것투성이다.
그러다 보니 작업 시간이 예정보다 훌쩍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아침에 작업을 한 게 엊그제인데 하다 보니 점점 시간이 밀려 이젠 새벽이 되어도 작업이 끝나지 않는다. 일주일이 10일 정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정도이다.
– 김충선 외에 항왜(降倭)[footnote]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및 명에 투항한 일본군·일본인을 뜻한다. 반대로 조선인이면서 일본에 투항·협력한 자는 순왜(順倭).[/footnote]의 존재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칼부림]은 이괄과 함이의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 항왜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항왜를 주목하게 된 계기나 모티브가 있다면?
임진왜란을 살펴보면서 항왜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이괄의 난에 대해 파고들면서 자연스럽게 항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항왜가 30년이 지나 이괄이라는 젊은 조선 장수 휘하에 들어가 반란의 핵심세력으로 활약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왜 그들은 다시 조선조정에 반기를 들고 앞장서 싸웠을까?’
‘그리고 왜 이괄의 명분 없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까?’
‘뭔가 이괄을 통해 자신들의 열망을 이루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언제까지 이방인으로서 조선 사회 속에서 살았을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조선 사람들의 시각은 어땠을까?’
이런 의문들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자료들을 접하고 나름대로 정리하며 작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항왜들을 묘사하려고 일본 전국시대 관련 영화나 자료들을 무던히도 찾아봤다. 그들의 정신세계가 어떤지도 알고 싶어 관련 서적들을 뒤져보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서 일본 특유의 감성이 드러날 때 몇몇 독자들은 거부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묘사하기가 좀 힘든 부류가 항왜다.
– 훗날 이괄을 배신하는 이수백을 제외하면 작품에서 뚜렷하게 악한 캐릭터는 없는 것 같다. 선악 구분 없이 입체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겠다는 취지인가?
원래 역사가 그렇지 않은가? 역사에 기록된 모든 인물은 그 당시의 ‘현실’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신념과 생각으로 살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수백도 지금은 간교하고 야비한 이미지이지만, 기록들을 더 살펴보면 그와 다른 취지의 것들도 분명히 나올 것이다.
[칼부림]에서는 인물들에게 ‘악마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주변 환경과 주어진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가? 입체적인 표현을 지향한다기보다는 그저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면서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한다.
다만 내가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아 그런 것들이 작품에 잘 녹아들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회 수가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독자들을 자주 본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독자들께서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원고료도 꼬박꼬박 나오고 작품에 별 터치도 없어서, 내 의지가 꺾이지 않는 이상 결말을 향해 꾸준히 연재할 수 있을 것이다.
간간이 작품이 다른 곳에서 연재되었으면 더 인기가 있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네이버 만화에 연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순위가 최하위라고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 생각대로 작품을 꾸준히 흔들림 없이 진행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애초에 이 작품을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다고 인기를 위해 어울리지 않는 MSG를 치는 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다.
어찌 됐든 나는 이 작품을 온전히 나의 색깔로 잘 마무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제 작품을 사랑해주는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작가로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네이버에서 나를 자르지만 않는 한 소신껏 작품을 그려나가고 싶다. 데뷔한 지 3년 차가 되었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니 앞으로 3년은 더 살아남을 것으로 본다.
나름대로 이 작품을 통해 나를 수련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믿고 작품을 즐겨주시는 독자들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만화가 고일권이 걸어가는 길을 묵묵히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