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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코로나

엄마가 수시로 방문을 연다. OO교회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대, 너 어떡하니. 이미 나는 그 정보를 안다. 엄마는 TV로, 나는 스마트폰으로 접한다. 같은 집 안에서도 정보의 속도가 다르다. 여수에 있고 스마트폰도 없는 할머니는 한참 후 알거나 아예 모를 정보다.

할머니가 ‘더’ 모르는 것 

할머니가 모르는 정보는 더 있다. 내가 일하는 카페는 OO교회 교인들이 주고객이며 우리 집이 현재 코로나 위험지역이라는 것, 한 2주 전부터 나와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OO교회 터지면 우리도 이 동네도 끝이라고 애써 깔깔거렸다는 것. 이 동네는 모두 OO교회 상권이고, 나는 동네를 걸을 때 대학 캠퍼스같이 거대하게 직조된 OO교회 건물들을 지나친다.

할머니가 알면 틀림없이 카페 아르바이트를 나가지 말라고 할 것이다. 동생과 연인의 반응도 같다. 아르바이트생이 나가지 않는다는 건 결국 카페를 그만둔다는 뜻이고, 나는 그만두고 싶지 않다. 카페를 닫지 않는 사장을 원망할 생각도 없다. 엄마에게 답한다. 어쩔 수 없지 뭐. 그건 나가겠다 안나가겠다, 위험하다 안 위험하다를 떠나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음이다. 오직 엄마만이 그걸 가깝게 이해한다. 엄마는 자영업자다.

할머니가 알았다면,

할머니가 알았다면, 틀림없이 카페 아르바이트 나가지 말라고 했을 거다.

카페에서 주 2회 오픈타임으로 40만 원 정도를 번다. 과외나 모임장 등 다른 일로 그보다 많이 벌지만, 효율이 훨씬 낮은 이 아르바이트가 내겐 몹시 소중하다. 프랜차이즈 카페는 잘 망하지 않고 맡은 시간대도 고정적이다. 변하지 않는 금액, 어떻게든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갑자기 스케줄이 변하거나 말없이 원고가 끊겨도, 어제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고 라떼를 사먹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금액. 지난 달 엄마에게 음식을 시켜준 걸 후회하게 만들지 않는 금액. 가계부 앱을 보며 내 삶에 삶 냄새를 주는 목록을 훑는다. 그런 감각이 없다면 나는 내 삶이 무엇인지 모르게 될 것만 같다.

건강의 중요성이나 사태의 위험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사장이 닫는다면 당연히 나가지 않겠지만, 그만두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 나는 우선 어쩔 수 없어 지켜보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나처럼 자신이나 타인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가게 문을 연다. 카페 사장도 같은 이유로 카페를 연다. 어떤 건 멈추는 순간 회복되기 어렵다.

앎이 반드시 삶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생산직으로 일하며 공장에 나갔던 내 또래를 둘 안다. 한 명은 건강의 가치 같은 걸 잘 몰랐다. 누구도 그의 건강을 귀하게 여기라는 배움을 주지 않았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뿐이었다. 그는 지금 크게 다쳐 어디서도 일하지 못한다. 한 명은 건강의 가치를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현재를 더 잘 알았다. 어린 가장이던 그는 현재의 삶에 어떻게든 매달리기 위해 미래를 팔아 현재를 샀다.

둘의 공통점은 입가다. 코로나와 상관없이 그들의 일터는 이미 재난과 닮아있었다. 둘은 각기 다른 공장에서 같은 복장으로 마스크를 끼고 일했다. 인간은 제 숨에도 염증이 인다. 피부 균형을 잃은 둘의 입가는 얼룩덜룩하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이나 내가 내뱉는 숨이란 결국 구취라는 걸 이제 조금 안다.

내 세대는 앞세대가 치른 건강의 상실로 말미암아 그 값을 안다. 삶이 나아질수록 우리의 앎도 나아졌고, 잘 알게 된 덕에 치료보다 향상을 위해 병원을 다닐 지경이다. 그 앎의 여부는 중요하나 고르게 분포되지 않는다. 같은 집에서도 엄마는 나보다 느린 걸.

마스크를 재활용해도 된다는 말에 잘 접어두었다. 내 일은 더 줄어들 테고, 마스크는 더 비싸질 것이다. 더 싼 걸 찾는다. 저번 주엔 마스크 하지 않은 폐지 줍는 할머니를 보았고, 이번 주엔 폐지 줍는 어떤 노인도 보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없을 게 분명한 노인이 마스크를 주문하는 일과 폐지의 가격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주제에 어쩐지 마스크보다는 다른 것을 걱정하게 된다. 내가 방금 먹은 밥의 찰기나 지금 앉아있는 방의 온도 같은 것이 그들에게도 존재할까. 그런 것이 없이, 코로나고 마스크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양질의 정보는 삶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로 인한 실감이다. 내 공장 친구가 건강의 가치를 안다고 실감하지는 못했듯, 앎이 반드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는 생의 조건을 채우며 어떻게든 삶에 닿기 위해 닥치는 대로 몸을 썼다. 어떤 건 멈추는 순간 가라앉으니까. 그에겐 실감할 만큼의 양질의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걸 감각할 여력도 없었다.

앎이 반드시 삶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바람에도 불구하고, 앎이 반드시 삶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인간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느낄 수 없다. 몸을 쓰며 일하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 감각을 사용하느라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건강을 감각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움직임이 없을수록 건강을 실감하게 된다. 주변 직장인들을 떠올린다. 이미 삶에 닿아있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도 건강을 실감할 수 있다. 좋은 정보의 환경, 생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 따위가 그러한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 되어서야 건강을 실감하는 사람들은 건강을 향유할 수 없다. 슬프게도 그들은 건강에 대한 좋은 표본이자 정보로 남는다.

계획의 소멸

코로나는 재난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최근 씨네21에 글을 남겼다.1 그에 따르면 “재난은 서서히 준비되고 오래 지속”되며, 그 결과 중 하나는 “계획의 소멸“이다. 영화 [조커]는 저소득층 무료 심리 상담과 약 처방 중단으로 사회적 재난에 놓인 개인을 보여준다. 아서는 병을 치료할 수 없어 훌륭한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계획을 이룰 수 없다. [기생충]의 주인공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계획 가질 권리가 소멸되어버린 이들을 보여주는 이 두 영화는 명백히 사회적 재난 영화다. 계급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들로 인해, 우리는 이미 재난과 가까이 살며, 역병이란 재난이 덮쳤을 때 그 재난이 마치 그로 인한 듯 드러날 뿐임을 알 수 있다. 신형철은 과거와 미래가 한 인간의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성이라 말하며, 이 글로 하여금 계획을 가질 권리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숙제로 남겼다.

"인간은 미래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에만 자신을 파괴한다." (신형철)

“인간은 미래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에만 자신을 파괴한다.” (신형철)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다른 이들에게 [기생충]이 미쳤을 영향을 재평가했고, 희망을 가졌었다. 누구에게나 계획을 가질 권리를 주는 것. 그걸 떠올리지 않는다면 기생충이 탄 오스카 상은 타인의 재난을 투어한 것 외에 아무런 의미 없는 현재가 될는지도 모른다.

오스카 따위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나는 코로나가 무섭다. 죽을까 봐? 아니. 거대한 사건 앞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무력한 개인은 뭐라도 하기 위해 누군가를 겨눈다. 재난은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환기시킨다. 장소가 밝혀진 어떤 개인은 겨누기 좋은 곳에 위치한다. 그 장소는 신천지이기도 하고, 맹목적 믿음이나 커다란 교회이기도 하고, 도덕적 흠결이나 정보의 부재 혹은 단순한 불운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삶에 가라앉지 않으려 아등바등하고, 이미 재난에 가까운 과정 중 재난에 더 노출된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는 확진자라는 이름으로 섞인다.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구분짓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인다. 구분은 개인을 삭제하고, 죄목만을 남긴 채 점차 무의미해진다. 급기야 ‘우한’ 폐렴이니 ‘대구’ 코로나니 지역으로 낙인을 찍기도 한다. 죄목은 바다를 건너간다. 어떤 미국인은 아시안 여성을 폭행하고, 베네치아에 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은 여행 온 중국인들에게 침을 뱉었다.

코로나 확진자는 더는 한 개인이 아닌 코로나라는 죄목을 쓴 자에 불과한 듯 보인다. 확진자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들이 사회적 물리적으로 어떤 장소에 있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신천지니 뭐니, 그들이 많이 밉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미래라 해도 그들이 몰살될 것이 무섭다. 그 사이 살아보려던 개인들이 섞여서 익사해버릴까 무섭고, 타인에 관한 얇은 정보로 말미암아 그가 계획 가질 권리를 기꺼이 파괴하려는 사회가 무섭다.

그리하여 미래의 총량이 줄어버리는 것은 사회적 재난일 것이다. 메르스의 유포자는 자살을 생각했다. 재난은 오래 지속되는 건 거듭되기 때문이다. 재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재난을 예방하거나 이미 일어난 재난이 거듭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 뿐이다. 사회가 거기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개인이 할 수 있는 몇 없는 일 중 하나는 ‘구분’보다 ‘함께’를 생각하며 견디는 것이다. 우리가 본 영화나 책 따위로 알게 된 것들을 삶에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스카 상이니 뭐니 그깟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숭고한 의료진이나 몇몇 건물주, 온정을 베푸는 이들과 따스하게 기다리는 이들을 바라본다. 자영업자나 배달부,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의미 있는 현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들처럼 재난이 드러낸 삶의 단면을 이해하고 실감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과정이 커다란 앎이 되길, 그 앎이 다시 다음 재난을 견디어 낼 수 있을 삶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두서없이 적는다.

'함께' 견디지 못한다면, 오스카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어려움을 ‘함께’ 견디지 못한다면, “계획 가질 권리”를 우리가 지키지 못한다면, 오스카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1. 신형철, ‘재난 속에서의 웃음, 계획을 가질 권리’, 씨네21(1243호, 2020.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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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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