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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2차대전 중에 찍힌 평범한 사진들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연재물입니다. 전쟁사와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은 필자 고어핀드 님이 사진을 접하며 발견한 풍성한 사연과 이야기들을 함께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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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군 해병대원이 차곡차곡 정리된 철모들을 지나고 있다. 1945년 2월, 일본 남부 이오지마.
한 미군 해병대원이 차곡차곡 정리된 철모들을 지나고 있다. 1945년 2월, 일본 남부 이오지마.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감독이 워낙에 유명한 사람인 데다가 같은 촬영장에서 동시에 촬영한 다른 영화가 동시에 개봉을 한 탓에, 적지않이 화제가 되었고 아마 전쟁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는 봤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 영화와 감독이 화제를 모았다고 해도 영화 포스터 원본 이미지의 유명세에는 발끝에도 못 미친다. “수리바시 산의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 해병대” 이 사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한 장이라 전쟁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정도다. 특유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지만 태평양 전쟁에서의 미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개전(1941) 이래 일본과 미국은 남태평양을 무대로 수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여 왔으나, 아무리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한들 후방에 있는 국민들이 이걸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일본 본토를 함락시켰다는 소식과 함께 이 사진이 신문 1면에 보도된 것이었다 – 승리를 확신한 국민들은 열광했고, 사진작가 조 로젠탈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화려한 연극 무대가 있으면 그 뒷면도 있기 마련이고, 이 법칙은 이 사진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그 ‘뒷면’을 찍은 것이다.

‘가장 특별한 방어구’

항복한 독일군 아프리카군단 병사들의 철모가 리비아의 포로수용소에 쌓여 있다. 독일군 전통의 회색 철모와 사막전용으로 노랗게 도색된 철모가 섞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43년 5월.
항복한 독일군 아프리카군단 병사들의 철모가 리비아의 포로수용소에 쌓여 있다. 독일군 전통의 회색 철모와 사막전용으로 노랗게 도색된 철모가 섞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43년 5월.

무기와 방어구의 역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마주치게 된다. 별로 크지도 않은 투구가 굉장히 큰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투구가 방어하는 면적은 매우 적지만, 온몸을 보호하는 갑옷보다 더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각종 최신 기술과 화려한 장식이 우선 적용된다. 동서고금에 예외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머리만큼 눈에 잘 띄고 공격하기 쉬운 급소는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눈에 잘 띄는 만큼 머리를 감싸는 투구 역시 눈에 아주 잘 띈다. 그렇기 때문에 투구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을 수 있는 방어구인 동시에, 이런저런 정보를 표시하는 데 유용한 표지판이 되었다. 당장 투구 모양에 따라 쉽게 피아 식별을 할 수 있고, 약간의 손질만 하면 소속 부대나 계급을 표시할 수도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군 제 6군 병사들의 철모가 버려져 있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은 91,000명이 넘었으나, 10년 뒤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은 사람은 5천 명에 불과했다. 긴 포로 생활도 생활이었지만 그해 봄 티푸스가 유행하면서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복한 독일군 제 6군 병사들의 철모가 버려져 있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은 91,000명이 넘었으나, 10년 뒤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은 사람은 5천 명에 불과했다. 긴 포로 생활도 생활이었지만 그해 봄 티푸스가 유행하면서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1943년 2월.

사정이 이렇다 보니 투구는 그 어떤 방어구보다도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일단 투구는 소유자의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어느 정도 보급 체계를 보유한 곳에서 전투원에게 투구를 지급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투구를 지급받지 못한 전투원은 시원찮은 잡병이거나 시시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2차대전 말기 급조된 독일군의 국민척탄병이나 복면을 뒤집어쓴 테러집단 조직원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투구는 군기만큼이나 확실한 전리품이 된다. 상대방의 투구를 빼앗는 방법은 상대를 무력화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고 간편하면서도 상징성이 큰 전리품인 셈이다. 특히 적장이 사용하는 화려한 투구나 별이 새겨진 사단장 철모는 더욱 매력적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에 제출된 충무공의 전투 보고서에 왜장들의 크고 화려한 투구가 첨부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마지막으로 철모는 소유자의 운명을 증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도 한다. 포로수용소 앞에 아무렇게나 마구 쌓여 있다면, 이 철모의 주인은 포로가 된 것이다. 기간병들에게 포로의 철모 따위는 귀찮은 물건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무덤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거나 어느 한 편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면 – 이건 전사한 것이다. 주인을 잃은 철모는 이제 새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인세(人世)지옥

"친구":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 산악병들이 전사한 전우와 적병을 묻어 주었다. 결코 함께 설 일이 없던 영국군 철모와 독일군 철모는 무덤 위에 나란히 섰고, 살아생전 총을 겨누던 두 젊은이는 세상의 북쪽 끝 머나먼 이국에서 함께 누웠다. 1940년, 노르웨이 Viskiskoia.
“친구”: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 산악병들이 전사한 전우와 적병을 묻어 주었다. 결코 함께 설 일이 없던 영국군 철모와 독일군 철모는 무덤 위에 나란히 섰고, 살아생전 총을 겨누던 두 젊은이는 세상의 북쪽 끝 머나먼 이국에서 함께 누웠다. 1940년, 노르웨이 Viskiskoia.

로젠탈의 사진이 유명세를 얻은 데에는 강렬한 이미지와 의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오지마는 미군이 발을 들인 최초의 일본 본토였다. 그런 만큼 일본군 역시 안방에 발을 들인 미군에게 어떻게든 큰 대가를 치르게 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 첫날 상륙에 투입된 미군 해병대 3만 명 중 당일 죽거나 다친 사람만 2,400명이 넘게 나온 것이다. 단 하루 만에 발생한, 전체 병력의 10%에 달하는 대피해 – 보고를 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전해지지만, 진정한 인외마경(人外魔境)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지하 통로로 복잡하게 연결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은 일본군은 벙커를 오가면서 미군들을 끝없이 괴롭혔고, 대포를 쏜 다음 동굴에 재빨리 숨기는 식으로 미 해군과 포병대의 반격을 회피했다. 미군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면 쫓겨난 일본군은 화산섬 곳곳에 자리 잡은 동굴 속으로 도망가 끝까지 저항했다. 악에 받친 미군이 화염방사기로 동굴을 통째로 태워버리거나 다이너마이트로 무너뜨려 안에 숨은 일본군을 생매장해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인세지옥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36일간 계속됐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이 섬에는 일본군 수비대 21,000명이 있었다. 그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포로가 된 216명에 불과했다. 미 해병대는 7만 명 중 약 7천 명이 죽고 2만 명이 다쳤는데, 이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유일하게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보다 많았던 전투였다. 사실, 전체 병력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는 데서 벌써 이야기는 끝난 셈이다. 로젠탈의 사진에 나온 해병대원 중 두 명도 사진을 찍은 뒤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사람 잡는 도살장이 따로 없는 지경이었다. 한 달에 걸친 기간 동안 이 작은 섬에서는 끝도 없이 희생자가 나왔고, 주인을 잃어버린 철모와 개인 장구 또한 산더미처럼 쌓였다. 저 사진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무대의 뒤편에서 벌어진 일

부상자를 옮기는 미군 해병대(1945년 2월). 사진 오른쪽으로 해안가에 처박힌 전차와 지프차가 보인다.
부상자를 옮기는 미군 해병대. 사진 오른쪽으로 해안가에 처박힌 전차와 지프가 보인다. 1945년 2월.

다시 처음의 사진으로 돌아가자. 차곡차곡 정리된 철모들, 주인을 잃은 개인 장구들에서 뭐라 말 못할 슬픔과 처연함이 느껴진다. 철모 하나당 기다리고 있을 전사 통지서들,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소우주들, 짧은 생과 함께 사라져버렸을 그 많은 미래들…

패배의 현장에 쌓인 철모 더미에서는 틀림없이 패배의 굴욕과 비참함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리의 현장에 쌓인 철모 더미에서 기쁨과 짜릿함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가지런히 정돈된 철모만큼이나 단정한 인상의 이 사진은, 상복을 입은 사람마냥 오히려 더 말이 없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군신(軍神)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을, 승리와 맞바꾼 크나큰 대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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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재본에는 각주에 해당하는 내용을 생략하였습니다. 각주 내용은 저자 블로그 “gorekun.log”의 해당 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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