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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한겨레 키드다.

어릴 적부터 한겨레 기획 연재 기사와 칼럼을 스크랩해가면서 읽었다. 특히 고종석의 칼럼을 좋아했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한겨레 칼럼과 기획 연재 기사를 묶어 놓은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지적 체험은 노동해방문학을 처음 읽은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한겨레를 통해 노동해방문학을 처음 읽었다. 당시 한겨레는 노동해방문학을 지면에서 ‘광고’했다. 그 광고가 없었다면 내 삶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학교를 자퇴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다.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의 기관지로 훗날 알려진(?) 노동해방문학에는 박노해와 이정로의 “피로 쓴 글”[footnote]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나는 오직 피로 쓴 글만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footnote]이 있었다. 정수라의 “아아 우리 대한민국”이 X같은 거짓말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순진하고 평범한 중학생에게 그 한겨레 광고는 ‘진짜 대한민국’으로 접속하는 모피어스의 빨간 알약 역할을 했다.

(물론 인간의 경로는 어떤 식으로든, 더디 가더라도 자신의 숙명을 쫓기 마련이므로 여전히 그 한겨레 광고가 없었어도 노동해방문학을 만나고, 그래서 자퇴하고, 한 여자 아이를 만나고, 죽고 싶고, 살고 싶고… 그랬을지도 모르지. 암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는 아니다. 각설하고…)

나는 이제는 한겨레를 (찾아) 읽지 않는다. 한겨레를 읽지 않아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 불편이 없다. 한겨레를 읽지 않아도 내 정신의 일용할 양식을 채울 수 없다는 불안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한겨레가 의미 없는 미디어라는 건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한겨레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하고 드높은 가치라 여긴다. 수많은 시민이 쌈짓돈을 모아서 세운 영광의 성채이자 여전히 귀한 시민의 언로다.

한겨레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정책 의견 광고를 받았다고 시끄러운 모양이다. 한마디로 쪽팔린 일이다. 한겨레 내부 성원들이 그 누구보다 치욕스럽게 느낄 것으로 생각한다. 저널리즘 컨텐츠와 광고 컨텐츠를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둥, 법 뭐시기 조항을 보면 문제 될 게 없다는 둥의 헛소리에 대해선 일고의 가치가 없다. 이론이나 법으로 피난간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냥 쪽팔린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고,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 치욕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불구하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를 받은 거다.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 망가뜨린 강”[footnote]파블로 네루다, ‘망각은 없다’ 중에서,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 밖에” [/footnote]처럼, 먹고 살려고, 월급 깎이지 않으려고, ‘국정교과서’ 광고를 받았다.

정말 떳떳하게, 정말 자랑스럽게, 광고와 저널리즘 컨텐츠는 서로 ‘영역’을 달리하므로, 정말 우린 그렇게 판단해서 국정교과서 광고 받았으므로 아무 문제 없음. 님들 사고방식이 아직도 쌍팔년도식 이념에 사로잡혀 촌스런 지랄옆차기하는 거임. 그렇게 생각하는, 그래서 국정교과서 광고가 정말 하나도 쪽팔리지 않는 한겨레 성원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글쎄, 나는 너에게 할 말 없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라.

하지만 진짜 문제는 누가 쪽팔리고, 덜 쪽팔리고,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고가 아니다. 한겨레 구독하는 독자든 나처럼 한겨레 읽지 않는 독자든 한겨레를 가루가 되게 씹을 권리는 존재한다. 그게 한겨레가 탄생한 가치다. 맘껏 입을 벌리고 공적 사안에 대해 떠들 권리. 그거 하나 때문에 태어났다. 그 입마저 다물라고 지랄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한겨레 성원이 있다면, 나는 이런 글을 쓰는 것마저도 정말 부끄러울 거다.

각설하고, 문제는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한겨레를 씹어도, 그렇게 씹고 또 씹을 만큼 한겨레를 애증(?)하는 이들에게, 그 행위가 ‘전략적으로’ 별로 이득이 없다는 거다. 그렇게 씹는다고 한겨레가 받던 정부 의견 광고를 갑자기 전면적으로 받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 같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지속해서 감소하는 한겨레 구독 부수가 급감하거나 급증하지도 않을 것 같다. 다시 또 흐지부지, ‘그런 일이 있었군’의 목록만 하나 더 늘어나지 싶다.

시민이 뜻과 쌈짓돈을 모아 ‘언론’을 그것도 유력한 ‘언론사’를 세웠다. 그야말로 시민의 힘으로 만들었다. 이제 저널리즘에 한정하면 그런 시민의 힘은 급속히 감소했다. 비극의 조건은 한겨레가 광고를 받았네 경향은 안 받았네 이런 게 아니다. 비극은 조중동은 대자본 언론사가 됐고, 한겨레와 경향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가난한 언론사가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구도는 앞으로 당분간은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

한겨레와 경향이 얼마나 치열하게 생존과 철학을 공존하게 하려고 그 둘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난 모른다. 그걸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으니 몰라도 내 탓만은 아니다. 그런 치열한 노력의 흔적을 아는 사람은 내 무지를 탓하시라. 대신 그 치열한 생존 노력, 적어도 쪽팔리지 않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대한민국 저널리즘 산업의 딜레마는 단 두 단어로 함축할 수 있다.

‘찌라시’와 ‘기레기’.

지난 어느 시대보다 찌라시와 기레기라는 경멸과 조롱이 넘치는 시대를 우리는 산다. 우리의 위대한 네티즌은 얼마나 고결하고 순결하며 고상하신지 찌라시와 기레기를 아예 입에 물고 산다. 뻑하면 찌라시, 뻑하면 기레기. 일상다반사로 찌라시와 기레기를 발사한다. (여기엔 나도 당연히 포함이다.)

찌라시와 기레기를 이토록 증오하고, 경멸하는 시대. 이토록 고상한 시대에 역설적으로 그 기레기들이 가득한 찌라시 언론사들은 그나마 입에 풀칠하거나 떵떵거리고 잘산다. 이렇게 수준 높은 독자들이 넘쳐 나는데, 이렇게 찌라시와 기레기를 증오하는 독자들이 봄날 개나리처럼 지천으로 깔렸는데, 이건 뭔가 이상하다.

한마디로 비평의 권력, 독자의 권력이 종말을 고했다. 두 가지다.

1. 일단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 입에서 나온 말들이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평판을 돈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평판시스템이라고 할만한 게 아예 없다. 욕먹어도 버티는 놈이 강한 놈이다. 박근혜 각하식으로 말하면 ‘각자도생’의 시대, 더 노골적으로 비유하면 동물의 왕국이다. 이건 무슨 침팬지들이 사는 사회와 본질에서 별 차이가 없다. 피키캐스트나 인사이트 같은 매체(?)가 이런 ‘침팬지의 시대’를 그대로 증거한다.

2. 그나마 정치적 당파성에 기대어 노무현의 향수를 주술처럼 읊거나 그도 아니면 지상파에서 쫓겨난 스타 프로듀서와 기자의 고군분투와 같은 숭고한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면 지갑을 열지 않는다. 삶의 일용할 양식으로 미디어를 소비하지 않고, 그저 고상한 지적 알리바이를 위해, 또 대개는 하루의 피곤을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미디어를 소비한다. 협의의 저널리즘이라고 할만한 영역은 점점 더 축소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스스로 비참할 만큼 절망적인 사건이 터지고, 큰 선거철이 오면 그제야 눈을 반짝인다. 하지만 사안과 정책을 판단할 자료는 없고, 있는 건 그저 온통 ‘이미지’뿐이다. 그마저도 각자 먹고사느라 금방 잊는다. 이게 현재 상황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과 페이스북과 카톡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저널리즘 산업은 질적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개와 고양이, 셀럽과 웃동, 그리고 그나마 봐줄 만한 모호한 휴머니즘이 협의로서의 저널리즘을 완전히 대체하는 순간까지는 이제 겨우 3초 정도 남은 것 같다.

점점 더 우리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컨텐츠, 그러니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 희생하는 존재, 더 큰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스스로 고통받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부조리와 추악한 권력에 대해 더는 분노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루종일 개고생하고, 하루종일 감정노동으로 죽다 살아왔는데, 슬로우뉴스 같은 진지 빠는 글을 읽으라고?!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강요한다면, 내가 생각해도 참 너무하다. 그러니까 정말 답이 안 보인다.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발명된 존재”는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footnote]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마지막 부분, 소위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문단. [/footnote] 우리는 그저 죽어버린 인간을 기억하고, 향수하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리고 나에게조차 서글프지만, 별로 말할 만한 희망이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문득, 초등학교 백일장처럼 희망과 소망으로 결론을 채우고도 싶지만, 글쎄, 이런 글 쪼가리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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