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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1.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2.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3.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4.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5.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6.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7.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8.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9.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10.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11.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12.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13.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14.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15.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16.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17.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18.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19.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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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에서 수도원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야만적인 사회 풍경을 만들어내는 데 그 어떤 사회 제도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은 주의 깊은 보정을 통해 남녀 출생 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해오면서, 남녀가 서로 짝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주기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은 남성의 개체 수를 큰 폭으로 줄인다. 여자도 출산 과정에서 많이 죽기 때문에 남녀 성비는 효과적으로 균형이 맞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확산된 수도원은 성비 균형을 깨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자리잡는다.

중세 성직자의 사생활

남성 한 명이 수도윈에 들어가면 여성 한 명은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성적 충동은 단순한 서약만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영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성욕을 억제할 만큼 자제력을 발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수도사들이 가까운 동네 여자들과 은밀하게 밀회를 즐기는 일은 유럽 전역에 평범한 일상처럼 자리잡았다. 수도사들이 무절제하게 ‘오입질’ 하는 세태를 한탄하고 비난하는 글이 발표될 정도로 이러한 일탈은 심각하고 흔한 것이었다.

수도사들은 자신들과 정을 통하는 여자들을 ‘설거지 부인(cleaning lady)’이라고 불렀다.

도덕적인 문제를 제쳐 놓더라도, 이러한 일탈은 기독교에서 늘 강조하는 ‘신성한 결혼’이라는 가치를 헛소리로 만들어버렸다.

남자와 여자는 한 집에 살면서 서로 성욕을 충족시키며 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당에서 즐겁게 뛰어논다. 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간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 ’설거지 부인들’은 시간의 탄생 이후, 이전의 어떤 문명 속 주부와도 달랐다. 수도사는 혼외자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해도 부양할 어떠한 법적 의무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수도사가 불륜을 저질렀기에, 자신의 과오를 규율할 규칙이나 법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면, 수도사는 사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수도원 규칙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연녀들은 자신과 오랜 기간 정을 통한 수도사가 죽더라도 유산을 한푼도 받을 수 없었다.

누구의 아이인가?

실제로 수도사들은 엄청난 사생아를 산란하듯 쏟아냈다. 1018년 격노 속에서 진행된 파비아 공의회는 성직자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난 아이는 종신 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이며 어떤 유산도 받지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포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공의회: 기독교에서 성직자와 신학자가 모여 교리, 의식, 규범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이런 악습으로 인해, 우리 서방 세계에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이 무수히 넘쳐나게 되었다.” (포티우스; Photius, 820-891)

사회에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할 수도사들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문란한 성생활을 벌인다면, 일반인들 역시 그런 짓을 좀 따라 한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유럽에서 결혼 제도는 거의 몰락할 위기를 맞는다.

매춘의 성행

정작 심각한 문제는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사생아들이었다. 이들은 중세 유럽 사회의 심각한 불안 요소가 된다. 법적 지위도 갖추지 못한 채 사생아로 태어나 자란 남자아이들은 거친 남성적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무력으로 권력을 잡는 것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세 역사와 전설 속 영웅들은 상당수가 서자다. 아서 왕(전설 속 인물), 가웨인(아서 왕의 조카, 원탁의 기사 중 ‘녹색의 기사’), 롤랑(중세 문학작품 중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수좌’), 윌리엄 1세(별칭은 정복 왕, 사생아 왕)은 물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사들도 모두 서출이다. 많은 이들이 깡패나 도적떼가 되었다. 물론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수도원에 들어간 이들도 많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은 평생 천한 일을 하거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어머니처럼 다시 설거지 부인이 되는 이들도 많았고, 아예 매춘부로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은 지역 정부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초래했다.

오늘날 비교적 가벼운 욕(‘새끼’, ‘개자식’)을 뜻하는 배스터드(‘bastard’)은 ‘사생아, 서자’라는 뜻도 가진다. 그림은 ‘정복 왕’ 또는 ‘사생아 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 윌리엄 1세(1027-1087)의 가상 초상화(1620년 작)

암흑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기독교 참회 규정서에는 매춘에 관한 고해성사가 들어있지 않다. 죄목에 들어있지 않으니 매춘이 중세 시대에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다. 중세시대 유럽의 도시에는 거의 빠짐없이 매춘이 성행했다. 매춘이 너무나 성행한 나머지 툴루즈, 아비뇽,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도시들은 매춘을 아예 합법화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심지어 중세 런던 사우스워크(Southwark) 지역의 매춘업소는 윈체스터 주교(성공회)가 소유했다(*McCall, Andrew (1979). The Medieval Underworld (First ed.). H. Hamilton. ISBN 9780241100189.).

앤드루 맥콜의 [중세의 지하세계] (1979)에 따르면 런던 사우스워크 매춘업소는 윈체스터 주교가 소유하고 관리했다.
1177년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앙리는 “고대의 소돔이 폐허 속에서 다시 솟아났다”고 허탈해하기도 했다. 또 한 성직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현실을 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숙한 여인들이 거리를 안심하고 다닐 수도 없구나” (Paul Lacroix, *History of Prostitution*, 1: 733-42)

이러한 상황에서,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성직자 수절 명령은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켰다. 교회의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현실에 분개했지만, 그러한 현실이 엄격한 수절을 요구하는 교회 자신이 만들어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곳곳에 퍼진 매춘과 쏟아져나오는 사생아로 인해 유럽의 공중 도덕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성직 매매 금지, 기혼 성직자의 이혼 요구, 성직자 독신 의무 강제 등 교회 개혁을 추진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15-1085, 재위: 1073-1085)

타락한 교황들의 행진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면서 벌어진 카노사의 굴욕(1077) 이후 교황권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최고의 권력인 교황 역시 점차 타락하기 시작한다. 암살을 공모하고, 전쟁을 축복하고, 성직을 팔고, 끊임없이 돈, 권력, 개인적 이득을 탐했다. 탐욕, 음모, 부패, 옹고집, 비겁함 등 온갖 세속적인 악덕을 모두 보여주기 시작한다.

교황의 실정이 거듭될수록 세속의 왕들, 평신도들, 성직자들은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결정권을 가진 교황들은 개혁요구를 계속 무시했다. 오히려 더욱 추악한 교황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결국 영원의 도시 로마는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식스토 4세

1470년 즉위한 식스토 4세(라틴어Sixt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Sisto IV, 1414-1484, 재위: 1471-1484)는 교황권을 급속하게 몰락시킨 장본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20대에 불과한 자신의 조카 둘을 서둘러 추기경으로 임명한 뒤, 지금으로 따지면 수십억 원에 상당하는 급여를 지급한다. 더욱이 이 두 조카는 무절제한 사치와 방탕으로 악명이 높았다.

교황 식스토 4세(라틴어Sixt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Sisto IV, 1414-1484, 재위: 1471-1484)

교회에서 교황 다음의로 높은 직위라 할 수 있는 추기경은 원래 서품을 받은 성직자만 오를 수 있는 자리이지만, 식스토 4세는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도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 돈을 많이 낸 사람들에게 추기경 자리를 내주었다. 대부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군주’라고 생각했다. 하인 수백 명을 거느리며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았으며, 외출할 때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사냥개와 매를 끌고 다녔다. 식스토 4세는 재위기간 동안 자신의 친인척에게 모두 교회의 주요 직위를 나눠줬는데, 당연히 이들 중 대다수는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대주교와 맞먹는 어떤 고위직에는 8살 아이와 11살 아이가 오르기도 했다.

인노첸시오 8세

식스토 4세 다음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8세(라틴어: Innocenti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VIII, 1432-1492, 재위: 1484-1492)는 역사상 최초로 사생아를 둔 교황이다. 그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추기경들은 그를 ‘성스러운 아버지’ 자리에 앉히는 데 모두 동의한다.

인노첸시오 8세(라틴어: Innocentiu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VIII, 1432-1492, 재위: 1484-1492)

교황이 되고 난 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불명예스럽게 태어난 자신의 아들 프란치스케토 키보(Franceschetto Cybo; 1450-1519)를 출세시키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케토는 밤마다 폭력배들과 로마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을―심지어 수녀들도―납치하여 집단강간했으며, 가정집에 침입하고 약탈하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어떤 죄를 저질러도 아버지 교황이 모두 보호해준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1486년 인노첸시오 8세는 프란치스케토를 메디치 집안 상속녀와 결혼을 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성대한 파티를 여는데,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을 저당잡혀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쏟는다.

한없는 사치로 인해 예산이 부족하자 인노첸시오 8세는 교황청에 많은 직책을 신설하여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도 돈을 내면 용서하고 자유를 주었다. 이에 대한 비난하자 한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죄 지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네. 살아서 돈을 내길 바라지.”

알렉산데르 6세

성직자라기보다는 권모술수에 뛰어난 정치인에 가까웠던 스페인 출신 로드리고 보르지아(스페인어: Roderic Llançol-Borja i Borja)는 성직을 팔아 챙긴 엄청난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인노첸시오 8세 다음에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 1431-1503, 재위: 1492-1503)다. 알렉산데르 6세 역시 교황에 오르자마자 교회의 주요 직책을 자신의 친인척으로 채운다. 어떤 이는 그의 행각을 보며 이렇게 비꼬았다.

“교황이 10명 정도 된다고 해도 교회의 직책을 다 채우지는 못할 만큼, 자기 사촌들을 끌고 왔다.”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 1431-1503, 재위: 1492-1503)

알렉산데르 6세에게도 사생아가 있었는데, 자그마치 16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에서 자신의 혈육으로 인정한 사생아만 8명이었다. 특히 아들 체사레와 딸 루크레치아과 함께 그가 벌인 모략과 범죄는 로마시대 네로와 칼리굴라 이후 볼 수 없었던 타락의 극치를 달렸다.

보르지아 가문의 타락과 범죄를 그린 드라마 ‘더 보르지아스'(The Borgias, 2011-2013, 쇼타임)
“마피아 전에 보르지아가 있었다.” ‘보르지아 가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또 다른 드라마 ‘보르지아'(Borgia, 2011-2014, ZDF; 독일 제2텔레비전) 교황 알렉산드르 6세 이야기는 지금도 소설, 드라마, 영화,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교황에 오르기 바로 전인 59살 때 그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19살밖에 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 줄리아 파르네세를 자신의 정부로 삼는다. 파르네세를 먼저 다른 남자의 결혼시킨 뒤, 결혼식 첫날 밤 그녀를 교황청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또한 나중에 ‘알밤연회’(The Banquet of Chestnuts, 1501)라고 이름 붙여진 만찬을 주재하기도 한다. 교황청 의전관 부르카르트(Johann Burchard)는 매우 건조한 문체로 이 연회에 대해 묘사한다:

“만찬이 끝난 뒤 손님들은 아름다운 창녀 50명과 춤을 추었는데, 창녀들은 처음에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곧 모두 알몸이 되었다. 촛대를 늘어놓은 바닥에 알밤을 흩뿌려 놓았다. 창녀들은 알몸으로 바닥에 놓인 촛불 사이를 기어다니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밤을 주웠다. 교황과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는 손님들에게 모두 보는 앞에서 창녀들과 섹스를 하도록 유도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 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귀족은 물론 고위성직자들도 값비싼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교황청 의전관 부르카르트)

알밤연회(The Banquet of Chestnuts). 1501년 10월 30일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청에서 개최한 역사상 가장 문란하고 타락한 연회. 그림은 알밤연회 가상도.

또한, 부르카르트는 알렉산데르 6세와 루크레치아가 교황청 앞마당에서 흥분한 종마가 암말 위로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던’ 일도 기록하였다. 유죄를 선고받은 추기경들을 교황청 앞마당에 모조리 끌어내 풀어놓고는 체사레가 화살을 쏴서 한 명씩 죽이기도 했다. 지금 보면 믿기 어려운 기행이지만, 이러한 내용은 여러 사람들의 기록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꾸며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에 즉위한 초기에는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던 만큼 반대파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지만, 갈수록 관용을 잃어갔다. 한번은 자신 앞에서 기분 나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몰아 혀를 뽑고 팔을 잘랐다. 그는 72살에 이름 모를 열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는데,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새까만 혀를 내민 채 부풀어오른 그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기 위해 발목에 밧줄을 묶어 말에 매달고 질질 끌고 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환호했다.

알렉산데르 6세가 기독교 세계에서 최악의 교황으로 낙인찍힌 이유는 무엇보다도 근친상간 때문이다. 그의 딸 루크레치아가 18살에 아들(조반니)을 낳는데, 문제는 이 아이가 오빠(체사레)의 씨인지 아버지의 씨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빠’ 체사르 보르지아,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삼각 근친상간 관계. (왼쪽부터, 존 콜리어, 1893년 작)

아이가 태어난 뒤 알렉산데르 6세는 공식칙서와 비밀칙서 두 개를 발부한다. 공식칙서에서는 조반니를 교황의 아들 체사레가 어떤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명시한 반면, 비공식칙서에서는 조반니를 교황이 바로 그 ‘어떤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명시한다. 하지만 조반니의 어머니가 루크레치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딸 또는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단서가 되었다.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의 어머니 반노차 카타네이(Vannozza dei Cattanei, 1442–1518, 왼쪽). 반노차의 어머니 역시 ‘설거지 부인’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6세와 반노차 사이에서 낳은 루크레치아(Lucrezia Borgia, 1480-1519, 오른쪽) 그녀는 오빠 체사레,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와 삼각 근친상간 관계를 맺었다.

율리오 2세

교황 율리오 2세(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 1443-1513, 재위: 1503-1513)는 세속 군주들에게 빼앗긴 교황령 영토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용병을 모아 군대를 이끌고 직접 출정한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향해 막무가내로 대포를 쏘라고 명령했고, 자신의 명령에 반발하는 장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교황 율리오 2세(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 1443-1513, 재위: 1503-1513, 라파엘로 산치오, 1511년 작)

레오 10세

다음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1475-1521, 재위: 1513-1521)는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방탕한 씀씀이로 인해 교황청은 재정적 파탄에 처했다. 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손님들에게 순금으로 만든 접시에 음식을 대접한 다음, 연회가 끝나면 이 순금 접시들을 창 밖으로 던져 테베레강에 버렸다. (물론, 이것은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레오 10세(라틴어: Leo PP. X, 이탈리아어: Papa Leone X, 1475-1521, 재위: 1513-1521)

레오 10세의 어마어마한 씀씀이로 인해 금고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보충하기 위해 교황청은 돈을 긁어모을 묘안을 생각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면죄부’를 파는 것이었다. 교황이 서명한 이 문서를 돈을 주고 사면 그동안 지은 죄가 사해진다고 선전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일가친척을 위해 면죄부를 구입하면 그들을 연옥에서 꺼내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대리면죄부’도 팔았고, 또 자신이 앞으로 저지를지 수 있는 죄에 대한 벌을 미리 면제받을 수 있는 ‘면벌부’도 팔았다.

당시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던 수도사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 내세운 마케팅 슬로건은 사람들을 상당히 현혹했다.

“헌금함 속 동전이 쨍그랑하는 순간, 연옥에서 고통받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그토록 면죄부를 팔았음에도 레오 10세가 세상을 떠날 때 교황청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심각한 재정파탄 상태에 놓였다.

클레멘스 7세

레오 10세 다음으로 하드리아노 6세가 교황에 오르지만 즉위 2년 만에 사망한다. 추기경들은 재정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메디치 가문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클레멘스 7세(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 1478-1534, 재위: 1523-1534)다. 그는 교황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스페인의 왕 카를 5세와 맞서다가 결국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 카를 5세는 로마를 향해 진격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카를 5세는 로마를 100km 남겨놓고 진격을 멈춘다.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6만 두캇(ducat)을 받고 휴전협정을 맺은 뒤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전쟁이 중간에 멈추자 갈곳을 잃어버린 용병들이었다. 배도 고프고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하여 불만에 휩싸여 있는 이들을, 로마와 적대관계에 있던 이탈리아의 여러 공국들이 부추겨 로마로 돌진하도록 한다.

카를 7세와 맞서 ‘로마 대약탈'(1527)을 초래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 1478-1534, 재위: 1523-1534)

로마 대약탈(사코 디 로마; sacco di Roma, 1527)

1527년 5월 6일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카를 5세가 끌고온 용병들이 로마로 밀려들어왔다. 야만인들의 축제가 로마 전역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황급히 세인트 안젤로 요새(Fort Saint Angelo)로 피신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강간, 학살, 방화, 약탈의 희생자가 되었다.

1100년 전 반달족에게 짓밟혔을 때보다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폭도들은 집집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약탈하고, 무차별적으로 강간하고 살인했다. 테베레강은 둥둥 떠다니는 시체로 가득했으며, 도시 곳곳에 불길이 치솟았다. 폭도들은 약탈한 추기경의 옷을 입고 성베드로광장을 활보했다. 교회에 쌓여있던 금은보화도 모두 약탈했으며, 수녀들은 폭도들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간이 유곽으로 끌려가 성 노예가 되었다. 로마를 파괴한 이 폭도들도 역시 신심 깊은 기독교도들이었다.

로마 대약탈(Sacco di Roma). Francisco Javier Amérigo Aparicio, 1884년 작.

그리스도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 로마의 치욕은 너무도 처절했다. 결국 6개월 뒤 로마에 역병과 기근이 찾아온 뒤에야 침입자들은 이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도시를 떠났다. 1527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로마에는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약 5만 4,000명이 거주했다(*매슈 닐,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p. 287). 하지만 카를 5세의 사코 디 로마로 인해 사상자와 해외로 도피한 사람은 무려 4만 5,000여 명에 달했고, 그중 사망자도 무려 1만 2,000여 명에 달했다.

1527년 역사상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로마 대약탈’의 피해 규모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 족의 약탈로 시작해 450여 년 전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한 약탈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번의 기존 로마 대약탈, 그 처참함을 압도했다. 하지만 유럽인은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지난 80년간 방종, 방탕했던 교황들에 대해 하느님이 천벌을 내린 것이라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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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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