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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이 글은 영화 [국제시장]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의 불안을 염려하는 독자께 미리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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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ense]국제시장은 부산 중구 대청동 일대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거주지였고,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 몰려와 새로운 상권을 이뤘다. 현재는 해운대 등 신시가지에 밀린 부산의 대표적 구도심이다.

덕수의 첫 기억, 눈 내리는 흥남 부두 

덕수(황정민)는 60년 넘게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잡화점을 운영한다. 그는 툭하면 화를 내는 고집불통 노인이다. 영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고집불통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해 보라는 듯, 덕수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보여준다.

첫 번째 기억은 눈 내리는 흥남부두. 아버지 덕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덕수의 첫 기억. 눈 내리는 흥남 부두.

한국전쟁 도중이던 1950년 12월 8일 흥남, 미군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에 피난민 10만 명 넘는 인원이 부두로 향했다. 덕수네 여섯 식구도 이 무리에 있었다. 아버지는 남동생을, 어머니는 여동생을, 10살쯤 돼 보이는 장남 덕수는 막내 여동생 막순이를 업고 달렸다.

인파에 밀려 할머니, 어린 소녀 등 노약자들이 먼저 넘어졌다. 넘어진 이들을 돌보는 자들은 없다. 밟고 달려야 한다. 미군의 배를 얻어타고 탈출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국제시장

미군은 피난민들을 받아주기로 했다. 제때 부두에 도착한 이들은 일단 조각배에 오른 뒤 밧줄 사다리를 타고 거대한 군함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기어 올라가야 했다. 1차 관문을 통과했던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무더기로 탈락한다. 힘이 빠져서, 밧줄을 놓쳐서, 고드름에 맞아서. 남이 떠밀어서. 등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덕수의 등에 업힌 막순이는 배 밑으로 떨어진다.

죄책감에 우는 덕수에게 아버지는 “지금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족을 지켜라”는 말을 남기고 막순이를 찾으러 다시 배 아래로 내려간다. 배는 떠난다.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과 폭파된 부두를 뒤로 하고.

스스로 힘으로만 탈출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군함을 타고 탈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확히 탈출한 이들의 죄책감과 평생을 걸쳐 진행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이야기다. 피난민들이 군함에 오르는 과정은 한국인의 삶 자체였다. 제시간에 오르지 못하면 죽는다. 뒤처져도 죽고, 뒤돌아봐도 죽는다.

누군가를 떨어내야 하는 아수라장에서 어린 덕수는 동생을 배에 태우지 못하고, 자신 때문에 아버지와도 헤어졌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가 용서받는 길은 아버지의 유훈을 완수해내는 일뿐이었다.

국제시장

그에게 과업을 수행할 첫 번째 기회가 왔다. 그는 친구 달구(오달수)와 함께 국제시장 한복판에서 구두닦이를 하다가 미군에게 초콜릿을 얻는다. 나이 든 동네 형들이 초콜릿을 뺏으려 시장 한복판에서 덕수와 달구를 두들겨 팬다. 어른들은 이승만의 정전방송을 듣느라 이를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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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국민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 담화가 울려 퍼지는데 두둑한 자루를 든 군인 2명이 덕수가 얻어맞는 장면을 지나쳐 어디론가 달려간다. 군납품을 빼돌리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서도 덕수는 초콜릿을 포장도 뜯지 않고 입에다 집어넣고 폭행을 견뎌 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영화의 초반부는 정직하게 말한다. 1950년대 한국, 흥남 탈출에서부터 국제시장까지 아무도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기댈 곳은 가족뿐이었다.

국제시장은 국가주의를 미화하는가? 

국제시장을 두고 국가주의 미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 어긋난 독해다.

영화는 1960~70년대를 다루면서 폭압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도 보호받아야 할 10살 아이가 5살 동생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보다 더 폭압적인 현실이 무엇이겠는가. 영화는 이런 종류의 폭압과 부당함을 숨기지 않는다.

폭압의 주체 여부를 떠나 국가 자체가 덕수의 삶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덕수는 흥남철수 때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가족들이 ‘생존’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배를 타야 할 때마다 몸을 던졌다.

60년대 서울대에 합격한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독일로 떠나고, 70년대 여동생을 결혼시키고 고모가 남긴 가게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80년대에는 트라우마의 원인인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나간다.

국제시장

덕수에게 국가란?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일상적 의례를 제외하면 국가는 그 전환의 순간에만 나타났다. 이때 국가가 한 일은 국립 서울대에 동생을 합격시켜주는 것, 독일과 베트남에 갈 기회를 주는 것, 공영방송 KBS를 통해 이산가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국가는 국기에 대한 의례와 같은
국제시장에서 국가는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일상을 제외하곤 부재한다.

‘기회’를 주되 ‘네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덕수에게 민주화나 국가와 같은 문제가 시야에 들어온다면 더욱 부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특히나 공무원이나 군인, 대기업이 아닌 소상인, 즉 자영업자라는 점에서 덕수는 국가와 접촉할 계기가 더욱 없다. 덕수가 국가의 덕을 가장 강력하게 본 것은 군인으로서 베트남에서 구조되는 순간이었다. 바꿔 말하면 국가와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는 한국 현대사의 일면은 ‘국가의 부재’로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세대를 위한 ‘응답하라 1950-1987’

영화는 폭압적 국가 대신 ‘배’만 내어주는 국가를 통해 각개약진이라는 아주 익숙한 한국인의 생존방식을 그려낸다. 이야기는 상투적인 진부함으로 가득하다.

신파와 코미디. 연출은 촌스럽고 흐름이 뚝뚝 끊기지만 디테일한 배경 고증과 유머라는 상업영화의 미덕도 충분하고, 예측 가능한 코미디는 관객 입장에서는 편안하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면도 있다. 몇몇 성적인 농담은 불쾌하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하다.

이를테면 덕수의 오랜 친구 달구는 ‘백마’를 부르짖으며 서독으로 향하지만 정작 거칠고 강한 게르만 여성에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호소하던 유순한 인상의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다. 코미디를 위한 연출이지만, 세계에서 준주변부 국가인 한국 남성이 경험하는 좌절과 성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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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과정에서 느끼는 희망, 절망, 좌절, 성취, 사랑, 고통, 슬픔을 모두 아주 익숙한 형태로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는 미덕일 것이다. 한국전쟁 세대를 위한 ‘응답하라 1950-1987’인 셈이다.

고생한 우리와 우리를 고생시킨 ‘나쁜’ 적들 

문제는 영화에서 성장과 좌절의 계기가 되는 ‘외부’를 그리는 데 있다. 영화에서 젊은 세대는 시종일관 나쁜 사람들로 나온다. 아버지에게 자녀를 맡겨두고 해외여행 떠나는 자식들, 제 앞길만 생각하는 철없는 여동생, 탐욕스러운 재개발업자, 이주민들을 무시하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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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독일 파견 광부 시절을 그리는 대목에서 서독인 관리자들에 대한 시선도 좋지 않다. 그들은 대놓고 한국인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정을 주지 않는 관리자로 등장한다. 광산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안전 문제로 구조를 포기한다. 한국인 광부들은 자신의 힘으로 동료를 구출해내고 독일인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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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 속에 스스로 가족을 지켜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덕수, 아니 덕수 세대가 처음으로 집단으로 성취를 경험하고 마침내 아버지가 된 순간이다. 실제로 덕수는 이 사건 이후에 진짜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베트남전에서는 아이들마저 구한다. 바로 그런 성취를 위해서 파독 광부들의 증언과 달리 독일인들은 나쁜 부분만 부각돼 묘사돼야 했다.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베트콩들은 주민의 적으로만 그려져야 했다.

영화 속 덕수의 세대는 국가의 보호 없이 오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을 지켜내는 성취를 이뤘다. 그 결과일까. ‘우리’가 아닌 ‘외부’를 향한 시선은 항상 적의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와 닮은 자폐적 성장이다.

덕수의 소외를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한 젊은 세대

젊은 세대가 부정적으로 그려진 이유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독일인들이 과거 덕수의 성장을 위해서 등장한다면 젊은 세대는 오늘날 덕수의 소외를 증명하기 위해서 등장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와도 밀접하다. 영화는 ‘우리 시대 꼰대 취급받는 어르신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을 표방한다. 영문 제목이 아버지를 위한 송가(ode to my father)다.

국제시장

그런데 영화에서는 ‘고집불통 노인네’ 덕수의 모습은 과장될 정도로 그리지만, 젊은 시절 나름 사랑스러웠고 로맨티스트였던 덕수가 왜 그런 꼴통 노인네가 됐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고생한 건 알겠는데, 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는 의문이 든다.

덕수는 왜 꼰대가 됐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덕수의 기억은 이산가족상봉에서 멈춘다.

흥남에서 잃어버린 여동생 막순이는 미국에 입양돼 자신의 옛 이름마저 잊어버렸지만, 오빠 등에 업혔던 기억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덕수의 부채의식이 불완전하게나마 해소되는 순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덕수는 꽤 다정한 가장이었다.

그 이후 덕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국제시장 인근 멀티플렉스 주인이 된 달구와의 격차가 왜 생겼는지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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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과의 대립이 이유라면 자녀들이 장성한 이후인 90년대 이후 상황이 나왔어야 했다. 재개발 문제로 골치를 썩인다면 부산에도 재개발 붐을 일으켰던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나와야 했다. 이를테면 6070 국가는 덕수에게 ‘기회를 줬으니 살아남으라’며 몇 차례 매러디스 빅토리호를 제공했고, 상인 덕수는 그런 방식으로만 국가와 만났다. 이 시절 그는 승선에 실패하지 않았다.

영화의 진짜 결함: 이유 없이 꼰대가 된 덕수

민주화 이후에는 어땠을까?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를 만났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답했다가는 민주화 이후 정부를 불편하게 그렸다는 논란에 휘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답하지 않고 넘어간 통에 덕수는 이유 없이 꼰대 노인네가 됐다.

“젊은 시절 너희를 위해 고생했으니 꼰대가 되더라도 이해하고 존경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겠지만, 꼰대가 돼 가는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늙으면 원래 저래”라는 의도와 정반대인 결론으로 향하게 한다.

윤제균은 아마 이 맹점을 보완하려고 나쁜 젊은 세대와 덕수를 끊임없이 대비시켰겠지만, 이 때문에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에 세대갈등의 여지를 주며 결함을 만들었다.

덕수는 왜 꼰대가 되었을까? 영화는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덕수는 왜 꼰대가 되었을까? 영화는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정치를 지우려다 정치편향 논란에 휘말리다 

즉, 영화의 문제는 정치적이어서가 아니라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려고 애쓴 데 있다.

덕수네를 방치한 국가(이승만)-덕수네에게 배는 준 국가(박정희)-소외된 덕수(현재)를 구성하고 ‘빈 구석인’ 중년 이후 덕수를 나쁜 젊은 세대로 어떻게든 땜빵하려고 하니 박정희 시대 미화 논란까지 이르는 것이다.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려면 젊은 시절의 순수하고 가족밖에 모르던 덕수에게서도 큰오빠/형으로서의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면모가 더 강조됐어야 했다.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은 서울대 들어간 동생과의 관계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영화는 흥남 철수 장면에서 보여준 정직한 묘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안이함이 국제시장만의 것은 아니다. 보수 친화적 정서의 결과도 아니다. 불편한 질문은 가급적 배제하고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주인공을 순백으로 설정하고, 정치한 갈등구조 대신 단순한 선악 대립 구도로 서사를 구성한 연출은 진보 친화적 정서의 영화에도 숱하게 등장했다.

[국제시장]이 취한 전략, [카트] [변호인]도 택했다 

[카트]는 이랜드 투쟁에서 민주노총을 제거하고,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라는 따뜻한 이야기로만 전달하려 했다. [변호인]은 “사회주의자도 아닌 실존주의자를 사회주의로 둔갑시키는 5공 정권의 폭압성”을 고발하면서 ‘사회주의자는 고문해도 돼?’라는 의문을 비껴간다.

두 영화가 회피한 지점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윤리적으로 취약한 부분이다.

변호인 (양우석, 2013) 위더스필름㈜(제작), NEW(배급) / 카드(부지영, 2014) 명필름(제작), 리틀빅픽처스(배급)
변호인 (양우석, 2013) – 위더스필름㈜(제작), NEW(배급) / 카트(부지영, 2014) – 명필름(제작), 리틀빅픽처스(배급)

이를테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자식을 잃은 불쌍한 존재였을 때 동정받았지만, 진상규명을 요구할 권리를 내세우자 사회의 벽에 부딪힌 사실은 [카트]가 민주노총을 피해간 이유와 무관치 않고,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은 [변호인]이 눈 감은 지점과 연결된다.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를 위한 송가가 되고자 했다면, 아버지의 불편한 모습도 좀 더 정면돌파했어야 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이 부분에서는 좀 더 모범적이다.

영화 ‘주변’에만 머무는 [국제시장] 논란 

영화 [국제시장]의 서사적 결함은 우리 사회에서 텍스트를 소비하는 방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편한 질문을 용납하지 않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듯이 흥행한 아니 흥행할 영화는 비판할 수 없다.

비판이 가능하다면 영화 자체에 대한 접근보다 영화를 둘러싼 상황에서 시작되는 영화 저널리즘의 빈곤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 몇몇 신경을 긁는 점에도 불구하고 [국제시장]을 보수주의 내지 국가주의 영화로 평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최근 본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영화였다. 자신만의 서사가 없던 이들에게 결함이 있을지언정 서사를 제공했다. 한국인의 삶의 원형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초반부가 인상에 남는다. 덕수는 끝내 구원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좀 더 열려있는 영화다.

국가(아버지) 가지지 못한 세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덕수는 흥남 시절 어린 덕수의 모습으로 엉엉 울고, 아버지가 그를 껴안으며 위로한다.

국제시장

덕수의 삶이 힘들었던 까닭은 평생 국가라는 아버지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생 흥남 비료공장 노무부 주임이었던 아버지는 전쟁으로 단절되지 않았다면 산업화 1세대여야 했다. 한편으로 배에 승선하지 못한 딸을 구하려 내린 아버지였다. 그는 모든 가족을 구하려 했다.

한국인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이상적 아버지상은 보수/진보할 것 없이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좀 더 다양한 틀에서 풍부하게 논의됐으면 한다. 영화는 잠시 즐거운 소비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텍스트를 끝까지 파헤쳐 영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덕수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할 만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평론, 나아가 비평에 근거한 영화 저널리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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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도 표시 없는 이미지 출처
    국제시장 (윤제균, 2014) – ㈜JK필름(제작), CJ 엔터테인먼트(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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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댓글

  1. “젊은 시절 너희를 위해 고생했으니 꼰대가 되더라도 이해하고 존경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겠지만, 꼰대가 돼 가는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늙으면 원래 저래”라는 의도와 정반대인 결론으로 향하게 한다. – 가 아니라 덕수는 아버지를 찾고 싶었던 거죠.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꽃분이네”이기 때문에, 꽃분이네도 자기가 죽을 고생하면서 산거구요. 물론, 젊은 세대들이 봤을 때는 그 때까지 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뻔한 거라 생각하겠지만, 덕수 입장에서는 정말 궁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일하게 아버지만 못 찾았으니…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덕수가 한 얘기가 ‘그 가게 팔아버리라’는 거였죠. 아버지는 이제 늙어서 더이상 찾아오실수도 없을 거라면서…

    그러니깐… 그 꼰대가 된 이유를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죠. 하지만, 그런 꼰대들을 이해해라 도 아닙니다. 그 꼰대도 결국 가게를 팔아버렸으니, 어른들은 이제 과거에서 부터 좀 자유로워 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아닐런지..

  2. 국가주의를 못찾으셨어요? 그 시대 가정들이 경제적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을것 같아요. 서독 광부? 독일 간호원? 베트남 기술자? 각각 몇천명 밖에 안돼요. 대부분은 장사, 막노동, 지게, 가내수공업, 식모, 버스 차장, 공순이, 유흥업소…등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국제시장이라고 붙였지만 실제적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잠시 스칠뿐이고 장사꾼의 일상과 고난과 애환은 없어요. 대신 엉뚱하게 해외가 등장합니다.
    그것도 보수 언론에 의해 박정희 시대의 표상으로 왜곡작업된 독일 광부와 간호사를 꼭 집어 끌어들이며 반 이상의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해서 국내적인 국가 책임문제, 국민내부의 빈부/노사의 갈등은 피해가며 대신 노예같은 한국인과 비정한 독일인을 갈등구조로 만들죠. 이게 국가주의지요. 내부의 문제를 외면하고 외부와의 갈등으로 눈을 돌렸죠.
    실제라면 황정민은 미군부대 물건 빼오기 작업을 했을 것이고 서울대학 간 동생은 아마 한일회담 반대 데모했을 것이고 극중에 멋만 부리던 여동생은 공순이로 일해서 번 돈을 작은 오빠 등록금으로 내놨을겁니다.
    그리고 부마항쟁시절에 경찰에 쫒기던 학생들을 누가 숨겨줬는지 아세요? 부가세 세제 도입으로 화 나있던 국제시장 상인들이었습니다.
    제가 그 시대 그 도시에 살아봐서 잘 압니다. 시대와 국제시장은 왜곡되게 그려졌습니다..

  3. 기사의 전반-중반부는 제작사에서 제공해주는 시나리오 설명을, 후반부는 기자 자신이 하고픈 “좌파”적 시각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영화로 보세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흑도 백도 아닙니다.
    다양한 시각입니다. 있는 그대로 존중하세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국제시장은 주인공의 개인적 이야기이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완벽한 영화는 없습니다.
    다만, 감사, 존경 등의 사회의 기본적 미덕은 심지어 공산주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권장됩니다.
    긍정적 사고에 긍정적 발전이 있습니다.

  4. 한 24시간짜리를 만들면 되겠군요. 아니다 차라리 다큐멘타리가 어울리겠습니다. 감독은 쑥국을 끓였는데 짬뽕 안만들었다 타박하시면 어쩝니까.

  5. 이정도 팔력으로 통찰력으로 편엽된 시각으로 글을 쓰니 이해를 못하죠. 다른 부분의 과장은 과장으로 받아 들이고 꼰대가 된 이유는 못 받아 들이는 군요. 실제보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 꼰대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보는 마음과 시각을 가지세요. 글고 똑똑한 넘은 국가의 자식입니다.

  6. 누구맘대로 국가의 자식이래 내 자식이지. 국가라는 체제를 활용할 생각은 못하고 귀속되서 노예가 될 생각만 하는 이런 개꼰대 마인드를 자랑이라고 지분거리다니.

  7. 공순이보다 독일 광부가 더 고생했다는데 한 표 겁니다. 공순이는 죽을 고비는 안 넘겼죠?
    대한항공의 모체인 한진 그룹은 원래 운수업으로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에서 미군의 군수물자 트럭을 몰다가, 앞에 폭탄이 터지는 위험 상황에서, 근로자들이 운전을 두려워하자, 임원진들이 운전을 직접하여 키운 회사입니다.
    즉, 베트남, 필리핀보다 못 살던 나라에서 기적은 없었습니다. 목숨 걸고 경제발전 시킨 겁니다.

  8.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 평론을 위한 평론. 도대체 이런 글쓰기는 어디서 배웠는지.
    라면을 먹으면서 영양학을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라면은 라면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있지. 라면에 대해 평하려면 라면의 존재가치에 더 집중해야지 라면의 영양학적 결함을 따져서 뭐하게. 김밥천국을 가는 사람은 라면이 영양학적으로 결함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도 라면을 먹고,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은 서사적 결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즐거워한다.

    자신만의 눈이 없이 남이 쓴 비평을 통해 비평을 배우고, 또 그렇게 배운 비평으로 쓴 비평을 통해 비평을 배운 비평들이 넘쳐나니 비평의 근친상간이 횡횡해서 여기저기 기형적인 비평들이 좀비처럼 돌아다닌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국제시장의 서사적 결함을 논하기 전에 자신의 글이 가진 논리적 결함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9. 공순이들 죽을 고비 많이 넘긴 걸로 아는데요. 당시 노동착취의 현장을 기억해 봅시다. 괘니 젊은 사람이 몸에 불 지르고 죽은 거 아니예요. 폭탄 얘기 나와서 말입니다만, 물론 그분들 고생하신건 알지만 외국이 아닌 한국 국내 어디에서라고 해서 거친 현장이라면 어디엔들 무용담이 없겠습니까. 누가 더 고생했다느니 하면서 비교할 거 없어요.

  10. 적당히 땡겨쓴 일반론은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워요. 스스로 쓰신 댓글에서 ‘영화’라는 단어를 ‘기사’로 바꿔서 보면 어떤 게 문제인지 아실 듯 합니다.

  11. 최근 잘 나가는 대중영화들이 정치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탈정치적인 공간에 머무르려 노력한다는 것은 저도 늘 느끼던 것이라…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이 잘 나가죠. 심지어는 요즈음엔 정치인들조차도 탈정치적 이미지를 가진 이들이 인기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분들이 이 영화에 국가주의가 왜 없느냐, 라고 말씀하셔서 생각해 봤는데… 이 영화의 경우 개발세대의 어떤 낭만주의랄까 그런 걸 반영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가 부차적으로 묻어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기억의 가장 로맨틱한 현장으로 알려진(혹은 선전된) 것이 파독노동자의 현장이나 베트남 참전의 현장이겠고, 그 현장을 중심으로 그리다보니 소재의 특성상 다른 현장들이 무시되는 게 아닐지. 그런 낭만주의의 와중에는 노동현실이나 독재의 기억은 끼어들기 어렵기도 하니 영화의 뉘앙스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어찌 보면 웃는 얼굴의 악의없는 폭력성같기도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 영화 버전도(소설은 다르지만) 좀 그런 현장을 취사선택하는 모습이 있기도 한데 이건 영화의 분량상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그렇다고 포레스트 검프처럼 좋은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고). 애초에 현대사를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술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선택된 기억에 대한 영화니까, 태생상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놓고 보면, 국가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ㅎㅎ; 횡설수설해 봤습니다.

  12. 그 자위용 불쏘시개라면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어렵겠던데요 ㅎㅎ 그쪽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같기도 하던데. 우익이 타겟이든 뭐든 간에 너무 작품의 수준이 낮아요.

  13. 라면의 존재 의의는 끼니 때우기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평론이 건강을 목표로 한다면 라면이 영양식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평론의 가치겠지요. 서로 목적이 다른 법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이 라면이 어떤 맛 라면인지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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