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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국제시장]을 봤다.

정치적 논란으로 인해 안 좋았던 이미지와 달라 재밌었다. 영화를 보며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흥남 철수, 다른 한 번은 이산가족찾기. 특히 이산가족찾기는 영화보다 자료화면이 더 슬펐다. 그러나 수도 없이 짜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젊은 세대를 묘사한 부분에서 그랬다.

그러나 (왜곡보도로 잘못 알려진 평이지만) “토 나오는 영화”라거나 “산업화 세대의 정치적 보수성을 탈색시킨 영화”라는 평에 동의할 수 없었고,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세대갈등으로 수렴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을 통해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가능성이 있었던 영화였다.

일각에서는 국제시장을 ‘우리들의 영화’로 띄웠다. 이 과정에서 ‘우리’를 규정하기 위해 ‘젊은 세대’ 내지 ‘좌파’가 먹잇감이 됐다. 종합편성채널 TV조선은 영화평론가 허지웅 씨의 한겨레 대담 기사 중 발언 중 “토가 나온다”는 구절을 구색에 맞게 각색했다.

허지웅: 머리를 잘 썼어. 어른 세대가 공동의 반성이 없는 게 영화 [명량]수준까지만 해도 괜찮아요. 근데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

– 한겨레, 진중권 허지웅 정유민의 ‘2014 욕 나오는 사건사고 총정리’

출처: TV조선 http://www.tvchosun.com/main.html
출처: TV조선

기성세대의 자기 위로 vs. 젊은 것들 공격 도구 

 “우리가 했던 고생을 후손들이 하지 않아서 다행” (허지웅이 대담에서 인용한 영화 주인공 덕수가 월남에서 보낸 편지 중 일부)이라는 구절에 나는 크게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다. 현대 한국인 중에 가장 끔찍한 경험은 해방 직후부터 시작해 한국전쟁일 것이다. 이 시대를 헤쳐나온 사람들은 요즘 관점으로 트라우마 치유가 필요했지만, 곧바로 생존경쟁에 내던져졌다.

인생 자체가 트라우마다. 그들이 ‘대신’ 겪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가 겪었더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이 정도 위로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동료 시민에 대한 가혹한 처사다.

그러나 이 발언이 소시민의 자기 위로가 아니라 “젊은 것들은 고생도 모르고 권리를 주장한다”며 공격하고 젊은이들이 제기하는 사회문제를 은폐하는 용도로 쓰인다면 역겨운 일이다.

영화는 덕수의 발언에 담긴 심리를 전자로 해석할 여지도 후자로 해석할 여지도 남겨둔다만(리뷰 참조), 종편은 영화를 띄우기 위해 후자를 적극적으로 부각했다. 정치편향 논란에 이어 국제시장을 꼰대들이 징징대는 영화로 생각하는 즉각적인 반발이 나타났다.

게으른 진영논리… ‘보수의 영화’로 묶일 뻔한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보수의 영화’라는 괄호 속에 묶일 뻔했다. 애국을 강조하던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괄호를 확정 지을 뻔했으나, 영화업계 최초로 말단 스태프까지 모두 표준 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영화를 제작했다는 보도가 특히 논란이 한창이던 중에 10아시아 인터뷰노컷뉴스 인터뷰 등으로 거듭 확인돼 논란을 잠재웠다.

[국제시장]은 연일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사회적 논란을 불렀지만, 막상 영화 자체를 텍스트로 여기고 진지하게 분석하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이른바 비평의 실종이다. 논쟁을 위해 영화를 진지하게 보고 장면과 대화의 맥락을 분석하고 감독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편이 나뉜 상태에서 영화는 싸울 기회 한 번을 준 것에 불과했다. ‘산업화세대’, ‘박정희 미화’, ‘보수’, ‘싸가지’, ‘좌파평론가’. 논쟁에 사용된 언어들이다. ‘우리 편 영화’라는 기호와 ‘저쪽 편’에 대한 즉자적 반발만 있으면 ‘안이하게’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영화 저널리즘 실종… 사회 기사 돼 가는 영화 기사 

‘안이한 연출’과 ‘안이한 논쟁’은 ‘안이한 저널리즘’이 연결고리가 돼서 나타난다. [레미제라블]과 [카트], [변호인]을 연속으로 거치며 든 생각이지만, 어느 순간 영화 저널리즘이 실종되고, 영화 기사가 사회부 기사가 돼 가고 있다.

영화 전문잡지가 폐간하는 등 평론은 예전에 사라졌는데, 영화를 ‘신드롬’으로 바라보는 현상은 더욱 강화되고, 이념전쟁의 도구가 되는 분위기까지 생겼다. 000 영화 열풍 왜? “사회변화를 바라는 심리” 따위의 기사를 나 역시 숱하게 써 왔음을 고백한다.

영화산업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냥 재미로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그 ‘재미’의 요소가 뭔지 진지하게 분석하는 기사의 비중을 줄인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요즘 영화 저널리즘이 추락한 원인으로 보인다. ‘영화 저널리즘’이란 것이 있다면 말이다.

나아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흥행한 아니 흥행할 영화는 비판할 수 없다는 듯한 이상한 규칙이 굳어져 가는 것 같다.

무식해서 용감한 발언 부추기는 저널리즘의 빈곤  

텍스트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영화 분석기사는 스포일러가 필연적이다. 스포일러 없는 영화 소개 기사는 결국 ‘돈 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매체는 리뷰 기사를 꺼리고, 뛰어난 리뷰 기사가 있더라도 영화와 관련 숱한 어뷰징 기사들이 인터넷 세계에서 기사를 묻어버린다.

‘성찰 없는 영화 감상’ 속에서 영화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점점 줄어들고, 텍스트를 안 보고 하는 용감하고 무식한 발언이 진영 논리의 힘으로 나쁜 논쟁을 계속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도 보지 않고 용감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정치 외적’ 배경은 이런 대목이 아닐까 싶다.

박근혜 대통령은 보지도 않은 영화의 장면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그 장면에서 무조건적인 '애국심'을 읽어낸다. / 출처: 국제시장 (윤제균, 2014) ㈜JK필름(제작), CJ 엔터테인먼트(배급)
박근혜 대통령은 보지도 않은 영화의 장면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그 장면에서 무조건적인 ‘애국심’을 읽어낸다. / 출처: 국제시장 (윤제균, 2014) ㈜JK필름(제작), CJ 엔터테인먼트(배급)

영화 저널리즘의 빈곤은 오늘날 미디어업계가 처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만, 그럴수록 필요한 덕목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평론가가 있더라도 흥행할 영화는 흥행할 것이다. 평론가들은 ‘대중 위에 있는 고매한 존재’라며 난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악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비평이 쌓이고 쌓인다면 논쟁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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