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직접 뛰는 건 거의 민폐 수준이지만 경기를 보는 건 꽤 즐깁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뛸 때는 주말마다 새벽 서너 시에 축구를 보는 일도 잦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축구를 잘 안다고는 생각지 않고, 더구나 축구계 동향에 대해서는 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최근 홍명보 국가대표팀 감독 유임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논란이 많아 제 생각을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축구공
Joe Shlabotnik, CC BY NC SA

저는 축구경기를 여럿이 함께 보는 걸 싫어합니다. 가능하면 조용히 혼자 보거나 그게 힘들다면 차라리 노트북 앞에 앉아 이어폰 끼고 인터넷 생중계를 보려고 합니다. 브라질월드컵 때 러시아와 경기하는 날 일찍 출근해 출입처 대변인실에서 경기를 시청했는데 무척 후회했습니다. 상대 문전에서 패스하면 “왜 슛을 때리지 않는 거냐. 병신아~” 하고, 상대 문전에서 슛을 때리면 “왜 패쓰를 안 하냐. 이 멍청아” 하는 소리에 축구 보기가 싫어질 정도였습니다.

축구를 시청하는 영국 시민들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영국 축구팬들 (사진: Casey Hugelfink, CC BY SA)

어찌어찌 하다 여럿이서 재방송을 보게 됐는데 이번에도 “저것도 못 넣냐~” “왜 패스를 안하냐~” 하며 축구선수들이 오징어나 되는 듯이 씹어대는 게 영 마땅찮았습니다. 얘기 끝에 “홍명보가 원칙을 깨고 박주영을 기용한 게 문제다”는 얘기가 나오고 “이게 다 박주영이 홍명보 고려대 후배라서 그런 거다”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웬만하면 아무 얘길 안 하려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16강전 결승골 넣은 안정환도 그때 페루자 구단에서 후보선수였잖아!”

축구전문가는 많지만 K리그에 관해선 침묵?

대한민국에는 축구전문가가 5,000만명 쯤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축구전문가들이 한국 프로축구인 K리그를 두고 전문가로서 식견을 드러내는 걸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 많고 많은 축구전문가들은 다만 월드컵이나 국가대표팀 경기 때만 축구 전문가 모자를 쓸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결과를 기준으로 내용을 꿰맞춥니다.

K리그
이른바 ‘국대'(국가대표) 경기에는 열광하지만, 정작 자국 리그인 K리그에 관한 관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이미지: K리그 소속팀)

2002년 국민영웅이었던 안정환이 만약 그때 결승골 못 넣고 한국팀이 16강에서 떨어졌다면 ‘화장품 모델하느라 겉멋만 들었다’거나 ‘페널티킥도 못 넣냐 병X~’이라는 소리가 한반도를 뒤덮었을 거라 자신합니다. 아마 ‘왜 후보선수 기용했느냐. 수비수 빼고 공격수만 그렇게 집어넣는 게 어디 있느냐’며 히딩크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겠죠.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제가 홍명보 유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략 짐작하셨을 겁니다. 예. 저는 대한축구협회가 홍명보 감독을 경질하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봅니다. 많은 이들이 이걸 두고 축구협회가 무책임하다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축구협회가 이런 결정을 할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신선한 충격입니다.

홍명보 유임을 지지하는 이유

많은 분들은 1998년에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한 것과 비교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이번 결정을 지지합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1998년 축구협회장이었던 정몽준보다는 현 축구협회장인 정몽규가 훨씬 더 책임감이 있어 보입니다. 차범근을 경질했던 그런 엉터리 결정은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하고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홍명보 유임은 좋은 결정입니다. 홍명보는 내년 아시안컵까지 임기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축구계를 망치는 고려대 학맥 때문에 홍명보를 유임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정몽규도 홍명보도 박주영도 모두 고려대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차범근 역시 고려대를 졸업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시에는 서울대 나온 정몽준이 고려대 나온 차범근을 경질했고, 이번엔 고려대 선후배니까 봐 준 거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세상일이 그 정도로 단순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정홍원은 서강대가 아니라 성균관대, 안대희와 문창극은 서울대 졸업한 걸 어찌 해석할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고려대
최악의 브라질 월드컵 결과 원인 중 하나가 ‘고려대’ 학맥을 챙긴 홍명보 감독의 ‘엔트으리'(엔트리+의리)라고 많은 이들이 비아냥거린다. (이미지: 고려대 로고)

혹자는 홍명보가 박주영을 편애하는 반면 이명주는 대표팀에 발탁하지 않은 것을 지적합니다. 윤석영을 편애하고 박주호는 제대로 쓰지 않은 것도 지적합니다. 사실 저 역시 박주영이나 윤석영을 기용한 부분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감독의 고유권한입니다. 감독은 자신이 판단해서 선수를 기용하거나 탈락시킵니다. 그에 대한 칭찬과 비난은 온전히 감독 몫입니다. 잘못하면 자기가 쫄딱 망하게 생겼는데 학교 후배라고 막무가내로 기용하는 수준이라면 런던올림픽 동메달은 무슨 수로 땄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홍명보의 아이들’에 대한 반론

다만 ‘홍명보의 아이들’ 위주로만 선수를 기용해서 문제였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대표팀에서 탈락해 논란이 됐던 이명주 역시 한때는 언론에서 ‘홍명보의 아이들’로 불렸습니다. 사람들은 홍명보호에 승선한 사람만 ‘홍명보의 아이들’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요. 박종우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주전으로 뛴 ‘홍명보의 아이들’이었습니다만,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영에 밀려 단 1분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주전이었고 ‘홍명보의 아이들’로 불렸던 김창수는 우측 수비수 자리에서 이용에게 밀려 월드컵 내내 벤치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박종우 인스타그램
‘홍명보의 아이들’로 불리며 대표팀에 선발됐지만 단 1분도 경기장을 밟지 못한 박종우 선수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적은 소회 (이미지: 박종우, 인스타그램)

임기 제대로 마친 건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뿐

일각에선 학벌과 파벌에서 자유로운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자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역시 지금으로써는 순진한 발상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외국인감독 들여와서 임기를 제대로 마친 사람은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뿐입니다. 거기다 아드보카트는 시간 없으니 월드컵까지만 단기계약한 사람이었고요.

코엘류, 본프레레, 베어벡 등 모두 임기도 못 채운 채 불명예스럽게 쫓겨났습니다. 심지어 차범근이나 조광래에서 보듯 내국인감독도 댕강댕강 가차 없이 자른다는 건 이미 국제적인 악명을 얻었고요. 이력관리에 목을 매야 하는 외국인감독들이 보기에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은 맘이 들 턱이 없지요.

히딩크 이후 12년 동안 축구대표팀 감독은 8차례나 바뀌었습니다. 2010년 월드컵 이후만 놓고 보면, 조광래는 조별예선 한 경기 졌다고 경질됐는데, 그는 그 사실을 신문보고 알아야 했습니다. 적당한 후임도 없이 경질해놓고 급한 대로 최강희를 억지로 임시 감독에 앉혔습니다. 월드컵 준비가 제대로 될 턱이 없지요. 월드컵 1년 앞두고 부랴부랴 홍명보에게 ‘독이 든 성배’를 맡겼습니다. 월드컵 성적이 나쁜 건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성적 안 나오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임기보장’이 축구협회 개혁의 출발점

이런 상황에서 홍명보를 경질한다면 지난 4년간 겪은 혼란을 또다시 되풀이할 뿐입니다. 한마디로, 제가 보기엔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축구협회 개혁의 시발점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임기를 채우는 게 뿌리를 내리면 대충 기용했다가 대충 자르지 못하게 되니 처음 감독 뽑을 때부터 신중해질 겁니다. 급한 대로 희생양을 만들어서 넘어가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제 반년 뒤에는 아시안컵이 열립니다. 한국은 1956년 첫 대회와 1960년에 우승한 뒤 지금껏 단 한 번도 우승을 못했습니다.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내년 1월에서 한국 대표팀이 우승하길 기대하겠지요. 아시안컵에 우승하면 2018년 러시아월드컵 전에 열리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권이 생깁니다. 중요대회 반 년 앞두고 새 감독이 오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겁니다. 사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독기가 올랐을 홍명보에게 감독직을 계속 맡기는 게 아시안컵 우승을 위한 가장 강력한 카드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시안컵
2015년 아시안컵 로고

분명한 건 이번 월드컵 대표팀 선수들은 내년 아시안컵에서도 주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적잖은 선수들이 2018년 월드컵에서도 핵심 자원이 될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대표팀 평균연령은 25.7세라는 걸 고려하면 다음 월드컵에선 대부분 기량이 절정기에 달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다음 월드컵을 그렇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독 자꾸 해고하는 나쁜 버릇만 고친다면요.

관피아 논란과 홍명보

사실 제가 홍명보 ‘임기보장’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최근 ‘관피아’ 논란에 대해 고민하면서부터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관피아 때려잡기’에선 공무원에 대한 신분보장이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습니다. 신분보장은 안 해주면서 일 똑바로 하라고 요구하는 건 아무리 봐도 몰상식하지 않으냐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철밥통 관피아
공무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충분한 임기를 보장한다는 것은 신중하고 철저한 인선을 전제로 합니다. 지금처럼 국무총리 장관 선임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선 기대하기 힘들 수밖에 없지요. 미국에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버락 오바마 1기 행정부 4년간 국무장관을 역임했고, 존 케리 국무장관이 이변이 없는 한 오바마 2기 행정부 4년간 국무장관을 역임한다는 게 상식입니다. 이는 장관 임명 전에 이미 예측 가능할 정도로 철저한 검증을 거쳤고, 임기를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국책연구기관 원장을 선임하는 방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 국책연구기관 원장은 종신직이라고 합니다. 통상 40~50대 연구자가 원장이 되기 때문에 20년 이상 원장으로 일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낙하산이나 행정직 출신은 원장 되는 걸 언감생심 꿈도 못 꾸지요. 자타가 공인하는 연구자가 기관장이 되고 종신직이다 보니 장기전략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후임 원장을 정하기 위해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적임자를 선정하기 때문입니다. 검증하는데 3년가량이 걸린다고 할 정도입니다.

반복하는 ‘희생양’ 제의 이제는 끝낼 때

‘혈의 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 눈엔 과거사청산 문제가 한창 사회적 쟁점이던 참여정부 당시 시대적 상황을 19세기 동화도라는 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에 투영한 영화로 보였습니다. 영화 말미에 핏빛 비(血雨)가 내리고 공포에 질려 제정신을 잃은 섬 주민들은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외치며 원인제공자 가운데 한 명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합니다. 그렇게 해서 섬 주민들은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진 모릅니다만, 도대체 사람 죽인 것 말고 달라진 게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죄책감을 씻기 위해, 책임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누군가를 죽였듯이, 우리는 어제는 박주영, 오늘은 홍명보를 번제(燔祭, 짐승을 태워 제물로 바치는 제사) 제물로 바치는 건 아닐까요? 틈날 때마다 제물에 쓰기 위해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다니는 심정으로 노무현, 관피아, 철밥통, 뙤놈, 쪽바리, 김정일, 김정은, 전라도를 소환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건 ‘정신승리’이고, 우리가 잃는 건 ‘성찰을 통한 발전’이 아닐까 합니다.

희생양
반복하는 ‘희생양’ 제의를 이제는 끝내야하지 않을까. (이미지: h.koppdelaney, CC BY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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