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중국을 넘어 한국, 나아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면서 연일 어두운 분위기가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방역 실패의 책임을 두고 정치적 갈등이 격화하고,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바이러스 확산이 대체 언제 끝날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상황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 쳐도, 이탈리아, 이란, 그리고 수많은 인접국들까지 코로나19가 유행하면 대체 어떻게 대비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 사회 전체가 코로나와 함께 사는 법을 지금에라도 고민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줄 뿐이라고 했던가. 이번 코로나라는 ‘상황’도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경우 어두운 면이 많지만, 빛나는 면이 그렇다고 아예 없지는 않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타국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행력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 방역 시스템이다.
놀라운 한국 방역 시스템의 역량
처음에 신천지 교인을 중심으로 대구, 경북 지역에서 감염이 폭발했을 때, 이렇게 한국 전역이 후베이성처럼 변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왔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진자 수가 늘어나면서 그 비관적 전망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많은 환자들을 찾아낸 것이 역설적으로 한국 시스템의 놀라운 역량을 입증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방역 당국은 감염자의 동선과 사회관계망을 사실상 전수조사하고, 위험성이 높은 의심자들을 선별해낸 뒤, 쏟아져나오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전부 검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햇을 때 이 성과는 더욱 잘 드러난다. 특히 중국발 입국이 통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이 고작 수천 명의 의심자들을 검사할 동안 한국은 수만 명을 검사해냈다. 최근 질병이 크게 확산되는 타국들과 비교했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다. 증상이 미약하고 감염력이 엄청난 이 질병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확진자 대비 사망률이 한국보다 높은 이탈리아에는 분명 파악하지 못한 환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여러 질문을 남길 것이고, 다양한 측면에서의 평가도 요구할 것이다. 정부의 실책, 잘한 점, 중국과의 관계, 전염병과 세계화의 관계 등등.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중대한 질문들이지만, 한국 방역 당국과 의료계가 보여준 고도의 수행능력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참고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일선에서 몸을 불사르고 있는 방역 전사들을 생각하면, 개강이 연기된 덕에 집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된 내가 여기서 보탤 수 있는 말도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보고 싶은 것은 있다.
대체 한국의 이 놀라운 방역 행정 역량의 기원은 무엇인가?
공중 보건의 탄생
전적으로 개인이나 지역사회의 몫이었던 건강의 문제가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는 보건이 다른 많은 영역과 마찬가지로 근대 국가가 성장한 뒤, 국가의 관료제와 행정 역량이 사회 말단까지 침투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진보주의, 자유주의적 사회개혁가들의 요구와 국력을 위해 인구의 양적,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했던 국가의 필요가 맞아 떨어지는 과정에서 소위 ‘공중 보건’이라는 게 탄생한 셈이다.
특히, 1815년에 발화한 탐보라 화산이 초래한 기후 위기는 유럽 각지에 거대한 기근을 초래하였고, 영양 상태가 악화된 대중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전염병은 빈민 구제, 공중 보건 등 기초적 사회복지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근대 과학과 정보 조직 역량도 19세기 공중보건 발전을 위한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식민지와 군대 그리고 사회보장
물론 공중 보건이 사회 전체에 확산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근대 공중 보건의 역사는 근대 과학으로 무장한 국가 권력이 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침투하는 역사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과거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대부분 근대적 의학 지식이 부족했고, 국가 권력에 의해 대상화되고, 행동이 통제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했다. 소위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이 있기 전에는 엘리트들조차 식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씻기도 바랄 수 없었으니 하물며 교육 받지 못한 대중들은 어떠했겠는가?
[adsense]따라서 이 과정에는 강제력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 각국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는 강제력을 손쉽게 행사할 수 있는 인구집단이 있었다. 바로 식민지였다. 유럽 제국의 일선 관료들은 인도인, 아프리카인 등 자국민과는 전혀 다른 외양과 문화를 지닌 존재들을 다룰 수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해당 지역 인구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나섰고, 식민지인들의 신체를 이루는 여러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분류했다. 이 경험은 후에 유럽의 근대 국가들, 특히 영국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보건 정책을 수립할 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footnote]비슷하게, 근대적 경찰 시스템은 바로 영국 바로 옆의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도입된 뒤 시행착오를 거처 브리튼 본토에 적용되었다[/footnote]
강제력을 손쉽게 행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집단은 바로 군대였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개별 병사의 역량이 작전에서 점점 중요하게 되면서 병력 자원의 질은 군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유럽 열강 간의 군사적 긴장은 이를 더욱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징집 대상이 될 남성의 영양과 보건 상태를 체계적으로 검사했고, 징집된 병사들의 신체 정보를 마찬가지로 체계적으로 수집해 문서화하였다. 이 흐름은 이후 신체를 넘어서 정신까지 이어져, 미군에서는 1917년 군 장병을 대상으로 ‘알파지능검사(Army Alpha)’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19세기를 관통하는 이 흐름 속에서 사회 전반이 점점 근대 국가의 보건 행정에 익숙해져갔다. 국가는 국민의 신체에 개입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보장도 제공해주었다. 비스마르크가 최초로 도입한 의료보험 시스템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런 시스템들은 유럽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 군사적 경쟁과 내부 안정을 도모했던 비스마르크와 같은 보수주의 정치인들,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근대 의학 지식과 맞물려서 현대적 의료의 기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총력전’의 체험
마침내 20세기가 되자, 19세기에 이미 축적된 근대적 공중 보건은 전혀 다른 수준에 진입하게 된다. 국가가 개입하는 정도와 그 적극성이 한 차원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총력전에 있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를 뒤흔든 제1차 세계대전은 발전한 근대 산업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었다.
각국은 수백만 명, 많게는 천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징집했고,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만가지의 물건에 대한 생산을 관리해야했다. 생산이 끝난 뒤에는 이 모든 물자와 사람들을 전선으로 제때에 신속히 수송해야했다. 철도, 전신 등 기존에 확보한 수많은 인프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할 과업이었다.
총력전은 국가 역량이라는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를 각국에 제기했다. 위에서 말한 국가 역량의 동원을 충실히 수행해내지 못할 경우, 국가 자체가 파괴되는 것을 모두가 목도했기 때문이다. 독일이라는 막강한 전쟁 기계에 밀려 러시아 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했다.
독일은 역량이라는 차원에서는 그 어떤 국가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국가 역량으로 전략적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긴 나라들이라고 즐거워만 할 수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놀라운 산업적 역량에 감탄했다. 전쟁 내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소모전을 이어간 이탈리아도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자연스레, 다가올 새로운 총력전에 대비하여 국가 역량을 일신시키고자 하는 흐름이 떠올랐다. 산업적인 면에서는 전기라는 새로운 동력원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내연기관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농업, 산업, 교통에 투입하고, 그 동력원인 석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계획들이 입안되었다. 점점 대규모화하는 산업을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산업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관리, 계획이 진영을 가리지 않고 크게 늘어났다. 공간적으로는 국민과 국가가 살아가는 공간인 ‘국토‘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국토의 모든 자원과 인구의 잠재역량을 끌어올려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관념이 등장했다. 이는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낙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 프로그램으로 등장했다.
하이모더니즘
정치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 1936~현재)은 전간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 흐름을 ‘하이모더니즘(High modernism)’이라고 칭한다. 앞서 국가 관료제가 확대되고, 정보를 체계화하고 수집하고, 그에 기반해 인적, 물적 자원을 적절히 동원하는 것은 모더니즘, 즉 근대 국가의 주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여전히 근대 국가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하이모더니즘’은 이와는 조금 다른데, 일상적인 시스템보다는 어떠한 이념적 지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이모더니즘은 근대에 대한 강렬한 이상과 신념을, 강력한 국가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회에 거의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경향이다. 그 이상과 신념은 진보를 향한 신념, 자연을 정복해야겠다는 의지, 철저히 작동하는 합리적 계획, 거대하고 직선적인 공간과 경관 등으로 대표된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이 보여준 근대 국가의 막강한 힘과 그 엄청난 파괴력은 정치인, 관료, 지식인, 예술가로 하여금 다가올 총력전에 대한 공포와 발전에 대한 종교적 열망을 심어주었고, 그 집단적 의식이 바로 하이모더니즘이었던 것이다.
하이모더니즘은 체제와 국가에 따라서 그 정도는 다를지언정,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예외 없이 번성했다. 근대에 대한 불타는 비전에 사로잡힌 레닌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선도적인 하이모더니즘 국가였다. 공산당은 하이모더니즘을 통해 낙후한 농업국가인 러시아를 가장 선진적인 근대 국가로 재편하고자 분투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무솔리니는 ‘기차를 제시간에 도착하게 하는’ 기적을 이탈리아에 선사했고, 히틀러는 아우토반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숱한 하이모더니즘 실험을 시작했다. 권위주의 정권은 아니었을지라도 미국도 이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상당히 많은 하이모더니즘적 색채를 띠고 있다. 국가 동원을 통해 낙후 지역에 대한 전력화를 추진한 테네시강개발공사(TVA)가 대표적이다.
당연하게도, 보건과 위생은 하이모더니즘 계획가들이 관장할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이전부터 각국은 이전의 소극적인 보건 행정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이모더니즘은 그 흐름에 불을 붙였다. 시작은 이번에도 소련이었는데,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이 나라에서 수백만명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헛되이 사망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소련은 전국적 보건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인민들의 일상적 위생에도 간섭하면서 신체 또한 혁명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공격적 보건 행정을 펼치면서 남이탈리아에서 기승을 부리던 말라리아를 퇴치해 유사한 작업을 해냈다. 히틀러는 우생학을 국가 보건의 근간에 집어넣음으로써, 가장 악명 높은 하이모더니즘적 공중 보건 정책을 실시했다. 인종적 순수성 관념을 위생 개념과 섞어서 사고한 히틀러에게 슬라브인, 집시, 유대인을 박멸하는 것은 일종의 계획적인 ‘보건 정책’이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하이모더니즘은 수그러들게 되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적극적인 보건 행정은 세계적으로 자리잡는다.
일본, 양생에서 위생으로
2020년의 한국과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보여주는 방역 역량이 간접적으로 이 시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하이모더니즘 시대에 일본이 추구했던 보건 정책과 연관이 있다. 19세기에 근대화를 추구하고 20세기에 총력전을 수행해보았던 일본이 상술한 세계적 흐름을 수용하고 적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일본의 보건은 많은 영역에서 그러했듯이 단순히 서구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시스템으로 체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의 시대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열강에 합류한 제국이었고, 자연스레 여타 동아시아 국가에 제시할 표준을 설정하는 국가였다. 특히 일본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에 들어가 있던 조선과 대만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adsense]영어 ‘하이진(hygiene)’의 번역어인 ‘위생'(衛生)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유신 직후 메이지 정부는 각계각층의 인물로 하여금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견학하여 일본에 적용할 수 있도록 사절단과 유학생을 파견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끈 1871년의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이 사절단에 속해 있던 나가요 센사이는 일본이 진정한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보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욱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건강을 지키고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건과 행동’을 뜻하는 ‘하이진(hygiene)’을 기존의 ‘양생’이 아닌 도교 경전(‘장자’)에서 유래한 ‘위생’이라는 말로 번역한 장본인이었다.
[toggle style=”closed” title=”양생(養生) vs. 위생(衛生)“]
개개인의 건강을 강조한 ‘양생’과 국민 건강을 위한 국가의 체계적인 행정 조직과 국가 정책을 강조하는 ‘위생’의 개념적 차이는 아래 인용한 문구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편집자)
“갑신정변(1884)을 이끌었던 박영효와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는 “국가적인 양생”으로서의 위생을 근대 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꼽은 바 있다. 위생 사업은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훌륭한 방법이며 국가를 튼튼하게 하는 참된 법”으로 등장했다.”(권창규, ‘상품의 시대’, 2014, 민음사)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의학자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는 생명이나 생활을 지키는 개념으로서 독일어의 ‘Hygiene’이 사회 기반의 정비를 포함하고, 국가와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서양에서 사용되고 있는 sanitation, health, Hygiene 같은 용어가 단순히 건강 보호의 측면에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건강과 위생을 담당하는 행정기구의 사무 범위가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가요 센사이는 이 행정기구가 “세상의 위해를 제거하고 국가의 복지를 완전히 하는 기구로서 유행병, 전염병 예방은 물론, 빈민구제, 토지청결, 상하수도 설치·배수, 시가 가옥 건축방식부터, 약품·염료·음식물의 단속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 생활에 관계된 것은 모두 망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행정기구를 번역함에 있어서 양생(養生), 의무(醫務), 건강(健康), 보건(保健) 같은 직설적인 단어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냈다. 그가 독일어 ‘Hygiene’의 번역어로 찾아낸 단어는 장자(莊子)‘경상초편(庚桑楚篇)’에 있는 ‘위생(衛生)’이었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 고아(高雅; 우아하고 품격이 있음)하고 발음도 나쁘지 않기 때문에 ‘Hygiene’의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松本順自傳 長與專齋自傳, 東京 : 平凡社, 1980, 133-134쪽, 139쪽, 재인용 출처: 건강과 대안, ‘[위생/검역] 서약 위생개념의 수입’ 중에서
남영주: (…) 저는 ‘위생'(衛生)하는 방법에 관해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노자: 삶을 보호하는 길(衛生之經; 위생지경; 생명을 지키는 도리)은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것이며, 자기 본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장자, 제23편 ‘경상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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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요는 위생 행정 기구를 만들고, 교육과 자격 제도 등을 설계해 일본에 적용한 일본 보건 행정의 아버지나 다름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일본의 공중 보건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기본적으로 서구화를 지향하는 국가였지만, 동시에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유가적 국가관을 적극 수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따라서 일본의 보건 행정은 하이모더니즘 시대가 펼쳐지기 이전부터 유독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특히 각종 전염병이 일본을 강타했을 때, 이들 조직은 빈민촌을 비롯하여 위생이 낙후한 지역, 부락이나 조선인 거주지역 같은 소수자 거주구역을 선제적으로 봉쇄, 차단해 감염 확산을 막고자 했다. 또한 전염 가옥을 소각하는 강수를 두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 적극성은 한층 더 발전했다.
일본의 ‘총력전 엘리트’
일본의 이 같은 적극적 보건은 여느 제국주의 국가에서 그러하였듯 식민지에서 더욱 강력하게 적용되었다. 보건도 여타 근대적 행정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강제력을 투사하는 일이고, 그런 이유로 자국민이 아닌 식민지인에게 더 편하게 강제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에서 위생을 담당하는 조직은 총독부의 경무총감부 위생과였는데, 이는 다시 말해 위생 업무는 곧 경찰 업무였다는 뜻이다. 위생 경찰은 콜레라가 조선에서 2만 5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후 적극적 보건 정책에 나서 조선에서 의료 인프라 확산에 기여했다. 상하수도 개선, 오물 처리, 검역과 차단, 병원 증설, 호구 조사 등이 모두 이 시기 이루어졌다.
조선과 대만, 본토에서 일본이 각종 보건과 방역 역량을 축적하는 도중, 세계는 점차 하이모더니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군사 교류 차원에서 유럽 각지, 특히 독일에 파견되어 있던 청년들은 그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10년 전에 수행한 러일전쟁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의 국가 총력전을 두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독일이 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놀라운 동원력과 그 기반이 되는 막강한 산업은 당대 많은 일본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전시산업을 담당한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 1867-1922)와 군사 동원을 담당한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1865-1937)는 일본의 혁신적 인적 그룹에게 중요한 학습대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총력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젊은 엘리트들이 보기에 당시 일본은 시대의 변화 속도에 비해 너무나 느리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광대한 식민 제국을 보유한 영국, 프랑스, 이번 전쟁에서 그 힘을 제대로 보여준 미국, 패배하기는 하였으나 경이적인 전쟁 기계였던 독일에 비하면 후진적인 면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도 전쟁으로 붕괴하기는 했어도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야심찬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들 나라와 비교하면 잠자는 상태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이대로 가면 다가올 새로운 총력전과 지정학적 경쟁의 시대에, 장기전 수행을 위한 핵심 자원과 그것을 수급할 식민지도 없는 일본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구 엘리트들, 특히 정당 정치인과 기존 재벌들에게는 이런 절박함이 없었고, 총력전 엘리트들에게 이는 큰 불만이었다.
무시무시한 실험장, 만주국
그래서 그들은 본토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와 전통적 엘리트들을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장을 만들어냈다. 바로 만주국이었다. 총력전 엘리트들은 일본 제국이 다가올 총력전 수행을 위한 역량을 배양하는 데 만주가 적격이라고 판단해, 봉천 군벌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획득했다.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 1889-1949)가 주축이 된 군부 통제파,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 義介, 1880-1967)를 중심으로 한 중화학 공업 중심의 신흥 재벌,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1896-1987)로 대표되는 상공성 출신의 경제 관료들이 야망을 품고 만주에 합류해 다종다양한 하이모더니즘적 비전을 펼쳤다. 군수 산업 발전을 위한 통제 경제, 일본의 농업인구 이민을 통한 ‘개척’ 사업, 교통 인프라 확충과 새로운 도시 계획까지 현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를 빚어낼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다. 이 과정에서 총력전 엘리트들은 스탈린의 5개년 계획과 독일의 나치즘 경제 정책, 미국의 뉴딜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하이모더니즘 정책을 학습하고, 비교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적용하였다.
보건 정책도 만주국에서 새롭게 일신했다. 빈약한 인프라로 출발한 만주국에서 전염병이 숱하게 발병했고, 이를 제압하는 것을 일본 제국의 관료들은 일대 사명으로 생각했다. 이 지역에서도 일선 행정을 담당한 경찰은 조선이나 일본보다 인구 대비 2배는 많은 숫자인 8만여 명으로, 4천만 만주국 인구를 상대하는 밀착 행정을 해내야 했다. 총력전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국가답게, 전국적 동원과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신속한 투입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만주국은 속성으로 의사를 양성해내 1943년에는 2만 2천 명까지 그 규모를 키웠고, 이들을 광범위한 지역에 파견했다.
전염병 방역은 이 같은 만주국의 노력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험 무대였다. 특정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병하면 행정 기구는 즉각 군사 조직과 같이 전환되어 적극적 방역 업무를 수행했다. 전염병이 확산되는 지도가 작성되어 상부로 보고되었고, 재해지역 선포, 인구 격리, 가옥 소각, 방역 선전물 살포, 사망자 처리와 같은 업무들이 이루어졌다. 이는 마치 만주국에서 기승을 부렸던 비적떼를 소탕하러 출동하는 군대, 경찰의 업무를 그 대상만 미생물로 바꾼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이 같은 방역 사업은 당대 일본 제국에 만연하던 인권 유린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총력전에 대응하고 일본을 과학, 기술, 행정의 면에서 선도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제국 엘리트들은 그 같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반인륜적 조치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국 방역 당국은 자신들의 방역 역량을 시험하고, ‘실전’에 대응하기 위해서 여러 훈련을 시행했다.
그중에는 실제 중국인 마을에 페스트균을 몰래 살포하고 방역 사업을 벌이는 프로젝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페스트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역시 군사 작전처럼 방역 조직이 동원되어 재해지역을 봉쇄하고 발병지를 소독하고 사망자를 부검하는 등 강력한 대응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만주국은 강력한 방역 대응 경험을 쌓을 수 있었겠지만, 그 와중에 죽어간 중국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역시 생화학전을 위해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였고, 이 부대가 만주 하얼빈 근교에 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패망 후에도 살아남은 ‘만주 모던’
그러나 1945년, 일본 제국과 만주국은 그들이 필사적으로 대비하고자 했던 총력전에서 패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간기와 전시에 일본 제국이 구축한 시스템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그 시스템을 파괴하고, ‘서구식’ 시스템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으나 그 노력은 제한적인 성과만 거뒀을 따름이다. 패망한 일본 제국이 놓고 간 유산은 처음에 일본에서, 이후에 동아시아 각국에서 펼쳐질 경제 기적의 원형을 제공했다.
수출 중심의 산업 발전에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여 투입하는 데 몰두하는 국가, 즉 ‘발전국가’라고 알려질 국가 모델이 그것이었다. 한국, 대만과 같이 냉전기 미국 주도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은 이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중국이나 북한은 대신 소련에서 발전한 사회 모델을 수입하여 적용하였는데, 소련 체제도 공유하고 있던 하이모더니즘적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전시와 전후의 연속성은 생각 이상으로 컸을 것이다.
만주식 하이모더니즘, 즉 ‘만주 모던’은 패망한 일본 본토에서 먼저 생명력을 이어갔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만주 출신 인사들이 일본에도 만주식 모델을 도입하려는 ‘신체제 운동’을 펼쳤으나 본토의 기존 엘리트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하던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침략 전쟁의 주범을 이들 기존 엘리트로 판단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경제 통제권을 둘러싸고 상공성 관료들과 끝없이 반목했던 전통 재벌인 미쓰이와 미쓰비시가 미군정에 의해 해체된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빠르게 채운 것은 기시 노부스케를 필두로 한 만주 인맥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주 모던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시민들이 풍요를 누리게 되고, 과거 일본 엘리트를 짓누르던 전쟁과 군사적 경쟁의 부담이 평화헌법 체제 하에서 사라지자 만주 모던은 필연적으로 순화되었다. 이제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에 불타는 엘리트층도 없었고, 시민사회도 과거처럼 허약하게 국가의 원대한 비전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선진 사회에서 벌어진 현상과 일맥상통했다. 일본에서 55년 체제와 ‘소득배증계획’이 등장할 그 무렵,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사망하고, 탈스탈린화와 흐루시초프의 해빙을 맞이할 것이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가 주도하는 주간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와 함께 새로운 경제 호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마셜플랜 이후 유사한 흐름이 등장했다. 이후 펼쳐질 ‘영광의 30년(1949-1979)’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은 평화로운 호시절을 누리게 되니, 그 누가 하이모더니즘의 이상에 동조하겠는가?
‘만주 모던’의 진정한 계승자
따라서 얄궂게도 만주 모던의 진정한 계승자는 본토 일본이 아니라 한국과 대만 같은 구 식민지들이었다. 사실, 중심부에서 발생한 원형이 주변부에서 더 공고히 유지되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일이니 그리 얄궂지 않을 수는 있겠다. 어쨌든 만주 모던이 이 두 국가에서 이어진 이유는 자명했다. 총력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를 찾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과 대만은 미소 냉전의 최전선에 서야만 했고, 다가올 전쟁에 계속해서 대비해야 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권은 국공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쫓겨들어가면서, 남한은 북한과의 잔혹한 동족상잔을 거치면서 그런 전쟁을 실제로 경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대만보다 더 직접적으로 만주 모던을 계승했다. 한국에서 만주 모던은 너무나도 상징적인 인물과 함께 찾아왔다. 바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서 복무하였던 군인 박정희다. 박정희는 일본 제국 체제의 외부인으로서 이후 대만을 점거한 장개석과는 전혀 다른, 일본 제국 체제의 내부인이었다. 1960년의 쿠데타와 이후 선거로 정권을 획득한 그가 어느 정도로 만주국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을 설계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을테지만,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두 국가에서 발견되는 상당한 유사점은 만주의 영향력이 한국에서 부활하였음을 반박하기 어렵게 만든다(이에 관해서는 한석정 교수의 저서 ‘만주 모던’을 참고. 이 글의 주요 내용 상당부분이 여기서 나왔음).
박정희는 만주국 관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을 대규모로 동원하고, 국가적 과제에 투입하는 여러 사업들을 실시했다. 만주국에서 강조한 ‘건국’은 5.16 이후 한국에서는 ‘재건’이 되었다. 강력한 공업을 바탕으로 이후 있을 전쟁을 대비하자는 만주국과 일본 제국의 ‘고도국방국가’를 향한 이상은 영남임해공업단지의 거대한 기계, 화학단지로 실현되었다. 거대한 도로와 광장, 위압적 건축물, 직선이 가득한 도시계획 등 박정희 정권은 경관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도 하이모더니즘을 채택했다. 이 같은 상호연관된 요소들에 어떠한 원형이 있다면, 그가 청년시절을 보낸 만주국이 아닌 다른 후보를 상상하는 것은 힘들다.
보건 영역에서도 만주국의 유산은 한국에서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먼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각 지역의 낙후된 위생 상태를 뜯어고치고자 소탕전을 펼쳤다. 우물 청소, 소독, 기생충 박멸운동, 모기와 파리 구충사업, 방견(떠돌이 개) 도살 사업, 무허가 의료 행위 규제, 전국적 의료망 확충, 예방접종 실시와 같은 조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사 기구가 동원을 일상시하던 체제답게 이들 사업에는 사업의 특성에 따라 각급 공무원에서 의대생, 국민학생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만주국에서 볼 수 있던 군사적 보건은 역시 방역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군사 작전을 연상케 하는 새로운 방역 조치는 5.16 이후 군정이 최초로 도입한 제도 가운데 하나다. 군정은 만주국이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을 상대할 떄와 마찬가지로, 전염병 발병 시에 핵심 재해 지역을 구획, 설정하고 방역관을 급파하고, 보균자 색출, 추적과 격리 수용, 오염 지역 소각 같은 조치를 시행했다.
1960년대 이 같은 전쟁과 같은 방역은 주요 전염병이 한국에 도달할 때마다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콜레라, ‘일본 뇌염’ 등 일본을 경유해서 유입되는 전염병에 대해 반일 민족주의를 연상케 하는 수사를 동원하면서 철저한 방역에 나섰다. 정부는 선제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부산항을 비롯한 병원균의 주요 통로에 대한 적극적 방역을 실시함과 동시에 각 지역 보건소마다 위생 수칙 전달을 비롯한 각종 임무를 하달했다. 그 결과 콜레라는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퇴치되었다.
박정희 시대 ‘원형’ + 디지털 시대 ‘정보력’
이제 어느 정도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기시감이 들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한국이 보여주는 유난에 가까운 철저한 검사와 엄청난 동원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는 총력전의 그늘과 전염병의 창궐이 일상적이었던 총력전과 하이모더니즘 시대에 이미 선보였던 것이고, 한국에서는 박정희 시대에 수립된 모델에서 그 원형을 확인해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한국은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인구 집단에 대한 엄청난 가독성을 확보하였고, 그를 통해 그 이전 정부는 해낼 수 없는 수준으로 사람들을 찾아내고 검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의문은 들 수 있을 것이다.
- 먼저, 총력전과 하이모더니즘을 경험한 나라가 한국만이 아닌데 한국만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 둘째, 한국도 유신 체제가 끝나고 군사주의와 하이모더니즘이 퇴조해나갔는데 어째서 그 면모가 여전히 살아남은 것일까?
아마 주요 국가 중에서 여전히 총력전과 하이모더니즘의 유산을 가장 많이 끌어안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기에 이런 ‘마법’이 가능했던 것 같다. 유례없는 초장기간의 군사적 대치를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국가, 그 대신 병사를 줄이지도 못해서 인구가 줄어도 징집은 계속 해나가는 국가, 병사가 아니더라도 숱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동원해 다양한 목적에 투입할 수 있는 동원 국가, 급진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이 ‘명령하면 해야한다’는 정신을 하부기관에 강제하는 국가, 국민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국가가 ‘읽어낼’ 수 있도록 적절히 변환하고, 엄청난 속도로 그 정보를 추적, 분석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갖춘 국가. 이 같은 요소들은 총력전 시대의 하이모더니즘 국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국가의 모습이다.
억압 시스템의 압도적 행정 편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여타 선진사회는 위와 같은 요소를 차츰차츰 제거해나갔다. 물론 공산권에서는 국가의 강력한 동원체제가 철의 장막 건너편 보다 오래 유지되었으나, 그 역시도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급격히 퇴조했다. 사실 한국도 유신 체제가 끝나고, 하이모더니즘 태세를 누그러뜨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그마저도 민주화에 밀려나면서 하이모더니즘적 병영국가의 면모는 차츰차츰 탈색되어갔다. 이제 한국 사회는 특정한 엘리트 집단이 일률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그를 위해 대규모로 사람들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부유해졌고, 복잡해졌고, 다채로워진 것이다. 여타 서구 국가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출발점이 타국과는 달랐던 것 같다. 여타 선진국에서 하이모더니즘이 저물어가고 68의 일탈이 시작될 무렵 한국은 새로운 하이모더니즘의 절정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즉, 그것이 해제되는 데도 시차가 발생했음은 물론이다. 지정학적 상황도 한 몫했다. 전 국민을 동원하여 대치하는 군사적 긴장은 국력 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억압적 시스템에 이미 익숙한 한국인들은 그 반대급부로 찾아오는 압도적으로 편의적 행정을 누리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다. 딱히 관료제나 행정뿐 아니라,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논리가 이제는 대체로 그렇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야한다고 말하면 다들 동의하겠지만, 국가가 지문을 수집하는 데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지문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제공하는 행정 인프라가 너무나 편리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편의성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다.
이처럼 다른 선진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병영국가적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도 1인당 GDP 3만 달러의 경제대국으로서 막대한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덩치’가 있으니, 옆에서 수천명을 검사하는 동안 수만명을 검사해내는 말도 안 되는 행정력을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남겨진 질문들
그렇다면 한국의 이 엄청난 방역 역량과 그 역사적 연원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1. 국가와 권력의 문제
먼저, 국가와 권력의 문제에 대해 먼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진보를 표방해오는 지식인은, 신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 왔다. 그들에게 그것은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권력이 인간을 ‘타자화’, ‘대상화’하는 폭력적인 행위였다. 제국 정부는 식민지인들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 같은 권력을 강제해왔던 것이다.
물론 이 지적은 참이다. 권력은 보건 행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었다. 개인은 국가에 의해 자신의 신체에 관한 자율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본질적으로 나쁜 일일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금, 우리는 자유롭게 모이고 마스크를 끼지 않고 떠들 수 있던 ‘자유로운 나날’을 벌써부터 그리워하고 있다. 만약 국가 권력이 각 개인의 신체(몸)를 적절하게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 같은 자유를 누리는 게 가능했을까?
결국,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쓰이느냐는 것이지 권력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온당할 수 없음은 아마 이런 비상시국에 더 잘 드러나게 되는 듯 하다. 어찌되었든 한국인들은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던 박정희가 설계한 시스템에 여전히 음으로 양으로 기대고 있는 셈이다.
2. 왜 중국은 실패했는가
그 다음으로 중국과의 비교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은 아마 한국을 넘어서는 얼마 안 되는 하이모더니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 비전과 시민사회에 대한 강압과 동원이라는 하이모더니즘의 핵심 요소가 한국에서는 상당 부분 퇴조했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 중국이 야심차게 발표하는 디지털을 통한 사회 통제책은 21세기에 걸맞는 하이모더니즘 비전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중국은 결국 대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실패는 하이모더니즘이 비록 디지털 기술을 갖췄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그 장대한 이상에 맞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완벽한 설계와 통제를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지도자의 심기에 걸맞게 중간에 정보가 왜곡되었을 때, 중국이 설계한 촘촘한 사회 통제 시스템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물론, 이미 파국에 다다른 상황에서 도시를 봉쇄하고 무장 병력을 투입해서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시키고, 엄청난 수의 포크레인을 동원해 밤낮으로 대규모 병원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중국의 하이모더니즘 동원체제가 이미 갖고 있는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곧이어 서방 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을 시작하면, ‘방역의 체제경쟁’ 국면이 본격적으로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3. 동원체제의 이면
마지막으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동원체제의 이면을 생각해봐야 한다. 소련도, 만주국도, 박정희 정권도 국민의 대규모 동원에 의지하여 국가적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이모더니즘 체제의 동원은 총력전의 위협이 일상적이고 사회 발전의 이상이 넘치던 시대에나, 그것도 부분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에서도 탈스탈린주의 시대에 그런 동원은 반발에 직면할 때가 많았고, 일본은 전후에 그런 동원이 사라졌다. 오직 한국만이 민주화 이후에도 그런 ‘값싼’ 동원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동원체제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혜택을 보고 있다. 남성 인구의 대부분이 최저임금 미만으로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자유를 제약 받는 희생을 치르면서 국가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이상의 병영국가인 북한과 마주하는 이 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은 말할 것도 없고, 각급 관공서, 복지시설에서는 사회복무요원들이, 지방의 보건소에는 공중보건의사들이 그 짐을 나누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업의 작업장과 사무실에서, 관공서에서 이런 무보수 동원은 여전히 일상적인 일이다. 아마 숙직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도 이미 풍요로워지고, 사회의 이상은 빛이 바랬으며, 전쟁 위협은 점점 피부에서 멀어지는 가운데 과거의 동원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동원체제를 해체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공중보건의사들이 대구 경북 지역으로 급파되었고, 그 지역 사회복무요원들도 아마 마찬가지로 고생을 할 것이며, 현장의 의사와 간호사들도 코로나를 막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로 인한 혜택을 간접적으로 누리고 있는 셈이며, 그것이 한국의 경이적인 검사자 수와 확진자 추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동원된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성취다. 공중보건의들은 감염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끌려가 숙소와 식사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의사와 간호사들 역시 터무니 없이 적은 보수로 혹사에 시달리고 있다. 사회복무요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수만 명의 의심환자들을 검사한 놀라운 한국식 방역 시스템의 더러운 이면이다. 결국 강제동원과 노동력 착취가 시스템의 본질이라고 할 때, 일부의 희생 위에 나머지가 안온하게 잠자는 시스템을 우리는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까? 한국은 ‘세계최종전쟁’을 대비하며 왕도낙토를 건설하고자 했던 만주국이 아니고, 지금은 재건을 노래하며 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이는 박정희 시대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의 ‘인적 자원’을 동원하고 사용하는 태도는 이 시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GDP 3만 달러가 되었고,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컨텐츠를 생산하며, 새로운 기술 표준에 도전하는 이 나라는 이제 그에 걸맞게 과거의 동원체제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한국의 행정역량과 인적, 물적 자원 동원체제는 서방 민주국가 중 어느 국가도 하지 못할 위업을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정보의 투명성과 전문가 의견에 대한 존중 문화를 더한다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공짜가 아닌데 자꾸 공짜로 해결하려 하는 문화와 관행에 있다. 적극적 행정을 위해 동원된 이들에게 이제는 적절한 보수가 주어져야지만 이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돈뿐만이 아니다. 몇달 전 논란이 되었던 ‘마스크 공익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사건은 병역과 하등 상관 없는 직원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국가를 위한 노동에 동원된) 공익요원에게 불합리한 갑질을 행하고 모욕을 줘서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다. 어째서 국가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욕을 당해야하는가? 보수가 정상화된다고 하더라도, 군인, 공익, 공보의 등 수많은 동원 인력들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특정인들에게 과중하게 부담이 몰리지 않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분담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부담이 몰린다면 적어도 그에 대한 보수만큼은 더 줄 수 있어야한다).
글 서두에 언급했듯,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 사회, 나아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정말 많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다가온 총선과 맞물려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하지만 논의를 당장의 정치적 대립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의 반중정서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 설정 문제, 취약함이 드러난 글로벌 공급사슬의 문제, 갈수록 한국 사회의 리스크로 부각되는 신흥 종교의 문제 등 중차대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이 글은 그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이 보여주고 있는 수행력의 역사적 연원과 그 이면에 대해 살펴보고자 써본 글이다. 모쪼록, 소모적 논의를 넘어선 생산적 논의가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끝으로, 이 글에 강한 영감을 주고 대부분의 일화를 제공해준 한석정 교수의 [만주 모던]에서 묘사한 1960년대의 풍경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오늘날의 풍경과 겹쳐보면서 음미해보시길.
“1961년 장티푸스 예방접종 시 접종증명서가 없는 이들의 여행이 사상 처음으로 제한되었다. 격리, 차단은 여론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환자의 이름, 주소 및 차단 상태까지 보도함으로써 ‘여론상의 격리’가 이루어졌다.”
– 만주 모던, p.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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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한석정, 만주 모던 (문학과지성사, 2016)
-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박성진 역, 소명출판, 2015)
- 제임스 스콧, 국가처럼 보기 (전상인 역, 에코리브르, 2010)
- 재컬린 더핀, 의학의 역사 (신좌섭 역, 사이언스북스, 2006)
- 신상목,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일본 ‘위생’의 탄생, (조선일보, 2020.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