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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페이스북은 개인적인 사교 공간을 넘어 공론의 장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서 널리 읽히고, 공유되는 게시물은 (사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짧은 길든 글쓴이가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훌륭한 공적 대화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대화의 방식은 격렬한 토론일 수도 있고, 간곡한 설득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통해서만 더 풍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다양한 비판을 환영합니다. (편집자) [/box]

 

“어떤 집단이든 살아남고 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실력자를 뽑아야 한다. 실력에 따른 차별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안 하면 다 망한다.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 장애인 전형 같은 걸 두는 건 사회 복지 차원의 배려일 뿐이다.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강조는 편집자)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접한 글의 일부다. 이 글을 누가 썼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글의 내용과 이 글에 많은 이들이 공감과 동의(‘좋아요’)를 표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하다.[footnote]해당 글의 출처는 의도적으로 생략한다.(편집자).[/footnote]   

우선 잘못된 사실부터 바로잡자.

장애인 전형 또는 장애인 할당제는 노동정책이지 사회복지가 아니다.

장애인 전형은 사회복지가 아니다

OECD의 복지 통계인 ‘사회지출’(footnoten]Social Expenditure; 약칭 SOCX)은 아홉 가지 기능별 대분류를 가지고 있다. 사회(복지)지출의 국가간 비교와 시사점을 찾기 위해서다.

장애인의 고용과 관련된 복지지출은 그중 특별 부문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LMP)’에 속해 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복지 집계에서 특별 부문인 이유 중 하나는 유럽통계청의 경우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부문의 재정지출을 복지 또는 사회보장정책이라고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OECD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세부 내역을 정리하면서, 장애인을 고용하거나 일정 비중을 장애인으로 고용하도록 하는 ‘장애인 할당제’를 시행하는 것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속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즉, 장애인 전형으로 장애인을 채용하는 것은 사회복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애인 휠체어

재정지출을 통해 장애인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보조기구를 제공하거나 특수한 장소 및 설비를 갖추는 것 등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복지’)에 포함되지만, 단지 장애인 전형이나 장애인 할당 같은 것을 실시한다고 해서 이것을 사회 복지의 배려라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표준이다. 또 앞서 말했듯 유럽통계청은 재정 지출이 장애인의 고용으로 이어질 때, 이것을 사회복지가 아니라 노동(시장)정책으로 분류한다. 이렇듯, ‘장애인 전형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사회복지 차원에서 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를뿐더러 국제적 흐름에도 뒤처진다.

장애인의 고용이나 장애인 할당제에 관련된 세금 투입을 노동정책으로 규정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철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으며, 자연스럽게 비장애인과 대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비장애인에 대한 노동정책이 복지가 아니듯 장애인에 대한 노동정책도 복지가 아닌 것이다.

만약 장애인 전형 또는 할당제를 복지라고 규정한다면 선진국에서 (한국보다 더 널리) 시행 중인 각종 여성 관련 할당 제도들도 복지라고 규정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할당 제도를 복지정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지난날 비문명적 제약이 많았던 여성의 사회활동을 고양하기 위한 ‘긍정적 차별’(불어: discrimination positive)의 일환으로서 그와 같은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다.[footnote]물론 이러한 조정 제도가 모두 바람직한 성과만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다루는 것은 논지에서 벗어나니 자세한 논의는 넘어가자.[/footnote]

'긍정적 차별' (2016)
‘긍정적 차별’ (2016)

여성 친화적인 제도들을 통해 더 나은 문명을 일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이듯, 장애인 친화적인 제도들을 통해 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이다. 장애인을 채용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사고방식은 사람을 중시하는 문명이 발달한 선진국일수록 한층 멀리하는 차별의 시각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업의 줄기찬 바보짓

기업은 바보가 아니다. 뽑아서 돈 될 것 같으면 고졸이 아니라 초졸이어도 뽑는다. 단지 학교를 제대로 안 나오면 실력이 없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으니 고학력자를 선호하는 것뿐이다. 좋은 회사일수록 지원자가 워낙 많으니 굳이 스펙 안 좋은 사람을 뽑을 필요 없기도 하고.” (같은 글, 강조는 편집자)

기업이 바보가 아니라는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채용과 관련하여 기업이 바보짓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있다면, 저런 말은 함부로 하기 어렵다.

흔한 예로, 여성을 떨어뜨리거나  회사 내부인이나 권력자의 지인을 취직시키려고 취업 비리를 저지르는 기업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바보겠는가? 돈 되는 일이라면 기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학력과 무관한 최적의) 실력자를 찾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은 한국에서 연일 터지는 ‘채용 비리’ 뉴스 속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식이다.

기업의 대표 바보짓, 아니 바보짓을 넘어선 '범죄'이기도 한 '채용 비리'는 대한민국에선 천지 삐까리다.
기업의 대표 바보짓, 때로는 바보짓을 넘어선 ‘범죄’이기도 한 ‘채용 비리’는 대한민국에선 천지 삐까리다.

채용 담당자들의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걸핏하면 여성을 차별하거나 심지어는 성적 관계를 노리기까지 하는 채용 관행도 매우 심각하다. 일 잘할 사람을 찾는다면서 정치적 성향은 왜 캐묻고, 노조에 대한 의향은 왜 조사하며, 아이를 낳고 싶은지는 대체 왜 물어보고, 페미니즘에 호의적인지는 왜 알려고 드는 것인가? 이런 것도 돈 버는 데 중요한 스펙인가? 아니면 기업의 바보짓인가?

또, 단정한 외모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복장이나 메이크업 등까지 꼬치꼬치 간섭하겠다는 건 무슨 횡포인가? 이것이 기업의 바보짓인가, 아니면 우수 인재에 대한 채용 능력인가? 이에 그치지 않고 회사 차원에서 선정적인 복장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채용 담당자들이 취업을 미끼로 아예 성적인 접근까지 시도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기업은 돈 버는 게 목적일 뿐이라 채용과 관련하여 바보짓을 안 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비현실적이다.

인재를 활용하기 위한 기업의 무능은 채용 당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미친 스펙을 갖춘 구직자들을 제 나름 심사숙고하여 골라놓고는 강제 극기훈련은 대체 왜 가는 건가? 쌍팔년도식 신입사원 연수식은 왜 아직도 그만두지 못해 안달인가?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위해서라며, 여성 사원들에게 섹시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라고 강요하는 건 대체 뭐 하는 짓들인가? 이게 돈 버는 데 도움되는 직원의 관리인가, 아니면 바보같다는 말로는 부족한 뻘짓거리인가?

본디 ‘OO은 바보가 아니다’와 같은 말은 신중하게 써야 하는 문장이다. 이례가 하나만 나와도 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환장한 기업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채용도 알아서 너무 잘하고 또 직원들을 올바르게 대우할 것’이라는 논리 구조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가상현실 같은 이야기다. 물론, 모든 기업이 바보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이 바보짓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업이 또는 사용자나 고용주가 채용 및 직원 처우와 관련하여 돈 되는 것과 무관한, 돈 버는 데 방해가 되는 헛짓거리를 굉장히 많이 한다는 게 우리 현실이다.

기업(법인)을 개인(이른바 '오너')이 소유한다는 '논리적 모순'이 아무렇지 않은, '오너리스크'의 나라. 그런데 뭐시라?
기업(법인)을 개인(이른바 ‘오너’)이 소유한다는 ‘논리적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고, 그 오너님께서 ‘바보짓’을 너무 많이 해 ‘오너리스크’라는 조어까지 생긴 나라. 그런데 뭐시라?

자연의 섭리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차별을 좋아한다. 좋은 물건을 원하고 재밌는 것만 찾는다. 평등 부르짖는 놈들 쓰는 물건 보면 다 경쟁에서 이긴 것만 쓰고 있다. 시장의 경쟁은 자연의 섭리다. 이걸 부정하고 살아남은 생태계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유전된다.

경쟁을 부정하는 이들을 멀리해야 한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고쳐 쓸 수 없는 수준의 세계관이라 애초에 어울릴 필요가 없다. 특히 이런 품성의 자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그 일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다. 만약 본인이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하고.” (같은 글)

이런 극단적인 세계관이 행여 시장주의자(?)의 일반적인 인식이라면, 안타까운 일이다. 경쟁의 장점을 자신들만 알고 있다는 듯한 협소한 시야와 더불어 ‘자연의 섭리’처럼 어마어마한 문제마저도 다 통달했다고 단언하는 무모함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자연의 섭리처럼 거대한 문구는 내 역량을 벗어나니, 쉬운 일상과 인지상정의 상식에서 접근해보자. 경쟁과 협력은 시장(경제)를 포함하는 우리 삶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늘 교차한다. 우리는 경쟁만 하지도 않고 협력만 하지도 않는다. 무조건 경쟁만 하려는 이들은 도태될 것이고, 무조건 협력만을 소리치는 이들의 옆에는 정작 협력자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깡그리 경쟁을 부정하는 이들을 멀리할 필요가 (그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은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 또한, 동시에 평등을 부르짖는 이들을 폄하하고 마치 경쟁만이 자연의 섭리인 양 오도하며, 이를 부정하지 말아야 모든 생명체가 성장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 역시 사회의 건강을 위해 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경쟁을, 때로는 평등을, 때로는 자유를 항상 조정하고 균형을 맞춰가면서 발전해온 것이 인간이다. 이런 평범한 일상의 상식을 부정하면서 극단과 비약의 세계관으로 무장한 이들을 가까이하는 일이야 말로 정말 조심해야 한다.

공동체 화합 협동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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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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