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어째서 미국에 달 탐사에 뒤쳐졌을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보다 ‘월등히’ 앞서간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줬던 소련인데 말이다. 최초의 인공위성, 강아지, 남녀 조종사, 달 궤도, 우주 유영 모두 소련이 먼저였다. 하지만 결국 달 착륙 경쟁에서 소련은 미국에 뒤쳐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주된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실패를 알리거나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방식이고, 두 번째는 단일 조직 안에서의 내부 경쟁이었다.
공산주의의 무결성: 실패는 없다, 없어야 한다!
공산주의 방식은 어떻게 보면 치명적이다. 소련이 우주 개발에 있어서 먼저 나아간 것은 그만큼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이 있었다. 다만, 그만큼 실패도 많았다. 어쩌면 애초에 의도치 않게 스푸트니크를 성공한 까닭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승자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1957년 스푸트니크를 올릴 때, 소련은 다들 인공위성을 탑재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 로켓(R-7)의 강력함에 대한 반응을 기대했었다.
게다가 그 초보적인 위성이라는 것이 로켓 개발사를 아는 누구나 기억하실 이름인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가 우겨서 인공위성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특히 발렌찐 피트라비치 글루슈코(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의 반발이 심했는데, 1957년이 마침 10월 혁명(러시아 혁명) 40주년인지라 후르쇼프가 코롤료프의 손을 들어줬었다. 그래서 스푸트니크의 내부 별명은 코롤료프의 “개인 장난감(личной игрушкой)”이었다.
그런데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이라는 영어 표현이 생길 정도로 미국에 충격을 준 것은 R-7이 아니라 스푸트니크 위성이었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 보니, 예기치 않게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선전한 꼴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성공은 우주로 진출하는 인류이자 해방자인 소련의 위상을 올려줬다.
‘자, 이제부터는 오로지 소련의 영광 뿐이야!’
즉,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됐다. 가령 1965년 3월, 생방송됐던 최초의 우주 유영에서 러시아 우주비행사 알릭세이 레오노프(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은 다시 우주선에 진입할 때 문제가 좀 있었다. 우주복이 부풀어 올라서 출입구에 안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갑자기 클래식 음악 방송으로 바뀐다.
레오노프는 우주복 안 공기를 빼서 무사히 복귀하여 지구로도 귀환했지만, 당시 시청자들은 모두 그가 사망했으리라 짐작했다. 게다가 이 우주선(Восход)의 착륙지도 오차로 수백 km나 차이가 나서 소련은 향후 우주 프로그램용 우주선으로 소유즈(Союз)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듬해 코롤료프가 사망한다(1966).
이때부터 갑자기 사건 사고가 많아진다. 소유즈 1호는 폭발했고, 새로 디자인한 로켓도 계속 폭발했다(물론 미국도 아폴로 1호의 대참사가 있었다.) 특히 달을 향한 소련의 45회의 시도 중 성공 건수는 15건에 불과했다. 1/3의 성공률이지만, 실패 사례는 소련 담당자들 외에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실패가 누적됐지만 알리지를 않으니, 해결할 유인도 더 떨어졌다. 게다가 더 큰 이유는 내부 경쟁 격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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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올라간 동물들:
소련은 개, 미국은 원숭이, 프랑스는 고양이
미소 간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스푸트니크 2호에 개가 한 마리 실려서 올라갔던 것 기억하는가. 그 개의 이름은 라이카(Лайка, 암컷). 고열과 스트레스로 인해 임무 수행 수 시간만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라이카는 모스크바 외곽의 스타시티(Звёздный городок, 원래 소련의 우주훈련센터가 있던 곳이다)에 동상도 놓여 있다.
미국은 어땠을까? 미국은 쥐와 원숭이를 사용했다. 처음 우주로 올렸던 침팬지 이름은 이노스(Enos).
그런데 우주로 올라간 동물 중에 고양이가 있었다. 잠깐, 고양이? 실제로 고양이를 우주로 쏴 올린 곳은 프랑스였다. 1963년, 프랑스는 고양이들을 데리고 강도 높은 우주비행 훈련을 시켰었다. 단, 훈련생들 중 10마리는 너무 많이 먹어서 ‘임무 해제’됐다고 한다.
그렇게 실제로 우주 여행에 뽑힌 고양이는 펠릭스(수컷)와 펠리세트(암컷)였다. 문제는 펠릭스가 막판에 고양이 기질을 발휘하여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래서 실제로 우주에 올라간 것은 펠리세트였다.
근데 도대체 프랑스는 왜 고양이를 택해서 우주 비행을 시도했을까? 러시아가 개를, 미국이 원숭이를 올렸으니 뭔가 다른 동물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어서였을까? 펠리세트가 유용한 정보를 많이 전달해 주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우주개발은 후에 ESA가 설립될 때까지 정체에 접어든다.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재정이 모자라서였다. 아, 우주개발에 정력적이었던 드골이 물러난 이유도 있겠다.
사실 소련과 미국, 프랑스 모두 개와 원숭이, 쥐, 고양이 등을 모두 다 훈련 시켰었고, 올려보내기도 했었다. 다만 대표적인 동물로 각각 개, 원숭이, 고양이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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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조직 내부의 ‘자본주의적 경쟁’
단일 조직 안에서의 내부 경쟁은 소련이 우주개발 경쟁, 특히 달 착률 경쟁에서 미국에 뒤친 두 번째 큰 이유다. 잠시 시간을 현대로 돌려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준(‘Zune’)이나 윈도우 모바일(‘Windows Mobile’), 스팟 왓치(‘SPOT Watch’) 등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을 때 주된 이유로 거론됐던 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 사내 상대평가 시스템(Stack Ranking)이었다. 내부 경쟁을 북돋아서 회사 전체의 생산성을 늘리자는 아름다운 취지였지만, 그 결과는 사내 암투와 정보 독점 전쟁 뿐이었다. 현재 사내 평가 시스템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상대평가 항목이 제거됐으며, 그것만으로도 부작용은 크게 개선됐다.
흐루쇼프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아야 하기도 하고, 경쟁을 시켜야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결과는 내전이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흐루쇼프는 달 탐사 프로젝트를 두 곳의 디자인실(OKB)[footnote]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 бюро의 준말이 Окб/OKB이다. 직역하면 “실험디자인실”, 가령 OKB-1은 코롤료프가 맡았었다.[/footnote]에 각각 맡겼다. 1/3의 성공률이 이제 이해될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나사(NASA) 한 곳에서만 맡았다.
그래서 엔진 수를 늘리느냐, 엔진 자체를 강력하게 만드느냐로 파가 갈리고, 위에 나오는 글루슈코는 계속 코롤료프를 반대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소련이 자본주의식 경쟁을 도입해서 실패한 경험도 처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달 착륙 경쟁은,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국이 앞서갔다. 1969년 7월 13일, 아폴로 11호가 올라가기 3일 전, 소련도 루나(Луна) 15호도 상공에 올라갔었다. 궤도에 안 부딪히게 하자고 최초의 미소간 우주 협력이 있기도 했지만, 루나 15호는 달에 충돌하면서 실패작이 되고 만다. 물론 소련은 달에 무인 차량을 보내서 달 토양 샘플도 지구로 가져오고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남겼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아폴로 11호만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관대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갈 때, 그는 지구에서 챙긴 ‘패키지’ 좀 내보내라고 올드린에게 명한다. 이 패키지 안에는 1967년 아폴로 1호의 사망 대원들과 당시 이미 사망했던 유리 가가린, 소유즈 1호 폭발로 사망한 블라지미르 카마로프(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омаров)를 기리는 메달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