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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두 가지 종류의 공장을 보유한 까닭에 발전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재화를 만들어내는 공장이고, 다른 하나는 무지한 어린이들을 기술자와 훌륭한 사상가로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 말콤 칸, 19세기 페르시아 외교관

조엘 모키르가 쓴 [성장의 문화]은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 논쟁의 일환으로 쓰여진 책이다. 대분기는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나머지 세계의 급격한 분기(나뉨)를 뜻한다. 대분기 논쟁을 대표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대분기는 왜 벌어졌는가?

대분기는 언제부터 벌어졌는가?

산업혁명의 발원지는 왜 영국인가?
(왜 산업혁명의 발원지는 중국-청나라-이 아닌가?) 

딜레마 과제 물음표 숙제 고민

대분기 논쟁

전통주의적 분석은 서구 유럽이 나머지 세계와 구별되는 무언가 내생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대분기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케네스 포머런츠를 필두로 캘리포니아 학파에서 제기된 수정주의적 분석은 서구 핵심부와 중국 핵심부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었으며, 아메리카에 접근해 생태적 압박을 분산하고 석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우연적 요소가 대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제도주의적 설명도 있다. 요컨대 서구에서 어느 순간부터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정치-경제 제도가 등장했고 그것이 긍정적 피드백을 거쳐 산업화까지 이어졌다는 것.

조엘 모키르는 이런 이론을 소개해준 뒤 자신의 주장으로 훅 들어간다.

“자연의 원리를 파악해 유용한 지식을 이끌어내고 그걸 실용적인 세상의 문제를 푸는 데 쓰려고 하는 문화는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다.”

즉, 이런 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단순히 제도만으로, 무역과 시장통합만으로, 석탄에 접근한다고 해서 근대적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유럽에서 모종의 ‘산업계몽주의’ 출현을 파악해야지 대분기의 진상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문화라는 게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그동안 학계에서는 은근히 기피대상이었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면 한 쪽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기독교 정신이나 헬레니즘 정신을 만병통치약으로 쓰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문화라는 건 말랑말랑한 거니까 일단 설명요인에서 배제하고 간다는 극단론이 다수였던 것이다.

모키르의 설명, ‘문화진화론’ 

저자는 이 두 경향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정말로 중요한 문화 요인을 충분히 납득 가능할 방식으로 설명할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쓰는 것이 바로 문화진화론이다.

성장의 문화 책

문화진화론은 문화 자체가 마치 생물이 그러는 것처럼 진화한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문화를 전달하는 정보매체, 사람 등은 마치 유전자를 싣고 퍼트리는 것처럼 사회에 문화를 확산시킨다. 다만, 조엘 모키르는 리처드 도킨스의 밈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footnote]내가 생각해도 너무 단단한 실체를 설정하는 것은 현시점에서는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footnote].

생태계에서 어떤 두 종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문화적 요소들은 다른 문화적 요소들을 몰아내고자 투쟁한다. 그렇게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 해당 사회에서 적응도가 높은 문화는 번성하고 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다.

예컨대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라든가 아스텍 음악 같은 문화적 요소는 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탈락되어 틈새 위치 속에서 간신히 버티는 반면 기독교, 힙합 같은 요소는 세계적으로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적 진화 개념을 쓰면 “유럽 역사 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그리스 로마 정신~~” 이라든가 하는 말장난을 피해갈 공통의 논의 지반이 마련된다.

문화적 진화라는 거대한 투쟁과정에서 (현재 기준으로는)승리한 힙합
문화적 진화라는 거대한 투쟁에서 (현재 기준으로는) 승리한 힙합

명제적 지식 vs.(&) 처방적 지식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가 유럽을 변화시킨 것인가? 그 산업계몽주의라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지식이라는 건 크게 명제적 지식처방적 지식으로 나뉘는데 명제적 지식은 ‘F=ma’(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 같은 거라고 이해하면 쉽다. 처방적 지식, 기술적 지식 같은 암묵지(暗默知)[footnote]암묵지(暗默知, 영어: tacit knowledge):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의 조어. 지식의 한 종류로서, 언어 등의 형식을 갖추어 표현될 수 없는, 경험과 학습에 의해 몸에 쌓인 지식을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암묵지’ [/footnote]는 굳이 이런 명제적 지식이 필요 없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 경험과 학습으로 몸에 쌓인 지식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명제적 지식은 과학이고, 처방적 지식은 기술이다.

사실 자연에 대한 명제적 지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갱신하는 문화는 말 그대로 ‘과학혁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찬란한 문명은 전부 암묵적 지식, 처방적 지식에 의존하였다. 물이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지 몰라도 어쨌든 수리시설을 만들고 제방을 쌓으면 됐다. 건물이 하중을 어떻게 견디는지 무게를 아주 정교하게 계산할 필요 없이 일단 지어놓고 튼튼하게만 버티면 되었다.

¶ 관련 기사: 

그 자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혁명적 전환을 표현하는 관용구의 일부가 된 사나이. 과학혁명의 시작,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그 자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혁명적 변화를 표현하는 관용구의 일부가 된, 과학혁명의 시작,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농업 문명은 이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잘 굴러갈 수 있었다. 그리고 명제적 지식 대부분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4세기 몽골 제국으로 떨어져서 뉴턴 역학을 저술할 수 있다고 해도 사회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근대 시대 명제적 지식, 자연철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적으로 별 부족할 것 없는 고상한 지식인들이 숙고를 통해 발전시키는 영역이었고, 처방적 지식인 기술은 이름을 모르는 장인과 기술자들의 고된 노동과 피땀으로 돌아가는 영역이었다. 사회적으로 이 두 집단의 거리는 절대 지금처럼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명제적 지식(과학)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처방적 지식(기술)도 정체할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일반원리를 참고하며 기술개선의 동력을 돌려야지만 이 천장을 뚫고 나아갈 수 있다. 명제적 지식이 없다면 자잘자잘한 개선들만 이루어지고 본질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술 발전은 곧 수확체감 법칙에 의해 정체되고 수많은 기술이 정치, 사회적 혼란 와중에 후대에 이어지지 않으면서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결국, 관건은 당장 쓸모도 없는 명제적 지식을 계속 혁신하고 공격적으로 자연에 대한 원리를 파내야 하는 지적 풍토가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를 좋아하겠는가? 명제적 지식을 업데이트한다는 것은 기존 사회가 지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상들의 근간을 흔들고 구성원의 인지부담을 높이는 행동이다. 유럽에서 갈릴레오를 탄압하는 등의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이유는 유럽의 보수파들이 그만큼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기존 사회의 관성과 저항 때문에 혁신가들은 언제나 동력을 소진하고 조용히 살거나 탄압받고 죽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근대 과학혁명의 '산파'였다면, 아이작 뉴턴과 함께 '산모' 역할을 한 천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였다.
코페르니쿠스가 근대 과학혁명의 ‘산파’였다면, 아이작 뉴턴(1643년 ~ 1726년)으로 이어지는 과학혁명의 거대한 흐름에서 ‘산모’ 역할을 한 천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였다.

베이컨과 뉴턴

그런데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 경향은 두 명의 문화적 사업가로 대표된다. 문화적 사업가는 ‘아이디어 시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널리 퍼트리고 남들을 설득하는 탁월한 재주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인들이 상품을 열심히 팔아서 자신의 시장지배력을 강화하듯이 문화적 사업가는 자신의 생각을 퍼트리며 아이디어 시장을 정복하고자 한다. 그 둘의 이름은 프랜시스 베이컨아이작 뉴턴이었다.

베이컨의 사상은 아주 간단하다. 명제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획득하고, 장인과 기술자들의 방법론을 기꺼이 차용해 자연을 정복해야 하고, 거기서 유용한 지식을 이끌어내 기술을 발전시키고 최종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상한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달리, 손에 기름떼를 묻혀가며 실험기구를 조작하는 손과 발로 뛰는 경험주의 과학자들은 베이컨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년 1월 22일 ~1626년 4월 9일)
프랜시스 베이컨(1561년 1월 22일 ~1626년 4월 9일)

아이작 뉴턴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는 수학의 원리를 통해 기존의 물리학을 고전역학으로 통합한 과학의 거인으로 유명하다. 뉴턴을 통해 과학활동에서 (베이컨은 아주 꺼렸던) 수학적 정당화가 보편화 되었고, 고대인의 마지막 지적 유산은 문을 닫았으며, 형이상학적 자연의 본질 같은 것은 신경 안 쓰는 기계론적 우주관이 등장했다. 많은 과학자가 뉴턴을 신격화하면서 이 모델을 과학 활동 전반의 규범으로 삼았다.

물론 이 두 문화적 사업가의 관념이 사회 전체로 확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고대와 완전히 단절한 사람들도 아니다. 둘 모두 미신, 흑주술, 연금술 등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물론 후계자들은 그것들을 깡끄리 잊거나 은폐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뉴턴에 감명을 받았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 훅이 잘 표현했듯이 핵심은 고도로 조직화된 지식 엘리트, ‘코르테스 군단'[footnote]멕시코 지역의 아즈텍 문명을 정복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do Cortes)의 군대[/footnote]의 태도였다. 결국 어느 사회나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것은 엘리트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이컨과 뉴턴 등의 문화적 사업가들은 코르테스 군단 형태로 지적 엘리트 내에서 추종자를 양산했다. 아주 성공적으로 말이다. 그들은 아이디어 시장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유럽의 문화적 진화는 가속화되었다.

과학자의 전범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아이작 뉴턴(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20일)
후대 과학자들에게 과학자의 전범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아이작 뉴턴(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20일)

그렇다면 왜 베이컨과 뉴턴으로 대표되는 문화가 유럽에서 힘을 쓸 수 있었을까? 기존의 설명에서는 주로 인적 자본 혹은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유럽의 높은 문해율, 인쇄술의 확산, 혹은 신으로 표상되는 절대적 질서에 다가가고 싶다는 정신 등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점은 유럽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청나라만 해도 인적자본 수준은 상당했으며 일신론적 종교는 반대로 창의적 지적 활동을 얼마든지 고사시킬 수가 있다. 요컨대 유럽에서는 더 근본적인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엘리트 계층) 사람들이 지식에 대해 갖는 태도를 바꾸었다.

전통적 권위의 약화와 유럽의 만성적 분열

16~17세기 일어났던 가장 핵심적인 문화적 변화는 ‘약화되는 고대인의 권위’였다. 그리고 고대인을 위협한 동력들은 서로 연관된 채, 때로 독립된 채로 연달아 이어졌다. 우선 그 기반에는 중세시대에 있었던 기계기술의 발전, 알프스 이북에서 유럽 세계의 팽창 등이 있었다. 이 기반을 갖춘 유럽에서 흑사병과 같은 사회적 재앙과 충격이 다가오자 문화적 변동성을 굉장히 높이 끌어올렸다. 동시에 인쇄술의 도입으로 아이디어 시장에서의 경쟁은 치열해졌고, 이단적 사상이 금새 확산될 조건이 갖추어졌다.

결정적으로 지리적 발견의 시대가 열리면서 고대인의 가장 권위적인 지식 기반이 붕괴했다. 어떤 고대인도 아메리카의 존재를 미리 써놓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들이 물밀듯이 쏟아들어져 왔으며 유럽인들은 그때부터 새로운 지식, 기이한 이야기 등을 수집하는 데 몰두했다. 그와 함께 병행된 상업의 팽창은 ‘실용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알렸고 중국, 인도, 이슬람 세계의 숱한 지식을 유럽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변화들이 누적되자 이단적인 문화적 사상가들의 아이디어 혁신이 마치 생태계에서 특정 종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듯 번창할 조건이 마련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

하지만 이런 문화적 변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유럽인은 자신들이 최소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쌓아온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버릴 생각이 절대 없었다. 특히 중세의 대학들은 보수파의 견고한 요새로 기능했다. 국가 권력자들도 대부분은 이단적인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럽에서는 이 모든 저항이 무위로 돌아간 것일까? 

흄부터 재러드 다이아몬드까지 숱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왔듯 유럽의 만성적 분열과 경쟁 상태가 원인이라고 보는 게 제일 타당하겠다. 이런 종류의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또 구매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인층, 전문직이 많았다. 프랑스의 위그노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겠다. 만약 이들이 중국과 같은 단일 제국의 신민이었다면 국가에 대해서 지렛대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분열되어 있었고, 국가 간 군사적, 상업적 경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인적 자본을 축적한 이들 인구집단은 협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했을 때 일어난 일처럼, 네덜란드 같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곳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많은 혁신가들이 그런 곳에서 피난처를 마련해서 자신들의 이단적 사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만약 유럽의 보수파들이 하나로 뭉쳐서 이단아들에 대항했다면 고대인의 권위는 계속 지켜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누가 하나라도 룰을 깨고 이단자들을 관용으로 받아들이면 나머지 억압자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집단 조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유럽 각국은 최소한의 도덕적 선(유신론 등)만 지키면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최대한 보호해줄 수밖에 없었다.

‘편지공화국’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 “17,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원거리 편지 교신으로 지식과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해 온 문화적 공동체.” 출처: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이다. 유럽 지식인은 자신이 ‘범유럽적 시민’이라는 코스모폴리탄 정체성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다. 초기에는 라틴어가 그 정체성의 단단한 뿌리였고, 나중에는 편지공화국의 시민이라는 정서 자체가 그 뿌리가 되었다. 편지공화국의 시민은 국적, 지역, 종파 등에 상관 없이 편지로 자신의 의견과 사상과 과학 연구 결과들을 공유했다.

편지공화국 시민의 편지 교류를 시각화한 이미지. (출처: 스탠포드 대학) http://republicofletters.stanford.edu/
국가는 물론이고 대륙까지 넘나드는 ‘편지공화국’ 시민의 편지 교류를 시각화한 이미지. (출처: 스탠퍼드 대학)

왜 이들은 이런 활동을 했을까? 편지공화국 내에서의 인정 욕구, 그리고 충분한 인정을 받았을 경우 정치 권력자들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후원이 핵심적인 동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된 지식들은 곧바로 전 유럽으로 공유되어 숱한 지역어로 번역될 수 있었다. 글의 형태는 책, 편지, 후에는 학회의 학술지까지 다양했다.

또한, 유럽의 활발한 인쇄 출판문화 덕에 지식의 유실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편지공화국은 논리와 자연세계의 현실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아이디어의 가치를 평가했기 때문에 지적 혁신은 폭발적으로 가속되었다. 이 편지공화국을 통해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이 확산되면서 산업혁명의 지적, 문화적 기반이 단단히 다져지게 된다.

이제 적어도 편지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세부적인 사항에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큰 틀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인은 근대인보다 못하며, 오늘은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진보의 문화가 확립된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이런 문화적 신념을 바탕으로 경제성장, 정치적 해방 등을 꿈꾸었고 사회가 마주하고 있던 단단한 천장을 부수려고 전력투구했다.

그리고 이 계몽주의 정신 아래에서 오랜 기간 분리되어 있던 명제적 지식과 처방적 지식은 단단히 결합되었다. 이런 과학발전이 실제 산업혁명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18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완성 단계에 달한 성장의 문화, 진보의 문화는 유럽과 나머지를 대분기로 이끌었다.

중국에서는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실 저자는 중국이 문제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서구였다. 서구에서 일어난 일이 특별한 것이었지 비서구 사회가 정체, 퇴보한 것이 아니었다. 서구가 만들어낸 것은 만성적 분열과 경쟁이라는 정치적 환경 속에서, 초국적 아이디어 시장을 만들어 자연에서 질서를 이끌어내고 유용한 지식을 축적하려는 문화였다.

중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의 단일 제국이 너무나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했다는 데 있었다. 황제와 관료들의 지배력 하에서 이단적 사상가들은 나오기 힘들었고, 나와도 그들의 사상이 전통의 권위를 전복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했다. 과거제는 점차 안정지향적이고 기득권의 지대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어 갔고, 중국의 높은 교육투자와 인적자본 축적은 생산적인 영역으로는 전혀 향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이들이 금융이나 상업,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재능을 살렸던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모두가 과거시험에 매달렸고, 실무와 별 상관없는 경전을 암기해야 했다. 이런 사회의 보수화는 부분적으로 중국이 송대 이후에 겪었던 유목민의 정복과 사회의 붕괴, 대혼란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어떠한 경쟁 세력도 중국 내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불변의 사실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지식인에 대한 후원은 황제의 개성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중국은 많은 책을 생산하고 소비했으나 지식이 체계적으로 확산되어 보존되는 일은 없었다. 청대 중기까지 중국에서 만들어낸 찬란한 전서들은 상당수가 유실되곤 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지적 환경에서는 산업계몽주의가 출현할 수 없었고, 그것이 중국에서 뉴커먼과 와트[footnote]토머스 뉴커먼이 1705년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제임스 와트가 1769년 이를 개량했다. 편집자 주[/footnote]이 출현하지 못한 이유였다.

청나라(1616년~1912년)의 국새
청나라(1616년~1912년)의 국새

이것은 중국 문화가 내생적으로 혁신을 억압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왜냐면 중국에 ‘중국판 계몽주의’의 씨앗도 없던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말·청초부터 고증학을 비롯하여 전통적 성리학의 질서에 염증을 느낀 일군의 학자들이 실용학문을 강조하는 풍토가 생겼다. 수많은 학자가 지리, 농업 등에서 막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실용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들을 작성했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정교하게 구축한 과학적 방법론은 오직 고전을 복원하는 데에만 적용되었다. 고전과 고대인의 사상이라는 전제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쪽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대신 전통 중국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근대인은 고대인을 절대 넘을 수 없으며 타락만 하지 않아도 정말 잘 하는 것이라는 데 머물러 있었다. 이는 중세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관이었고, 여기서도 우리는 “중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유럽이 특이했던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치평가를 어떻게 하든 중국의 지적 풍토가 경제성장에 부정적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럽인들이 함포와 기관총을 끌고 중국 해안가에 나타났을 때, 고대인의 지혜는 무참히 깨져나가면서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권에서 살고 있다. 전통 서양에서 발생한 명제적 지식을 우리는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으나 전통 동양에서 발생한 명제적 지식을 다수 서양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장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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