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분석합니다. (약 18분)

80억 중 20억, 20억 중 6만 명.

2022년 기준 전 세계 인구는 약 80억 명이다. 그중 무슬림은 약 20억 명으로 추산되고, 그중에서 약 6만 명이 한국에 산다.

인도네시아 인구는 약 2.8억 명(2022 기준)인데, 그중 90% 정도가 무슬림이고, 파키스탄 인구는 약 2.3억 명(2021)으로 세계 다섯 번째이며, 무슬림은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많다. 파키스탄은 국가의 설립 목적 자체가 이슬람이다.

대구 북구 대현동에도 우리나라 무슬림 6만 명 중 일부가 산다. 이들은 대부분 유학생이다. 대구 북구에 사는 무슬림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연립주택을 증축하려 했다. 기도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기도실 설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구청에 건축 허가를 받아 연립주택을 증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이 반대했고, 구청장이 ‘정치적 판단’을 했다. 건축을 중단시켰고, 법원의 판단을 통해 그 중단 처분은 무효가 됐지만, 여전히 연립주택 증축은 멈춘 상태다. 이른바 대구 대현동 이슬람 사원 건립 갈등이다.

사원이라고 했지만 연립주택 증축이고, 갈등이라고 썼지만 일방적인 혐오와 증오다. 집값 떨어진다는 이기주의라면 차라리 합리적이다. 돼지고기가 무슬림에게는 금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돼지머리로 실력 행사(?)하는 눈먼 증오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대현동에서 무슬림은 명백한 약자고, 주민과 북구청 그리고 경찰은 명백한 강자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정환이 정리한 ‘슬로우리포트: 이슬람 사원 앞 바비큐 파티, 누가 이들을 극단으로 내모는가(2024.05.31.)’를 참고하기 바란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소재 모스크(이슬람 예배당). 대구 대현동 이슬람 사원은 이런 으리번쩍한 모스크를 짓자는 게 아니라… 아래 사진을 참고할 것.

한국은 무슬림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 소재 대학도 외국 유학생이 필요하다. 농촌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지역 경제 영역에서 이주노동자는 필수적이다. 유학생과 이주노동자의 종교를 우리가 선택할 순 없다. 나와 당신, 우리의 종교를 이주노동자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미 아르헨티나에서만 배타적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게 아니다. 트럼프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부러워했던 북유럽, 핀란드와 스웨덴에도 우익 포퓰리즘이 하루가 다르게 득세한다. 올해 치러질 미국 대선에서도 ‘남쪽 문제'(미국 -멕시코 국경 불법 이민 문제)는 화두다. 우리는 그 증오, 포퓰리즘의 씨앗을 대현동에서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캡콜드(김낙호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에게 미국의 ‘남쪽 문제’에 관해 물었다. 그 질문은 대현동 이슬람 사원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미래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슬람 사원이라고 했지만 무슨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기도할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빌라를 증축하려 했다. 그런 유학생과 이주민의 바람에 대현동 주민은 이슬람이 금기로 삼는 돼지고기 머리라는 혐오와 증오로 답했다.

캡:콜드케이스 [ep. 10]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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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4.06.06.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으로 대체하거나 본문에 맥락화합니다.

미국 내 분위기


서로 다른 히스패닉: 정착민 vs. 난민

트럼프의 난민 공포 조장에는 미국 내 히스패닉도 상당수 동조한다. 왜 히스패닉이 같은 히스패닉 난민에 관해 공감하고 연민을 품기보다는 공포와 선동에 공감하는가.

히스패닉 인구를 무조건 하나의 큰 덩어리로 취급하는 것은 어렵다. 우선 미국 내 히스패닉 이민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됐다. 150여 년 전, 철도 대공사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적 의미에서도 최소 1980년대부터 크게 늘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든 3D 직종을 중심으로 히스패닉 노동력이 ‘아메리칸 드림’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여 미국에 유입됐다.

그런 대규모 유입 시기를 아주 보수적으로 1980년대로 본다고 해도 30년이 훌쩍 넘은 셈이다. 한 세대 이상이다. 그렇게 유입된 히스패닉은 이미 안정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정착한 히스패닉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하면 하나의 기득권이 된다. 새로운 유입을 필연적으로 반길 이유가 없다.

아메리카 드림? 배타성 근거로 왜곡

새로운 히스패닉 이주민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미 기득권이 된 안정적으로 정착한 히스패닉에게는 일종의 ‘외적’이다. 아메리칸 드림, 그게 뭔가 생각해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고생스럽지만 크게 성공할 수 있다, 큰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 거 아닌가. 1980년대 한국계 이민자도 여기에 공감한 거고.

그래서 그 아메리카 드림에 담긴 함의는 뭔가. 노력하면 성공한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 나름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주민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거다!’ 그러니까, 미국 사회에 안착한 자신의 ‘아메리카 드림’과 ‘노력’ 사이에 인과관계라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까지의 헌신과 성실과 노력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주민은? 무임승차하려는 도적이 되는 거다. 그렇게 새로운 이주민을 배척하는 배타성을 정당화한다. 성공에 기여하는 환경이나 구조의 힘을 등한시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는 셈이다.

리버럴도 동조하는 트럼프의 공포 마케팅

히스패닉이 아닌 미국 시민? 더 안 좋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져야할 법한 미국 ‘리버럴’들 마저도 점차 부정적 여론이 늘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범죄자고, 마약을 가지고 온다! 트럼프는 그런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부각했고,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미국의 리버럴도 이런 트럼프의 공포 마케팅에 영향받지 않을 수는 없다.

트럼프의 공포 마케팅


리버럴 진영은 한 때 미국에서 비백인 인구가 늘어나는 인구학적 관점에서, 백인 지지 위주의 공화당은 이제 더는 대권을 잡을 수 없다고 낙관했는데, ‘그 안에서의 변화’를 너무 간과했다. 안정감을 무너뜨리는 건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 (마케팅)을 체화한 게 트럼프다. 나아가 이민자에 대한 공포가 잘 먹힌 또 다른 이유는 마약 위기다. 아편계 마약에 관한 사회적 문제 의식이 차 있던 상황에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민자는 마약 카르텔의 일원이라는 프레이밍이 씌여졌다.

건강보험과 마약 위기의 함수 관계

사실 미국 사회 마약 위기는 건강보험의 문제와 연결된다. 미국 사회에는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보험은 메디케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한국의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같은 식의 보편적인 보험 보장은 없다. 그러다보니 보험 보장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병원에 아예 갈 생각을 안한다. 가더라도 비용 생각해서 진통제만 처방 받게 되고. 그 처방전이 아편 계열일 수밖에 없고, 그런식으로 고통에 대처하다 중독자가 되고, 그러다가 더 강력한 게 뭐가 있냐… 결국 펜타닐 같은 합성 마약까지 찾게 된다. 그런 것이 흔하게 굴러다니다보면 좀 더 “대중적인” 의미에서 쾌락성 마약으로 전용되기도 하고.

이주민, 마약과 범죄에 대한 공포

여튼 그런 배경인지라, 미국 사회에서 이민, 난민에 씌여지는 주된 이미지이랄까 내러티브는 마약과 범죄다. 일자리는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내러티브로 작동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이야기는 긍정적인 내러티브일 수도 있어서 지속적인 효과를 낼 수도 없다.

미국의 우익 나치들은 문화적인 측면을 건드렸다. 은유적인 의미의 나치가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극우는 사전적 정의 그대로의 나치라고 규정해도 위화감이 없다. 이들은 특히 트럼프 시대에 다시 각광받은 ‘거대한 대체’ 이론 같은 걸 내세웠는데, 한마디로 ‘우리(백인)가 소수가 될 것이다’ 같은 류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대놓고 인종차별이라서 주류에서 호소하고 공감을 받기 어려웠고, 그래서 남은 게 비백인 신규 유입자들이 사회 안전을 위협한다는 원초적인 공포. 그들이 우리 사회를 위협한다는 것. 그 강력한 내러티브를 채우는 게 마약과 범죄다. 가장 깔끔한 호소력을 가지는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vs. 바이든


바이든도 굴복한 공포 마케팅? 바이든의 두 얼굴?

이런 분위기가 누적돼서 바이든마저 난민을 신경쓰는 상황이다. 최근 남쪽 국경 심사를 전면 중단했다(멕시코 국경 무단 월경자 대상 국경 폐쇄 행정명령, 사실상 국경 봉쇄. 2024.06.05). 바이든마저 트럼프의 공포 마케팅에 굴복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다만 어제 6월 18일에는 미국 시민과 결혼한 약 50만 명을 출국이나 추방 우려 없이 영주권을 주는 멕시코 국경 폐쇄와는 상반된 새 이민 정책을 발표했다. 편집자)

사실에 바탕한 ‘근거 있는’ 공포

미국 사회에서 마약 공포는, 합성마약 펜타닐 공포가 주류 언론에서 많이 부풀려지긴 했지만, 아예 거짓은 아니다. 애초에 펜타닐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마약의 세계화 덕분이다. 중국에서 공급한 재료로 멕시코에서 만들고 미국인 바이어가 수입하는 식 말이다. 그야말로 마약 범죄의 세계화가 완성됐다. 정작 ‘남쪽 난민’을 통해 들어오는 비중은 매우 적을텐데도 말이다.

11월 대선, 바이든과 트럼프의 차이?

기본 인권을 대하는 철학과 방법에서 차이가 있긴 하다. 트럼프 공화당 쪽은 난민을 짐승 취급한다. 반면 민주당 쪽에서는 수용 인력을 늘리고, 기본 인권을 존중하는 쪽으로 신경을 쓰는 편이다. 트럼프가 가장 악질적인 건 가족을 찢어놓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강제로 분리된 난민 가족들은 트라우마가 생기고, 개별 신원 파악도 제대로 안 되어 그야말로 생이별을 당했다.

그런 반인권 행태는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데, 그야말로 인권을 개무시하는 공포 정책이다. 오바마든 바이든이든 민주당 정권들은 그런 반인권적 방식은 최소한 지양했다. 하지만 오바마든 바이든이든 난민 대책을 제대로 세웠다고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미국은 난민 정책에는 모두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실패했나

우선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너무 많다. 그리고 남미 정세가 너무 불안정하다. 대표적인 예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을 꼽곤 한다. 야심찬 개혁 과정에서 몇가지 악조건이 겹치자 정치 경제가 완전히 망하지 않았는가. 차베스가 갑자기 죽기도 했지만, 승계한 후계 정권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익의 역습이니 뭐니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결과로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많은 사람들은 탈출을 꿈꾸게 됐다.

멕시코는 말할 것도 없다. 정부가 범죄 카르텔을 제대로 통제를 못한다. 이렇게 중남미가 불안해지면서 이민과 난민 수요가 너무 많아졌다. 최근 멕시코는 새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중도 좌파의 정권 연장 성공이라는 의미 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물론 몇 가지 희망적인 요소도 있긴 하다. 멕시코 최초의 여성 대통령(당선자)이고, 이공계 배경도 있고 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하는데… 이공계 +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메르켈 총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멕시코 정부가 지역을 거점으로 삼는 마약 범죄 카르텔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사회와 정국은 계속 불안한 채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정권이 극우 반동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정도를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진일보한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 법적 지배가 필요한데, 그런 대책이 있는가? 기대가 크지 않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1954년 생. 총리 임기; 2005.11.~2021.12). 그리고 메르켈의 시그니처 손동작.

미 대선 화두 ‘남쪽 문제’


현재는 미국 내 난민 상황과 이에 관한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크게 확대된 상태다. ‘남쪽’ 문제는 미국 대선에서 최대 화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악의 내러티브, 백인 민족국가

그러다보니 이런 분위기가 사회 내의 인종 차별과도 연결된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남쪽 국경의 난민 정책 실패. 그래서 우익은 ‘백인 민족국가’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미국의 우익 싱크탱크가 ‘프로젝트 2025’이라고 발표한 걸 조선일보가 칭찬해서 개인적으로 기겁한 적 있는데, 그 내용에 무엇이 들어있냐면 ‘백인 기독교 국가’를 만들자는 거다. 반(反)이민 정서는 그런 내러티브의 총합이고, 이민자 = 범죄자라는 공식은 난민 정책의 실패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앞서 살핀 것처럼 마약 공포와 이와 관련이 있는 건강보험의 실패가 이 내러티브의 배경이다.

현실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런 내러티브를 한층 강화하는 게 미디어 환경이다. 우선 코로나 이후에 팟캐스트 자체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는데, 특히 실제 범죄를 다루는 팟캐스트와 영상물이 주류에서 인기를 끌게 됐다. 드라마 ‘CSI’의 픽션에 사실적인 현실감이 더해졌달까. 그 연장선에서 지난 3, 4년 동안 넷플릭스에도 범죄 다큐멘터리가 꽤 많졌는데, 이런 미국 사회의 현실과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회적 환경과 미디어 환경이 경합하면서 사람들은 실제 범죄에도 관심을 품게 됐는데, 그때 사람들이 체감하는 공포의 정도가 드라마 픽션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앞서 예시한 ‘CSI’ 같은 범죄 수사 드라마는 악당도 잡고, 문제도 해결하면서 통쾌하게 끝나지만 현실에 밀착한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상품으로서의 다큐멘터리도 문제 해결에 주목하기보다는 공포를 그 자체로 주목하고 분위기 잡는데 더 초점을 맞춘다. 진짜 범죄 다큐를 보면 ‘무섭다’. 그게 인기 포인트고. 범죄에 관한 공포가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넷플릭스에서 ‘범죄 실화 다큐멘터리’로 검색한 화면. 2024.06.20. 기준.

소셜미디어가 촉진하는 공포

여기에 소셜미디어 환경까지 더해진다. 이웃들끼리 우리 동네에는 이런 범죄가 있었다더라하는 카더라 통신으로 공포가 확대재생산한다. 더 두려워하고 더 꺼려하는 쪽으로 이야기들은 살이 붙어서 퍼진다. 알고 보니 남미 깽단, 무슨무슨 테러 집단이라더라. 막역한 불안과 공포가 ‘남쪽 나라는 범죄 집단, 범죄 조장, 마약 소굴’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에 수렴된다. 현재 미국은 ‘공포로서 이민자’를 두려워하는 방향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함치는 공포, 속삭이는 희망


언론의 자정작용?

이민자에 관한 공포, 이를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혐오와 증오, 그리고 사회적 배제의 내면화는 주류 언론이나 공식 언론을 통해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쉽게 말해 언론이 제대로 보도한다고 해서, 혹은 자신들 관련 기사 팩트체크를 잘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셈이다. 이 문제에 정론을 표방하는 언론이 개입하기 쉽지 않은 게 이런 맥락이다.

언론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라는 게 문제의 특이성이다. 그나마 이 문제에 개입하고 있는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주류 언론은 폭스뉴스 정도다. 왜냐? 큰 영향력을 가진 주류 언론임에도 불구하고 언론 규범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까. 물론 공포를 증폭시키고 극우들의 세계관을 만족시켜주어 수익을 키우는 것이 핵심이고.

실마리: 바이든의 새 이민정책 발표

그럼에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고, 단기와 장기로 나눠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장기적으로는, 역시나 뻔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공포를 조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대중 서사 말고 현실에서 ‘진짜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 삶의 다양성에 맞게 때론 가볍게 또 때론 진지하게 또 때로는 유쾌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거다. 이때 대중에 대한 계몽적 태도, 훈수 두는 식의 접근은 최대한 피하면 좋겠다. 물론 그래도 사회적으로 왜곡된 채 축적된 공포(증오/혐오) 내러티브에 대한 재교육은 긴요하다고 본다. PC(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한다는 이들의 역풍을 맞기는 하겠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난민 정책을 성공적으로 개혁하는 방법밖엔 없다. 성공한 난민 이민자 융화 정책이 필요하다. 그 정책이 잘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걸 점차 더 확대하고, 모델화하고 시스템화해야 한다. 해법의 큰 그림은 사회 전반의 내러티브를 바꾸는 것이지만, 단기 처방으로는 정책적 개혁과 개선이 필요하다(최근 2024.06.18. 바이든이 발표한 ‘미 시민과 결혼한 50만 명’ 추방 없이 영주권 준다는 선언 참고할 것. 편집자).

정답은 안다… 하지만

미국 정부도 정답을 모르는 건 아니다. 결국은 정치경제적 풍파를 겪는 남미 각국을 직접 지원해서 안정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하고, 무려 미국 시민에게 납득시켜야 하는데, 외국에 관한 미국인의 인식이 평균적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서… 정답은 그거긴 한데, 너무 어렵고 거대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또 하나. 난민 심사를 효율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우선 입국 심사 기구를 확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무원을 더 뽑아야 하고, 특히 연방 공무원 수를 늘려야 하는데, 이것 역시 보수 쪽에서 아주 싫어하는 정책이긴 하다. 그럼에도 인력과 제도를 손보는 게 가장 효율적인 단기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먼 나라 이야기? 대현동을 보라


대현동 사건 혐오 멈출 수 있었던 기회

학생 대책위 보고서에서 잘 설명된 것처럼, 5년 동안은 표면적인 갈등이 없었다가 특정 교회에서 개입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학생들은 주장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5년 동안 갈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건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법 집행’이다.

경찰이 제 때에 개입했다면, 그래서 특정 교회가 선동하는 혐오에 제동을 걸었다면 이렇게 사태가 악화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경우에 경찰이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이 부족하고, 주민들의 증오와 혐오 감정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에 관한 노하우도 부족하다. 그런 명확한 가이드라인, 경험적 노하우가 없으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거다. 실제로 경찰은 대현동 주민의 명백한 혐오 행위에 관해 무혐의 처분했다.

북구청장의 정치적 판단

경찰이 제때 제대로 된 가이드와 노하우로 개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더해서 제도적 기반이 중요하다. 그야말로 오래된 숙원인, 차별 금지법이 존재했더라면 이렇게 혐오가 손쉽게 확장하고 갈등으로 치닫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북구청장의 정치적 판단을 제재할 수 있는 법안이 바로 차별금지법. 현재는 그런 법적 제재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그래서 공무원 이전에 정치인으로서 북구청장은 선거 표 계산을 하면서 판을 열어두고 본다. 투표권도 없는 유학생과 이주노동자보다는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주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거다.

집값도 집값이지만… 본질은 공포

증오와 혐오의 기반은 공포라고 생각한다. 미국과 일맥상통하는 공포. 그 공포를 한 교회가 들어오면서 확대한 거고. 하지만 그 공포가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조성됐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슬람 테러가 일어난 적 있나? 없다. 한국에 이슬람 문화권과의 충돌로 역사의 궤적이 바뀐 무언가가 있나? 없다. 이슬람에 대해 품는 공포와 혐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에서 수입한 ‘이미지’다. 미국 대중담론이 워낙 자연스럽게 늘 강력하게 흘러들어오다보니, 그쪽에서 만들어놓은 테러리스트 느낌을 그냥 자연스레 체화해버리는 것.

9.11 테러. 이슬람이 과격 테러리즘 이미지와 연결된 결정적 사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단체의 영역 다툼이다. 일부 개신교 집단은 쟤네들(이슬람)이 들어오면 우리 걸 빼앗긴다는 제로섬 인식을 가진다. 이렇게 보면 각각의 대처도 좀 더 명확해진다. 미국에서 수입한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한국에서 더 나은 더 제대로 된 서사로 지워야 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다. 이를테면, 우리 스스로 새로 쓰는 이슬람 이야기랄까. 그게 중요한 과제다. 일부 개신교 단체가 조장하는 혐오에 대해선 엄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

한 대구시의회 의원의 ‘이슬람 경제 특구’ 아이디어

그 의원 뜻은 알겠는데, 그리고 그런 컨셉을 반대하는 건 아닌데, 특구를 만들면 ‘이슬람 사파리’가 될 위험성이 있다. 타자화된 채로 한번 구경하면서 지나가는 동물원으로 끝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지금으로선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로 생각한다. 한국과 유리된 이질적인 공간이 될 우려가 크고, 뭔가 통합된 조화로운 이미지가 이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진 않는다.

내가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그림은 이렇다. 모든 공공시설에 이슬람 기도실이든 불교 참선실이든 기독교 기도실이든 그쪽에서 필요로 한다면 모두 하나씩 구비해두고 있고, 동네 걸어가다가 모스크가 그저 평범하게 하나씩 보이는 것. 인도 커리집 처럼 할랄 푸드점도 있는 거고. 일상과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런 상황이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와 한국 사회에 스며드는 시나리오가 이상적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의” 이슬람과 무슬림으로 가야 한다. 이슬람 그 자체의 고유성을 존중해야겠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무엇인가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나, 그런 걸 발굴해야 한다.

기독교 불교 다 외국 것인데… 왜 이슬람에는 유독 배타적일까

그래서 이슬람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주노동자가 많아질 거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서 유학생과 이주노동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 그 규모는 꽤 커질 수 있다. 중동 지역도 마찬가지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무슨 대형 계약을 체결하고, 그밖의 중동 국가들과도 교류를 맺는 흐름은 한참 되지 않았는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이슬람 문화에 관한 ‘드러냄’의 과정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늦었지만, 더 드러내야 한다. 가령 외국인 출연 예능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된다. 간단한 예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걸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보여주다보면 재미있다가 익숙해진다. 채식주의나 비건이 이제 더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이태원처럼은 어려울까?

그려려면 다문화어야 한다. 이태원은 한국과 뒤섞인 다양한 외국’들’이라는 점에서 성공한 거다. 어느 단일한 문화였다면 이렇게 성공한 문화적 상징이 되기는 어려웠을 거다. 이태원도 그냥 미군 부대 대상 상권 정도였던 옛날에는 딱히 ‘힙’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대현동 클라쓰는 가능할까


스킨십이 필요하다

가장 나쁜 건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선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인식에 무슬림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민들 사고방식을 완화할 수 있는 해결의 열쇠는, 얄궂게도 해당 유학생들이 쥐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주민들 데리고 스킨십을 하는 것, 그러니까 이슬람 먹거리를 나누며 동네잔치를 종종 벌인다든지 말이다. 무척 피곤하겠지만, 동네 안에서 부대끼는 뭔가를 하면 좋을 것 같다. NGO나 지자체가 무언가를 해결하고 싶다면, 바로 그런 ‘스킨십’을 유학생들이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젊은 사업가의 ‘신데델라’ 스토리라는 상투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문화, 소수자에 관한 성숙하고 포용적 태도를 잘 보여준 [이태원 클라쓰] (2020)

전범 사례, 94년 LA 폭동

1994년 LA 폭동 사례를 떠올려 보자. 여러 중층적으로 누적된 계급갈등, 인종갈등이 있었고, 한인 점주의 흑인 소녀 사살 등의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당시 흑인 폭도들에게 그야말로 한인 타운이 박살 났다. 그 파괴 후에 화해하기 위해서 지역에서 조화를 찾아내기 위해서 한인들이 정말 많이 노력했다. 그런 과정이 대현동에도 전범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인들은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그랬겠나. 정말 필요하니까 그렇게 한 거다.

스킨십 요구도 강요 아닌가

물론 그런 스킨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혐오가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시민단체든 개개인이든 그런 걸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는 거다. 그 동네 무슬림 다수는 유학생이다. 지역 친화 활동을 하기엔 학생은 부담이 될 수 있으니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적게든 많게든 조금씩 그런 변화, 부딪힘, 스킨십을 시도해야 한다. 대한변협 토론회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의 역할

사실 대현동 사건은 대학 안에 기도실 하나 만들면 처음부터 이렇게 갈등과 증오로 커질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외국인 학생, 사람에게 그 정도 투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슬픈 거다. 이슬람 기도실을 대학에 설치한다고 해서 이슬람 편애나 타 종교에 대한 차별이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필요하면 그런 공간을 작게라도 만들어주면 된다. 지역 대학에서 공간이 부족해서 그런 걸 못만들까? 의지가 부족하고 방법을 몰라서라고 생각한다.

그런 종교시설은 마치 수유실과 같은 거로 생각하면 좋겠다. 필요하니까. 그걸 제공하는 거다. 무슬림은 반드시 하루 다섯 번은 기도해야 하니까. 기독교도 학생에게도 필요하다면 만들어주고. 불교도 학생에게도 필요하면 참선실 만들어주고, 힌두교도 학생에게도 원하면 만들어주면 된다.

학교 안에서 만들면 가장 편했을 거다. 이슬람 유학생 보고서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원했던 것이 바로 그거다. 다시 강조하지만, 학교가 그 정도로도 사람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프랑스의 실패

프랑스는 지난 10년의 흐름을 보면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변협 토론회도 지적하는 것처럼, 유학생과 이주민이 지역 사회에 동화해야 하는데, 그 동화라는 게 쉽지 않을 뿐더러 무조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는 반면교사로 볼 만하다. 너무 지나친 통합주의 원칙을 강제한 측면이 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려면 너희 것을 버리고 무시해라. 가령 히잡 금지는 대표적이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해서 학교 수업에서 무함마드를 비하하고 풍자하는 게 반드시 필요했을까도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당 교사의 살해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무례함의 파장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이런 문제들을 방치해서 장기적으로 갈등만 고조시켰다.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리 앱도 총격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2015년 1월 8일 파리 추모집회에서 문제의 샤를리 앱도를 두고 촛불로 고인들을 추모하는 모습.

Valentina Calà, 나는 샤를리다 17, CC BY SA
2023년 6월 29일 시작된 프랑스 인종 차별 반대 시위. 아주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위키미디어 공용).

한편 미국 모델은 불법만 아니라면,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니들 살고 싶은 대로 살라는 식의 접근이다. 그런 원칙하에 다문화를 포용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세인트 페트릭 데이처럼 아일랜드 문화를 미국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인 건 거기에 아일랜드계 인구 및 그 문화에 관한 상업적 효용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던 거고. 거꾸로 생각하면 문화적인 존중을 받으려면 상업적인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측면이 있다. 기브 앤 테이크랄까.

캐나다 포인트제

개인적으로 더 긍정적인 모델로 삼고 있는 건 캐나다다. 이민자를 맞이하는 표현방식인 ‘뉴커머 오리엔테이션‘을 보면, 캐나다의 기본적인 관점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이민자’. 너희들은 이번에 새로 온 ‘우리들’일 뿐이라는 게 캐나다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캐나다의 포인트제(점수제)도 실용적인 접근이다. 예를 들면 캐나다에 부족한 어떤 특정 직종은 이민 절차에서 점수가 가산된다. 캐나다 사회에 어떤 게 부족하고 어떤 게 더 필요한가. 그런 실용적인 가이드를 마련해서 이민 코스를 더 단축하거나 늦춘다. 그래서 캐나다에 필요한 직업이라면 정착하기에 훨씬 더 수월해진다. 캐나다의 실용주의적 접근, 다문화와 이민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인상적이다.

캐나다 정부 홈페이지.

이민과 이주를 인도주의만으로 보거나 사회 진보로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걸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한다.

대현동 클라쓰는 가능할까?

대현동에서도 ‘이태원 클라쓰'(2020) 같은 달달한 다문화 스토리가 가능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K-그룹 안에 비한국계가 있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됐다. 글로벌 전략이기도 하고, 인력을 관리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리사가 없으면 블랙핑크가 얼마나 이상하겠나.

대현동의 증오와 혐오가 그저 다큐멘터리의 공포가 아닌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될 필요가 있다.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드라마 속 외국인, 파트리샤의 경우

핍진성(verisimilitude: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이 자연스럽고 일관성 있게 논리적으로 전개된다고 여겨지는 정도)을 위해서라도 동남아계가 많아져야 한다. 드라마 [비밀은 없어] 속 작가팀 막내 작가로 파트리샤(콩고 출신, 극 중 성이나)가 등장한다.

별다른 외국인 사연을 붙일 법도 한데 그런 게 없다. 그냥 파트리샤로 등장한다. 그게 이상하지 않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더 자연스러워지면, 낯섦, 다름에 관한 경계가 많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걸 많이 늘려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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