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스토리 4.] 트럼프의 ‘장애 비하’ 발언으로 미국 정치에 관심이 생겼다. 한국과 미국의 장애 정책 차이는 뭘까? 우리나라 장애 정책의 방향성은? 홍윤희 ‘무의’ 이사장의 장애와 삶에 관한 이야기. (⏰12분)
만지니는 “급진적인 혁신은 질문 자체를 바꾸는 대답을 창조한다”라고 썼다. (69쪽/177쪽)
배지 가운데에는 “루게릭병이 제 몸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제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가장자리에는 “저는 루게릭병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이 병, 그리고 이 병이 가져오는 모든 새로운 상황에 대항하지도, 관리하지도, 심지어 고통받지도 않을 것이며 대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외치는 저 문장들은 사실이자 선언이다. (90쪽/177쪽)
사라 헨드렌,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영어 2020, 한글 2023.
미국 대선이 막 시작됐습니다. 빠르면 내일(11월 6일 수요일) 오후 그 결과가 나온다고 하죠. 미국 대선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미국 대선을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홍윤희 무의 이사장이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미국 대선과 미국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미국을 타산지석으로 혹은 벤치마킹해 준비해야 할 우리의 장애 정책 방향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홍윤희 스토리 [ep. 4]
‘장애’라는 렌즈로 본 미국 대선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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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오래전에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인터뷰이(홍윤희)가 오랜 시간, 오늘 미국 대선 투표일 아침까지 퇴고했습니다. 독자의 가독 편의를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맥락화해 표현하고, 인터뷰이 홍윤희 무의 이사장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장면 1. 프레드 트럼프 3세
트럼프 전 대통령의 조카인 프레드 트럼프 3세가 정치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장애 국민은 그 모습 그대로 장애인을 봐주는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있다(Disabled Americans deserve a president who sees them for those who have disabilities)” 카멀라 해리스의 정치 광고였죠.
장면 2. 거스 월즈
많은 이들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장면이 있었어요. 부통령 후보인 팀 월즈 미네소타주 주지사의 연설 장면 도중이었는데요.
“불임 치료를 통해 힘들게 낳은 내 딸 호프, 거스(아들), 그웬(배우자). 가족은 내게 세상의 전부입니다. 사랑해!”
팀 월즈
내내 눈물이 북받치는 듯하던 거스는 이 말을 듣고 일어나요.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를 가리키며 한마디를 외치죠.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어요. 이 장면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죠.
거스가 이렇게 감정을 폭발시켰던 이유는 그가 ADHD, 비언어 학습장애, 불안장애가 있는 ‘신경다양인’이었기 때문이에요. 팀 월즈 부부는 거스의 장애를 “남다른 슈퍼파워”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장애를 무언가 신비한 힘이라든지, 우월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를 장애인단체에서는 비판해요.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거스가 보여 준 뜨거운 눈물은 TV를 보던 많은 이들에게 ‘3일 전당대회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하게 해줬죠.
이 순간에 대해 일부 극우 논객들이 빈정거리는 댓글이 있었어요. 비난이 빗발치자 이 사람들, 슬그머니 트윗을 지웠죠. 그걸 보니, 트럼프가 대통령 선출 전 했던 ‘장애 비하 발언’이 생각났습니다. 미국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였거든요.
“트럼프는 질병이 아니라 증상이다.”
앤드류 양(미국의 대만계 정치인)
트럼프의 등장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
바이든이 대선 후보 사퇴 전 트럼프에 붙인 슬로건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어요. 선거 전략 차원에서는 너무 밋밋하고 추상적이라서 실패한 슬로건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해리스가 후보가 된 이후에도 약간 변주되어(weird but dangerous) 사용되었죠.
트럼프는 많은 미국인들에겐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상징합니다. 그와 그 지지자들의 인종차별 발언, 여성비하 발언 등이 트럭으로 차고 넘치니까요. 대통령(후보)의 이런 발언은 전체 인권 의식 후퇴에 큰 영향을 끼치죠. 미국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예요.
트럼프의 장애인 조롱
트럼프는 자신을 비판하면 상대가 누구든 조롱해요. 하지만 저에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면서 조롱하는 모습이었어요. 해당 기자는 뉴욕타임스 기자로 뇌병변으로 추정되고, 당시 트럼프는 2015년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뉴욕타임스 기자라서 더 그렇게 조롱했던 걸로 보여요.
장애 인권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미국장애인법(ADA, 1990년 7월)을 만든 미국에서 이런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려 한다는 게 경악스러웠어요. 그러던 중 한 예능 몰카에서 여자는 내가 얼마든지 꼬실 수 있다면서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언급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전파를 탔어요. 이때 많은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은 물 건너갔다’고 했는데, 결국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충격은 더 커졌죠.
트럼프는 장애인 조롱에 대한 비판에 “트럼프타워에 장애인들 많이 고용했어!”라고 말하고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건 법적 의무 사항을 이행했을 뿐이죠. 이런 대통령 후보의 장애 조롱과 장애인식이 당연히 일반 시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해롭다고 짐작할 수 있겠죠.
이런 트럼프의 장애인 조롱은 거의 10년이 지난 올해도 바뀌지 않았어요. 상대 후보의 장애를 절대 조롱하지 않는 미 정치의 관행을 깨고 트럼프는 바이든의 말 더듬는 습관을 흉내 내며 조롱했죠.
공화당, 약자 갈등을 부추기다
유색인종 투표 확대를 막는 공화당
유색인종, 특히 흑인이 많은 주에서는 투표권 확대가 큰 민권 이슈 중 하나에요. 2020년에 특히 이런 투표권 확대에 대한 이슈가 심했어요. 어떤 유색인종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국 저소득층 노동자 중 유색인종이 상대적으로 더 많으니까 저소득층, 일용직 노동자가 많은 주에서는 이들의 투표권 보장을 위해 부재자 투표 방법을 좀 더 쉽게 하고, 다양한 투표 방법을 모색하는 법안을 추진했어요.
주로 민주당이 그런 법안을 추진했고 공화당은 유색인종 투표율이 투표권 확대 법안을 지속적으로 막아왔죠. 한편, 텍사스에서 장애인이 부재자 투표를 쉽게 할 수 있는 주 법안을 상정했는데, 텍사스 주지사(공화당)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어요. 웃픈 사실은 텍사스 주지사 자신이 장애인이에요. 젊은 시절 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이용하죠. 장애인권이든 인종적 민권이든 소수자의 권리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통하죠.
인권과 민권
인권이 좀 더 보편적인 개념이라면. 민권은 현대 시민이 각성해서 얻게 된 권리라고 생각해요. 가령 여성 투표권, 참정권, 장애인접근권. 흑인, 유색인종 차별 철폐. ‘투쟁’해서 쟁취한 권리를 민권이라고 표현하죠.
여성, 이주 노동자, 장애인…사회적 약자를 서로 싸우게 만드는 구조를 부추기는 건 반민권적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장애인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례가 1977년 샌프란시스코 점거농성에서 흑인민권단체들이 연대했던 사례에요. 소수자들이 연대해서 함께 발전시키는 좋은 역사적인 사례인 것 같아요.
소수자들끼리 갈등 부추기기
사회적 약자의 갈등을 부추겨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어요. 미국에서 갈라치기 쉬운 이슈가 미국 대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이민자 문제’예요. 애리조나, 텍사스, 플로리다주에 히스패닉계 이민자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주가 이민자들에게 관대한가? 아니거든요.
히스패닉도 이민 출신 지역에 따라 정치 성향이 약간 다르긴 한데 2024년에는 트럼프로 표심이 많이 옮아갔어요. 특히 젊은 히스패닉 남성의 경우 트럼프로 표심이 많이 옮겨갔는데(45세 이하 히스패닉 남성의 55%가 트럼프 지지),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들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옳다고 믿는 성향이 높아요. 결국 내 밥그릇 빼앗길 것 같으면 아주 적대적인 거죠.
나도 살기 빡빡한데 왜 내 세금을 이민자들에게 쓰는가. 외교 이슈에 왜 쓰는가. 사람들의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삶의 팍팍함을 분노로 표출하죠. 그런 분노 표출을 하도록 앞장서서 개 휘슬(dog whistle) 을 부는 인물이 트럼프예요. 이렇게 갈라치기나 공포를 조장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게 트럼프의 정치적 기술이죠.
이렇게 마이너리티 그룹 사이를 갈라놓는 전술을 정치인이 사용하고 그게 먹힌다는 건, 다른 마이너리티 그룹도 언젠가는 소위 ‘좌표’ 찍히거나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해요.
장애와 관련 있는 미국 정치인
사실 트럼프는 미국의 전반적 장애인식이나 법적 기반 등을 고려할 때 충격적으로 예외적인 정치인이죠. 국내에서 장애 정책을 개발할 때 미국, 유럽, 일본 등과 비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장애인법(ADA)은 기본적으로 참고하거든요. 장애와 관련 있는 미국 정치인들 몇 명에 관해 이야기해 볼게요.
루스벨트의 휠체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탔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대통령이 되자 백악관 전체에 경사로를 만들어요. 휠체어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게요. 장애를 숨기지는 않았지만, 국민에게 휠체어 탄 모습을 보여주는 건 꺼렸다고 하더라고요. 강력한 리더십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로 판단했을 수도 있죠. 장애는 취약함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어요.
미국장애인법(ADA, 1990)에 서명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
미국 장애인 권리와 편의 증진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법인 ADA에 사인한 대통령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화당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에요. 레이건 시대 부통령이었던 조지 H. 부시가 장애 인권 역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ADA에 사인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하기도 해요. 그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를 설득했느냐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는 의원들을 설득했다고 해요. 부시 가족 중에도 장애인이 있었고요. 그런 당사자성이 법을 통과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상·하원 의원 중에 장애 당사자들이 꽤 있어요.
바이든 대통령
조 바이든의 ‘말더듬증’은 그가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였고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한 사례죠. 바이든 자신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해요. 장애계에서는 ‘극복’ 서사를 싹 좋아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바이든은 옛날 사람이라서 장애를 ‘극복’이라는 프레임으로 보긴 했을 것 같아요.
태미 더크워스 상원의원
바이든의 2020년 대선 당시 부통령 후보 중 하나로 상이군인 출신 태미 더크워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민주당), 이라크전에 참전해서 다리를 잃은 태국계 의원입니다. 바이든의 러닝메이트로도 꼽혔을 정도로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입니다. 평소에는 휠체어를 이용하는데요. 2024년 전당대회 때는 의족을 달고 걸어 나와 연설했습니다.
개비 기퍼즈 전 하원의원
애리조나주 전 하원의원(민주당)인 기포드는 마크 캘리 애리조나주 상원의원(민주당. 우주비행사 출신)의 아내입니다. 기퍼즈는 2011년 총기 난사 사건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이 사건은 미드 [뉴스룸]에도 나오는 아주 유명한 장면이에요. 간신히 살아나 뇌수술 후유증으로 말하기, 걷기 등 일상생활이 어려웠지만 피나는 재활을 거쳐 천천히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총기 규제를 외치는 활동가가 됐습니다.
존 페터먼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민주당)으로 뇌졸중이 와서 투병하던 중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케이스입니다. 회복 후에는 후유증으로 청각장애가 생겼고 빠르게 말할 수 없게 됐습니다. 상원에서는 문자 통역을 활용하고 있죠. 페터먼 상원의원이 등원하기 전에 의회가 필요한 기술적 조처를 준비했다고 하네요. 왠지 한국에서 시각장애인 의원이 안내견과 함께 등원하려고 하다가 ‘그런 사례가 없다’며 처음에 막혔었다는 일화가 생각나네요.
그레그 애벗
공화당에도 장애 당사자 정치인이 있습니다. 그레그 애벗이라는 텍사스 주지사입니다. 하반신마비 장애로 휠체어를 이용하죠. 그러나 애벗은 앞서 언급했듯 장애인의 투표를 더 용이하게 하는 법안을 거부하는 등 장애 정책을 진보시키기보다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됩니다.
우리나라는 주로 비례 의원
한국에서는 비례 국회의원으로 장애인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도 4명의 장애 당사자 국회의원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어요(1988년 이철용 의원, 이후 이상민 의원).
장애를 대하는 미국 정치 vs. 한국 정치
미국이나 한국이나 장애 이슈는 초당적…그러나 정책 주목도 낮은 한국
장애 관련 입법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초당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장애 이슈는 정책적인 주목도가 낮아요. 입법한다고 해도 입법이 실현되려면 현실적으로 적용할 세부 규정도 만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예산을 확보해야 하죠. 이런 법 좋아! 통과시켜! 해 놨는데 예산 확보가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고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2021년 기재부 장관 집 앞에서 시위했던 것도 이런 이유고요. 기재부가 예산 못 주겠는데? 이러면 그만이라서요.
이번 국회에 여러 장애 당사자가 입성했고 이 중에는 법조인 출신도 있어요. 지난 국회 때부터 활발히 활동한 분이 재선됐고, 이번에 새로 국회의원이 된 분들도 열심히 활약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초당적 노력으로 장애 인권을 진일보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는 건 중요하고요. 좀 더 바란다면 한국이 UN 장애인인권협약 비준 국가인데 UN 권고 사항을 다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접근성부터 장애 비장애 학생 통합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초당적 노력을 통해 UN권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타산지석? 벤치마킹? 무엇을 할 것인가
미국 장애인법(ADA)와 같은 포괄적 일반법이 필요해요
미국의 장애인법(1990, ADA)은 가장 포괄적이고 힘이 센 법이에요. 미국과 한국을 단순히 비교하는 건 힘들죠. 미국은 연방국가고, 주 단위로 정책이 다르기도 하고요. 하지만 ADA는, 비유하면, 연방 차원에서 법률적 차원에서 큰 우산이고요.
미국으로 이민 가면, 한국에 비해 복지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장애인식 수준은 높은 것 같다는 게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요. 그건 ADA가 제정 공포되고 34년 동안 축적된 효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법제도 미국 장애인법의 영향을 받은 법들이 있지만, 세부 법령들이 우선순위나 체계가 좀 불확실한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사실 장애 인권을 전반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장애에 관한 ‘일반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는 경사로 같은 편의시설, 교통 등등 각기 다른 법으로 쪼개져 규정되어 있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긴 하지만, 규율하는 영역이 포괄적이지 못하고 다른 법과의 위계도 잘 정리돼 있지 않아요. 현장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해요.
방법은?
애초에 법을 제대로 만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경사로 등을 동네 가게에 설치할 때의 규칙을 정한 장애인 등 편의 증진법을 보면 처음 법을 만들었을 때 동네 음식점, 카페 등의 근린생활시설 중 편의시설을 갖추어야 할 시설 규정을 바닥면적 300㎡(약 90평)로, 시행령으로 정해놔서 동네 작은 가게 중에 90평이나 되는 가게가 어딨어요. 전체 편의점 중 단 1.5%만 경사로 설치가 의무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죠.
미국이나 유럽은 이런 법이 없어요. 법을 처음에 아예 대부분에 적용 못 하게 만들어놓으니, 신축건물이 아닌 이상 아예 휠체어로 1층 가게 대부분에 접근하기 어려워서 휠체어 이용자가 동네음식점에서 외식하거나 동네 약국에 가려고 해도 불가능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그러다 보니 법을 개정하거나 법 자체가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국가적 낭비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죠.
이렇게 처음에 잘못 낀 단추인 상황에는 법 개정을 통해 단추를 바꿔 끼더라도 현장이 바뀌는 데엔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러다 보니 시민들의 니즈를 반영해 동네 매장 경사로 설치를 각 지자체가 예산을 편성해 임시방편처럼 하고 있고, 제가 있는 무의 같은 단체들이 지자체와 기업을 연결해 지속 가능한 접근성을 만들려는 ‘모두의 1층’ 같은 프로젝트도 하게 되고요.
로드맵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정책 종합계획,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계획 등이 5년 단위로 꾸려져요. 교육부는 특수교육계획을 또 따로 짜고요. 그런데 이런 걸 종합적으로 보는 부처가 따로 없어요. 민간 기업 같으면 비슷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면 모여서 TF를 만들거나 조정 기능을 만들 텐데, 제가 공무원분들 일하는 걸 보니 자기부터 일 외에 뭔가 플러스알파로 더 열심히 하면 오히려 혼나는 구조에요.
2년 전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장애인이동편의증진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여러 부처 공무원분을 만나 의견을 제시했는데 정책이 구현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정책이 실현되려면 그 정책의 주무 부서가 정해져야 하고 예산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 활동을 하면서 장애 관련 정책을 통합적으로 보면서 필요하면 여러 부처와 논의하고 예산까지 실현이 가능한 국가 차원의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가 국무총리 소속으로 있고 외부 장애 전문가를 위촉해서 그때그때 정책을 정하는데 이 위원회의 위상을 높여서 대통령 직속으로 위상도 높이고 사무국도 둬서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김예지 의원이 2021년에 제안했다 통과되지 못했어요. 미국의 경우 장애인 정책을 조정하는 국가장애인위원회(National Council on Disability)라는 전담 부서가 1978년부터 만들어져서 여러 부처의 장애 정책을 전체적으로 총괄했어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상설부서고 여기에서 미국장애인법을 기안했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요? 예를 들어, 장애인 등 편의증진법에서 규정하는 매장 앞 경사로를 깔면 5% 등록장애인뿐 아니라 30%의 이동 약자에게, 나아가 100% 모든 국민에게 편해요. 노인, 장애인, 영유아 동반자 등을 포함하는 이동 약자 비중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며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참고로 한국에선 등록장애인만 봐서 5%로 보는데, WHO에서는 통상 인구 15% 정도를 장애인이라고 봐요. 기준은 나라마다 문화마다 정책마다 다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집에 잘 걷기 어려워하시는 어르신이나 영유아 동반자가 없는 집이 있을까요? 실제로 ‘모두의 1층’ 지지 서명을 무의에서 받으면서 서명자분들을 분석했더니 가족 중에 이동 약자가 있는 비중이 50%나 되더라고요. 소수의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셈이죠.
미국을 주시하는 이유
인구 상당수가 노환이든 후천적이든 장애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초고령화 사회로 가는 데 장애 문제에 관한 관심은 당연해요. 그렇기 때문에 벤치마크가 되는 미국의 장애 정책, 정책화의 과정, 그런 정책을 지지하거나 막는 사회적인 움직임을 참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벤치마킹의 사례가 되든 반면교사가 됐든 문제의식을 느끼고 바라보고 교훈을 얻어야 할 테니까요. 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회적인 운동이 필요한가? 그런 방법론을 미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미국 언론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서 ‘힌트’를 얻는 거죠.
잘 보고 갑니다. 저번에는 복지예산이 삭감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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