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2024년 주목할 만한 미디어 이슈와 현상을 돌아보고, 2025년을 전망한다. (🕰️22분)
캡콜드(김낙호 드렉셀 교수)에게 2024년 미디어 현상의 흐름과 그 의미를 물었다. 국내외 이슈를 다섯 개씩 선정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모든 사건들은 서로 ‘연결’돼 있었고, 그렇게 연결된 흐름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18]
숏폼식 공감, 고통의 연대로 이어질까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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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12월 30일(월) 밤 11시에서 31일(화)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선정 이슈 및 기준
이슈 선정에는 1) 사회적 임팩트, 2) 개인의 삶과의 접점, 3) 경제적∙문화적 함의와 영향력 등 세 가지를 우선 고려했다. 국외 이슈 다섯 개는 다음과 같다.
- 미국 대선: 오정보에 휩쓸린 미디어 환경.
- 트럼프 시대와 미디어 사주들의 자발적 굴종.
- ‘뇌 썩음’ 현상에 관한 주류의 주목.
- 빅테크의 AI 전면배치 본격화, 하지만 아직 멍청한 결과물.
- 가자 학살 보도와 언론 윤리, 그 딜레마.
그리고 국내 이슈 다섯 개.
- 국내 미디어 업계의 숏폼 도전.
-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을 대하는 한국 우익의 자세.
- 방송4법, 도전과 비토.
- K팝, 주먹구구 산업 vs. 문화 구심력.
- 극우 유튜브 음모론에 빠진 윤석열.
1. 체화된 혐오와 세인 워싱: 미국 대선
우익 세계관을 담아내는 팟캐스트의 영향력이 미국 대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용은 단순했다. 미국 경제가 망하고 있다는 골격에 우익의 정체성 정치를 더했다. 아이티 출신 이민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황당한 괴담(당연히 오정보)이 대표적이다. 특히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단순히 자극적인 혐오와 선동 한두방이 주효했다기보다는 일상적이고 꾸준하게 오정보를 전달했다. 이를 통해 막연한 불안의 씨앗을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자라게 했다. 그렇게 일상으로 체화된 혐오가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동했다고 본다.
우익 세계관 팟캐스트로 대표되는 생활 속으로 체화된 공포와 혐오는 대선 결과를 보듯 효과적이었다. 반면 사실 보도에 바탕한 규범적 기성 언론, 특히 리버럴(친민주당) 계열의 레거시 미디어는 제대로 시민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단순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선거 전략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 이것은 사회 환경 교육과 문해력에 관한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2024 미국 대선은 미국의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당장 흔히 비교되는 2016년의 트럼프 선거운동와도 질적 차이가 발견된다. 2016년에는 브라이트바트 같은 인터넷 유사언론이 순발력 있게 음모론을 생성하고, 폭스뉴스와 같은 기성 우익 언론이 그런 인터넷 스타일을 따라잡는 식이었다. 그런데 2020년 대선에선 그런 자극적 극우 음모론 유통 방식에 많은 이들이 피로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흥미진진한 ‘극우 음모론’의 반대편에 있는 ‘심심한’ 바이든을 선택했고,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024년에는 어땠을까. 표피적이고 찰나적이며 자극적인 극우 음모론이 일상의 차원에서 ‘우익의 정서’로 자리잡았다. 앞서 말한 우익 팟캐스트 채널은 2016년처럼 자극적인 이슈로 선동하지 않고도 아주 효과적으로 우익 성향 유권자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정치 불신과 이민자 혐오를 퍼뜨리면서 인기를 끌었다.
반면 민주당 계열의 리버럴은 전통적인 매체 공략 방식으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으로 대표되는 기성언론에 의존했다. 즉, 미국 우익 팟캐스트가 오랜 시간 미국인의 일상을 공략했다면, 민주당 리버럴은 선거와 같은 ‘특별한 시기’에 만 자신의 역량을 집중했다. 미국 우익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매일매일 우익 세계관에 비료를 주는 팟캐스트가 흘러나왔다. 반면 미국 진보적 리버럴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평소에는 뉴스 고관여자들을 위한 정치 보도가 나오다가 선거 때가 되어서야 TV 선거 광고로 트럼프를 비판하거나 미래 비전을 선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공화당은 일상화된 매체 환경을 통해 극우적 인식을 생활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번 대선은 그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선거다.
세인 워싱(제정신 세탁)의 문제, 똥을 밥상에 올린 언론들
그렇게 민주당 리버럴 계열에서는 전통적인 미디어 모델로 바탕으로 보도를 이어왔고, 공화당 쪽에서는 일상화된 공포와 혐오를 계속해서 축적해왔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거대 미디어가 뒤에 버티는데 겨우(?) 팟캐스트로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세인 워싱’ 문제가 대두한다(‘미국 대선 그 후: 그래도 계속 해야 할 이야기들’ 중 ‘언론의 문제 가령 제정신 세탁’ 참고).
영미권 객관 저널리즘의 관점에서는 경쟁하는 두 대상을 다룰 때, 어느 한쪽이 굉장히 미친 짓을 하면 여기에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런 것이 경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이야기해버리면, 편향된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친 쪽을 적당히 정상화시켜서 마치 정당한 경쟁 상대인 것처럼 포장하거나 그 미친짓을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세탁’한다. 그런 실수와 오류가 특히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소위 리버럴 계열의 권위지, 정론지에서 두드러졌다.
‘돌아이'(트럼프)를 논의 가능한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이야기하려면, 그 돌아이의 행위가 적어도 논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만한 행위이어야 한다. 그런데 직접적인 인종차별, 과학적 증거를 뒤엎는 막말, 기본 전제가 글러먹은 경제 정책 등 사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면 논의에서 배제해야 하는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전통적 레거시 미디어는 그렇게 하지 않고 ‘순화'(세탁)해서 자신의 지면 위에 올렸다. 가령, 트럼프가 아이티 이주노동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 강아지를 잡아먹는다는 인종 혐오를 퍼뜨리면 이 말도 안 되는 혐오 발언을 ‘이주노동에 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뉴욕타임스가 소개하는 현상이 계속됐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한다면서 결국 스스로 비정상(혐오)을 ‘세인 워싱’하고 논란(토론이 가능한)으로 만든 것이다. 전통언론은 ‘팩트체크’하니까 괜찮은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팩트체크 누가 보나? 잘 안 본다. 따로 팩트체크 코너를 두면, 대다수 사람은 별 관심이 없다. 따로 챙겨보지 않고, 긴 기사의 뒷부분에서 좀 더 해설해준다고 해도, 제목과 첫 소개 문단을 카피에디팅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세탁이 이루어지면 꽝이다.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공유된 소개 문구만 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굳이 본문을 클릭하고 읽는 비중은 낮다. 전통 레거시 언론의 저널리즘 원칙과 방법론이 오히려 현재와 같은 ‘미친’ 상황에서는 단점이 많다는 게 다시금 드러난 셈이다. 이에 반해서 우익 세계관 팟캐스트는 일상적으로 ‘사이다’스러운 통쾌∙상쾌 발언을 질러버린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나.
똥은 똥이다
뉴욕타임스와 같은 레거시 미디어는 더 직접적으로 ‘미친짓은 미친짓이다’라고 가치평가했어야 했다. 가치평가가 부족했던 건 전통적인 언론 규범, 사실과 의견을 분리한다는 원칙론 때문이었다. 사실 판단에 속하는 것마저도 의견의 요소가 있지는 않을까 너무 조심했다.
인종차별을 인종차별이라고 하지 않고, 인종적인 관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취급했다. 최종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는 태도는 때로 미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를 미덕이라기보다는 무책임이나 직무유기로 해석하기 딱 좋은 시절이다. 언론이 가치판단과 상황 규정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관계만 던져주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독자관을 전제한다.
그렇다고 미국 리버럴이 극우 팟캐스트와 똑같은 짓을 해야 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찾는다는 이유만으로 다들 패스트푸드 정크푸드를 내야한다는 격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유기농 채소로 건강식을 직접 요리해 먹으라고 강요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러니까 그 중간 어딘가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뉴욕타임스도 패스트푸드보다는 좀 더 건강하되 더 일상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밀키트’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했다. 그런데 소위 정론지들은 그런 노력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방송사들은? 몸 사리면서 단편적 사실 조각 던지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미국식 가치의 굴레에 덜 메어있는 영국 출신의 가디언이나, 비영리 재단 소유라서 좀 더 독립적 목소리를 낼 여지가 있는 지역지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등은 아주 분명하게 ‘똥은 똥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미디어계의 새로운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적극적인 가치판단을 수행한 모범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뉴욕타임스 vs. 팟캐스트의 매체력?
의제화에 대한 규범적 사고는 결국 매체의 쓰임새 자체를 나누어 놓는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계열 정치인을 움직이고, 탐사보도에서 강점을 보인다. 하지만 취재한 좋은 ‘원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의제화하는 건 꺼리는 측면이 있다. 가령, 트럼프 스캔들을 탐사보도 해놓고도 모든 코너를 집중하여 적극적으로 의제화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거다. 바이든을 대선 후보에서 밀어내던 한순간 말고는, 자신들의 힘을 제대로 쓰는 방법을 회피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반면에 앞서 강조했듯 우익 세계관의 팟캐스트는 원석이라 할만한 내용이 없음에도 일상생활에 완전히 녹아 있다. 이들이 무슨 대단히 혐오적이고 극단적으로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 시민들의 주체적 사고인 듯이 판을 깔고는, 가벼운 의문의 형식이나 초청 게스트를 통해 비교적 단순하게 우익적 메시지를 전하고, 그런 일상화된 소통을 통해 정서적으로 교감한다.
그러다보니 두 미디어는 서로 ‘종목’이 다르다. 음악에 비유하면, 뉴욕타임스는 점점 더 클래식이나 재즈가 되어가고, 극우 팟캐스트는 아이돌 음악이나 트롯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독자가 소비하는 정론지와 생활형 팟캐스트의 역할이 갈라진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팟캐스트는 조 로건이라는 코미디언 및 스포츠 진행자 출신인 사람의 방송인데, 이 사람이 표현하는 사회관은 무슨 극우음모론 같은 게 아니다. 미국 보수의 남자다움, 자유로움, 합리적 의심 이런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은 비교적 온건한 이미지를 고수하지만, 조 로건이 초대하는 사람들은 극우 음모론자 투성이고, 방송은 그런 음모론자에게 설득당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수적 환경에 처한 젊은 남성 정치 저관여층이 극우에 경도되는 과정을 다양한 이슈에서 고스란히 보여주는 선명한 채널이다.
트럼프 시대 전망
이런 미디어의 역할 분화와 영향력의 분산은 트럼프 시대에 더 심화할 것으로 생각한다. 생활에 밀착한 우익 팟캐스트를 좀 더 극단화해서 문자화해서 표현하는 게 사실상 일론 머스크의 개인 매체가 되어버린 ‘X’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극우적 일상의 정치 사회적 기제로 작동하는 미디어는 그 영향력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인가, 대안은 존재하는가? 전문성을 지닌 뉴스레터형 소형 미디어가 강하게 약진해야 않을까.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사업의 규모보다는 ‘특화’한 전문 분야의 깊이와 유연한 대응력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언론 스타일과 규범에 얽메이기보다는, 사안을 설명해내기 위해서 다양한 수위의 소통방식을 마음껏 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화제가 된 바, 뉴욕타임스에서 25년간 칼럼니스트를 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도 뉴스레터 방식으로 독립했다. 뉴욕타임스 편집진에게 맞춰줘야 했던 그동안 방식을 탈피해 필요에 따라 디테일과 폭넓은 비유 그리고 케이스 스터디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방식으로 독자와 직접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2025년은 전문 분야에서의 설명력을 중심에 놓고 형식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판으로 도전하는 이런 시도가 더 많이 대중화해야 할 타이밍이다.
결국 엘리트 지향 아니냐고?
(웃음)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중성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훨씬 어렵다. 일각에서는 진보 쪽의 로건 쇼가 필요하다고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장 2000년대 초만 해도 방송 코미디는 리버럴 진보 쪽 시각으로 점철되었던 적 있다. 대중문화는 리버럴 편향이라는 낭설이 지금까지도 우익의 단골 레퍼토리다.
하지만 방송 코미디의 영향력은 쪼그라들고, 오락성 팟캐스트가 시사적 사안을 끌어들이며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 방식의 오락성이 보수적 세계관과 궁합이 좋았다. 그뿐이다. 로건 쇼에 대응하는 진보의 대중적인 방식에는 좀 난점이 있다. 무언가 잘못이 있고 함께 무언가를 고쳐야한다는 진보적 의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재밌고, 시원하고, 통쾌하기는 쉽지 않다.
그에 반해 로건 쇼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아주 쉬운 프레임이다.
정부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
사회가 뭔가 잘못 굴러간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우리는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얼마나 쉬운가.
권력에 투항한 미디어 자본
LA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이 해리스 지지 사설을 발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유주가 보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오랜 규범을 보란듯이 파괴하고 ‘오너’들이 금지시켰다. 선거 후에는 베이조스(워싱턴포스트), 주커버그(페이스북), 알트먼(오픈 AI) 등은 트럼프 취임식에 100만 달러를 냉큼 기부했다. 트럼프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미디어 자본가들의 자발적 순응 모드다. 그 기부와 순응의 반대급부와 떡고물을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물론 이들은 언론인이 아니라 ‘오너'(사업가)이며, 얼마든지 정치권력에 순응하고 동시에 그들과 담합할 수 있는 자본권력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뇌썩음(Brain rot)과 숏폼
옥스퍼드대학출판부가 올해의 단어로 ‘뇌썩음’을 선정했다는 건 소위 주류에서도 ‘숏폼’ 현상을 주목한다는 걸 방증한다. 숏폼을 무한 반복하면 멍해지고 뇌가 썪는다는 이야기다. 실제 인과관계가 어느 정도 입증됐는지는 별개로, 이제 사람들이 짧고 가벼운 숏폼에 담긴 이미지와 이야기를 무한대로 반복한다는 현상 자체는 확실하다.
숏폼은, 음식에 비유하면, 일종의 뷔페 같은 것이다. 뷔페는 우선 사람들에게 화려하고 다채롭다는 만족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만 먹으니 별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착시 효과도 생긴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아주 조금씩 너무 많이 반복해서 먹기 때문에 결국은 일품요리는 물론이고 백반을 먹는 것보다도 훨씬 더 과식하게 된다. 또는 아예 접시에 가득 쌓아두고 그대로 버리기도 한다.
숏폼은 짧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런데 10분이나 20분쯤 찬찬히 숙고해서 논지와 자료를 구심력 있게 집중해놓은 ‘롱폼’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가성비’ 좋은 효과적인 뉴스 소비일 수도 있다. 그런데 10분 20분을 지겨워하면서 숏폼으로는 오히려 30분 40분 끝없이 파편화된 정보들로 접하는 피상적 정보 과식 현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결국 그 정보를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다시 또 다른 정보의 파편들을 찾아 헤매는 모순적 상황에 빠진다. 더욱이 파편성은 숏폼이라는 문법 자체의 속성이라서, 1시간 짜리 강의를 그냥 1분짜리 60개로 쪼갠다고 해서 멍하니 열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숏폼, 너무 단점만 보는 거 아닌가
숏폼 소비를 ‘뇌썩음’의 전제로 보는 경향이 확실히 있는데, 거꾸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숏폼을 소비하는 측면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서 그저 멍때리고 싶어서 숏폼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숏폼의 생산 소비 관계를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의 ‘틈’을 허용하지 않고 계속 멍때린 상태를 전개하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기는 어렵다. 왜 멍때리면서 집중하는가. 숏폼은 뇌의 보상체계가 가장 빠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니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정보도 있고, 또 간간히 적당한 감동마저 있다. 그리고 소비자는 언제든 나는 이 짧은 영상을 중단할 수 있다는 자기 통제력에도 자신감마저 품게 한다. 그런데 사실은? 보고 있으면 끊기가 어렵다.
미디어 기업 입장에서는 같은 분량에 더 많은 종류의 콘텐츠를 우겨 넣을 수 있는 숏폼이 장점이 크다. 다만, 다른 매체 대비 광고 효과의 장점이 실증적으로 뚜렷이 입증된 것은 사실 아니다. 통계적 증거보다는 대형 성공 사례 몇가지가 관심을 견인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몇년 전 틱톡을 달군 트럭 고장난 아저씨의 비디오가 그렇다. 차가 퍼지자 그 대신 롱보드를 타고 플리트우드맥 노래(‘드림즈’)를 흥얼거리며 오션스프레이 음료를 마시며 출근하는 모습이 바이럴을 탔다. 이 틱톡 숏폼 영상으로 프리트우드 맥의 노래 ‘드림즈'(dreams) 스트리밍이 급증하고 음료수 판매가 크게 오른 일이 있었다. 아무튼 효과를 체계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연구가 많긴 한데, 숏폼 안에서의 유행 요인이 너무 수시로 변하면서 변수가 심하다.
이제 유행은 실시간성을 띠고 전 지구를 커버한다
이미 롱폼(예를 들자면,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은 족히 지속되는 팟캐스트)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만 하더라도 내용에 집중한다기보다는 라디오나 배경음악처럼 부담 없이 흘러 보내는 속성이 강하다. 이제 대다수 사람은 한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걸 매우 힘들어 한다. 그 이유로 극장에도 덜 간다.
이런 ‘집중력 저하 시대’를 상징하는 숏폼 유행에 세대별 차이는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역적 차이는? 그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디지털 디바이스로 언제든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이런 유행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비슷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서로서로 거의 실시간으로 모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숏폼은 ‘공감의 내용’을 바꾼다
하지만 숏폼을 우민화와 직결시키긴 어려울 것 같다. 숏폼은 트랜드고, 트랜드를 쫓는 행위 자체는 ‘멍청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각 사안을 연결하고 맥락화하는 능력, 그런 사건들이 나 아닌 타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구체적인 상황을 구성하는 능력은 점점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숏폼 때문인지, 숏폼이 사회 현상의 반영인지는 단언하면 안 되지만.
숏폼 지배적 환경에서는 ‘공감’의 내용이 바뀔 것으로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는 것이 공감이라고 착각한다. 각각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려면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품이 많이 든다. 그 맥락을 이해해야 ‘아, 그래서 너는 이런 행동을 했구나’ 하는 공감이 비로소 이어질 수 있다. 숏폼 시대에는 그런 공감 의지와 공감 능력이 소실된 채로 표면적으로 같은 유행, 같은 소비로 공감과 노력을 퉁치려는 현상이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좀 더 우울하게 전망하면, 소수와 약자에 관해 이해하려는 동기가 그만큼 사라질 수 있다. 이미 그런 현상은 관찰된다. 숏폼과 같은 간단하고 즉물적인 즐거움을 소비하는 세태가 우익적 사고와 결합하면 드러나는 게 바로 타인의 고통에 관한 공감 능력 상실이다. 타인의 고통에 관한 맥락적 이해가 사라지고,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 같은 세태가 생겨난다.
한강 노벨상 수상과 고통의 연대
2024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에서 자주 드러나는 주제 의식이 바로 ‘고통의 연대’다. 한 사람의 고통을 보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깨닫고, 나아가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적이 된다는 것, 그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에 대한 여러 사유가 때로는 사적으로, 때로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펼쳐진다.
노벨상 선정단은 이런 성찰이 지금 시대에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고, 국내 어떤 우익들은 국가적 경사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경시 사이에서 갈등했다. 역사적인 사실 관계를 억지로나마 문제 삼으면서 딴지를 걸며 근엄한 척 하는 일부 한국 우익의 태도는 어이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공감 능력의 상실이라는 세태를 정치적 에너지로 활용하는, 나쁜 의미로, 대단히 흥미로운 방식이기는 하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고통의 연대’가 확장할까. 글쎄, 알 수 없다. 한국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거대한 이벤트가 소비되는 익숙한 패턴이 있지 않나. 노벨상 수상이나 아카데미 수상처럼 ‘국뽕’ 차오르는 일이 있을 때 ‘나도 한강 읽었다’거나 ‘나도 기생충 봤다’ 식으로 다들 숟가락 얹는데 실제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현실에서 일상에서 체화하지 못한다.
반면, 한 명이라도 더 그 강렬한 문장들을 접하면 분명히 사회적 모순과 타인의 고통, 그리고 역사적인 아픔에 공감하는 연결고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 물론 양자택일은 아니다. 후자의 씨앗이 더 넓게 뿌려지길 바랄 뿐이고, 그 씨앗이 자라나 더 많은 공감의 연대로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고통과 아픔의 연대, 공감의 확대를 위해 이야기해야 한다.
국내 업체의 숏폼 도전, 아직 걸음마
관심은 폭발했지만, 우선 플랫폼으로서 세계 3대 플랫폼(틱톡, 릴스, 숏츠)의 아성을 뚫기는 역부족이다. 숏폼 드라마 플랫폼을 표방한 ‘숏차’ 같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돌파구가 보이지는 않는다. 숏폼의 매체 속성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짧고 많은 것이 랜덤하게 계속 튀어나오도록 유통을 짜야하고, 그려려면 다다익선 효과가 필요하다. 그런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려면, 기존 이용자들의 끝없는 콘텐츠 공급과 유기적인 활동 네트워크를 전제해야 한다. 한마디로 신생 업체나 후발주자가 전문 프로덕션팀의 콘텐츠를 위주로 그런 네트워크 효과를 단숨에 만든다는 게 쉽지 않다.
3. 똑똑한 AI 시대의 멍청한 결과물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9개쯤의 진실에 1개의 치명적인 거짓말이 섞여 있을 때다. 그때 그 거짓을 가려내기가 아주 힘들어진다. 지금 구글 등의 AI 요약 검색이 그런 위험한 행동이다. 구글이 언젠가부터 검색결과에 AI 요약 설명을 가장 윗단에 내보내는데, 한마디로 ‘그럴 듯하게 엉망’이다. 구글뿐만 아니다. 구글 AI 검색 결과 요약문과 같은 ‘똑똑한 멍청함’의 사례는 매우 많다.
아마존만 하더라도 상품 구입에 있어서 ‘리뷰’는 핵심 중 핵심인데, 그 리뷰를 맨 윗단에 AI로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과는 물론 그야말로 엉망이다. 여러 개별 리뷰에 담긴 사용자 경험의 구체성을 ‘뭉뚱그려서’ 정보 가치를 극적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런 거대 초다국적 기업의 AI는 얼마나 정확하고 책임 소재 분명한 정보를 전달하느냐가 목적이 아니란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최소한 현재 버전의 생성 AI는 ‘얼마나 그럴듯하게 사람이 쓴 답변 같은가’를 목적으로 삼는다. 그거, 사람이 한다면 사기꾼이 하는 짓 아닌가? 사람들이 AI 검색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아가 자신들의 확증 편향 오류를 강화하는 쪽으로 소화한다면, 사회적 오정보 문제는 더욱 바로잡기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속칭 ‘인공 일반 지능'(AGI)이 완성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챗GPT3 가 충격적 일반 공개를 해버린 후 너도 나도 AI 패권을 선점하려고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제 더는 윤리적 책임을 고려해 출시를 유보하고 개발에 매진할 업체는 없다. 그저 뒤쳐지면 안 된다는 강박적 경쟁으로, 정확성보다 그럴 듯함에 주목하는 모습이 바로 2024년이었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정보의 정확성이라는 핵심 가치를 뭉개버리는 기업들의 모습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미완성 인공지능스럽다. 2025년에는 AI 만능론의 거품이 좀 빠지고, 모두가 현재 버전의 쓰임새에 대해 좀 더 겸손해지면 좋겠다 싶지만 뭐 헛된 희망일 것 같다.
4. 이스라엘의 학살과 ‘주어 없는 학살 보도’
팩트는 단순하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민간 학살과 인질 납치를 했고, 이스라엘이 인질 구출을 명분으로 걸고는 가자지구 전체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침략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서구 언론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정당하다고 보는 관점을 취했다. 하지만 전쟁을 진행하면서 이스라엘은 우익정부의 폭주 속에서 인질 구조를 위한 협상은 뒷전이고 전면 파괴에만 몰두하는 쪽으로 바뀐지 오래다. 정작 인질들도 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서구 언론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에 방점을 찍었던 보도 방향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학살 비판이 ‘반유대주의’로 비춰질 것을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유엔 차원에서 판단해도 이스라엘군이 무차별 학살을 벌이는 상황이 된 지 오래인데,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학살을 이야기는 하긴 해야겠다보니 ‘주어 없는 학살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정론지로서 대표성을 가진 뉴욕타임스 예를 자주 들게 되는데, 그곳이야말로 그런 ‘주어 없는 학살 보도’ 행태가 가장 심하다. 뛰어난 취재력을 바탕으로 학살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지만, 그 학살 행위의 주체인 주어는 기사 문장에서 최대한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
더불어 이스라엘 강경책 지지 칼럼니스트들이 자주 전면 배치된다. 토마스 프리드먼 같은 화평주의자도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주 브렛 스티븐스가 사이트 1면에 대서특필된다면 편집진의 ‘균형’ 감각이 어디로 향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관점을 잡는 문제에 있어서는 엉망인 상태다.
CNN은 좀 다를까? 개별 논설 해설보다는 사실 보도 중심이라서, ‘가자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현장의 참상을 ‘전황’으로만 포장해서 내보낸다. 역사적인 학살의 책임에 관한 가치평가는 대단히 약하다. NBC, ABC 같은 지상파 방송뉴스 역시 이런 관점에서 비슷비슷하다. 뉴욕타임스나 CNN 등의 개별 언론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명백하게 잘못된 학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미디어의 관성과 딜레마 그리고 스스로 초래한 자중지란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도 이스라엘 학살에 관해서 제대로 이야기하는 매체는 대체로 작은 독립 매체들이다. 하지만 규모가 큰 미디어일수록 제대로 이스라엘이 벌이는 학살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범주의 자위권 행사인 것처럼 ‘세인 워싱’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5. 한국 방송 4법의 도전과 비토
4개 법안의 핵심은 세금과 같은 공공자금이 들어가는 공영언론을, 어떻게 정치권과 절연시켜 독립된 거버넌스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다. 물론 이것은 매우 오래된 화두인데, 나 자신도 이런 문제 제기가 벌써 십수년 전이고, 무려 당시 박근혜 대선 후보도 이 문제에 나서야 함을 말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뒷전으로 밀렸고, 같은 문제 제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고, 시간은 흘러 윤석열 정부의 ‘패악질’로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이번만은 그래도 반복적으로 입법 시도되고 비토 당하며 좀 더 관심과 노력이 투여된 만큼, 탄핵과 맞물려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이미 너무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래서 ‘그때’ 만큼 개별 공영 방송사 자체의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그래서 방송 4법 개혁 입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해도 어느 정도 사회적 효력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 정도도 못하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유튜브 시대의 방송사
방송사의 영향력 쇠락과 관련해서는 유튜브 시대의 방송사는 ‘CP'(콘텐츠 공급자)로서는 그 맥랙을 유지는 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무한 채널 시대에는 플랫폼 사업자로의 영향력은 축소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성 인기프로그램들을 재활용하는 차원에서는 유튜브 등의 플랫폼 활용에서 제한적 장점이 있겠지만, 프로그램에 투자한 가성비를 고려하면 유튜브 전문 소규모 프로덕션과의 경쟁에서 장기적으로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분야로 이야기하면 속칭 AAA 등급의 제작비 수백억씩 드는 고해상도 그래픽 게임들, 큰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거대 자본 프로덕트가 젋은 세대에게 반드시 자금 투입에 비례한 높은 인기를 끄는 건 아니다. 마인크래프트, 로블럭스 같은 폴리곤 숫자 낮은 대형 히트 게임도 있듯이 말이다. 게임성, 그러니까 게임을 하면서 얻는 경험의 방식은 그래픽의 말끔함만이 아니다보니 말이다.
6. K팝 산업의 두 방향: 하이브 사태 vs. 탄핵집회 야광봉
뉴진스와 민희진으로 상징되는 하이브 사태는 전 세계를 호령하는 K-엔터 산업이 사실은 얼마나 주먹구구였지는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반면에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응원봉으로 표현된 K-팝의 문화적 보편성은 사회운동의 정서적 구심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사회적인 자본으로 축적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선 하이브의 민희진 축출 대작전은 민희진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똘끼’ 넘치는 기자회견으로 저항함으로써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민희진 기자회견에 이어진 무수히 많은 담론들은 K-엔터의 선구적 기업인 하이브의 주먹구구식 운영 방식을 드러내게 했고, 겉으로는 규모도 크고 화려했지만, 창작의 과정이나 결실에 관한 배분방식은 여전히 착취적인 전근대성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하지만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K팝은 세대를 포괄하는 보편성을 보여줬다. 응원봉 시위는 단순히 ‘축제 같은 시위와 집회’ 라는 동화의 실현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2024 윤석열 탄핵 집회는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응원봉’이라는 거대한 공감의 상징을 확인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각자가 응원하던 아티스트 팬덤의 K팝 응원봉을 ‘연대의 무기’로 삼았고, K팝(응원봉)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응원봉은 갖다 버리지 않는 한 각자의 집에 잘 모셔져 있고, 무언가에 진심으로 열광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의 상징으로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다. 이제 그것을 집회에 나가서 공유하고 구심점으로 삼는 이런 사회적인 체험, 문화적인 체험의 가치까지 쌓였으니,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에픽하이 응원봉부터 뉴진스 응원봉까지 여러 세대가 흐르고 쌓여, 충분히 시계열적으로 넓은 문화적 보편성을 확보하지 않았나.
즉, K팝 열광이라는 문화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은,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 보인다. 반면 산업으로서는 아직도 내실을 다지지 못한 주먹구구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 K팝의 양면성은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7.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본 오정보의 도가니
윤석열의 비상계엄 명분 중 하나가 극우 유튜브가 떠드는 ‘부정선거 음모론’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고 고위직 정치인에게도 극우 유튜브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이번 ‘내란 사태’에서 우리는 확인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부정선거 음모론의 원조는 극우가 진보로 생각하는 김어준이라는 점인데, 극우 유튜버들의 ‘김어준 따라잡기’ 방식의 선거 음모론이 쏘아 올린 미끼에 윤석열이라는 대어가 낚였다는 점에서 대통령급 뇌썩음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를 단순히 극우 유튜브의 부정선거 음모론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지만.
더욱 우려스러운 상황은 명백한 내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세력의 물타기 노력에 직간접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상당수 주류 언론이다. 앞서 미국 관련으로 이야기한 ‘세인 워싱’ 행태가 한국화된 모습들이 눈에 띈다. 가령 불법적 계엄은 그 자체로 용납할 수 없는 내란 행위임에도 국민의힘에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행태를, 마치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는 입장처럼 프레임을 씌워주는 일부 언론 행태 말이다.
내란 옹호에 가까운 발언을 직접 인용하고 제목에 넣어 일반론인 것처럼 포장한다든지, 기사에서 비등하게 대비시킨다든지, 문제임을 충분히 앞뒤에서 강조하지 않고 그냥 사실관계로 소개한다든지 말이다. 이런 언론의 행태를 보면, 정치 뉴스 보도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언론 일반이 윤석열 내란 사건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올해의 좋은 기사
마지막으로, 2024년 한 해 동안 읽어본 언론 기사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고 여긴 것을 몇 가지 꼽아본다. 아무리 쓰레기가 도처에 넘친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깊숙하게 조사하고 사려 깊게 전달되는 우수한 보도들은 충분히 계속 나오고 있다. 2025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쁜 것을 욕하는 쾌감 이상으로, 좋은 것을 더욱 장려하는 집요함이라고 본다.
- 해병대 수사 외압, 결정적 순간들 (경향): 이름들의 엮임. 시간의 흐름. 권력형 비리의 전개에 대한 복잡한 구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도와주는 데이터 시각화.
- 흔적: 가난한 노인의 낮과 밤 (KBS 탐사 다큐): 노인 빈곤 문제를 데이터 분석으로, 현장 파고들기로, 사회적이며 개인적으로 풍부하게 소화해 낸 좋은 의제.
-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기획 ‘산 자들의 10년’ (한국일보): 이슈 키핑의 모범 사례. 한국 사회가 여러 각도에서 두고두고 ‘킾’ 해둬야 할 아픈 상처, 세월호 참사 그 후 이야기들.
- 한겨레의 계엄령/탄핵 호외 시리즈: 기민하게 상황에 대처하며 물리적 현장의 앞줄에 나선, 종이신문으로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참여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