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완전하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걸 계속 내놔야 한다.”… “미중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최태원(SK그룹 회장)은 28일 국회 강연에서 “WTO 체제는 다시 오지 않는다. 물 건너갔다”고 했다. 세계 경제를 지탱하던 규칙 기반의 자유무역 원칙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상호 관세를 무기로 동맹국과 기업을 협박하는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의 엄포 앞에 우리도 대책이 필요하다.
최태원은 “우리와 처지가 똑같은 일본과 경제 통합을 해야 한다. 한일 경제가 합치면 GDP 규모가 6조 달러 정도로 크게 늘어난다. 최소한 미국, 중국과 대등하게 협상하고 대응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미국에만 기대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도 인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국회 한중의원연맹이 개최한 정책 세미나였다. 현장에 다수를 점한 민주당은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일본과 무역 갈등 국면에서 ‘노 재팬’(No Japan) 등 반일 감정을 자극하거나 편승한 전력이 있다. 그런 이들도 ‘일본과 경제 통합’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지금은 기존 국제 경제·안보 질서의 재편이 요구되는 시대다.
- 최태원은 “한일 간 에너지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저장해 사용하면 시너지가 커진다”며 “외국에는 이런 전력 공유가 흔한 일이다. 두 나라가 경제를 통합하면 고비용 사회에서 저비용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비용이 낮아진 만큼 우리는 다른 곳에 더 투자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했다.

돈, 전기, GPU, 메모리…병목을 깨자.
- 최태원은 AI 성장을 발목 잡는 4가지 보틀넥(Bottleneck, 병목 현상)으로 자본(돈), 에너지(전기), GPU(그래픽 처리 장치), 메모리 반도체를 꼽았다. 돈과 전기, GPU, 메모리 반도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 SK 하이닉스는 최근 1분기 영업이익 37조 원을 기록하며 최대 실적 역사를 갈아치웠다. 4가지 보틀넥 가운데 하나인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증해서다.
- 최태원은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메모리를 달라’고 얘기한다. 우리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생산량이 정해져 있어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돈을 많이 버니까 좋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영원히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 반도체 사이클이 어떻게 뒤바뀔지 알 수 없다는 취지다. “이게(메모리 반도체) 비싸고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메모리를 안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연구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그러다 보면 우리 메모리 칩을 덜 쓰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만큼의 공급을 최대한 많이 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필요하다.
- AI 선도 국가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AI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관건은 AI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많이, 잘 만들 수 있느냐다.
- SK와 아마존웹서비스(AWS)는 2029년까지 울산에 103MW(메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했다. 이를 더욱 늘려 1GW(기가와트)까지 확장할 생각이다. 최태원은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 10기가, 20기가, 30기가 규모의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AI 팩토리가 없다. 공장이 없는데 어떤 AI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AI 수출 국가여야 산다.
- AI 네이티브 국가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게 아니라 AI를 만들어 수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AI를 만들어 파는 경쟁 시대엔 선점이 중요하다.
- 이는 엔비디아가 성장한 방식이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똑같이 고성능 칩을 만들지만 어려움에 빠진다. 엔비디아가 칩 만드는 속도가 더 빨라서다. “우리도 엔비디아 전략을 카피(copy)해야 한다”는 게 최태원 생각이다.
완전하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걸 계속 내놔야 한다.
- AI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세 가지(3S)가 있다.
- 첫째, 속도(Speed)다. 완벽하게 만들 걸 기다리지 말라. 무엇이든 만들어 사람들 앞에 내놔야 한다. 불완전해도 상관없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게 더 중요하다.
- 둘째, 규모(Scale)다. 빠르게 만들어도 규모가 작으면 소용이 없다. 10기가, 20기가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만들겠다는 발표와 전략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산업과 시장이 만들어진다. 그럴 때만이 민간 기업과 외국도 참여하겠다고 쫓아온다.
- 셋째, 안전망(Safety)이다. AI 산업으로 기존 일자리가 소멸 위기다.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큰 충격파로 돌아올 수 있다.
기업이 행한 ‘착한 일’에 보상을.
- “사회적 기업이 얼마만큼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하는지 제대로 측정하고 평가해 그에 비례하여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최태원의 오랜 소신이다. 2014년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사회적 기업 활성화 방안으로 ‘SPC(Social Progress Credit)’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 국회 강연에서는 이와 함께 ‘작은 정부’를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기업이 돈을 벌면 정부에 세금을 내고, 정부는 그 돈으로 사회 문제를 풀어갔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문제 해결 난이도가 더 높아졌고, 돈도 더 많이 필요하다.
-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데에도 ‘경쟁’이 필요하다. “정부가 돈을 걷어 국민 복지에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복지 같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기업한테 보상을 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 정부가 직접 집행자가 되지 말고 측정하고 평가하는 심판이 되라는 것이다.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에 더 큰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국회의원? 현장으로 와서 같이 뛰자.
- 조배숙(국민의힘 의원)이 “기업인 입장에서 국회에 답답한 점이 있느냐”고 묻자 최태원은 “의원들이 글로벌 현장을 가봐야 한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플레이어 입장으로 사안을 봐야 한다. 과거 WTO 체제 때처럼 더는 ‘규율’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지 않는다. 우리도 강대국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있는데, 지금은 일방적으로 계속 맞거나 도망 다니는 상황”이라고 했다.
- 최태원은 지난 21일 국회 포럼에서도 “전 세계 정부가 자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게임 규칙을 새로 만들고 아예 직접 투자까지 단행하는 상황이다. 우리도 더 이상 코칭이나 보조에 머물지 말고 직접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개별 기업 필요에 맞춘 ‘핀포인트 지원’을 강조했다.
- 국제적 룰은 결국 힘에서 나온다. 우리도 미중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의식하지만 경제적으로 10분의 1 규모다. 중국은 우리를 의식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덩치를 훨씬 더 키워야 한다. “WTO 체제는 물 건너갔다. 우리 혼자 못하면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와 처지가 똑같은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 경제 통합을 해야 한다.”
전기세 선납 제안엔 “처음 듣는 이야기.”
- 박정(민주당 의원)은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다. 박정은 전기 요금을 미리 납부하면 할인 혜택을 주고, 이를 전력망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전기요금 선납제’ 법안을 발의했다.
- 최태원은 “처음 듣는 제안이라 숙고하여 대답 드리겠다”면서도 “중앙통제 방식으로 한 곳(한전)이 대한민국 전기를 장악해 나눠주는 것이 과연 충분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에너지 분산 발전(Distributed Generation, DG)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대 중앙 정수장에서 물을 끌어올 게 아니라 마을마다 혹은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자는 것이다.
- “물이든 전기든, 우리가 생산하는 상황이면 효율적으로 세이브하는 방법을 고민할 텐데 지금은 ‘나라가 다 해줄 테니 너희는 하지마’라고 하니 우리도 방법이 없다.” 전력 민영화와 맥이 닿는 주장으로도 해석된다.

“전남광주에 반도체 공장을…” 지역구 챙기기.
- 의원들은 그 와중에 지역구를 알뜰살뜰 챙겼다.
- 정진욱(민주당 광주 동구·남구 갑 의원): “아까 분산 발전 말씀하시면서 전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이번에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출범한다. 전남광주에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이 있다. 전기가 있다. 그 전기가 서울까지 올라오기엔 너무 힘들다는 거 잘 아실 것이다. 최태원 회장님께서 과감하게 (전남광주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저는 회장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 최태원: “전기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 그런데 너무 특정은 하지 않으셔야 하는 게, 거기에 꼭 가야 하는 게 반도체인지 잘 모르겠다. (전남에) 전기가 있으니까 전기를 활용해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을 찾고 있다. 전기 자체가 보틀렉이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잘 이용할지 연구 중이다. 답이 나오면 말씀드리겠다.”
- 모경종(민주당 인천 서구 병 의원): “인천 검단도 있다는 것 말씀드린다.”
최태원이 뜨자 여야가 모였다.
- 한중의원연맹 회장 김태년(민주당 의원)은 “오늘 자리가 AI 패권 경쟁이라는 대전환기를 돌파할 초당적 협력의 출발점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은 내부 이해관계를 넘어야 한다. 서로를 견제하는 데 머물지 않고 더 큰 전략을 그려야 한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 “결국 중요한 것은 ‘대규모 AI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국은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자금, 전력, GPU, 메모리 등 이른바 4대 병목을 해결하고 속도, 스케일, 인프라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곧 데이터, 메모리, 전력을 둘러싼 국가 간 총력전에서의 생존 전략이다.”
- 최민희는 자기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 “권력이 자본에게로 넘어간 지 오래다. 국회에 최태원 회장이 왔다. 나는 그의 한일연대 구상이 궁금해서 왔다. 국회가 난리다. 앞다퉈 최태원 회장 옆으로 몰려든다.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갈수록 국회와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민희는 강연 내용과 관련해서는 “지난 2년 동안 300번 내외의 AI토론회가 있었다. 최 회장은 국회의원들의 준비 상태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운동권 출신 의원의 의미 있는 ‘곤조’라 평가한다.
